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도서관 - 중국국가도서관 중국 근현대 100년의 축소판[ 中國國家圖書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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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26. 02:17조회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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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도서관
중국국가도서관
중국 근현대 100년의 축소판
[ 中國國家圖書館 ]
중국국가도서관 총관 전경. 뒤쪽으로 보이는 주루는 지상 19층, 지하 3층의 규모로 2천만 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출처: 李致忠, [中國國家圖書館], 中國國家圖書館, 1998>
문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중국 도서관의 역사
중국에서 도서관의 역사는 문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수많은 갑골(甲骨), 문자가 새겨진 그 뼈가 나온 자리가 바로 당시의 도서관이었다. 노자(老子)는 원래 주(周)나라 수장실(守藏室)의 사(史)였으며, 이 사의 직무는 오늘날의 사서(司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시절에 공자(孔子)가 노자를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다. 당시 ‘예’란 문물제도 전반을 가리킨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수장실에 근무하면서 왕실의 도서를 섭렵할 수 있었던 데 있다.
그 후 국가와 왕실, 개인의 도서관이 수없이 출현하였지만, 근대적 도서관의 역사는 이제 100년이 좀 넘는다. 1910년에 남경(南京)에서 문을 연 강남도서관(江南圖書館), 지금의 남경도서관이 최초의 근대적 공공 도서관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최대ㆍ최고 도서관은 북경의 중국국가도서관(中國國家圖書館, National Library of China)이다.
중국의 최대, 최고 도서관
중국국가도서관 총관 정문. 국가도서관의 100년 역사는 중국 근현대 100년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李致忠, [中國國家圖書館], 中國國家圖書館, 1998>
중국국가도서관은 중국의 국가총서고(國家總書庫), 국가서목중심(國家書目中心), 국가고적보호중심(國家古籍保護中心), 국가전적박물관(國家典籍博物館)이다. 국내외 도서와 문헌의 수장과 보호, 전국의 문헌 보호 작업의 지도와 협력, 국가기관과 사회 각계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도서관의 종합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국가도서관은 총관(總館)과 분관(分館)으로 나뉘어 있다. 총관은 북경시(北京市) 해전구(海澱區) 중관촌(中關村) 남대(南大街) 33호(號)에 있으며, 백석교(白石橋)가 놓인 고량하(高粱河) 바로 옆이다. 인근에는 유명한 자죽원공원(紫竹院公園)이 있다. 분관은 고적관(古籍館)이라고 하며 북경시 서성구(西城區) 문진가(文津街)에 있다. 북해공원(北海公園) 서안이 북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금오옥동교(金鼇玉蝀橋)의 서단이다.
총관은 1987년에 낙성한 남구(南區)와 2008년에 완공한 북구(北區)로 구성된다. 총관의 부지 면적은 7만 2,400평방미터, 건축 면적은 14만 평방미터다. 남구의 주루(主樓)는 한당풍(漢唐風)의 쌍탑형(雙塔形) 고루(高樓)이다. 몸통은 흰색이며, 지붕에는 물을 상징하는 남색 기와를 얹어 도서의 가장 큰 재앙인 불을 경계하는 뜻을 담았다. 서고로 쓰는 이 주루는 지상 19층, 지하 3층으로서 총 면적 6만 평방미터이며, 2천만 책을 수용할 수 있다. 북구는 현대식 건축물로 건축 면적은 8만 평방미터이다. 문진가 분관은 총 면적은 4만 평방미터이며, 관사는 명청풍(明淸風)의 궁전식 건물로서 건축 면적은 3만 평방미터이다. 국가도서관 전체의 건축 면적은 25만 평방미터에 달한다.
중국국가도서관 장서는 고금중외의 각종 도서를 망라하여 2010년 말 현재 2,900만 책(건)이며, 2013년에는 3천만 책이 넘으리라 추산된다. 중문 도서와 외국어 도서가 반반을 차지한다. 가장 이른 기록물은 역시 은허(殷墟) 갑골(甲骨)이며, 700여 년 전 남송(南宋) 황실의 집희전(緝熙殿) 장서도 수장하고 있다. 현대의 도서 이외에 선본 고적, 금석 탁본, 고대 지도, 돈황 문서, 소수민족 도적(圖籍), 명인 수고(手稿), 혁명역사문헌, 족보, 보통 고적 등 260여 만 책(건)이 있다. 그 중 선본 고적이 27만 책, 보통 고적이 164만 책이다. 이 가운데 돈황유서(敦煌遺書), 조성금장(趙城金藏), [영락대전(永樂大典)], [문진각사고전서(文津閣四庫全書)]를 “4대 전장(專藏)”이라고 부른다. 외국어 도서에는 1473년부터 1477년 사이에 인쇄된 유럽의 이른바 “요람본(Incunabula)”도 들어 있다.
중국 근현대 100년사의 축소판
100년 국가도서관의 역사는 중국 근현대 100년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해혁명 전야인 1909년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으로 출발한 이래 청의 몰락과 중화민국 건국, 북경의 북양(北洋) 군벌정부(軍閥政府)와 남경(南京)의 국민정부(國民政府), 북벌(北伐)과 항일(抗日), 국공내전(國共內戰),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중화민국으로 나뉘는, 그야말로 격동 근현대사를 국가도서관은 고스란히 감내하면서 수많은 전적을 수집ㆍ보호하였다. 그 전통을 이어 중국 정부는 국가도서관을 현대적 공공 도서관으로서 건설하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서세(西勢)와 서학(西學)이 중국으로 밀려들던 20세기 초에 근대화를 열망하던 중국 지식인들은 도서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건립을 추진하였다. 학부상서(學部尚書) 장지동(張之洞)의 주청을 받아들여 1909년 9월 9일 선통제(宣統帝, 청나라 마지막 황제)가 경사도서관(京師圖書館) 건립을 비준하였다. 4품 한림원(翰林院) 편수(編修) 무전손(繆荃孫, 1844~1919)을 정감독(正監督)에 임명하고, 관사(館舍)는 북경 십찰해(什刹海) 북안 광화사(廣化寺)에 두었다. 무전손은 1907년에 남경에서 강남도서관(江南圖書館, 지금의 南京圖書館)을 건립한 경험이 있었으며, 오늘날 중국 근대 도서관의 비조(鼻祖)로 칭송 받는다. 그는 경사도서관의 초대 관장으로서 도서관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특히 전적의 보호에 힘을 쏟았다. 내각대고(內閣大庫), 한림원(翰林院)과 국자감 남학(國子監南學)의 장서 및 문진각(文津閣)의 [사고전서(四庫全書)], 돈황(敦煌)에서 뒤늦게 수습한 문서를 모아 기본 장서로 삼았다.
사고전서 서고. <출처: 李致忠, [中國國家圖書館], 中國國家圖書館, 1998>
신해혁명 후에 경사도서관은 중화민국 북경정부 교육부가 접수하여 국립경사도서관(國立京師圖書館)으로 개명하고, 1912년 8월 27일에 개관하였다. 이 무렵 루쉰(魯迅, 1881~1936)과 하증우(夏曾佑)도 교육부에 근무하면서 경사도서관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노신(魯迅)은 북경정부 교육부 사회교육사(社會教育司)에 근무할 때 도서관 업무에도 심혈을 쏟았다. [노신일기(魯迅日記)] 1913년 10월 29일 각(脚)에는 “교육부에서 종일 (민국)3년도 예산을 짜고 경사도서관 개조를 의논하니 머리가 어질어질하였다”고 적었다. 1914년 1월 6일에는 승덕(承德) 문진각(文津閣)에 보관하던 [사고전서(四庫全書)]의 일부가 고궁(故宮) 문화전(文華殿)으로 옮겨온 일이 적혀 있다. 이 [사고전서]는 후일 문진각의 [사고전서] 나머지를 모두 옮겨와 경사도서관의 장서가 되었다.
건립 초기 청 조정과 북양정부(北洋政府)는 도서관 경비를 댈 수 없었지만 경사도서관 고적관(古籍館)은 장서가 풍부하였고, 전국에서 기부금이 모여들어 국가도서관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어 나갔다. 1916년부터 국내 출판물을 정식으로 납본 받음으로써 국가도서관으로서의 직능을 발휘하였으며, 1917년에는 관사를 방가호동(方家胡同)의 국자감 남학의 구지(舊址)로 옮겼다.
1928년, 남경에 국민정부가 들어서자 그해 7월에 국립북평도서관(國立北平圖書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교육부 격인 대학원(大學院)에 예속시켰다. 1929년 8월, 경비를 대기 위하여 남경 국민정부 교육부와 중화교육문화기금동사회(中華教育文化基金董事會, ‘중기회’로 간칭)가 협정을 맺어 국립북평도서관과 중기회 소속의 북해도서관(北海圖書館)을 합병하였다. 중기회는 1924년 미국이 돌려준 의화단(義和團) 운동 배상금 1250만 달러로 설립한 단체로, 이 금액을 이용하여 대학과 도서관 등 교육문화 사업을 벌였으며 북평도서관 운영도 맡았던 것이다. 합병 후에도 명칭은 국립북평도서관으로 하였고, 남경정부 교육부와 중기회가 함께 조직한 국립북평도서관위원회(國立北平圖書館委員會)를 꾸려 도서관을 운영하였다. 중남해의 거인당이 1관(一館), 원래 북해도서관 관사였던 북해의 경소루(慶霄樓)가 2관(二館)이었다. 의화단 사건 배상금은 중국의 교육계로 반환되어 근대화에 기여하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1931년 서안문대가(西安門大街)의 동쪽 구역 북해의 서안(西岸)에 새 관사를 낙성하였으며, 이 관사는 지금 고적관(古籍館)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설 자금은 역시 의화단 사건 배상금으로 충당하였다. 외관은 중국 전통 궁전식, 내부 설비는 서양식으로 건설하여 당시 중국 최대ㆍ최고의 도서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 관사를 낙성한 후 승덕(承德) 문진각(文津閣)에 보관했던 [사고전서]를 모두 옮겨 왔고, 거리 이름도 문진가로 바꾸었다.
중국국가도서관 문진각 고적관. 1931년 의화단 사건 배상금으로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