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판단력비판을 읽고 있는데 글자 위에 파리가 앉는다 지문이 닳도록 앞발을 문지르고 경기 일으킨 듯 뒷다리를 떨다가 날개를 턴다 나는 안다 칸트를 읽으려면 파리도 한 박자 늦은 호흡이 필요하다 그것을 깨달았는지 저렇듯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 파리는 원시인 듯 글자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고 있다 무료한 표정이다 천천히 글자 위를 기어가다 잠시 멈춰서고 또 기어가다가 멈춰서곤 한다 무채색의 글자를 저렇게 오체투지로 읽으니 쫓아버릴 수가 없다 도리어 도망갈까봐 내가 숨을 죽인다 이런 내용은 정말 오랜만이야 파리에게도 인내가 필요한 것일까 나는 어느새 파리를 읽고 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발걸음을 재촉하다 날아가버린다 잠시 후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떨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내가 파리가 되었다 난시의 눈에 뿌옇게 보이는 글자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다 글자가 무거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