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북간도 용정촌 약사 (1928년)
1928년, 해란강에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인 ❰용문교❱가 개설되어 용정의 도로 교통은 한층 더 좋아졌다.
길돈철도 준공과 더불어 중국인들의 북간도 이주가 본격화되자
중국당국은 조선인들을 구축하고 그 자리에 중국 이주민들을 정착사키고자 하였다.
길림성에서는 2월에 도윤회의를 열어 6개월 이내에 조선인 모두를 귀화 입적시킬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비귀화인들에게는 토지와 가옥을 임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였다.
귀화입적 기한을 1928년 7월 1일에서 12월까지로 설정했는데 남경국민당 정부 측은 특별히 북간도지반 조선인들의 귀화입적비를 면제해주는 우대정책을 취하기도 하였다.
5월에 전 민족유일당 회의가 좌•우파 18개 단체 대표가 모여 길림성 화전현에서 개최되었다. 그런데 유일당 조직방법 문제를 둘러싸고 단체본위조직론을 주장하는 협의회측과 개인본위론을 주장하는 촉성회로 나뉘어져 격론이 벌어졌다. 그런 와중에 정의부는 7월에 참의부와 신민부와 삼부통일회의를 신안둔에서 개최하였으나 통합방법의 견해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6월, 만주 봉천 군벌 장작림이 폭사하다.
6월 4일 만주 군벌 장작림이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일본군이 설치한 폭탄에 의해 살해되었다. 장작림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만주를 점령하고 북경까지 점령하여 군사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1927년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에 밀려 다시 만주로 쫓겨났다. 이에 일본이 만주를 장악할 목적으로 그를 제거한 것이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은 일본에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일본의 중국 침략에 맞서기 위해 1936년에 있는 국공합작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28년 9월 동성귀화한족동향회의 설립을 계기로 조선인들의 귀화청원운동은 차츰 조선인자치운동으로 발전되었다.
제2차 9월 2일 국제 청년 일을 기하여 제 2차 간도공산당 사건이 일어났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 간부들이 동만조선청년동맹을 앞세워 기념집회를 하려다 발각이 되었다. 일제는 동흥, 대성중학교를 비롯하여 연변에서 많은 당원과 청년남녀학생들을 검거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이 진보적인 학생들과 교원들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동만도 책임비서, 용정의 간부, 국자가의 간부 등 72명이 검거되었다.
국제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동북지구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각파들은 국제공산당의 “1국1당”원칙을 받아들여 1930년에 둥북지구의 조선공산다들은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1월에 개최된 민족유일당 통합회의가 결렬되자 12월에 촉성회 계열의 김동삼, 지청천, 김승학이 중심이 되어 정의부 탈퇴파,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가 연합하여 혁신의회와 함께 민족유일당재만촉진회를 결성하였다.
조선공산당 ML파의 작업으로 정의부 중앙소재지 청년들이 공산주의로 전향하여 길림성 반석현, 유하, 청하지방까지 ML파의 지반이 되었다.
5월 중국 외교부눈 길림성장에게 조선인들의 귀화입적을 제한하거나 입적할 경우에는 일본 입적을 이탈한 뒤에 중국 국적을 취득하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간민교육연구회❱가 국자가에서❰연변대표자촉성회❱를 설립하고 길림성당국에 대표를 파견하여 화룡현 옥석구에서 살해당한 조선소작인건에 대하여 항의를 제기하였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임시위원회에서 제3차 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성위와 동변도특별위워회를 성립하고 통화와 연변의 혁명운동을 지도할 것을 결의하였다.
중공만주성위에서 중공당원 주동교를 용정에 파견하여❰민성보❱사에서는 문예편집으로 대성중학교에서는 한어강사로 일하며 연변에서 최초의 중공용정촌지부를 설립하게 하였다. 주동교가 제1임서기가 되었다.
동성용사립연동소학교에서 일어로 교수하는 것에 반대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관준언의 초청으로 북경 향산자유원 사범학부졸업생 가운데 유건장, 조자강 등 20여명 공산당원과 공청단들이 연변에 와서 교원의 신분으로 공산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용정소년회❱가❰용정동만총대❱를 설립하고 항일사상을 주지시켰다.
❰명동소학교❱에 오을렬이 교장으로 취임하고 학교는 교회와 분리되었다. 교장이었던 김약연은 용정으로 이주하였다.
용정에 중공동만구위를 설립하고 10월에 비밀간행물❰동만통신❱을 창간하였다.
길림성❰해룡현 보통학교❱, 요녕성❰영구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조선공산당 ML파가 대성중학교에서❰간민교육연구회❱를 조직하고 중소학교 교원강습소를 열어 조선인 학교의 재직교원들을 초청하여 교육학과 학교관리지식을 전수하며 맑스주의 혁명이론도 강의하였다. 그러나❰제2차간도공산당사건❱으로 교원이 부족하여 강습이 중단되었다.
용정에서 조선 글과 한문으로 발행되는 진보계 신문❰민성보❱가 간행되었다.
길림에❰영명학교❱,흑룡강성 탕원현에 ❰송동모범학교❱가 세워졌다.
로투구청년동맹에서 한성촌에 ❰한성촌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의란구청년단일동맹❱이 동맹의 여자상무원 황인순이❰의란구부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28년에 세워진 학교는 도문 광제촌❰제24소학교❱,도문 부흥촌❰중남학교❱, 용정❰사립조광학교❱, 화룡 용수진❰용호소학교❱, 화룡❰토산자광신소학교❱5개 교이다.
1928년에 세워진 교회는 자료부족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연변 민족출판사에서 나온 ⌜종교사⌟152쪽에 보면 캐나다장로회의 조직교회 34개, 미조직 교회 74개, 기도처 68개로 교회 총수가 176개이다.
조선인들은 중국과 일본의 이중국적으로 고통을 겪으며 사상적으로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사이에서 혼란과 불안에 휩싸였다.
캐나다장로회, 감리교, 성결교 그리고 다양한 민족종교들이 전도 활동을 통하여 연변 조선인들의 불안과 절망,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
2026년 3월 28일 토요일 사시
우다초라하니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