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가족의 개종 이야기, 사냥꾼 전도사와 폐결핵 환자의 유언
봉화에서도 이 십리 정도 들어가는 그야말로 토끼와 노루랑 함께 발맞추며 사는 산골 마을에서 하루아침에 30대 후반의 어머니가 남편의 장례식을 마치자마자 바로 6남매와 함께 개종한 아주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그 마을은 1,207미터가 되는 문수산의 서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로 봉화읍에서 이십 여리 되지만 80년대까지도 다니는 버스가 없었고 제대로 된 도로가 없었다. 동북쪽 멀리에는 태백산 국립공원이 있고 서북쪽 조금 멀리에는 소백산 국립공원이 있고 바로 앞에는 290미터 정도의 호골산이 이 있어서 세상으로부터 교통이 단절된 오지 중의 오지였다. 유일한 통로는 남쪽으로 열려 있는 골짜기 길, 봉화로 가는 길이었다. 사람들은 물건을 이고 지고 봉화 장날에 가서 팔고 생필품을 구입하였다.
그 산골 마을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많은 금 씨는 일찍이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다. 그는 당시 여느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남존여비사상과 조상숭배의식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이었다. 농사일도 밭 갈고 논가는 일과 농약을 주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농사일과 밭일은 아내 몫이었다. 그는 담배 피고 술 마시며 노름하며 기일에 맞추어서 위엄을 갖추어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자기 일을 다 했다 고 생각하는 삼강오륜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자녀를 낳아 키우며 논일과 밭일과 온갖 길쌈질에다 세끼 식사를 준비하며 하루도 쉴 날이 없는 고된 시집살이를 했다. 말이 결혼한 것이지 종이나 다름없는 삶이었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서 저녁식사를 마치고도 절구질을 하거나 길쌈을 하였다. 봄에는 농사일 뿐 아니라 나물을 채취하고 가을에는 도토리 등 열매를 거두며 틈틈이 조상 3대의 제사 음식을 준비하느라 몸이 늘 고단하여 살이 붙을 시간이 없었다. 고되고 힘든 생활을 탄식하고 하소연 할 곳도 없었지만 그럴 시간도 전혀 없었다. 하여튼 그의 수고로 금 씨 가정은 풍족하지는 않지만 의식주에 어려움이 없었다.
금 씨 아내는 남편의 구박 때문에 아기를 낳고 7일 만에 모내기를 하러 다녔다. 그에게는 6명의 자녀를 출산하는 동안에 한 번도 산후 조리를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아픔과 상처가 컸다. 그러나 남편의 불호령과 권위에 꼼짝을 못하였다. 그리고 그 마을이 씨족마을이었기 때문에 순종, 복종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어느 날부터 남편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이기적이고 냉정한 남편이었지만 그는 남편을 위해 최선을 다해 병수발을 들었다. 부처님과 칠성신 등에 비는 일과 귀신을 달래는 일이 날 마다의 일과이었다. 가장을 살리기 위한 아내와 자녀들의 수고와 고생은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남편은 병을 핑계 삼아서 일체의 농사일에서 손을 떼고 무위도식하며 자기 몸만 챙겼다. 좋다는 약을 다 해먹으며 한량처럼 쉬었지만 갈수록 몸이 야위었다. 그러는 중에 약을 해먹기 위해 논밭을 야금야금 팔았다. 병이 폐결핵이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 금 씨는 약을 구입하고 좋은 음식으로 보식하기 위하여 남은 논밭을 다 팔기로 작정하였다.
그의 아내는 남편의 병이 폐결핵이라는 사실을 알고 절망하였다. 머지않아 남편이 죽으면 자신과 6남매만 세상에 남는데 살 일을 생각하니 하늘이 무너졌다.
그 마을에서 산 너머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교회는 일대의 씨족 마을들 속에서 거부를 당하여서 존립이 어려웠다. 교회는 그 지역 씨족마을 출신의 사람으로서 먼저 구원을 받은 분이 자기 고향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서 기도하며 세운 것이었다.
그 교회에 전도사님 한 분이 계셨는데 그는 교회에서 생활비를 일체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사냥을 하였다. 새들과 작은 산짐승들을 사냥하여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복음을 전하였다. 기독교에 대하여 배타적인 사람들 속에서 사냥꾼 전도사는 가가호호를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으나 문전박대를 당하였다. 그는 가정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고 어려운 가정이나 아픈 사람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금 씨가 폐결핵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지극 정성으로 그를 찾아다녔다. 그냥 찾아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냥하여 잡은 새들을 가지고 가서 고기 대용 영양식으로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하여 증언하였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부인하며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이 원죄임을 가르쳤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구원과 영생이 주어지며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선언하였다.
금 씨는 처음에는 사냥꾼 전도사를 냉소하였다. 조상신을 인정하지 않는 종교는 악하며 사람의 근본을 해치는 패역한 도라고 비난하였다. 그는 가부장의 위치와 남녀차별의 문화와 전통을 힘입어 남성으로서 기득권을 누리며 살았던 자신의 허세와 위선을 드러내는 복음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사냥꾼 전도사의 거듭되는 방문과 따스한 위로, 자비로운 마음과 간절한 사랑을 느끼면서 그의 마음이 열렸다. 피를 토하는 폐결핵 말기 환자가 되어 아무도 자기를 찾는 이 없고 가족들조차도 전염을 염려해서 직접 마주대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 전도사는 일정한 날짜에 변함없이 와서 손을 잡고 그를 위해 기도해주었다. 그리고 사냥해서 잡은 새들을 선물로 주고 갔다. 이제 그는 마당 한 귀퉁이 평상에 앉아서 기침하며 피를 토하며 전도사를 기다렸다. 자신이 건강하고 마을 유지로서 행세를 할 때는 무조건 거부하고 무시했던 전도사가 자기의 죽음의 날에 친구가 되고 위로자가 되어준 사실에 그는 참회를 하였다. 그는 어느 날 사냥꾼 전도사에게 자기 심정을 토로하였다.
“저는 비겁해서 아직도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귀의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와 사랑을 알았습니다. 제가 진즉에 복음의 도를 받아들였으면 제 인생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교회에 나가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러나 전도사님, 감사합니다. 그제가 병과 싸우는 중에 친구가 되어서 위로해주고 구원의 도를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도사님은 죽어가는 제게 희망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금 씨는 임종 전에 아내에게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으면 바로 교회로 가서 전도사님에게 사망 소식을 전해주시오. 그리고 기독교식으로 장례식을 해주시오. 그리고 당신과 6남매는 바로 교회에 나가시오. 전도사님이 나에게 전한 복음대로 나를 천국으로 보내줄 것이오. 그리고 문중의 어느 누구도 전도사님의 장례식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내 유언을 잘 듣고 그대로 따라 주시오.”
그의 아내는 남편이 최후의 숨을 거두자마자 곧 바로 산 너머에 있는 교회로 달려가서 사망의 소식을 전하였다. 전도사님은 사망의 소식을 듣고 곧 바로 와서 문중 사람들의 불평과 비난을 받으며 진지하고 차분하게 장례식을 집례 하였다.
수백 년 유교전통과 주자가례의 법도를 어긴 금 씨의 장례식은 씨족마을에서 센세이션이 되어 마을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었다. 삼강오륜을 최고의 가치로 아는 문중 어른들에게 쿠데타가 된 금 씨의 장례식은 마을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으며 훗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금 씨의 아내와 그의 6명의 자녀들은 장례식이 끝나고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주일에 바로 교회에 나갔다. 그의 아내는 6명의 아이들을 교회 맨 앞줄에 나란히 앉히고 남편을 천국으로 인도한 하나님께 자녀들을 맡겼다. 그는 생계의 문제로 남편처럼 완고하고 교만한 사람을 변화시킨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그와 자녀들은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였지만 교회를 집으로 삼아 살았고 말씀에서 위로를 받으며 가난을 이기며 감사와 은혜로 행복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큰 시련이 왔다. 막내아들이 전염병으로 죽음에 직면하였는데 약이 없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을 하였다. 아들이 살아나고 제대로 먹지 못하여 영양부족이었지만 똘똘하였다. 그는 시골중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전국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욕심을 부려 아들을 일류고등학교, 일류대학교에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험 때 만 되면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시험 날 아침이면 설사현상이 나타나 시험을 제대로 치루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아들은 고민이 되어 전도사님께 상담을 하였다. 전도사님은 묵묵히 듣고 난 다음에 그에게 신학교에 원서를 내고 시험을 쳐보라고 하였다. 설사가 있으면 우연한 반복에 불과한 일반적인 것이고 만약에 설사가 없이 시험을 치루면 영적인 문제일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전도사님의 말을 듣고 고민하는 중에 신학교에 원서를 냈다.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평상시 실력대로 아주 좋은 점수로 학교에 합격을 하였다.
그가 신학대학교에 합격한 후에 어머니에게 시험 때마다 설사로 고통을 당한 일과 신학대학에 시험을 치는 날에는 아무 일이 없이 무사하였고 심신이 평안하였다는 말을 간증하였다. 아들의 간증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사실과 아들이 공부를 너무 잘해서 인간적으로 욕심을 부렸다는 사실을 고백을 하였다.
폐결핵 환자는 살아서 교회에 나가지 않았고 아무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였지만 장례식을 전도사님에게 다 맡김으로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마을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초청하였다.
사냥꾼 전도사는 폐결핵 환자 한 명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만인을 거두었다.
2022년 5월 28일, 토요일
우담초라하니
후기
2022년 5월 22일에 전염병으로 죽었다 살아나서
후에 전도사님의 권고를 듣고 신학대학에 응시하여
은혜로운 목회자가 된 분의 간증을 듣고
감동을 받아서 글로 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