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라틴은 녹지 않는다
안수현
박치기의 왕 코뿔소는 케라틴으로 된 뿔을 가지고 있습니다 손상되어도 다시 자랍니다 애초에 웬만해선 굵히거나 부러지지 않기도 합니다 몸 가죽도 두꺼워서 잘 다치지 않습니다 맹수들도 함부로 덤비지 못합니다 게다가 굉장히 빨리 달릴 수 있습니다 그 무거운 몸으로, 대단하지요 단단한 뿔을 앞세워 달려들면 어마어마한 충격이! 이 초원에서는 천하무적입니다 그리고
멸종위기종입니다
그러니까 예전에나 그렇게 강했다는 거잖아요, 지금도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다면 뿔이 충분히 단단하다면 당장 이 울타리를 뚫고 도망가지 않았을까요?
퇴화가 아니라 변화입니다 멸종이 아니라 환생입니다 달려 나가지 못하는 삶을 살면서
달려 나가지 않아도 좋을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코뿔소를 가두어두기로 한 이 약속이 가두는 건 코뿔소 뿔에 치여 다칠 가능성 코뿔소 발에 밟혀 다칠 가능성 코뿔소 눈에 어린 눈물로부터 내 삶의 조건을 비추어 볼 가능성 눈물을 눈물이라고 읽는 것조차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철창 달린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게 그런 약속을 왜 해가지고 고생을 해. 도대체 누가 책임질 건데
야, 아까 입장권 한 번에 결제한 거 오늘 바로 보내줘 오래된 편지에서 발견되곤 하는 옛사람들의 머리카락처럼 저 뿔도 오래 남아 있기를 바라는 것은
아주 오래된 마음 모두가 무사하기를 바라며
_반연간 『포엠피플』 (2025년 여름호)
_안수현 시인
202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