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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ㅣ왜 청교도인가?
2장ㅣ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특성
3장ㅣ청교도의 목회신학과 원리
4장ㅣ청교도의 교회론과 목회신학
5장ㅣ청교도 목회와 설교
6장ㅣ청교도의 설교관
7장ㅣ청교도의 성경 해석
8장ㅣ청교도의 예배관
9장ㅣ공예배의 중요성
10장ㅣ청교도의 신학관
11장ㅣ청교도의 인간론
12장ㅣ청교도의 성령에 대한 이해
13장ㅣ청교도의 주일 성수
14장ㅣ청교도의 경건생활
15장ㅣ교회 절기, 성경적인가?
16장ㅣ청교도의 가정관
17장ㅣ청교도의 가정생활
18장ㅣ청교도의 나눔과 섬김
19장ㅣ개혁교회 역사적 측면에서 본 시편찬송가
1장 왜 청교도인가?
“왜 청교도인가? 21세기에도 청교도가 필요한가?”
새 시대에 새로운 변화를 요구한 현 시점에서 약 400년 전의 사람들을 연구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는가? 21세기의 국가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급변하고 있다. 교회 또한 사회의 변화에 뒤질세라 그 변화 욕구에 발맞추려 하고 있다. 사실 목회의 주변 환경의 변화가 뚜렷하기 때문에 목회의 패러다임도 변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 그리고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들은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시대의 문화적 조류에 맞추어 외양적인 부분만 바꾸고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성장의 둔화를 맛보고 있는 교회, 맥없이 그저 형식에 치우쳐 있는 교회, 병들어 교회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를 치유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 필자는 교회가 신약성경에 기초하고 있는 초대 교회의 원리에 충실하고,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교훈을 토대로 개혁교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것만이 21세기의 한국 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확신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17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은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적절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한국 교회는 진리를 믿고 아는 일에 하나가 되지 못하는 언행불일치의 오류에 빠져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 신앙의 성숙도가 극히 낮다. 너도나도 교회의 양적 성장에 치중하고, 목회의 성공을 사람의 수와 헌금 액수를 잣대로 판단하다 보니, 그야말로 알곡 신자들을 만드는 일을 등한히 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기독교는 좋지만 크리스천은 싫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다. 말은 그럴듯하면서도 생활은 전혀 성결하지 못한 이중적인 삶의 자세가 빚어낸 결과이다. 삶의 현장에 경건의 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었던 청교도들의 삶은 추락할 대로 추락해 버린 한국 교회의 영적 능력을 회복시키는 강력한 도화선이 될 것이 틀림없다.
왜 청교도인가?
첫째,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배양하는 일은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이 추구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청교도들은 성경에 충실한 자들이다. 그리고 인간의 심령이 변화하는 것,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믿은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생을 탁월한 설교자로 종사했다. 정말로 교회에 필요한 것은 신실한 말씀 선포자들이다.
피터 루이스(Peter Lewis)가 지적한 대로, 동일한 하나님을 믿고 동일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 성경 연구에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다고 자부하는 현대 교회는 왜 청교도들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하지 못하는가? 그에 대한 답을 청교도들이 추구했던 삶과 신학적 확신과 실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선하고 거룩한 자들을 그리워하는 본능이 있다. 어둡기 때문에 빛이 절실하게 요청된다. 주의 백성들을 주의 자녀답게 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 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범을 보여 준 청교도들의 설교 사역을 살피는 일은 이 시대에도 매우 유익하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청교도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익히기만 한다면, 한국 교회의 새로운 도약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둘째,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 역사 속에서 이어져 가는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이 믿었던 성경적인 교리와 영적 체험과 삶의 실천은 오늘날 성도들에게 매우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청교도들의 개혁 정신은 오늘날 교회의 개혁과 갱신이 마치 사명인 양 떠드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교회의 개혁이 무엇인지를 강하게 각인시킬 것이다. 청교도들이 몸부림치며 세우고자 애썼던, 신약성경에 충실한 교회가 바로 한국 교회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갱신은 생소한 언어였지만, 개혁교회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정신은 그들의 모든 활동에 깊이 배어 있었다. 우리는 청교도들을 통해 우리가 고민하는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며 참다운 목회가 무엇인지, 그리고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백히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진리에 대한 거룩한 열정과 헌신은 진리의 부재 현상이 심각한 한국 교회에 영적 각성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들이었다. 청교도들이 붙들었던 진리 자체가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를 부인하는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물리치는 강력한 무기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패러다임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의 본질과 목회의 본질적 회복이 문제이다. 그 일을 위해 청교도들은 분명히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셋째, 현대 사회의 병폐 중 하나는 가정 파괴이다. 가정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다. 그러므로 가정의 붕괴는 사회의 붕괴와 국가의 붕괴를 초래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한다. 윌리엄 가우지(William Gouge)의 말대로, 청교도들은 가정을 ‘꿀이 저장되는 교회요 국가의 신학교’로 간주했다. 가정교육의 부재가 심각한 오늘날 성경을 기초로 한 청교도들의 가정교육관은 건실한 교회와 사회를 이루는 기초석이 되리라 의심하지 않는다.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 개혁을 위한 가장 큰 지름길로 여기고는 가정에서 신학과 삶의 균형을 이루어 갔다.
넷째, 그들에게서 개혁교회의 뿌리를 보기 때문이다. 개혁파 장로교회는 ‘칼빈주의 신학과 청교도 사상을 이어받은 정통 보수주의 교단’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에 대한 연구도 부족할 뿐 아니라 청교도들에 대한 연구조차도 거의 없는 상황이다. 작금의 교회는 오로지 성장 신화만을 추구하다 보니 뿌리는 깊지 못한 채 잎만 무성한 나무를 키우고 있다. 신학적 기준과 판단보다는 오직 성장이 표준이 될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로지 교회의 개혁과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청교도들, 그들을 공부하는 것은 훌륭한 가문을 이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다섯째,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에 신학 부재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교회의 목회 현장은 위험한 수위를 넘나들고 있다. 마치 사사 시대처럼 뚜렷한 기준이 없어서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삿21:25 참고) 잡탕 신학이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 소위 번영 신학의 확산과 기복 신앙이 어우러져 교회들이 세속적인 성공 신화에 몰입하고 있다.
신학이 없는 목회는 공중누각과 같다. 실제로 신학이 분명하지 못한 목사들은 목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세속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점점 주님의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슬픈 현상을 낳고 있다. 더 슬픈 것은, 진리에서 상당히 멀리 벗어났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교회만이 참교회요 살아 있는 주님의 교회라고 착각하고 있는 현실이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데도 성경의 가르침인 양 오해하고 오로지 번영에만 몰두하는 사역자들에게, 청교도는 자기 성찰과 바른 교회의 회복, 건전한 삶을 낳는 힘을 제공할 것이다.
청교도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을 믿고 따라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선언했다. 따라서 청교도는 단지 하나의 역사로서가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살아서 죽어 가고 있는 교회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는 영적 거장들이다. 목회의 갱신과 영적 부흥, 기독교인으로서의 세계관의 확립과 거룩한 삶의 목적이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청교도들을 깊이 사랑하고 본받는 그리스도인 지도자와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2장 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특성
1. 청교도 운동의 역사적 배경
일반적으로 청교도 운동은 1558년 피의 여왕 메리(Mary)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엘리자베스 1세가 종교 통일령을 발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625년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 때에는 왕성하게 번창했으며, 1651년 최초로 공화정을 실시한 올리버 크롬웰(1599-1658) 시대에는 정치적인 주도권까지 쥐며 황금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1661년 왕정복고에 따라 찰스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성공회 감독들의 탄압과 함께 1662년의 대추방령에 의하여 역사적인 청교도 운동이 막을 내리게 된다.
1517년 10월 31일에 일어나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의 여파는 잉글랜드에 있는 교회에게까지 밀려왔다. 대륙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이 잉글랜드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움직임이 싹틀 즈음,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헨리 8세가 가톨릭과 단절하고(1529년) 독자적인 영국 교회를 세웠다. 1532-1536년까지 열린 영국의 의회는 헨리 8세에 대해 영국 교회의 최고 권위를 지닌 수장권을 인정하는 결의문을 반포한다. 이는 종교개혁을 흠모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그의 종교 정책 자체가 로마 가톨릭의 정책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는 개혁 사상에 호의적이었기 때문에 개혁가들이 종교개혁을 더욱 추진할 수 있도록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인 존 녹스를 왕실 목사로 임명하여 교회 개혁에 앞장서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헨리 8세의 부인인 캐더린에게서 태어난, 메리(Mary)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1553년).
피의 여왕 메리(Mary)는 철저한 가톨릭 신자로 개혁가들에게 무서운 핍박을 가했다. 그리하여 많은 개혁가들이 유럽 대륙으로 피난을 갔다. 그녀는 300여 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죽였으며, 그녀의 학정 때문에 800여 명이 망명했다. 이 때 존 녹스도 망명하여 존 칼빈과 교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망명한 개혁가들은 대륙의 개혁 사상을 더욱더 견고히 흡수하면서 훗날 조국의 종교개혁을 꿈꾸게 되었다.
메리 여왕은 즉위한 지 5년 만에 죽고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올랐다(1558년). 그녀는 개신교 사상을 가진 스승에게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헨리 8세가 발포한 수장령을 다시 반포하면서 교회와 국가를 동시에 다스리는 강력한 군주가 되고자 했다. 그로 인해 그녀는 개혁가들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을 청교도(Puritan)라고 불렀다. 원래 이 말은 ‘precisian’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매우 까다로운 사람’ 또는 ‘아주 꼼꼼한 형식주의자들’이라는 의미이며, 그들을 비아냥거리는 욕설이었다.
1603년에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가 왕권을 이어받게 된다. 그는 이미 존 녹스에 의하여 장로교를 국교로 삼음으로써 종교개혁이 완성된 장로교 나라의 왕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목적 때문에 감독주의제도를 선호했다. 청교도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들이 목회에 전념하든지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든지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것이 1620년에 종교와 시민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나 청교도들이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하게 된 모체가 되었다.
1625년에 제임스 6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르자 청교도들의 고난은 더욱 커져 갔다. 그는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국교인 장로교를 없애고 감독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이로 말미암아 폭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일종의 ‘국가 언약’을 발표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스코틀랜드의 개혁파들을 ‘계약파’ 또는 ‘언약도’라고 부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수장권 및 성경의 절대 권위와 장로 정치를 끝까지 수호하기로 다짐하고, 일부는 혈서까지 쓰면서 언약 문서에 서명했다. 이 소식을 들은 찰스 1세는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군대를 파견했으며, 장로교도들이 찰스 1세와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의회는 종교 문제로 도무지 평온을 찾지 못하는 사태가 지속되자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매듭짓고자 했다. 그래서 1643년 6월 12일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종교회의 열렸으며, 이것이 1649년 2월까지 계속되면서 역사상 가장 성경적이고 개혁신학적인 신앙고백서와 대소요리 문답, 예배 모범 및 권징 조례 등의 문서를 남겼다.
그런 와중에 강력한 통솔과 전쟁에 능했던 크롬웰은 찰스 1세를 체포하여 반역자로 처형했고, 청교도들에게 우호적인 그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청교도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면서 번성하는 기회가 되었다. 찰스 1세가 처형된 후 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스코틀랜드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찰스 1세보다 더 강력한 종교 통일 정책을 발포했다. 그는 재세례파와 퀘이커교도들과 비국교도들의 모임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포했고, 이때 4000명의 퀘이커교도들이 감옥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추방령을 발포하여 청교도들을 대거 추방했다(약2004명). 이리하여 1662년 이후 청교도 운동이 급속히 하락하여 끝나 버리게 되었다.
2. 청교도 신앙 운동의 특성
청교도주의가 그렇듯이 청교도 신앙이 무엇인지를 간단히 말하기란 쉽지 않다. 청교도 운동은 종교적인 요소뿐 아니라 국가적, 정치적, 사회적인 요소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다양하게 변천해 왔다. 여기서는 청교도들의 영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 운동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피터 루이스가 지적한 청교도 신앙의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한다.
1) ‘오직 성경’과 개인의 경건생활
청교도들은 철저한 성경제일주의자들이었다. 교회의 모든 문제나 개인의 신학 사상과 신앙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를 두어야만 했다. 그들에게 신구약성경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범’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사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 데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래서 다른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성경’을 가장 먼저 다룬다. 역사가들은 그들을 가리켜 “신구약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종교개혁가들에게서 이어져 내려오는 ‘오직 성경’이라는 사상은 성도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전환점이다. 특히 실천적인 측면에서 청교도들의 개인적 경건생활 역시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그들의 신앙 행위 중 가장 위대한 것으로 간주했다. 경건의 힘이 청교도들을 청교도답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교도주의란, 단순히 일련의 율법이나 교리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힘이었다. ‘거룩한 생활의 아름다움을 보여 줌으로써 그것을 향하여 움직이게 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만족감에 대한 가능성을 감탄하며 희열을 느끼게 하는 비전이요 충동이었다.
청교도들은 디모데전서 4장 8절의 말씀과 같이 “범사에 유익한 경건”의 연습에 힘쓴 무리들이었다. 삶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가려는 그들의 열망은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아들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나타내는 반응이었다. 이처럼 경건한 삶의 능력을 위해 청교도들의 마음 중심에 절대적인 권위인 성경이 깊숙이 자리 잡아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고 단련했다.
이러한 확신 때문에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경건생활을 위하여 성경 읽기에 전념했다. 청교도들이 살던 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누구나 성경을 소유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하루에 세 번 성경을 읽었고, 매번 한 장씩을 읽도록 권유받았다. 리차드 그린햄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여덟 가지 항목을 말했다. 근면함, 지혜, 준비, 묵상, 성도의 교통, 신앙, 실천 기도이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삶 전체가 성경을 달성하는 것과 같았다.
성경 읽기에 이어 개인의 경건생활의 두 번째 요소는, 공적 기도 시간 외에 가지는 개인 기도 시간이다. 청교도들은 기도할 틈을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기도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존 번연은 “효과적인 기도란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죄악을 드러내고, 은혜의 보좌 앞에,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도록 격려받는 것이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직장이나 집 안에서 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했으며, 하나님의 완전한 뜻을 추구하며 실천했다. 일하지 않는 시간에는 기꺼이, 그리고 매우 열심히 성경 읽기와 성경 연구와 기도에 힘을 쏟았다. 그들은 개인 경건 시간을 통하여 신앙의 성장을 꾀했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했으며, 마음의 평화와 기쁨 및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유익을 얻었다.
2)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청교도들에게 가정은 신앙교육의 중심지였다. 그들은 가정을 종교적 공동체로 보았다. 윌리엄 퍼킨스는 가정을 하나의 작은 교회라고 가르쳤다. 청교도들은 각 가정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빗대어 생각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에 설교자가 있듯이, 가정에서는 가장이 설교자가 되어 모든 가족들의 삶을 지도했고, 가정 예배를 위하여 적어도 하루에 두 번씩 함께 모였다. 가정 예배를 할 때에는 시편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한 장씩 읽었으며, 아이들에게 문답교육을 하고, 기도하고, 시편찬송을 부르고 폐회했다.
청교도들에게 교회가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가정에서나 일터에서 이를 실천하도록 고무하는 청교도 신앙의 근원지라면, 가정은 구체적인 신앙 훈련의 장이요 학습의 장이었다. 교회에서 배운 건전한 가르침은 곧장 가정으로 이어졌고, 가정은 이를 사회에 접목시키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이번에는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중 ‘물질의 바른 사용’에 대한 청교도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청교도들은 사랑을 베푸는 일을 권장하고 욕심에 이끌리는 것을 제한하며 절제하도록 훈련했다. 윌리엄 퍼킨스는 경제활동에 관하여 네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회계(會計)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것들을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둘째, 부자는 필요하다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를 과감히 포기해야만 한다. 그리고 부유하지 못한 것처럼, 재물을 챙기는 일을 포기해야만 한다.
셋째, 복음을 전파하거나 핍박당하는 자들이 있다면, 고통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구제해야 한다면, 그러한 일들을 위하여 우리의 소유를 과감히 사용해야만 한다. 그것은 성도들이 마땅히 따라야 할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넷째,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이처럼 청교도들은 재물에 대해 절대적인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은 근검절약하고 검소하게 살았으며, 남는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사용했다. 그로써 형제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했다.
청교도들은 여가 선용도 세속적인 쾌락을 위한 것이 되지 않도록 교육했다. 그러면서도 절제하는 미덕을 강조했고, 그러한 활동에 정열을 지나치게 쏟는 것을 금했다.
3) 주일 성수와 국가관
마지막 세 번째 특성으로, 주일 성수 개념과 교회와 국가관에 대해서는 10장에 따로 기술했다.
3장 청교도의 목회신학과 원리
1. 청교도 목회신학의 근거-성경
청교도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교회와 개인의 삶에 관하여 최고의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계시로 여겼다. 그리고 교회 개혁에 관해서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를 먼저 살폈고, 성도들의 실제의 삶에서도 성경의 가르침을 생활화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들은 토마스 브룩스의 말처럼 “성경이 침묵하는 곳에서는 나도 침묵하기를 좋아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는 나도 듣는 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상을 굳게 신뢰했다.
청교도들은 목회가 무엇인지, 양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하는지, 설교 사역은 어떤 것인지를 성경에 근거하여 바르게 제시한 목회의 모범생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그들은 성경을 사랑했고, 이 진리를 위해 전 생애를 헌신했다. 이것은 그들의 목회 사역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는데, 그들이 가장 고귀한 사역으로 간주한 설교 사역이 그 실례이다. 그들에게 설교는 오로지 성경 그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나 사역이 과연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 그리고 진리의 전달자로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서 행한 것인지를 깊이 점검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우리를 불러 세워 주신 주인의 마음에 합한 자이어야 한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것이 바로 사역에 심혈을 기울이게 한 원동력이었다. 목사는 업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로 말해야 한다.
2. 청교도 목회신학의 도구인 설교
흔히 청교도 신학을 일명 ‘목회신학’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의 목회활동이 바로 그들이 물려받은 개혁교회의 정통 신학을 갈고 다듬어 꽃피우게 한 실체였기 때문이다. 특히 설교 사역을 목회의 99%로 간주할 정도로 설교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리는 이것을 ‘강단 목회(Pastoral work from pulpit)’라고 부른다.
1) 설교 사역에 대한 이해
청교도들에게 설교는 목회 사역의 전부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풀어 증거하는 이 사역을 죄인을 구원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방편으로 믿었다(고전1:21 참고). 따라서 그들의 설교는 성경을 제치고는 설명할 수 없다. 그들에게는 성경 자체가 ‘하나님의 발언록(the utterance of God)’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들이 계시된 성경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영예로 간주했다. 토마스 굿윈의 말을 빌리면, 기록되어 주어진 성경은 하나님의 심장에 영원부터 기록되어 있는 성경에서 발췌한 것이요 복사본이다.
윌리엄 퍼킨스는 “설교는 영혼을 유혹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설교를 통하여 누그러지고 불경건함과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과 회개로 나아간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설교 사역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은사 중 가장 고귀한 은사이며, 성도들은 이를 가장 존귀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교회에 설교자들을 세우신 하나님의 뜻은 에베소서 4장 8절 이하에 잘 기록되어 있다. 토마스 굿윈은 여기에서 설교의 목적을 두 가지로 제시했다. 하나는, 사람들을 회심하게 하는 것이다. 목사는 사람들의 회심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는,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워 가는 것이다. 어떻게 그들을 온전히 세워 갈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 사역을 통하여 그들을 온전히 세워갈 수 있다. 말씀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결코 이 목적을 이룰 수 없다.
2) 설교자로서의 자세
그렇다면 청교도들은 어떤 자세로 강단 목회에 충실했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예배 모범 지침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첫째, 수고하고(전력을 다하라), 주님의 일을 태만히 행하지 말라.
둘째, 명백하게, 즉 가장 재능이 없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설교하라. 진리를 인간의 지혜에서 나오는 유혹적인 말로 전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무런 효과도 없는 것으로 만들지 말고, 성령과 능력의 증거로 전하라. 또한 알지 못하는 외국어나 이상한 어법, 무익한 억양을 삼가고, 고대나 현대의 별로 우아하지 않은 성직자나 다른 저자의 글을 인용하지 말라.
셋째, 신실하게, 즉 자신의 이익이나 영광을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영광과 사람들의 회심과 덕성 함양과 구원을 바라보라.
넷째, 지혜롭게, 즉 자신의 모든 교리, 권고, 특별히 견책을 가장 적절하게 설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하라. 각 사람의 인격과 처지에 가장 적절한 관심을 보이고, 자신의 걱정이나 한(恨)을 섞지 말라.
다섯째,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어울리게 전하라. 자신과 자신의 사역을 멸시하는 사람들의 타락을 유발할 만한 모든 몸짓과 음성과 표현을 피하라.
여섯째, 사랑의 감정으로 전하라.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선하게 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설교자의 경건한 열심을 알게 하라.
일곱째, 하나님에 의하여 가르쳐지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마음으로 설득하라. 설교자가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양 떼 앞에서 그 진리의 모범으로서 행하라. 주님께서 자신을 감독자로 세우신 양떼와 자기 자신을 주의 깊게 감독하라.
이와같은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들에 대해 존 플라벨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마태복음 24장 45-47절을 본문으로 설교하면서, 목사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집의 청지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즉, 목사는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신비들을 담고 있는 말씀 선포와 성례 집행에 헌신하며 힘을 다해 받들어야 할 청지기라는 것이다. 이런 청지기에는 두 가지 자질이 요구되는데, 하나는 충성스러움이요, 또 하나는 사려깊음이다.
① 충성스러운 청지기로서
충성스러운 일꾼은 첫째, 순결하고 영적인 목적과 의향을 가지고 직무에 임해야 한다. 교회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뜻과 영광을 우선적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심령이 진실하고 근엄해야 한다. 셋째, 직무를 수행하는 데 근면 성실해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의 집을 통솔하는 데 공명정대해야 한다.
② 사려 깊은 일꾼으로서
플라벨은 사려 깊은 분별력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우리의 임무가 무엇보다도 잘 수행되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임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도들의 영혼 속에 주님을 아는 지식이 견고히 세워지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목사는 영혼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청교도들에게 회중에 대한 연구는 말씀 연구와 더불어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사용하는 ‘단어 선택’도 신중해야 한다고 했다. 진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말들을 삼가야 한다. 청교도들은 학문 과시에 대해, “학문이 성경 연구에는 필요하나 강단에서는 그것을 과시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무엘 루터포드의 말에 동의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심령을 관통하는 말을 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설교자들은 열정적인 자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전하는 진리가 듣는 이들의 심령 속에서 살아 역사하도록, 먼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열정으로 힘을 다하여 호소해야 한다(빌3:18 참고). 마지막으로 사려 깊은 목회적 자세를 가진 목사로서 위로부터 은혜가 임하도록 도움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이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3. 청교도의 목회 방식
1) 주님의 양무리를 돌보는 목회
청교도들에게 목회 사역의 기본 철학은 철저하게 주님의 양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는 양들의 모든 형편을 알고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양식들을 적절하게 공급해 주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심장과 사랑으로 하는 목회
목사는 강단에서의 설교 사역과 심방 사역에서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야 한다. 목사는 이익과 명예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부르심에 충성하는 자세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3) 소명 의식과 영적 직무에 충실한 목회
청교도들은 주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영적인 직무에 충실하려는 자세로 양들을 돌보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목회 사역에 임했다. 그들은 예배와 성례와 기도 생활 등을 행할 때 자신을 향한 부르심과 어긋나지 않도록 사력을 다하여 섬겼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반드시 교회와 관련하여 공적인 유익과 건덕(建德)을 위해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자신의 장래를 내다보면서 일해야 한다.
4) 선포된 말씀의 생활화를 점검하는 목회
백스터는 사역하는 동안 한 주에 열다섯 가정 정도를 심방하여 성경을 암송하게 하거나 요리문답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소유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선포된 말씀의 생활화를 점검했다는 것이다. 심방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이 모든 원리와 방식은 이 시대에도 주님께서 목회자에게 요구하시는 길이요 덕목이다.
4장 청교도의 교회론과 목회신학
1. 교회에 대한 청교도들의 이해(존 오웬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교회에 대한 청교도들의 이해는 오로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 교회론에 대해 오웬은 매우 신학적으로 접근한다. 즉, 은헤 언약에 기초하고 있는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부름 받아 택함을 입은 자들의 모임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으며, 본질적인 진노의 자녀의 상태에서 불러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매임을 받은 공동체임을 강조한다.
오웬에게 교회는 특별히 네 가지 중요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바로 말씀 사역과 성례 거행, 권징, 복음 전파이다. 한국 교회가 깊이 고려해야 할 점은 교회 회원제도이다. 지금은 일단 교회에 등록하면 교회의 한식구로 간주하고는 성도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그러나 그것처럼 모순된 것이 없다. 성도는 말 그대로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별된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에 등록했다고 해서 그가 바로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라는 증거는 없다.
일부 목사들은 교회의 문턱이 너무 높아서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누구든지 오라고 손짓한다. 그래서 심지어 레포츠 교회라는 개념까지 도입되었고, 마치 교회가 지역 주민들을 위한 공간인 양 앞 다투어 나서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음미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사람들을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어 교회를 가득 채우는 것이 능사인가? 교회의 식구가 되었다는 것이 곧 주님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교회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중요한 것은 교회의 머리이신 주님께서 교회에 대해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고 구성원들의 자격을 더욱 철저하게 재정립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세례라는 성례를 통해 점검하고 확증했다. 세례를 베풀 때 반드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해도 실패하고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형식적인 문답을 통해 세례교인만 생산해 내는 것은 진리의 능력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무기력한 교회만 키울 뿐이다.
청교도들은 교회가 주님의 참된 교회가 되는 것이 교회가 세상에 대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봉사라고 믿었다. 지금 교회들은 여러 가지 복지 차원의 일들을 시행하고 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바른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외적인 일거리들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세상과 다른 바 없는 교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 목사직의 특성
오웬은 목사직이 사람에게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의 존속을 위해 제정하신 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목사는 주님의 권위에 따라 이 직책을 감당하되,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양무리에 대하여 주님께 책임을 진다. 그 책임을 일곱 가지로 설명한다.
1) 양무리를 먹이는 책임
목사의 근본적이고도 우선되는 의무는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함으로써 양무리를 먹이는 것이다. 베드로에게 주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이 위임된 것처럼, 교회의 모든 목사들에게도 이 일이 위임되었다(요21:15-17 참고). 사도들의 본을 따르면, 말씀 전파와 기도하는 일에 전무하는 것이 목사의 일임을 알 수 있다(행6:1-4 참고). 이 일을 위하여 성령께서 그들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는 감독자로 삼으셨다(행20:28 참고).
존 오웬은 말씀 선포 사역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요구되는 몇 가지 사항을 지적했다.
첫째, 목사에게는 복음의 비밀과 관련한 영적 지혜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목회는 기술이 아니라 사명이요 은사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무지하거나 전달할 은사가 없는 목사는 목회를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목사는 설교하는 진리의 능력을 경험해야 한다. 진리가 자기 안에서 살아 역사하는 경험이 없이는 목사의 사역에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그런 사역에 마음이 끌릴 수도 없다. 그런 사람의 사역은 대부분 성도들에게 무익하다. 설교를 가장 잘하는 목사는 먼저 설교자 자신의 영혼에게 설교한다.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맛보거나 그 속에 젖어들지 않는 설교는 그 누구도 감화시킬 수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거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서부터 다른 사람에게로 능력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셋째, 목사는 말씀을 옳게 분변할 줄 알아야 한다(딤후2:15 참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청중들의 영혼을 위해 실제적이고도 근본적인 양식을 제공해 주는 실제적인 지혜를 말한다.
넷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관련하여 양들의 상태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돌보아야 한다. 즉, 양들의 강한 면과 약한 면, 성숙도, 젖을 먹어야 하는지 고기를 먹어야 하는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또 성도들이 받기 쉬운 유혹들이 무엇인지, 그들이 영적으로 씨름하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성도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다섯째, 목사가 말씀을 신실하게 선포하는 사역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강한 열정과 사람들의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역이 왜 황폐해지고 있는가? 목사들에게 이러한 자질들이 없기 때문이다.
2) 양무리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 책임
양무리를 향한 목사의 두 번째 의무는 그들을 위하여 열정적으로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다(약5:16, 요17:20 참고). 사도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전하는 일에 전무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기도 없이 어떻게 말씀 선포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사실 효과적인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신실한 말씀 연구와 끈질긴 기도의 열정이 어우러져야 한다.
목회자의 기도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정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말씀이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심령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박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도들이 말씀을 들음으로써 은혜가 더욱 커지고 그들의 임무를 더 잘 감당하게 되며 믿음과 사랑 가운데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그들의 영혼이 더욱 밝아지며 하나님을 더욱 기뻐하게 되는 효과적인 설교 사역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복음의 비밀이 담대히 증거되고 영혼 속에 파고 들어가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목사는 교회가 빠지기 쉬운 유혹들로부터 건짐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거나 건전하지 못한 신앙적 독소들이 성도들에게 뿌려지지 않도록 날마다 깨어 있어야 한다. 목사는 모든 성도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영적으로 병든 자들, 육체적으로 병든 자들, 고난받고 있는 자들,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목사는 교회의 공적 모임에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분의 임재하심만이 교회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목사는 수시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존 번연의 고백처럼, 기도가 영혼의 방패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고 사탄에게 재앙이기 때문이다.
3) 성례를 거행해야 할 책임
목사는 하나님의 집의 청지기로서, 주님께서 언약의 보증으로 주신 성례를 거행해야 한다. 성례는 선포된 말씀에 대한 독특한 확증이요 적용이다. 이에 관하여 목사들은 세 가지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 첫째, 성례식을 자주하는 것이 좋다. 둘째, 성례식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방식대로 엄격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셋째, 성례식을 행할 때는 오직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이 합당하게 먹고 마시도록 주의해야 한다.
4) 복음 진리를 수호해야 할 책임
목사에게 위임된 책무는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다. 목사는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믿음의 도를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 쏟아야 한다. 오늘날 이 세대는 종교 다원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그래서 개혁교회의 가르침과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청교도들과 같이 복음 진리를 지키고 전파하는 것을 무엇보다 숭고한 사명으로 간주하고 열심을 내야 한다. 복음 진리를 수호하는 것은 특별한 몇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이 아니라 복음의 일꾼들 모두에게 위임된 일이다(행20:28-31 참고).
한국에 이단들이 판을 치는 이유 중 하나는 목사들, 특히 신학자들의 게으름과 총회 차원에서의 무관심 때문이다. 그리고 개혁교회를 표방하는 신학교들도 개혁주의 신학을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고, 신학적 진리의 주변만을 맴돈다. 목사는 튼튼한 신학적 기반 위에 서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목사들은 진리를 사랑해야 한다. 청교도들은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그 방면의 지식을 기꺼이 습득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그것이 이단을 막고 바른 교회를 세우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씨름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우리가 진리를 보물인 양 캐내어 탐구하지 않는다면 진리를 사수하는 일은 남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5)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수고해야 할 책임
목사는 영혼의 회심을 위하여 수고해야 한다. 주님께서 교회를 이 땅에 남겨 두신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죄인들의 회심을 위함이다. 이 일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수단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다. 교회 안에도 회심해야 할 사람들이 있음을 알고, 설교의 대상에 교회당 안에 있는 믿지 않는 영혼들도 포함시켜야 한다.
6) 심방 사역
청교도들은 각 가정이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며 기도하는 경건한 가정으로 세워져 갈 수 있게 하고자 심방을 했다. 그리고 심방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파고들고 있는지를 점검했다. 목사는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며 고난받는 자와 함께 고난을 나누는 영적 지도록을 발휘해야 한다.
7) 주 안에서 하나 된 보편적 교회를 이룰 책임
목사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다른 교회들과 다른 나라의 영적 지도자들과 교류해야 한다.
3. 목사의 경건생활
양무리의 본이 되는 것은 복음 사역자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바이다. 청교도들은 그런 면에서 가장 좋은 본을 보여 주고 있다고 본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곧 목사들의 문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은데, 그중에서도 목사의 경건생활이 너무나 부족한 것이 문제이다. 목사들은 직무와 관련된 일 외에 개인적인 경건생활에는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목사는 설교하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설교해야 하며, 늘 자신이 은혜 가운데 거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또한 목사는 자신이 삶에서 교리적 가르침과 모순되게 행동하지는 않는지를 살펴야 한다. 목사의 직책에 필요한 자질을 잘 갖추고 있는지도 살펴야 한다. 목사는 자신에게는 혹독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온유해야 한다.
리차드 백스터는 목사가 자기의 삶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를 여덟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목사가 승리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둘째, 목사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목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큰 유혹거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넷째, 목사에게 많은 시선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목사의 죄는 다른 사람들의 죄보다 파급 효과가 더 크기 때문이다. 목사에게는 위선적인 모습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다. 목사의 죄는 기독교를 더 많이 훼손한다.
여섯째, 목사의 직무는 다른 일보다 더 큰 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주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한 진리의 명예가 다른 누구보다도 목사에게 더 많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덟째, 회중들의 영혼과 사역의 성공이 자기 점검에 따라 많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설교한 대로 살지 않는 목사의 설교에는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이처럼 목사가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점검하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백스터도 지적했듯이 목사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며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날마다 죄를 회개하고 자기를 성찰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경건생활이 있어야 비로소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며,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다.
5장 청교도 목회와 설교
1. 성경과 청교도 설교
청교도들은 설교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사역을 감당했다. 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성경의 진리들을 설교했다. 퍼킨스는 “설교는 영혼을 유혹하는 것이다. 설교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불경건함과 세속적인 삶을 버리고 기독교 신앙과 회개로 나아가게 된다. 이처럼 설교가 모든 은사 중 가장 탁월한 것이라면, 의심할 여지 없이 설교 사역을 높이 사야만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2. 설교의 존엄성
1) 목사로서의 자격 요건
중생의 체험은 청교도 목사가 되기 위한 우선적인 자격 요건이었다. 그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받은 은사의 활용 문제를 점검했다. 그 다음 중요한 것으로, 코튼 매더(Cotton Mather)는 자신의 은사를 계발함으로써 선을 행하려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전 지역에서 실천하여 폭넓게 유용한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목사는 청중들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잘 준비되어야만 한다.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학문과 연구에 힘써야 한다. 특히 설교 사역에 적합한 연구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묵상하는 것과 신학 공부이다.
2) 목사직의 존엄성
청교도들은 사람들에게 설교직은 최고의 직분이라고 했다. 설교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소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이 직임에 가장 비싼 값을 매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목사직을 그토록 높이 여기셨다. 따라서 우리도 목사직을 높이 여겨야 한다. 목사직의 영광이 그처럼 위대하다면, 설교자에게 주어진 책임감 역시 매우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설교를 통해 인간을 회심시키고 경건하게 살도록 양육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하나님께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다.
3. 설교자의 수고
1) 목회자의 연구 활동
설교는 청교도 목사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설교를 위한 성실한 연구 활동은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강해하는 것을 가속할 뿐만 아니라 심령의 여러 상태에 적합한 말씀을 잘 적용하게 한다. 퍼킨스는 설교 준비에는 두 가지 부분, 즉 올바른 해석과 올바른 대지 구분이 있다고 말했다. 해석은 성경 말씀과 문장을 푸는 일이고, 올바른 대지 구분은 결단과 적용이라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결단은 본문에서 알기 쉬운 교리를 발췌하는 작업이고, 적용은 본문에서 끄집어낸 교리를 청중의 상황에 적합하게 제시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한 가지 덧붙이는 연구 훈련은 하나님께 부끄러울 것이 없는 합당한 일꾼이 되도록 자신을 훈련하는 것이기도 하다. 청교도들은 청중들에게 촉구하는 바를 자신들의 삶에 먼저, 그리고 지속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자기 훈련의 본질로 알았다.
2) 기도 훈련
사실 앞에서 언급한 연구 활동은 목사에게 무거운 짐이다. 그 짐은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짊어져야 한다. 사적인 기도든 공적인 기도든, 기도는 청교도 목사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역이었다. 다니엘처럼 하루에 세 번씩 정한 기도 시간 외에도 청교도 목사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하늘나라를 오고 가곤 했다. 성경을 연구하면서 본문의 영적 진리들을 묵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청교도 설교자는 성경을 해석한 후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먼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가운데 하늘을 쳐다보았으며 반복해서 탄원했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도움이 오는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준비하는 메시지의 대목 하나하나가 자신의 심령에 새겨지도록 기도했다. 이것이 탁월한 설교자가 되는 비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코튼 매더는 “당신은 당신의 연구실에서부터 무릎으로 직접 강단까지 가야만 한다. 당신의 설교에 당신의 구세주의 피가 부어져야 하며, 그분의 성령이 호흡하시는 설교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설교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맡은 일꾼임이 확증된다.
4. 강단 사역
1) 설교 방식
성공회 설교자들은 웅변에 집중하면서 미사여구를 구사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전해 줄 수 없었다. 청교도들은 명백한 진리를 선포하는 설교였다.
2) 언어
청교도 설교의 표현들, 명확한 언어는 인공적으로 꾸며낸 말들이 아니었다. 사무엘 크룩(Samuel Crook)은 가게에 물건이 부족하여 선반에 빈 상자만 올려놓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허공을 치는 공허한 말로 양들을 먹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만담만 늘어놓는다든지 실없는 소리나 모호한 말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는 텅 빈 머리와 정결하지 못한 심령에서 나오는 배설물과 같은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을 몹시 혐오했다. 그는 항상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으로 설교했다.
3) 열정
청교도 목사의 설교에는 진지함과 열정이 차고 넘쳤다. 코튼 매더는 이 화살들이 불화살이 되기를 원했다. “진리의 불을 지펴라. 그 진리들이 당신의 손에서부터 흘러나오게 하라. 최초로 복음을 설교했던 사도들에게 임재하신 그 성령이 함께하는 혀는 진리 위에 타오르는 하늘의 불꽃이다.”
5. 강단 목회
1) 양을 돌봄
설교자는 자기 백성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설교가 성도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기게 해서는 안 된다. 성도들은 굶주린 백성들이다. 청교도 목사들은 자신의 성경을 샅샅이 뒤져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 했다. 그리하여 성도를 싸움을 위하여 무장시키고 상처받은 상한 심령을 위로하고자 했다.
2) 황금 계율
하나님의 말씀은 청교도들의 모든 삶의 황금 계율이었다. 강단은 이 척도가 근본적으로 적용되는 곳이었다. 청중들에게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라는 증거로서 경건한 삶이 촉구되었다. 그러하기에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살 것인지가 진지하게 다루어졌다.
청교도 목사들은 우리 속에 거하는 죄를 죽이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 청중들이 순례자의 삶을 잘 감당하도록 권면했다. 따라서 그들의 인내와 그리스도인의 영적 싸움은 단순히 금욕주의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청중들을 경건하게 살도록 이끌 것인지를 늘 연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청중들로 하여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에서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행복을 느끼도록 지도했다.
6. 강단의 영광
1) 그리스도를 붙들라
청교도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설교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그만큼 강단의 영광은 그리스도를 굳게 붙드는 특권에 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들어야만 하고, 목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설교해야만 한다. 그리스도만을 들어야 하며, 그리스도만을 설교해야 한다.’
2) 설교자의 특권
목사의 이 영광스러운 사역의 특권은 과연 무엇인가? 코튼 매더는 “설교 사역의 주된 목적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회복하는 것이요, 사망의 아들들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요, 경건의 수단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따라서 설교 사역에서 가장 큰 목적은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구속주 예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이 얼마나 놀랍고 선하고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6장 청교도의 설교관
1. 왜 설교 사역이 회복되어야 하는가?
‘설교란 왜 하는가?’라는 글에서 패커는 그 글을 쓰게 된 동기를 여섯 가지로 밝힌다.
첫째, 오늘날의 강단에 설교가 아닌 설교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의 강단이 2,30분 정도의 시간을 윤리적, 도덕적 교훈을 주는 설교로 땜질되고 있는데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가 성경의 근본적인 진리는 밝히지 않고 설교자 자신의 견해를 진술하는 데 그친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둘째, 주제별 설교가 강단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교는 두 가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다. 하나는 성경이 설교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보충 자료로 전락해 버릴 수 있고, 또 하나는 주제별 설교를 통해 인간의 사상을 전하는 것이 되기 쉽다. 성경의 본문이 메시지의 내용이나 양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뽑아 설교자의 생각을 덧붙인 요리를 제공하기 쉽다.
셋째, 설교에 대한 저조한 기대감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기대하며 준비하고 나오는 성도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설교자나 청중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먼저,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기 때문에 청중들은 단지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예배당에 나올 뿐인 신자들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한편 성도들은 더 이상 생명의 말씀을 깊이 있게 들으려고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그저 설교 비평가들이나 감상가들이 되어 갈 뿐이다.
넷째, 현재 기독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건전하지 못한 운동들이 설교 사역을 위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 은사 집회, 찬양 모임이라는 명목의 건전하지 못한 집회 등 다양하게 형성된 기독교 문화들의 결함들이 참된 설교를 침해하고 있다.
다섯째, 헌금 순서 등 예배 의식에 관한 지나친 관심 때문이다. 화려하고도 장엄한 의식 행위와 외적 치장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뒤로 밀리게 된다.
여섯째, 전달 매체인 말의 힘의 중요성이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 스크린의 영향은 사람들의 정신 감각을 마비시키고 있다. 선포된 말씀으로 깨달음과 함께 각성이 일어나야 하는데, 영상을 보며 느끼는 것으로 만족한다.
2. 청교도의 설교관과 설교의 특성
1) 청교도의 설교관
피터 루이스는 ‘설교’를 종교개혁의 원리들과 교회의 새 생명을 지속하는 데 매우 중요한 도구로, 공예배와 개인의 경건생활이 메말라 버린 모든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에 대한 바른 이해를 불러 일으키는 활력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설교는 본질적으로 성경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요, 생명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선포하는 사역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하나님의 도구이다. 호튼 데이비스는 “설교란 하나님의 계시의 전달자에 의한 선포로써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신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계시를 확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설교란 “하나님의 예언적인 음성이다”라는 확신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설교의 가치를 굳게 붙들게 했고, 모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설교 사역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말씀을 선포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예배에서 말씀 선포 사역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사람들이 구원 받는 것은 오직 복음 선포가 아니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토록 사랑했고, 그 말씀만을 선포했다. 윌리엄 퍼킨스는 설교자의 근원적인 목적이 ‘성경이 성경 자체를 말하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했다. 성경 강해나 말씀 선포는 모두 이 목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청교도 설교의 특성
① 청교도의 설교는 신학적이다.
설교는 신학이 좌우한다. 복음에 대해 어떤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느냐에 따라 복음 선포가 달라진다.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 등 기독교의 근본적인 진리들과 성경의 영감성, 찬양과 기도, 그리고 예배 의식과 성례식 등의 제반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관점을 설교를 통하여 뿌리내리게 했다. 그런데 현대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어떤 신학이 내포되어 있는가? 신학이 없는 설교가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이단들이 활개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② 설교 사역은 교회의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 중에서 설교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설교의 중요성과 존엄성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다룬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퍼킨스는 설교 사역을 교회에 주신 은사 중의 은사로 간주했다. 특히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말씀 선포 사역 외에 다른 목회 직무를 드높이는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 장로교의 창시자인 토마스 카트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로와 책망의 방편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의 심령과 양심에 적용될 때 활력적으로 역사한다. 불이 뜨거움을 더해 주듯이, 설교를 통해 뿜어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청중들의 마음속에서 말씀을 읽을 때보다도 더 큰 불길을 치솟게 한다.” 그렇다. 설교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뜨거움을 더하는 것이요,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들추어 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심령 속에 안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지식의 전달자로서 강단에 서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화, 감동시키고 변화를 일으키며 하나님께 대한 헌신의 열정을 불러 일으키고, 생동감이 넘치는 성도로 서게 해야 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성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왜 설교가 그토록 중요한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청교도는 말씀을 신실히 선포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설교하신다고까지 말했다. 즉, 설교자가 성경 말씀을 참으로 강해할 때 하나님이 그 설교자를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설교자의 권위이다.
③ 청교도의 설교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진리는 단순하지 복잡하지 않다. 진리는 명백하다. 청교도들은 단순하고도 열정적이며 신실한 설교를 지향했다. 그들은 명백한 진리를 선포했으며, 직접적이고 경험적이며 구원하는 설교를 했다. 한마디로 그들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었다. 모든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증언했고, 청중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었다.
④ 청교도의 설교는 적용이 탁월하다.
청교도들은 선포한 말씀을 적용하기 위하여 회중들의 영적 상태를 매우 깊이 연구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정확히 살펴 그들에게 적용하는 메시지를 선포했다. 적용의 측면에서 볼 때,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분의 백성들의 삶 속으로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즉, 성도가 설교자에게서 들은 말씀을 개인적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스펄전은 “적용이 시작되는 곳에서 비로소 설교가 이루어진다”라고 했다.
청교도들은 설교자의 자질을 평가할 때, 회중들이 들은 진리를 얼마나 철저하게 적용하느냐를 고려했다. 이러한 청교도들의 생각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하게 한다’(딤후3:16-17 참고)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렇게 설교의 모든 적용은 목회적이요 복음적이었다.
3. 설교 사역의 중요성을 강화한 청교도들의 활동
1) 예언회 혹은 설교 학교
예언회 혹은 설교 학교는 목회자 훈련원의 성격을 띤 것으로, 목회자들의 상호 협력과 발전을 위한 비평의 목적을 가진 모임이다. 이 모임은 주로 청교도 목사들이 주도했지만, 간혹 그들에게 우호적인 귀족들의 요청으로 시작되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청교도들은 성경 강해 훈련과 주해 설교 실습을 주로 했다. 토마스 풀러가 쓴 글을 보면, ‘가장 젊은 목사가 강단에 올라가 성경의 한 본문으로 30분을 설교하고, 그 다음에는 나이 순서에 따라 3명 혹은 5명이 같은 본문으로 설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경험이 많고 나이가 많은 선배 목사가 앞에서 설교한 설교자들의 설교를 요약하고 평가했다.
2) 신앙 강좌
신앙 강좌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적극 참여했고, 주 중에 한 번씩 모였다. 교구 교회(지역교회)들이 연합하여 모였고, 특별히 외부 강사를 초청했다. 유명한 청교도들 중 대부분이 이 특별 강사 출신들이다. 윌리엄 퍼킨스, 아더 힐더샴 등은 당시 신앙 강좌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설교가들이었다. 특별 강연들은 많은 청교도 작품들을 후세에 남기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강좌는 청교도 평신도들에게 종교개혁을 위한 열정을 불러 일으켰으며, 청교도 정신을 계승하게 했다.
3) 금식일
금식일은 하루 종일 예배하는 날이었다. 존 하웨가 금식일에 대한 경험을 기록한 것을 보면, 아침 9시경에 모여 기도로 시작하여 오후 4시경에 그날의 예배를 마쳤다고 한다. 어떤 교회에서는 하웨가 한 것보다 두 배로 길게 시행했다. 메튜 헨리의 기록을 보면, 그의 아버지 교회에서는 아침 9시에 시작하여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진행했다고 한다. 개 교회가 독자적으로 하기도 했지만, 몇몇 교회가 연합하여 금식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식일은 청교도들의 신앙생활의 활력소였고, 경건의 힘을 기르는 하나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7장 청교도의 성경 해석
이번 장에서는 패커의 논문과 윌리엄 퍼킨스의 「설교의 기술」을 중심으로 청교도의 성경 해석의 원리와 방법 및 적용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
1. 하나님의 발언록으로서의 성경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발언록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글로 전개된 것이요, 인간을 교육하시고자 하나님의 마음이 글로 펼쳐진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들이 선포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성경을 단순히 오래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이야기로 읽지 말고, 모든 시대의 독자들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 토마스 왓슨은 “당신이 읽는 모든 절에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생각하라”라고 말했다.
2. 청교도의 성경 해석 원리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어떻게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성경해석과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어진다. 청교도들은 성경 본문을 조직적으로 분석하고 적용함으로써 강단 사역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고자 추구했다. 설교자는 본문의 메시지를 전하는 대변자가 되어 전하고자 하는 본문을 섬겨야 한다.
설교자는 먼저 본문의 내용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문맥의 연결점을 찾으며, 본문의 구조와 구성이 어떠한지를 파악해야 한다. 이 모든 작업은 성경의 저자가 의도한 바와 전체 범위가 무엇인지를 청중들이 잘 이해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다음에는 본문으로부터 본문이 나타내거나 암시, 또는 전제하거나 예증하는 한두 개의 교리적 명제들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퍼킨스는 주장했다. 그러나 일단 진술된 교리들은 본문을 더 상세히 분석하고 다른 본문에서 말하는 바를 대비시킴으로써 입증되어야 한다. 다음은 적용 단계인데 이후에 언급하겠다.
청교도들의 성경 해석 원리는 모두 다섯 가지이다. 물론 성경 해석 원리에 관하여, 청교도들은 “성경에서 성경으로 해석한다”라는 대전제 하에 본문의 의미를 문자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1) 문자적, 문법적 해석
중세 시대에는 다양한 영적(Allegorical) 의미를 선호하다 보니 성경을 해석하면서 성경의 문자적 의미를 경시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풍유적인 해석을 배격하고, 성경의 문자적 의미, 즉 문법적이고도 자연스러우며 저자의 의도를 밝히는 해석만을 성경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해석으로 믿었다.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에는 실질적으로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단어들 속에 담긴 의미 외에 다른 의미는 없다.....어떤 사람의 생각을 해석하려면, 먼저 그가 말하고 기록한 바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그가 말한 언어와 관용어구, 표현의 통상적인 사용과 취지들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는 한, 우리는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직시할 수 없다......많은 강해자들, 특히 한 번역본만을 의지하여 설교하는 설교자들이 원어에 무지하여 얼마나 많은 혼란과 오해와 잘못된 해석을 내놓는지 모른다.”
2) 일관되고도 조화로운 해석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일관된 신적 마음의 표현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이 진리이어야 하며, 부분과 부분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성경의 모호한 내용을 명확한 본문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또 하나는, 지엽적이고 모호한 표현들을 확실한 것들과 조화시켜 해석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즉, 기독교 교리나 요리문답의 가르침들 등에 비추어 볼 때 어딘가 이상한 것은 절대로 올바른 강해라고 볼 수 없다.
3) 교리적이고도 하나님 중심 해석
성경은 교리적인 책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 중심적인 가르침이다.
4) 기독론적이고도 복음적 해석
그리스도는 성경의 중심이다. 기록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는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에게 굳게 고정해야 한다. 모든 성경은 아기 예수를 싸고 있는 강보와 같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예표와 그림자들의 진리요 본체이며, 은혜 언약의 실체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성경의 약속들이 만나는 중심지요 만남의 광장이다.
5) 경험적이고도 실천적 해석
성경은 인간이 믿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영적 강건함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말해 준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실천적 가르침들이 강해설교에 그대로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3. 청교도 설교의 적용 원리
청교도들의 성경 해석 문제는 충실하고도 실제적인 적용으로 빛을 발했다. 그들은 교리의 ‘활용’을 논하는 것을 성경 강해의 한 부분으로 보았다. 성경 해석은 ‘말씀을 여는 것이요, 성경의 문장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이 청중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고도 연관이 있는 말씀이 되도록 만드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관계성이 드러날 때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청교도들이 사용한 적용의 활용법은 다섯 가지였다.
① 지식 전달의 활용법
이 방법은 진리의 전달을 통하여 심성을 교훈하는 일에 적용되며,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도와준다. 이를 통해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된 뜻을 향한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확정하도록 도움을 받는다.
② 권고 또는 간언의 활용법
이 방법은 청중에게 교리적 조명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③ 탄원과 호소의 활용법
이 방법은 설교자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지 않는 눈멀고도 어리석은 청중들에게 탄식하고 호소함으로써 감명을 주며, 자신들을 위하여 진리를 굳게 붙들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④ 위로의 활용법
이것은 의심과 불확실성으로 대두되어 온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 이 진리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⑤ 자기 점검의 활용법
이 방법은 설명되는 교리에 비추어 자신의 영적 상태를 평가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강해 적용법이 있다. 그러나 청교도들의 설교 적용은 한결같이 교리와 적용이라는 논지에서 이루어졌다. 존 오웬은 “교리의 활용이 없는 설교는 고상하지 못한 설교이다”라고 했다. 이들의 적용은 매우 실제적이었다.
윌리엄 퍼킨스는 “설교자는 개인 경건 시간에 성경 연구에 몰두하라”라고 권고한다. 이 일을 위하여 디모데전서 4장 13절, 베드로전서 1장 10절 및 다니엘 9장 2절 말씀을 인용하여 개인 성경 연구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해서 말했다.
첫째, 본문에 기술된 교훈을 마음에 새기며 암기하라. 이것은 명제에 대한 정의와 분석 및 적용을 생각하는 작업이다.
둘째, 성경 읽기에 주력하되 문법적, 수사학적, 논리적으로 분석하면서 읽으라. 먼저 로마서와 요한복음을 읽고 나서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읽으면 성경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또 구약의 교리적인 책, 특히 시편과 예언서(그 중에서도 이사야)와 역사서(주로 창세기)를 읽으라. 사도들과 전도자들은 이사야와 시편을 많이 읽었다.
셋째, 정통 신학 서적을 읽으라. 최근의 신학 동향뿐만 아니라 고전도 읽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라. 모든 연구 활동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간구해야 한다(시119:18 참고).
8장 청교도의 예배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예배 모범 지침서에 준하여
1. 개혁파 장로교 예배 신학 원리
1) 예배의 통일성의 원칙
교회는 주님의 교회로 하나이다. 따라서 하나 된 교회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형식도 반드시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오늘날 예배 갱신 운동에 앞장서는 자들을 보면 성경적인 원리와 근거를 내세우기보다는 사람들의 현실적 요구 사항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적어도 개혁교회는 예배의 통일성을 속히 회복해야 한다.
2) 성경적이고도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
전통적인 개혁파 교회의 예배는 철저하게 성경적이었고, 하나님 중심적이었다. 이에 비해 현대 예배 갱신 운동은 육적이며 인간 중심적 예배를 추구한다. 예배의 핵심은 예배자의 느낌과 생각이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예배 대상자의 뜻이 더 중요하다. 영어에서 예배를 가리켜 ‘service’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섬김을 받는 분의 의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지 섬기는 자의 의중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 또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 개혁교회는 이것을 예배의 ‘규정적 원리’라고 한다. 인간에게는 방종하려는 죄성이 있으므로 제한된 규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신앙고백서에서 규정하고 있는 원리는 무엇인가?
첫째, 예배 의식은 인간이 고안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상상이나 고안 또는 사탄의 제안에 따라 어떤 가시적인 형상들을 사용하거나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방식으로 예배할 수 없다”(제21장 1항).
‘축제’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예배자가 흥겨워하고 즐기는 인본주의적 예배는 참예배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기 32장에서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 때 ‘자기들을 위한 하나님’을 만들고 그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던’(6절 참고) 행동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둘째, 올바른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행하는 의전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안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예배이다.
2. 영과 진리로만 예배하라
1) 진리로 예배하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계시된 성경 말씀을 따라 예배하라는 말이다. 더 나아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딤전2:5 참고).
구약에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으로서 첫 제사 의전을 집전할 때 즉결처분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일러 주신 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온 백성들에게 나타내고자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신들과는 구별된, 지존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천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한다고 하지만 상당수의 교회들이 실로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은 예배자의 종교적 위안은 될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 없는 것이 되어 헛된 경배가 될 수 밖에 없다(롬10:2-3 참고).
2) 영으로 예배하라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테리 존슨은 이를 몇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마음을 다하는 예배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적(내적)으로 마음을 다하여 예배해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그분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마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이루어질 수 없다.
둘째,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단순한 예배를 의미한다. 신약의 예배는 의전 행사와 같은 복잡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구약의 제사법처럼 신약의 예배법이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단순하고도 간단한 것임을 뜻한다. 신약 시대 성도들은 복잡한 구약의 의식법 절차에 따라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히10:22 참고) ‘보다 더 단순한 회당의 예배 의식을 따라 성경을 읽고 설교하며 기도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간단한 방식’을 택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셋째, 영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경외심으로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의 정신은 경외감이다.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이 예배이다(히12:28 참고). 그러하기에 예배를 가볍게 여기거나 소홀히 여길 수 없다. 경외심은 공포심이 아니다. 마음에 깊은 감격을 안고 어려워하며 매우 조심하는 자세를 말한다. 지존하신 하나님의 이름이나 명성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에 떨리는 경외심이다.
3. 개혁파 교회의 성경적 예배 요소
칼빈이 제네바에서 사용했던 예배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예배 부름/죄의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시편찬송/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성경 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강론 및 성례/헌금/긴 기도와 주기도문 또는 사도신경 및 십계명 암송/시편찬송/축복 선언 |
이것이 스코틀랜드에서 존 녹스가 만든 ‘공동전례집’에 그대로 반영되다가, 1648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예배 모범 지침서에 따라 다음의 순서로 고착화되었다.
| 예배 부름/은혜와 조명을 위한 기도/성경 읽기(신약과 구약에서 한 장씩)/시편찬송/죄 회개와 중보기도/설교/감사와 간구의 기도/긴 기도와 주기도문 암송/시편찬송/축복 선언 |
1) 성경 읽기
성경 읽기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분의 백성들을 훈육하기 위하여 세움 받은 목사나 교사들이 해야 한다. 외경은 허용될 수 없고, 오직 신구약성경 66권에서 읽되 가장 잘 번역된 모국어로 읽어야 하며, 얼마나 많이 읽을 것인가는 목사의 판단에 맡겼다.
2) 공기도
공기도는 성경을 읽고 난 후, 그리고 시편찬송을 부르고 나서 설교를 담당한 목사가 ‘청중들에게 말씀이 효력을 발하여 그들이 죄악을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탄식하는 마음을 가지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르고 갈급해하는 심령을 가지도록 간구했다. 또한 말씀 사역에 주님의 은혜가 부어지도록 기도했다.
3) 설교
설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 사역에 속한 것으로서, 이 일을 수행하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가장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일이다.
4) 시편찬송, 찬송
공예배에서는 시편찬송 또는 찬송을 불러야 한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나 칼빈의 예배에서는 시편찬송을 불렀다. 칼빈은 그의 시편찬송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성령께서 만드시고 다윗이 노래한 시편보다 좋은 노래가 없으며, 이보다 더 찬송의 목적에 부합하는 노래가 없다....”
한국 장로교회는 예배할 때 찬송가를 부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배할 때 부를 올바른 찬송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가사가 성경적이며 개혁신학을 잘 반영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곡조 역시 찬송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것인지를 고민하여 선택해야 한다.
4. 개혁파 장로교회의 예배 회복에 관한 실제적 제안
개혁파 장로교회가 물려받은 신앙 유산은 예배 그 자체만 보아도 얼마나 풍성하고 생명력이 넘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형식화되어 생명력이 사라지고, 마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예배 축제 개념이다. 그로 인해 거룩하고도 순결해야 할 예배가 어떤 공연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주님의 교회는 주님의 교회다운 모습으로 회복해야 한다. 그 회복의 핵심에 예배의 회복이 있다. 즉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장로교의 특성에 맞는 통일된 예배 예전이 반드시 필요하다. 예배야말로 성도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배 개혁을 위한 실천적 지침을 살펴보자.
첫째, 공예배와 사적 예배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적어도 공교회가 정한 주일 예배는 규정적 원리에 입각하여 가장 경건하고도 은혜로우며 즐거운 예배가 되도록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둘째, 예배의 통일성이다. 적어도 예배 모범에 직시된 내용들이 일관성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교회마다 예배의 틀이나 내용이 다르다. 예배 인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셋째, 성경적 강단의 회복이다. 우려스럽게도 한국 교회의 예배에서 강단이 진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예배가 웃음거리 또는 흥밋거리 추구로 이어지고 있다. 참예배가 되려면, 반드시 강단이 하나님의 진리로 충만해져야 한다. 말씀을 맡은 목사는 한 권의 책의 사람이어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보고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주일 성수의 회복이다. 한국 교회가 더 영적인 교회로 거듭나려면, 주일 성수 운동을 다시금 활기차게 벌여야 한다.
예배의 성경적 원리 회복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말씀이 중심이 되는 제3의 종교개혁이 강단 개혁을 통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13장 청교도의 주일 성수
세속 문화를 주도해 온 서구 기독교 문화 형성의 시금석이었던 주일 성수 개념이 퇴보하면서 서구 교회마저도 세속 문화에 빨려 들어가 몰락당하고 있다. 한국 교회도 교회 성장이라는 명목 아래 성도들을 대량 생산하는 일에 주력하다 보니, 기독교인의 구별된 외적 생활 양상으로 자리 잡은 주일 성수 문제가 신자들의 편리 위주로 변모해 가고, 결국 유야무야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견고한 회복을 위하여 실천적 주일 성수 개념을 회복하는 운동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하다.
1. 칼빈의 주일관
칼빈은 십계명을 강해하면서 안식일에 대한 교회의 바른 이해와 신약 시대의 주일 개념의 원리를 두 가지 형태로 집약하여 설명한다.
1) 모세의 율법이 보여 주는 안식일 개념
율법이 보여 주는 안식일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영원한 안식을 상징하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구약의 성도들의 안식일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하여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일을 접어 두어야 한다는 안식의 개념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사람의 의무이자 첫걸음이었다.
칼빈은 이러한 의식적인 개념에서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원리를 이야기했다. 벤자민 팔리가 인용한 칼빈의 ‘Four last books of Moses’ 주석에서는 안식일이 단순히 게으르고 나태하게 보내는 날이 아니라 안식일에 우리의 몸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는 자발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신약 교회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는 방법을 배워야 하며, 하나님만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의식적인 단호한 행동이 요구된다.
2) 경건 훈련을 위한 공동체의 의식일로서의 안식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율법의 교훈을 듣고 희생제사에 참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하여 제정되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날을 정하시고, 그날에 사람들이 모여 율법을 듣고 의식을 거행하거나 적어도 이날의 시간을 특별히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에 대하여 묵상하는 일에 바침으로써 이를 기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경건의 훈련을 받기를 원하신다”
이어서 칼빈은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6-17절에서 언급하는 바를 들어, 안식일의 상징적인 의미는 상실되었지만 여전히 그 영적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고 한 번 더 역설했다. 즉,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공동체로서의 경건 훈련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해진 날에 모여야 한다. 이와 같이 안식일은 단순히 육체적인 활동의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묵상하고 경배하는 일을 방해하는 온갖 일을 중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날들 동안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묵상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종사하기 위함이라고 칼빈은 가르쳤다.
그렇다면 주일을 어떻게 보내는 것이 바람직한가? 칼빈은 우리가 몇 가지 훌륭한 교훈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저 설교나 들어보려고 교회에 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하여 반드시 우리의 모든 의식을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공동으로 고백하는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주일에 모여야 한다.
그런데 그날이 제칠일이 되어야 하지 않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모든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구속하시고 율법 준수에 대한 책임을 면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에 모인다. 자율적인 자세로 이날을 지켜야 한다.
2. 청교도의 주일 개념
청교도들은 단순히 영국 기독교의 주일 성수 개념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이후 개신교의 주일 개념에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주일에 구약의 안식일 원리를 철저하게 적용했고, ‘안식일 엄수주의’를 유출시켰다. 그들이 이토록 엄격한 주일 성수 사상을 고집한 데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1세는 ‘오락 포고령’을 반포하여 주일 예배 후에 모든 대중오락을 즐겨도 된다고 했다. 게다가 그의 아들 찰스 1세는 모든 성직자가 강단에서 이 포고령을 낭독하도록 강요했다.
이와 같은 현실은 청교도들에게는 매우 거슬렸다. 청교도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는 길은 신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노력은 결국 큰 성공을 거두어 기독교 역사상 ‘신구약 성경 밖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인 사람들’을 만들어 냈다. 이를 통해 1677년에 청교도들의 가르침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 의회가 주일 성수 법령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칼빈이 주장한 것을 그대로 이어받아, 구약의 안식일을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은혜와 신앙의 교통 가운데 누리는 안식’을 예표한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의식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한 날을 정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에 대한 강력한 구속력을 언급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이러한 그들의 태도가 명확하게 표명되어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하여 적당한 분량의 시간을 구별해 바치는 것은 자연법칙에 합당한 일이다. 그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서 적극적이고도 도덕적인 영구한 명령으로 요구하신 것이 있으니, 곧 모든 시대의 인류로 하여금 이레 중 한 날을 하나님을 위하여 거룩히 지키도록 한 것이다. 창세 이후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이 안식일이 이레 중 마지막 날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부터는 이레 중 첫날로 바뀌었다. 이날을 주일이라고 하며, 그리스도 교회의 안식일로서 이날을 세상 끝날까지 계속 지켜야 한다”(제21장 7항).
3. 청교도의 주일 성수에 대한 실제적인 원리
하늘의 소명을 위하여 이 땅의 소명을 잠시 내려놓고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가르친 청교도들은 이것을 부담이 아니라 즐거운 특권으로 여겼고, 금식일이 아니라 축제일로 간주했다. 그들은 주님의 날을 영적 박람회요 한 주간에 필요한 모든 영적 양식을 충분히 비축하는 즐거운 날로 생각했다. 그러하기에 청교도들은 이 날을 위한 실제적인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선포되는 말씀을 듣기 위해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즉,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들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청교도들은 주로 토요일 저녁 시간에 모여 기도로 준비했다. 스윈녹은 이렇게 말했다. “만일 당신이 토요일 밤에 당신의 심령을 하나님께 맡긴다면, 주일 아침에 당신의 심령이 하나님과 함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주일에 졸지 않기 위해 제시간에 자라고 권면했다.
청교도들은 주일이 모든 공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는 보통 세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주일에 모두가 가족 단위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주일에는 예배하러 가기 전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오늘의 예배에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하기를 간구했고, 예배를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족들이 함께 들은 말씀을 확인했다. 오후에는 요리문답서로 자녀들에게 신앙교육을 했고, 저녁 예배에 가기 전에도 오전에 한 것처럼 동일한 방식으로 예배를 준비했다.
토마스 브룩스는 일찍이 영국 교회에서 경건의 능력이 쇠퇴한 원인으로 주일을 엄숙히 지키지 않는 것을 지적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힘이 바닥에서 기고 있는 현상은 브룩스의 지적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영적인 힘을 다시 소생시키는 길은 주일을 엄숙히 성수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성수하는 자들을 오히려 바리새적이라고 몰아붙이는데, 신앙생활에는 무엇보다도 구별된 의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위하여 한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여 사용하는 것은 의인 된 죄인의 의무이자 특권이다. 주일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주 중에도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지 방종하지 않을 것이다.
14장 청교도의 경건생활
청교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그들의 경건한 삶일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철저한 안식일 엄수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적 박람회장에서 한 주간에 필요한 모든 영의 양식을 공급받는 그들에게, 주 중에 들은 말씀대로 실천하는 경건한 삶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 경건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전제들
청교도들은 사람이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먼저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인지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오웬은 그리스도인도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 대해 바르게 이해할 때 비로소 왜 우리가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고 했다.
인간의 처지가 어떠한지를 알게 되면, 곧바로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고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벗어나 영생의 복을 누리는 인간의 참 행복을 발견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스럽게 경건한 영적 생활을 추구하게 된다. 더욱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인간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엡4:24)이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감사와 감격을 쏟아 놓게 된다. 이것이 경건의 시작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때부터 사탄의 거센 공격이 시작되며, 이 땅에 사는 동안 죄와 싸우는 일이 계속된다. 오웬은 이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죄는 가장 잠잠해 보일 때 가장 잠잠하지 않으며, 죄의 호수는 잠잠할 때 가장 깊다”라고 말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워 주었다. 이것이 지속적인 경건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러한 경건생활을 청교도들은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불렀다.
2. 성화 또는 경건생활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성화를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전환하여 우리의 육체와 옛사람을 죽이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활력 있는 삶’을 함축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하나님이 중생한 그리스도인을 즉시 주의 나라로 데려가시지 않고 이 땅에 살게 하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거룩한 생활로 이끄시려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렇게 말했다. “성화란 신자들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인 역사로서, 그들의 본성을 죄의 오염과 부정함으로부터 정결하게 씻어내고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새롭게 심어 줌으로써 성도들이 은혜의 신령하고 습관적인 원리에 따라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대부분 성령의 첫 번째 사역이 중생하게하는 역사를 제외하고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를 실행하도록 도우시는 것이라 보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인데, 성장이란 성도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는 영적 증진이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말하며, 이것은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다.
3. 경건생활의 기초
1) 성경에 반해 버린 청교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때문에 거룩하고자 하는 성도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성도의 태도가 경건생활의 근본을 이룬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날마다 성경 읽기와 선포되는 말씀 듣는 훈련을 강조했다. 청교도들의 마음 중심에는 성경이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규범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성경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2) 기도의 사람들인 청교도
인간이 스스로 거룩하고도 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준행하기 위하여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간구해야 한다. 이는 우리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는 겸손이며,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이 거룩한 순종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청교도의 기도 생활을 보면 공적 기도 시간 이외에도 개인 기도 시간이 주를 이루었는데, 대부분 하루에 적어도 세 번 기도 시간을 가졌다. 청교도들은 성경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개인 기도의 모범과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는 법을 습득했다.
3. 맺는말
모든 그리스도인은 거룩해야 한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신자들은 마땅히 성결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버려진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보여 주는 성령의 내적 역사이다.
그런데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을 고리타분하고 딱딱하며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고통 없이 어떻게 성경적이고도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공부와 기도회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경건생활의 전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경건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지속적인 열망에 사로잡히고 그리스도를 닮고자 몸부림치는 생활이다. 우리의 몸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의 피가 흐르는 것이 경건이다.
15장, 교회 절기, 성경적인가?
교회력의 중요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및 죽으심과 부활, 성령강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의미를 해마다 새롭게 다짐하며, 그 깊은 뜻을 바르게 전하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실제로 교회력의 기원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과 관련하여,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그 감격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주일마다 모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주일 예배의 근간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사순절, 주현절, 오순절, 성탄절, 부활절을 제정하여 해마다 교회의 주요 절기로 지켜 왔다. 여기에 중세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각종 성인들의 날을 교회력에 포함하여 모든 교회가 ‘날’들을 지키게 했다.
1. 교회 절기에 대한 역사적 배경
교회력을 보면, 주일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이 오순절이었다. 유대인들에게 그날은 유월절로부터 49일 후에 등장하는 칠칠절이었다. 이것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율법의 선포와 이스라엘의 건국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칠칠절에 이른바 ‘성령 강림’사건이 일어났고, 교회는 이날을 신약 교회의 탄생일, 또는 새 이스라엘의 시작으로 정했다(행2장 참고).
대강절은 6세기 이전에도 있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교에 의해 제정된 성 앤드류의 날인 11월 30일에 가장 가까운 주일로부터 시작하여 4주 동안 지키게 되었다. 대강절은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관계된다. 따라서 대강절의 절정은 성탄절이다.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을 위한 영적 준비 기간으로 4주를 엄격하게 지켰다.
성탄절은 초대 교회가 관심을 가진 날이 아니었다.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삼은 유래를 보자면, 이날은 원래 로마 이교도들의 축제일 또는 태양신을 숭배하는 대대적인 축일이었는데, 주후 336년에 콘스탄틴 황제의 지시로 기독교의 성일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겨울이었고, 또 이날이 우주에 빛을 주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12월 25일로 정한 것이다. 이후 안디옥에서는 375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5세기 경에 이르러 성탄절을 지키기 시작했으며, 그 이후 전 서방 교회가 지키게 되었다. 그러나 동방 교회에서는 1월 6일로 지켰다. 서방 교회가 동방 박사의 방문과 관련해 12월 25일로 정한 한편, 동방 교회는 예수님의 세례식에 맞추어 축하하는 뜻에서 주현절을 지키게 되었다.
사순절(주일을 제외한 부활절 전 40일)은 부활절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절기이다. 이 절기는 회개일인 속죄일에 시작되어 주님이 죽으신 성 금요일에 끝난다. 이 기간에는 엄격한 절제와 금욕을 실천한다. 이 절기는 4세기 중엽 예루살렘에서부터 교회력에 포함되기 시작했으며, 다락방에서의 성만찬 사건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 빌라도의 법정에서의 수난 등을 생각하면서 예배했다고 한다.
부활절은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절기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춘분이 지나고 만월이 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킨다. 따라서 부활절은 3월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지켜진다. 부활절은 사실 따로 정해진 절기라기보다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게 된 매 주일이 부활절이었다. 그러다가 동방 교회에서 부활절을 교회력의 시작으로 삼아 해마다 부활의 참된 의미와 부활의 영광을 되새기면서 기념하게 되었다.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우리가 알 듯이 1620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청교도들이 첫 수확을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드린 일을 기념하여 지킨 미국 교회의 절기라고 할 수 있다.
2. 교회 절기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
칼빈은 절기에 미신적인 요소가 더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미신적으로 성물을 숭배하듯이 절기들을 숭상하는 듯한 오류가 없다면 절기를 지키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 선포와 성례 거행 및 공적 기도가 있어야 한다.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국교로 세운 존 녹스는 1560년에 교회 규범집이라 할 수 있는 ‘제일치리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지 않는 법규나 규범이나 계율에 의하여 사람들의 양심에 부과된 것은 무엇이든지 철폐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순결서약, 결혼에 대한 맹세, 금식일에 대한 미신적인 성수.....죽은 자를 위한 기도 및 인간이 제정한 성인의 날들, 사도들의 축일들, 순교자의 날들, 동정녀의 날, 성탄절, 주현절....마땅히 철폐되어야 한다”
제2차 헬베틱 신앙고백서는 녹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예수님의 성탄, 수난, 부활, 승천 및 성령 강림’은 지켜도 무방하다는 예외 규정을 두었다. 이것은 중세 시대 익숙하게 지켜 온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주일 성수를 제외하고는 교회 절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때에는 종교개혁자들의 가르침에 힘입어 절기가 더 이상 대중적인 관행이 아니었고, 교회가 순수하게 성경에 근거한 예식을 집행해 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볼 때 개혁교회의 교회의 절기 문제는 세 가지 차원에서 금지된 것을 볼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에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이 없다. 둘째, 교회가 지나치게 절기들을 영적으로 신비한 무엇이 있는 것처럼 미신적으로 가르쳐 왔기 때문에 개혁교회에서는 미사와 더불어 미신적인 행위를 우상 숭배로 간주하고 금했다. 절기를 지킴으로 어떠한 영험이나 죄 사함과 신령한 복이 임한다든지, 또 이를 어기는 자들에게 임할 공포심을 조장하는 미신적인 놀음을 개혁교회에서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셋째, 교회나 개인이나 누구를 막론하고 성경에 없는 것을 고안하여 강요하거나 지키도록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반대했다.
3. 절기의 타당성
교회가 절기를 지킴으로써 얻는 유익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현대 교회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에 종교개혁가들이 우려했던 종교적인 미신을 조장하는 일이 없다고 믿고 있다. 절기를 지킴으로써 절기의 성경적인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게 되어 회중들이 더욱 그리스도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며 주님께 헌신을 다짐하게 된다면, 그것처럼 바람직한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절기를 지키는 데서 오는 몇 가지 폐단을 우리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첫째, 매년 절기를 지키는 것이 점점 절기의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고, 절기를 그저 하나의 연례 행사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부활절 연합 행사, 그리고 축하 공연 등등.
둘째, 교회에서 지키는 절기는 무엇보다도 성경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생신을 축하하는 행사를 열고 즐겼다는 기록을 읽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복음 선포적 측면에서 절기 수행은 타당성이 결여되었다. 절기 때 한번 전하는 것으로 끝내 버리고 마는 것은 옳지 못하다. 부활의 환희와 감사, 영광이 어찌 일 년에 한 번뿐이어야만 하는가? 초대 교회가 주일마다 모여서 기념한 것처럼, 우리도 매 주일이 고난 주간이요 부활절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왜 절기를 지키는가? 교회의 전통이기 때문에, 또는 복음이 선포되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외에 혹시 교회의 재정적인 수익 때문에 지키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진단해 보자.
16장 청교도의 가정관
청교도들의 위대한 특성 중 하나는 가정교육이다. 그들은 가정교육을 통하여 영국의 기독교 가정의 참모습을 심어 주었다. 특히 성경제일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그들의 가정생활에서도 성경의 권위와 가치를 한층 드높이게 했다.
1. 가정이란 무엇인가?
청교도들은 가정을 이루는 근본적인 목적을,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둘째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하여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각은 가정이 제대로 형성되면 사회나 국가가 저절로 잘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낳았고, 실제로 영국의 얼굴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1) 종교적 공동체로서의 가정
윌리엄 퍼킨스나 리차드 십스는 가정을 일종의 ‘작은 교회’라고 했다. 윌리엄 가우지 역시 가정을 “꿀이 저장되는 교회와 국가의 신학교이며, 다스림과 복종의 제일 원리와 근본을 학습하는 곳”이라고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적어도 기독교인들이 가정을 단순히 사회 구성원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조직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하나의 종교적 공동체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다. 즉, 교회와 가정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고 상호 협력적인 관계를 지닌 공동체로, 가정을 교회의 강단에서 외쳐지는 말씀을 구현하는 현장이요 선포된 말씀이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열매를 맺도록 다져지는 실습장으로 보았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은 가정으로 이어졌고, 가정에서의 교육은 삶의 터전에서 꽃을 피웠다.
2) 안식과 행복이 깃든 공동체로서의 가정
청교도들은 안식과 복이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리차드 십스는 경건한 사람의 처마 밑에 거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베풀어 주신다고 말하면서, 한 사람이 회개함으로써 온 가족이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 실례를 성경에서 찾아 설명했다(눅19:9, 행16:34). 이처럼 한 가장의 회개와 신앙이 온 집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를 형성하며, 사랑과 행복이 가득 담긴 사회 공동체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2. 청교도의 결혼관
가정을 형성하는 최초의 의식은 결혼이다. 청교도들은 결혼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청교도들은 결혼을 ‘창조의 원리이며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로 간주했다. 따라서 결혼은 차선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으로 인간의 이상적인 삶에 속한다고 여겼다.
청교도들은 창세기 2장 22절을 주해하면서 여성과 남성의 평등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취하신 갈비뼈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 남자의 머리뼈로 만들지 않으신 것은 남자보다 높아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요, 남자의 발가락에서 여자를 만들지 않으신 것은 남자에게 짓밟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것은 남자와 평등하게, 그리고 그의 팔 아래에서 보호받고 그의 심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으며 지내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결혼은 남편과 아내의 의무를 늘 상기시켰다. 리차드 백스터는 서로의 공동의 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① 완전히 서로 사랑하라.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스러운 상대를 택하라.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소멸할 경향이 있는 모든 일들을 피하라.
② 함께 거하며 서로 즐기라. 그리고 자녀의 교육과 가정을 다스림과 세상의 일의 경영에 조력자로 신실하게 협력하라.
③ 특별히 서로의 구원에 조력자가 되라. 서로 믿음과 사랑과 순종과 선해을 분발시키라. 죄와 모든 유혹들에 대해 서로 경고하며 도우라. 가정 예배와 개인 예배에 협력하라.
④ 모든 분쟁을 피하고 당신이 고칠 수 없는 서로의 약점들을 참으라. 다루기 힘든 정욕을 일으키지 말고 진정시키라.
⑤ 부부의 순결과 정절을 지키고, 질투를 일으킬 수 있는 상대에 대한 모든 부적당하고 무례한 몸가짐(행동)을, 그리고 부당한 모든 질투를 피하라.
그리고 아내(배우자)를 선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청교도들은 신앙적인 관점에서 출발했으며, 매우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면들을 찾았다. 헨리 스미스는 교인들에게 다섯 가지 기준을 말했다. 첫째는 그 여성에 대한 평판, 둘째는 경건의 모습과 능력, 셋째는 말이 많은 사람인가 아닌가, 넷째는 단정하고 검소한가, 다섯째는 친구는 어떠한가 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배우는 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 하며 불신자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혹시 믿지 않는 배우자를 얻었을 경우에 배우자의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앞에 흠이 없는 배우자로 서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부부가 된 자들은 서로를 사랑하고 아껴야 한다. 고린도전서 7장 4절의 말씀을 통해서 부부의 평등성을 강조하고, 이에 기초하여 서로를 엄숙히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청교도들은 감상적인 애정 표현을 개발해야 하며, 진정한 사랑을 명백히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3. 청교도의 가족관
결혼의 목적은 자손을 번식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따라서 자녀가 없다고 해서 결혼을 파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결혼의 가장 큰 복은 자녀이며, 자녀를 기도로 보살피며 돌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육해야 한다고 했다. 청교도들에게 가족의 개념은 부모와 자녀뿐 아니라 가정에서 봉사하는 종들과 때로는 나그네들까지도 가족의 개념에 포함했다.
청교도들은 가정을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에 빗대어 생각했다. 그래서 각 가정에서는 가장이 설교자가 되어 모든 가족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되, 하루에 적어도 두 번은 예배해야 한다고 했다. 사실 가정의 회복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남편의 이러한 권위와 책임의 회복에 달려 있다.
4. 청교도의 자녀 교육의 실제
교회에서 배운 건전한 가르침은 곧장 가정으로 이어졌고, 가정은 이를 사회에 접목시키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존 게리는 『옛 영국 청교도 또는 비국교도의 특성』에서 이렇게 말했다.
“청교도들은 누구에게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한 가장 좋은 기독교인은 가장 훌륭한 남편이며 아내요, 부모이며 자녀요, 주인이며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대한 교리가 모욕당하지 않고 영화롭게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가이우스 데이비스는 청교도의 자녀 양육의 이상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설교자들은 사랑이 모든 부모의 의무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녀들을 버릇없이 만들어서는 안 된다. 부모들은 원숭이같이 어린아이들을 너무 품다가 죽여서는 안 된다. 부모의 모범은 거룩함의 가장 큰 자극이다. 특히 자녀가 어릴 때에는 어머니의 모범이 큰 영향을 미친다. 교육은 가능한 한 빨리 시작해야 한다. 교육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경건이 지식보다 더 중요하다.”
5. 맺음말
이처럼 청교도들의 가정생활은 경건과 훈육이 공존하면서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서 성도의 책임과 의무가 무엇인지를 터득하고 적용시킨 활력소였다. 신앙 훈련의 장이 되었던 가정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모들은 오로지 학교 공부를 뒷바라지 하느라 전력을 기울인 채 신앙교육을 그저 주일학교 교육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한 인격체는 육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므로 온전한 정신과 올바른 사고를 위하여 반드시 기독교 신앙이 필요함을 인식하여야 한다.
17장 청교도의 가정생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127:1).
1.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은 권위와 책임에 관하여 성경에 분명히 명령하셨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11:3).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하나님은 ‘머리 되심’의 원리를 가정에 명령하셨다. 가족은 하나님이 정하신 ‘머리’의 지배 아래 생활한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생활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가정을 지도하고 보살필 책임을 진다. 아내는 남편의 지배 아래 생활하며 남편 앞에서 집안일을 돌보고 자녀를 보살필 책임을 진다. 자녀는 부모의 지배 아래 생활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분명한 권위와 책임의 테두리 안에서 가정의 체계를 세우셨다.
1)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창세기에 매우 명백하고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찌로다”(창2:24). 배우자와 연합한다는 것은 남편과 아내가 모든 면을 받아들이는 관계가 된다는 뜻이다.
배우자간에는 서로 존중의 원칙이 적용된다. 배우자를 존중한다는 것은 배우자를 하나님에게서 거룩한 지위를 받은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의 관계로 설계되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4-25).
2) 아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권위나 힘에 겸허하고도 슬기롭게 순종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교회를 실례로 보여 주신다. 이것은 품위를 떨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교회의 영광이 된다.
3) 남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 같이 해야 한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희생으로 평가된다. 남편으로서 아버지에게 속해 있는 거룩한 권위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형성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권위는 주님 자신의 희생에 뿌리박고 있다.
18장 청교도의 나눔과 섬김
성경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균형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믿음과 이웃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이야말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만이 보여 준 독특한 삶이었다. 청교도들이 나눔과 섬김의 문제를 어떻게 실천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을 줄 것이다.
1. 나눔과 섬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청교도들이 이해한 섬김은 은혜의 결과이지 은혜의 조건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빛의 열매를 맺는다. 빛의 자녀이기 때문에 열매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속한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성도의 삶에 선한 열매가 없다면, 그는 중생하지 못한 자이거나 바른 믿음이 없는 자이다. 왜냐하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선해야 하고, 선한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심령에 성령이 내주하고 있는 성도들은 선한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선행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말씀 가운데 명령하신 것들이며,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에 의하여 고안되거나 맹목적인 열심 혹은 어떤 좋은 의도를 구실로 하는 것은 선행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여 행하는 선행들은 참되고도 살아 있는 신앙의 열매요 증거이다. 이 선행으로 신자들은 그들의 감사함을 나타내며 그들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하고, 형제들의 덕을 세우며 복음의 고백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대적들의 입을 막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6장 1,2항).
2. 말씀에 근거한 선한 행위들
성경에서 언급하는 선한 행위들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선행과 다른 것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행6:1 참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딤전3:2 참고), 병자들을 돌보는 것(마25:35-36 참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는 것(행9:36, 약1:27 참고),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롬14장 참고),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돕는 것(행10:2 참고) 등이 이른바 착한 행실들이다. 이 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을 살리는 복음 전파가 선행 중에 가장 큰 선행으로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말씀에 근거한 선행은, 그 모든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그분의 죄인들을 회개와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착한 행실로서 사람들을 섬긴다. 그 선행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선행은 단지 공적을 쌓아 자신의 의를 나타내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행위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12:31)라는 주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며, 또한 그들 속에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강권되어 행하는 일이다.
3. 신앙의 열매와 증거로서의 나눔과 섬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로, 성도들의 선행은 크게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신앙의 열매이며, 또 하나는 믿음의 증거이다.
먼저, 성도들의 선행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열매이다. 행함은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진 증거이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포도나무요, 성도인 우리는 그 나무에 붙은 가지이다(요15:5 참고).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에는 자연스럽게 좋은 열매가 열리게 마련이다.
우리는 착한 행실을 통해 믿음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다. 선행은 성도들에게 주는 유익이 참으로 많다. 이런 선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감사를 표현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임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연약한 자의 약점을 감당함으로써 서로를 세워 주는 귀한 일에 동참하게 되며, 덕을 함양시킬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믿는 복음에 대한 우리의 고백이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임을 나타내고, 우리를 비방하는 원수들의 입을 막을 수 있다. 성도들의 선행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중요한 덕목이다. 영혼을 건지는 도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4. 어떻게 사랑하며 섬길 것인가?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라는 의도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라고 명하셨다. 나눔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실천할 수 있다. 하나는 가진 소유를 나누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몸으로 봉사하는 것이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두 가지 다 혹은 둘 중 하나에 평생토록 종사해야 한다. 가진 부를 나누고 지식을 나누며 생명을 나누는 일이야말로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또 다른 사람들의 수고에 동참하여 몸으로 봉사해야 한다. 시간을 내 직접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소외된 사람들의 말벗이 되어 주며,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되 물질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청소나 세탁 등 필요한 일들을 거들어 주어야 한다. 여기서 신중하게 생각할 것은 교회는 복지 단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요즘 교회마다 복지 사업에 열심을 내고 있는데, 선한 사업에 부한 자들이 되라고 명령한 것은 성도 개개인이 할 일을 말한 것이지, 교회의 임무로 말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삶의 터전에서 선한 일에 부지런히 임하도록 격려하고 지도해야 한다.
우리의 유여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은 가진 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권이요 복이다. 청교도들은 심지어 결혼의 목적까지도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함이라고 공공연하게 가르쳤다. 선행은 필수이지 선택이 아니다. 청교도의 선행은 은혜의 행위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성경적인 원리를 제시하고, 그 원리에 따라 더불어 사는 공동의 유익을 위해 가진 것을 적절하게 분배했다.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선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기뻐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위하여 부를 쌓지 않았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되지 않는 한, 우리의 선행은 한갓 자기과시와 자기만족에 빠지게 되며,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영광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청지기로서 나눔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것을 잘 관리해야 하는 자들로 인식했다. 그들은 부의 분배를 통해 하나 된 지체 의식을 실현하고, 신앙의 열매요 산 믿음의 증거를 나타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