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시ㆍ1
시편 제 90장 ㆍ 信天함석헌
원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라 하였다.
물을 마시려하여 먼저 그 어떤 샘에서 길어왔음을 묻는 것같이, 시를 읽으려 할 때 먼저 그 어떤 심령에서 나온 것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이스라엘의 위인 모세의 시다. 그런데 그 이름 위에 붙이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 사람의 이름에 붙일 수 있는 명사 중에 이에서 더 고귀한 것이 어디 있을까. 이스라엘인은 생각하기를 천하만고에 모세의 우(右)에 나갈 인물은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그를 아버지로 애모하고, 스승으로 존경하고, 지도자로 숭배하고, 심판자로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부른 이름이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는 자요, 그 뜻을 대행하는 자요, 자기네의 어려움을 대변하고 호소하는 자로서, 하나님이 특별히 택하여 세운 인물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그런 고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명리(名利)를 탐하고 지교(知巧)를 자랑하고, 세상 과거 기사는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이 명칭은 조금도 존귀한 것이 될것 없다. 저들은 세계의 대부호라면 부러워할 줄 알고, 세계적 정치가라면 존경할 줄 알고, 각하나 박사라면 좋아할 줄 알며, 혹은 사회의 사업가라 하고 인민의 지도자라면 기뻐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이라 해서 영광으로 알 자는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 시는 아무 감격을 줄 것이 없다. 그러나 과연 어느 것이 참 높은 것이요, 어느 것이 참 귀한 것인가. 사람에게 충(忠)했던 자는 그 사람이 망하면 같이 망할 터요, 인간에 빼났던 자는 그 인간이 쓰러지는 날 같이 쓰러질 것밖에 없다. 그러나 우주는 없어지는 날이 있던가, 생명은 끝나는 때가 있던가. 하나님에 충실했던 자는 그와 한 가지 길이 영예로울 것이다.
국가의 영예는 국가를 독점하려는 애국자에게 취케 하라. 민족의 앙모는 민족을 전매하려는 지도자에게 가지게 하라. 세상의 추대와 우중(愚衆)의 아첨은 사회를 속이고 민중을 강압하는 사상가, 정치가에게 맘대로 탐케 하라. 그리고 그 아우성소리 속에 티끌처럼 높이 떴다가 티끌처럼 사라지게 하라. 우리는 모세와 함께, 또 그를 존경할 줄 알았던 옛날 이스라엘인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무상의 영광인 줄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저로 더불어 애타는 기도를 힘쓰리라.
기도라 한다.
기도의 시요, 시의 기도다. 모든 참 기도는 시일 수밖에 없고 모든 참 시는 기도일 것 밖에 없다. 영혼의 밑바닥에서 떨려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기도를 모르는 입이 시를 어떻게 읊으며, 시심을 안 가지는 가슴이 기도를 어떻게 올릴 수 있을까. 참 인생은 하나님의 재단 밑에 시로써 올리는 기도 밖에 다른 것 아니다.
모세와 같이 기운차게 살려는 자, 모세와 같이 민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힘있게 바칠 능력 있기를 원하는 자, 그리하여 그와 같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오라, 와서 꿇어앉아 이 시를 읊으라.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 거처가 되셨나이다.
시의 첫구, 기도의 첫마디는 가슴 속에 전편이 다 익어가지고 그 박력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모세가 이 첫구를 부르짖던 순간의 심경은 이 시 전편이 내 것이 된 후에야 비로소 느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인생의 덧없고, 작고, 약함, 그 비참, 그 고뇌, 그 우치(愚癡)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답답하고, 안타까워, 오래 탄식하고 애소한 후, 오로지 전능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만 구원이 있다는 확신에 들어가 기쁨을 느끼었다. 그리하여 소리를 높여 부른 것이 이 구다. 고로, 읽는 자도, 전편을 되읊고 읊어 자연히 감격에 겨워 두 손을 들어 손뼉을 탁 치며 「주여, 당신은 만대에 우리 안택이 되셨나이다」하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집이다. 만대에 변함없는 우리 집이다. 인생은 잠깐이 아니냐고 묻지 마라. 인생은 항상 불안 중에 헤매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지 마라. 인생이 덧없고, 헤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인생이 하잘 것 없는 줄을 모르는 것 아니요, 인생이 참혹한 줄 모르는 것 아니요, 누구보다도 더 그 때문에 의심하고 그 때문에 번민하는 것이지만 그 암담한 현실을 들여다보면서 내려갈 밑바닥에까지 다 내려간 때 홀연 반짝하고 빛나는 일조의 광명이 있어, 자기가 빠지려도 빠질 수 없고, 꺼지려도 꺼질 수 없이 튼튼한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있는 것을 발견하는, 거기 시가 있고, 기도가 있다. 이것은 말로 할 수 있는 지경이 아니다. 다만 우리도, 자기의 미약하고 더러움이 노한 물결처럼 양심을 덮어 눌러, 입술을 깨물어도 견딜 수 없고, 사회의 어지럽고 불의 한 것이 달려드는 적군처럼 눈앞에 강박하여 주먹을 쳐도 할 수 없어, 죽을 수밖에 없어질 때에 책을 들어 서서히 이 구절을 읽으면 뺨에는 두 줄 눈물이 흐르면서 목에서는 찬송이 담긴 목젖을 들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인생의 물결은 일고, 인생의 물결은 꺼져도, 하나님은 만대에 우리의 안거할 집이다.
영원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인생의 안거처라는 생각은 놀랄 만한 사상이다. 이 사상에 살아 있는 개인이나 민족이라면 어떤 역경에 있거나 문제가 없다. 무서운 것 중에 천지간에 어디 가나 의지할 곳 없다는 생각같이 무서운 것은 없고, 위대한 것 가운데, 생존하는 하나님안에 살아 있노라는 믿음같이 위대한 것은 없다. 행불행의 원인, 멸망, 구원의 갈라짐은 다만 여기 있다.
맹자는 인(仁)은 인지안택(人之安宅)이요, 의(義)는 인지정로(人之正路)라, 폐안택이불거(廢安宅而不居)하고 사정로이불유(舍正路而不由)하니 애재(哀哉)라 하였다. 인(仁)속에 들어 있으면 평안하여 염려없고, 의 위로 걸어가면 광명정대하여 걱정이 없는데, 그 좋은 집 비워두고 안있고, 그 좋은 길 내버리고 안 가면서, 못 살 데만 들어가고, 못 갈 데만 헤매어서 인생은 이리 참혹하고 세상은 저리 어지러우니 기가 막히지 않느냐 하는 말이다. 인은 무엇인고, 하나님의 맘이지. 의는 무엇인고, 하나님의 발이지. 동양이고, 서양이고, 옛날이고, 이제고, 참사람의 참 말씀은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집이란 것은 사람이 거처하여 풍우를 피하고 짐승의 해와 도적을 피하여 안심하고 있자는 것, 즉 인생의 안거처(安居處)다. 그렇게 볼 때 개인이고 국가고, 인생이 영영(營營)하여 일야(日夜)로 분주하는 일이 결국은 집 한칸 찾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말 집을 찾아드는 인생은 얼마던가. 대부분은, 찾다가 풍우 속에 쓰러지거나 맹수의 입에 들어가거나 하는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가옥이나 여사(旅舍)에서 객사를 하고 마는 것이요, 참말 집에 들어 영주하게 되는 자는 극소수다. 그 원인은 참집이 어떤 것임을 모르는 데에 있다. 고로 그 사는 집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토옥(土屋)에 사는 자는 토옥같이 취약한 심정의 소유자요 석전(石殿)에 사는 자는 석전같이 튼튼한 것을 찾는 심정의 소유자다. 맘이 정주겸허(靜酒謙虛)한 자는 초당에 사는 것이요, 맘이 부화교만한 자는 화려한 집을 짓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집은 사람의 겉이 아니요 속이다. 인생이 그 속을 끄집어내어 집으로 쓰고 산다. 하나님을 집으로 삼는 자는 사실은 하나님을 속에 모시고 그 성전 노릇을 하는 자다.
문화를 자랑하는 현대 각 국민의 집을 보면 제가끔이다. 일본인은 국가로 그 집을 삼아 국가주의를 고취하고, 독일은 민족을 집으로 삼아 민족주의를 부르짖었고, 영국인은 가정을 안거처로 알아 「스위트 홈」을 찾고, 다수(多數)한 미국인은 물질의 풀더미 속을 안락의 둥지로 알아 그것을 쌓기에 열심이다.
스탈린, 히틀러 배(輩)에 이르러는 강철과 피의 지하굴을 그 안전한 소굴로 알아 산적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과연 인간의 안거처가 되고 인생의 안식처가 될까. 불로 시험하는 날이 한번 오면 그 여부는 만인의 눈앞에 환하게 증명될 것이다.(고린도전서 3; 12〜15절)
불로 시험하는 날은 과연 오지 않았던가. 이제도 오려니와 벌써도 몇 번 불의 시험은 있어서 증명이 되었다. 멀리 구할 것 없이 오늘의 세계는 화재 당하고 쫓겨난 세계가 아닌가. 나라마다 가보라. 어느 국민이 과연 집 한칸 쓰고 안거하는 국민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타다 남은 그루터기를 주어 모아 또 가옥을 지을 생각밖에 못하는 호모사피엔스(智慧人)! 맹자를 울린 것도 이 사람이요, 이 시인을 탄식시킨 것도 이 사람이다.
그러나 눈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안거처인 것을 알고, 그의 영원한 것을 안다. 고로,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
인생의 눈앞에 서서 우선 대(大)를 표시하고 장구(長久)를 나타내는 것은 산이다. 소위 청산(靑山)은 불로(不老)다. 변전불주(變轉不住)하는 인사에 비하여 산은 과연 항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어찌 하나님의 영원을 표하며, 그 산의 터가 되는 땅이나 이 아득하게 빈자리 없는 우주전체를 가지곤들 어찌 그것을 헤아릴 수 있으리오. 그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하나님이다. 곧 있어서 있는 자다.
하나님은 영원하다. 그 하나님이 인생의 근거가 되는 줄 알고 우리는 맘이 튼튼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 그 하나님을 바라면 바랄수록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4, 5, 6절은 시인이 자기를 하나님의 영원에다 견주어보며 하는 탄식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이더이다.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아침에 꽃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버힌 바 되어 마르나이다.
비관하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원에 비추어 보아서 인생의 작고 하잘 수 없음을 새삼스러이 느끼지 않을 수 없어 하는 말이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하도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강할수록 자기의 약함을 슬퍼함이 더 심하다. 인생에 안연(安然)한 자는 반드시 굳센 신념을 가진 자는 아니다. 신자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떤다. 그러나 그 떪은 촛불이 풍전에 떠는 것 같은 떪은 아니요, 마치 모래 속에 솟아나는 작은 샘물이 파동을 일으키는 것 같아서 표면에는 동요가 있는 듯하나, 속에는 깊은 데 뿌리박는 기쁨이 있어서 떨려나오는 기쁨의 탄식이다.
7절에서 10절까지는 인생이 그 비참의 원인을 찾는 말이다. 진실한 심정은 인생의 표면에서만 떠서 돌지 않는다. 반드시 깊은 속에 들어가고야 만다. 인생의 덧없음과 가엾음을 읊은 것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시인에 한하지 않는다. 지구상 도처에 있어 초부 목동의 입 뿐 아니라 음부 창녀의 입에도 오르내린다. 그러나 현상에만 멈추는 자는 속(俗)시인이다. 저들은 마치 인생을 조롱하는 것같이 비탄만을 일삼는다. 이스라엘의 시인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표면의 현상을 꿰뚫고 깊은 속에 들어가지 않고는 마지않는다. 같은 슬픔이라 하여도 그들의 슬픔은 속가인(俗歌人)의 하는 눈꺼풀이나 목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만장(萬丈)의 대해가 노호하는 것같이, 끝없는 암동(岩洞)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오는 것같이, 레바논의 백향이 광풍을 만나 비명을 하는 것같이 뱃속에서, 뼛속에서, 영혼의 밑바닥에서 떨려나오는 비절통절(悲絶痛切)한 것이었다. 왜 그런가. 그들의 인생은 남들의 인생보다 깊고 큰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을 한 개 동물로 아는 자는 그가 죽는다기로 그리 아파할 것이 없을 것이다. 인생을 한 개 인생으로만 보는 자도, 그가 고뇌를 한다기로 그리 고민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전능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그를 여호와의 만세 반석에 깃들이는 자로 보는 이스라엘의 시인에게는 인생이 밤의 한 경점같이 지나가고, 인생의 노력이 일조에 홍수처럼 쓸려가고 인생의 사상과 문화가 초화처럼 피었다 스러지는 일은 단순한 비가일편으로만 지나갈 수 없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왜. 그러할 운명에 낳다고는 볼 수 없는 인생이, 그 모양인 것은. 그 원인이 무엇이냐,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인생이 왜 이런 거냐 하고 추궁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깊은 자는 참에 도달하고야 마는 거요, 참은 영원한 거요, 영원한 것이야말로 위대한 것이다. 시편이 시대와 풍물이 다른 수천 년 후에도 어느 민족에 가거나 어느 국가에 가거나, 성서 중의 성서라는 말을 들으면서 오늘날까지 허다한 심령을 감동시키며 허다한 가슴을 위로하고 격동하여 마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깊은 인생 반성 때문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인생 불행의 원인은 무엇이냐. 시인 대답하기를 「하나님의 분노」다. 과연 그밖에 다른 설명이 있을 수 없다. 죽지 않을 것으로 지음을 당한 것이 죽고 말고, 영광스럽게 살아야 할 것이 참혹한 운명 속에 신음하게 되는 것은 그 원인을 지수화풍(地水火風)에서 찾을 수 도 없고, 천사 마귀에서 찾을 수도 없다. 인생의 불행 비참을 자연 현상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생명의 간절한 욕구가 없으면 몰라도, 만일 있는 자라면, 이 인생의 모양을 당연히 있을 자연의 현상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인생은 어떤 적의를 가지는 자의 권력 안에 들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도처에서 우리를 위협하는 적의를 느낀다. 그러면 그 적의는 누구의 것일까. 천지만물을 지은 하나님 이하의 다른 누구일 수 없다. 다른 어떤 존재자가 인생을 미워한다 하더라도 조물주 자신이 우리에게 호의를 가진다면 문제가 될 것 없다. 이것은 창조신을 믿는 신앙으로서는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다. 인생은 하나님의 분노를 샀다. 왜 인생은 하나님의 분노를 샀을까. 이유 없이 될 일은 아니다. 시인 또는 대답하기를 「우리 죄 때문이다.」이유 없이 인생을 미워할 하나님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생의 안거처가 될 수는 없다. 이유 없이 미워하지 않을 하나님에게 분노를 샀다면, 그 까닭이 인생 자체 안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눈을 뜬 시인의 면전에는 인생의 실상이 여실하게 드러났다. 「우리 죄악을 주 앞에 놓았다.」 하며, 「우리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다.」 는 것은 그 실감을 그리는 말이다. 죄가 있을까 없을까 생각을 할 형편이 아니요, 죄란 것은 무엇이냐 토론을 할 지경이 아니다. 변명을 할 수도 없고, 도피를 할 수도 없고 은폐를 할 정도도 지나 백일하에 환하게 드러난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었다.
인생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의 분노에 있고,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가 인생의 죄악에 있다고 하면 현대인은 머리를 흔든다.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그것은 과거 무지하던 시대의 말이지, 인간의 죄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은 무엇냐고, 죄가 있기는 어디 있느냐고, 그런 미신이 어디 있느냐고, 이런 고로 현대인은 현대인이요, 이 시대는 이 시대다. 저들에게 죄가 없어진 것은 좋을는지 모르나 그러나 불행은 없어지지 않았다. 또 불행도 없어졌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인생도 저들의 앞에서 그림자를 감추어 버렸다. 저들에게 생활하는 동물은 있다. 그러나 인생은 없다. 저들에게 맹목적인 의지로 살아가는 생물은 있다. 그러나 인생은 없다. 저들은 인생은 당연히 죽을 것이요, 당연히 고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자연의 법칙이 저들을 그렇게 현명하게 만들었다. 가엾은 지혜인이여, 너는 그렇게까지 타락했는가. 그렇게까지 마비됐는가. 사(死)를 그대로 긍정하리만큼 비참을 그대로 감수하리만큼까지 됐는가. 과연 너는 사의 종이 되고 말았다. 세계의 인종은 황인종이니 흑인종이니 할 것이 아니라, 생과 사의 두 인종으로 구분함이 가당하다. 인생은 영원한 생명체가 될 것으로 주장하는 생(生)인종과, 인생은 죽는 것이 당연한 자연이라고 하는 사(死)인종으로. 모세는 사인종의 자손이 아니고 생인종의 자손이었다. 살았는 고로 영생을 구하고, 영생을 구하는 고로 영원한 하나님을 찾고, 영원한 하나님을 찾는 고로 인생의 미약에 견딜 수 없고, 그 모순을 묵과할 수 없었으며, 그 모순의 뿌리를 들쳤는 고로 죄악의 쓴 샘물이 치달아 올라왔다. 지혜있는 현대인이여, 판단하라, 누구의 논리가 분명한가.
죄없는 인생, 하나님의 분노도 없는 인생, 따라서 하나님 없는 인생이 어떤가, 어떻게 행복스러운가 보고 싶은가. 눈을 들어 세계를 보라. 어떤 모양인가. 근세 이래 소위 이성의 시대라 하고 지식이 발달한다해서 가슴 속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원숭이를 대신 들여앉힌 사인종만이 점점 늘어갔다. 그런 결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되고, 제2차세계대전이 되고, 원자탄이 되고,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되고, 미ㆍ소대립이 되고, 제3차 대전을 내일에 두게 되었다. 그대로 만족한가. 심중에 쾌한가. 쾌하거든 맘대로 미치도록까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좋다. 멸망하는 줄을 알지도 못하고 멸망하는데야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만일 아니거든, 그대로 쾌하다 할 수는 없는 일편 그윽한 생각이 있거든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대들은 모순이라면 못견뎌하는 이성의 사람들 아닌가. 그렇다면, 잘 살아야 80사는 이 인생의 자랑이 있다면, 그 받는 수고와 비참밖에 안되고 그 인생조차 날아가듯이 지나간다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할 터인가. 왜 이 모순은 그저 슬쩍 넘어가려는 건가. 이성이란 것은 그렇게 심장이 약한 것인가. 대단히 담대한 줄 알았는데. 그대들은 모세같이 담대하라. 모세같이 대사업을 성축하고 싶거든, 우선 그와같이 인생에 대해 담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떤 것을 가리켜 담대하다고 하는가. 진실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에 대하여 진실한 자가 참 담대한 자다. 편의를 위해 사실을 은폐하거나 중도에 그만두는 자는 비겁한(卑怯漢)이다. 이성의 문명인은 비겁한인가.
인생의 시ㆍ2
아픈 진실을 아픈 대로 추궁하는 것은 한갓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로 인생 불행의 원인을 찾는 시인은 거기만 그치지 않고 그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으로 나간다. 11, 12 양절은 그 노력의 첫걸음이다.
‘누가 주의 노(怒)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맘을 얻게 하소서.’
불행의 원인이 하나님의 진노에 있는 이상 그것을 제거하려면 우선 그 하나님의 노여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려야 한다. 인생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어떻게 무서운 일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는 일은 곧 하나님을 모멸하는 일이다. 즉 없이 보는 일이다. 없이 본다 함은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말이니 뻔히 생존하는 하나님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처럼 교만한 일은 없다. 무지라면 오히려 모르나 교만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노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시인의 말은 하나님, 인생이 교만하여 당신을 감히 없이 보는 것이 가증은 하시겠지만, 인생은 감히 하나님에 대하여 교만할 이만큼 무지한 것입니다. 그 지(知)가 도리어 참 무지입니다. 그럴새 미미한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니 우리를 불쌍히 보아 지혜롭게 하여주소서 하는 말이다. 극히 겸손한 말이다.
그러면 지혜가 어디서 나올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의 맘이 어디서 나올까. ‘시인은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하였다. 우리 연령을 계수하는 것이 아니라, 일수를 세게 하란 말이다. 인생에 대하여 충실한 태도다. 세상에 산다 하여 운연과안(雲煙過眼)으로 일년 간다, 또 일년 간다, 그렇게 지나갈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하루하루를 놓치지 말고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을 아는 데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일생을 전진(戰陣) 속에서, 또 싸움만 아니라 정치의 모든 사무, 행정이니, 재판이니 할 것 없이 일국의 대소사를 혼자서 친결(親決)하여야 하며, 우맹(愚盲)한 백성의 밥술을 들고 코를 씻는 것까지 지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모세로서, 나날이 일자를 계수하며 살아가는 생활태도가 있었다는 것은 참 놀랄만한 일이다. 그 대(大)와 소(小)를, 그 거(巨)와 그 미(微)를 어떻게 그렇게 겸하였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사실은 그 소와 그 미가 있었는고로 그 거와 그 대가 있을 수 있다. 자고로 위대를 끼친 사람들은 다 생활에 충실하였던 사람들이다. 인생의 시라면 자연 미국 시인 롱펠로의 「인생의 시」를 연상케 되는데 그 안에도 역시 그런 구절이 있다.
아무리 좋아도 미래를 믿지 말고
죽은 과거로는 그 주검을 장사케 하라
행하라, 산 현재 속에 행하라
양심은 속에 두고, 하나님은 머리 위에 두고.
산 현재 속에 행하라고 한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미래라는 것도 내것이 아니요, 과거란 것도 이미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만이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생명은 현재에만 있다. 참 시간이란 것은 현재만인데, 현재란 것은 생명에만 있는 것이다. 우리 생명을 빼놓고 시간을 생각할 수 없다. 과거란 것은 기억 속에만 있는 것인데, 기억이란 결국 생명의 죽은 껍질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미래란 것은 전연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에 이러하리라고 예측하는 것은 결국 기억의 투영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참 미래는 전연 알 수 없는 것이다. 미래가 시간으로 되는 것은 다만 생명의 불도가니 속에 들어와 현재란 것으로 된 때만이다. 현재, 현재요 현재란 것은 일찰나 전에도 없었고, 일찰나 후에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다만 살 수 있는 현재다. 나는 이 현재 속에 있다. 우리 생활이란 것은, 이 일찰나 전에도 없고, 일찰나 후에도 없을 이 나를, 이 나에 깨어 다시 더 할 수 없이 공극(空隙)을 남기지 말고, 충실 시키자는 것이다. 날짜를 세고 시간을 세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아를 응시하잠이다. 생명을 꼭 붙잡고 있잠이다.
다시 말하면 자아에 철저함이다. 내가 나를 깊이 여실히 안다 함이다. 그럼 내가 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앞에 놓고 보면 어떤 것인가. 말로는 표할 수 없는 이 미묘한 것을 경험하여 아는 사람은 안다. 외계의 이끌림에서 우리 맘이 해방되어 안으로 스스로 자기에 향하여 응시의 눈을 던질 때 어떤가. 자기는 무수한 참 아닌 껍데기에 싸여 있음을 발견치 않나. 그 껍질을 백채심(白菜心)을 벗기듯이 벗기고,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어, 한없이 벗겨 들어가면 갈수록 끝이 없고, 의식의 첨단이 바늘 끝보다도 더 가늘고, 더 미미한 데까지 올라간 때에도 자아에는 항상 자아 아닌 것이 있지 않던가. 그리하여 그것이 무한히 추하고, 무한히 악하고, 무한히 소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던가. 자아에 철저하면 할수록, 내 마음을 맑히려면 맑히려 할수록 어떻게 할 수 없이 흐린 것을 절감하지 않나. 가장 긴장한 기도 속에 가장 고약한 악념이 침입하지 않던가. 광명을 보는 듯한 바로 그 중심에 깜깜한 심(心)이 박혀 있지 않던가. 예수께서 40일 금식기도를 한 때에 사탄의 시험이 있었다는 것은 과연 그랬을 사실 중의 사실이다. 여하간 우리가 자기의 밑바닥에 철(徹)하여 얻은 것은 추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요 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자아에 철저하여 지혜를 얻는다는 것은 결국 나의 죄의 추악(醜惡)을 알게 된다 함이오, 그것을 지혜라 하는 것은, 그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을 청하는 손을 올려들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의 참 생활은 현재에만 있고, 현재는 찰나에만 있는 것이면, 그 현재는 영원한 현재다. 손도 안 가닿고, 맘도 안 가닿고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영원한 것이요,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영원 무한한 것에 접근하면 할수록 자기와의 두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절연이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비상히 좁은 것 같으면서도, 한번 뛰면 용이하게 건널 듯하면서도, 종내 건너갈 수 없는 영원의 암연이다. 이렇게 발견하고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찰나는 영원의 찰나요 자아는 그 영원의 찰나 속에 자기 근본 모양을 나타내는데 거기 영원의 저주가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니 어떻게 된 것인가. 여기서 부르짖음이 아니 나올 수 없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런 소리가 어디 있어. 이런 어림없는 소리가 어디 있어. 돌아오기는 누구더러 돌아오라는 것인가. 영역 성서를 보면,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하지 않고 아주 뉘우치소서 하였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에게로 돌아오라 하며, 자기를 향하여 노했던 것을 뉘우치고 생각을 돌리라고 한다. 어떻게 두고 하는 말인가. 도망은 누가 했으며, 버리기는 누가 버렸고, 잘못은 누가 했는데, 죄는 누구 죄인데, 하나님더러 돌아오라 하고 뉘우치라 하는 것인가. 모순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안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절망하는 영혼의 부르짖음이다. 절선(絶線)된 인생의 소리다. 이론으로 한다면 자기가 하나님을 버린 것이니 자기 죄요 자기가 돌아오고 자기가 뉘우쳐야 할 것이지만, 이론의 지경이 아니다. 진실에 이론이 어디 있으리오. 절선이 된 인생에게는 이론의 실꾸러미도 끊어져버리고 깉어 있지 않다. 이론의 구명줄을 오히려 가지고 희롱하는 것은 희롱이지, 일개 극(劇)이지, 진실의 지경은 아니다. 진(眞)에 철(徹)한고로, 모순된 소리를 하는 것이다. 말이 아니고 부르짖음이다. 주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인생이 이 지경에 빠진 때는 참 불행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은 참 불행에 내려간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더러 감히 뉘우치라고 할 이만큼 진아(眞我)에 철(徹)한 후에는 행복이 오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언제까지든지 불행 중에 헤매는 것은 저들이 참 불행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들이 과연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 야곱같이 다시 더 피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든다면, 축복이 아니 올 수 없다. (창세기 32;24〜28) 인간은 약하지만 진실한 인간은 하나님을 움직인다. 하나님의 생각을 뉘우치게 하는 것, 하나님편에서 못 견디고 돌아오게 하는 것은, 진실한 인간이다. 회개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못 견디는 것이다. 참처럼 무서운 것은 없다. 하나님의 생각을 돌이키게 하는 참.
‘여호와여 종들을 위하여 뉘우치소서’
그렇다 여호와는 뉘우치는 하나님이다. 저는 자기의 법칙을 깨쳐서 은총을 드리우는 하나님이다. 과연 저에게 법칙이 있을까, 없다. 여호와 하나님에는 법칙이 없다. 생명의 본원에 법칙이 없다. 법칙 없는 하나님의 가슴에서 인생 구원의 일선(一線)이 움직인다. 절선(絶線)된 인생을 향하여. 절선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의 법칙에 의하여다. 그러나 그 법칙은 하나님 자기편에서 파괴함에 의해 구원의 생명선이 성립이 된다. 이것이 모순된 소리로 들리는가, 하나님의 존엄과 전능을 해(害)하는 것같이 들리는가. 그러면 귀를 막는 것이 좋다. 막고 그대들은 영원한 하나님의 법칙 하에 영원한 노예로, 영원한 죄수로 신음하는 것이 좋다. 사망을 이기고 생명에 들어가고 싶은 자는 모세와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무리(無理)를 주장하여 그로 하여금 뉘우치고 은총의 일선을 내리게 하리라.
이것이 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이다. 논리가 통치 않는 말이다. 왜 논리가 통치 않나.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상대의 세계요, 하나는 절대의 세계다. 의는 어디까지 의며 죄는 어디까지 죄요, 인생은 어디까지 인생이며 하나님은 어디까지 하나님이요, 불행은 어디까지 불행이며 법칙은 어디까지 법칙인 것은 상대의 세계다. 상대의 세계에 있는 한 둘의 사이는 언제든지 떨어진 것이요, 결코 연속이 되지 않는다. 고로 차별상의 상대의 세계에 서있는 한 구원은 없다. 그러나 그 상대의 세계를 그대로 두지 말고 추궁해 들어가면 드디어 절선이 되는 지경이 있다. 상대의 세계로 보면 절선이 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부정되는 것인 고로 사(死)로밖에 아니 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절선되는 그 순간 딴 세계가 전개된다. 이것은 벌써 차별상에 구속이 되지 않는 세계인 고로 자유자재의 절대 세계다. 현실의 인간에 절망이 되는 때에 구원신앙이 성립되는 것은 이것이다. 이것을 혹은 일개 주관에 취하는 것이 아니냐 하기도 하지만, 그는 역시 아직도 상대 세계에 서 있는 생각이다. 주관이니 객관이니, 내 생각이니 내 생각과 별립(別立)한 사실이니 운운하는 것은 의연히 상대의 세계에서만 하는 소리다. 상대 세계의 산록을 내버리고 무시할 각오를 하고, 쑥쑥 올라가서 봉정(峯頂)에 서서보게 되면 어젯날 산하에서 하던 일이 문제도 아니되는 소소한 일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14절 이하 17절까지는 이렇게 이미 절대의 신앙세계에 들어와서 신생(新生)을 발견하고 하는 찬송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자손에게 나타내소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위에서 인생의 불행과 그 죄를 비탄했던 것과는 전연 딴 사람의 말 같은 말이다. 그럼 인생이 다른 인생이요, 세상이 다른 세상이냐. 아니다. 여전히 그 사람으로 앉았고, 그 세상을 바라고 있다. 그럼 웬 까닭이냐. 그것이 세계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절대의 세계에 선다는 것은, 이 세상 이 인생을 이대로 두고, 그 의미가 달라지는 지경이다. 고로 말하자면 눈이 바뀐 셈이다. 의식이 바뀐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세계란 것은 오관의 감각의 소산이지만, 그것만이 세계의 전부는 아니다. 도리어 알고 보면 그것은 참 세계의 지극히 적은 일부분, 일부분이라기보다도 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의식 아닌 절대의식이 열리는 순간에 세계는 외양으로 변함이 없는 듯하나 사실에 있어서는 전연 딴 세계가 된다. 그리하여 그 전에 절선(絶線)됐던 것이 끊어진 그대로 연속이 되고, 부정된 인생이 부정된 그대로 긍정이 되게 된다. 시인이 ‘우리 곤고한 날 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하는 것은 그것이다. 고뇌 그대로가 환희가 되고 실패 그대로가 성공이 되며, 불행 그대로가 바로 감사가 된다. 그 전에 죄라던 것이 죄기 때문에 그대로 은혜로 되고, 주검이라던 것이 주검이기 때문에 그대로 생명이 된다. 그러니 거기서는 전에 상대의 세계인 고로 틀렸다고 했는데, 지금은 상대계 그대로가 절대로 긍정이 된다. 그리하여 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었던 미래가 이 현실의 역사 이 가운데 발견되게 된다. 시인이
우리 손이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새로운 절대의 세계에 서지 않고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 손에 견고케 하여달라는 말을 감히 할 자가 없다. 양심을 가지고는, 참 견고라는 것은 이 상대계에 사는 인생으로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다. 해 아래는 견고란 것은 없다. 자연법칙 아래 있는 세계에는 조만(早晩)의 차는 있을지언정 다 무너질 것이지 견고란 것은 없다. 무너질 인생으로서 무너질 세계에서 능히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것, 영원한 것을 원하는 것은, 죄 이대로가 은혜가 되고 죽음 이대로가 생명이 되는 절대적인 신앙이 아니고는 불능(不能)한 일이다. 신앙이 구원한다는 것은 이것이다. 신앙에 의해서만 시간 공간의 제약 밑에 있는 생명 이대로가 영원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다언수궁(多言數窮). 그만둠만 못하다.
모세라면 영웅인 줄은 알아도 시인인 줄은 모르기 쉽다. 그러나 그 표면에 나타난 것에 현혹하여 그 내면을 잊어서는 진리를 찾는 도리가 아니다. 외는 내의 표현에 불과하다. 모세의 영웅된 소이는 그 시인인데 있다. 즉 그의 위대는 그의 깊은 인생 체험에 있다. 외외(嵬嵬)한 산속에는 소곤소곤 흘러가는 시냇물이 있는 것같이 이 위대한 인격의 이면에는 시 90편 같은 기도가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그는 이런 절절한 기도를 하는 인물이었는 고로 능히 그 놀라운 민족의 대사업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인생이 버림을 당한 시대다. 사람들이 학문에는 열심하고 사업에는 광분하며 이욕에는 미칠는지 몰라도, 인생을 생각하려 하지는 않는다. 고아가 가두(街頭)에 버림을 당했을 때 버리운 것은 고아가 아니요 인생이다. 처녀가 정절을 귀히 여길 줄 모를 때 천해진 것은 처녀가 아니요 인생이다. 이름을 파는 학자는 인생을 파는 것이요, 부정사업을 하는 탐리는 물건을 도적한 것 아니라 인생을 도적한 것이다. 지금은 위가 큰 돼지와, 깃이 아름다운 공작과, 아름다운 공작과, 성욕이 강한 원숭이와, 지배욕이 성한 사자가 있을 뿐 인생은 없다. 그러나 정말 그래서 될 것인가. 그 넷이서 문명을 건설할 수 있나. 그 넷이서 나라를 세울 수 있나. 말마다 애국이요 말마다 문화지만 인생을 기르지 않고 나라는 어디서 나오는 거며, 문화는 어디서 솟는 건가. 일찍이 인생 없는 나라가 있었던가. 인생 없는 사회가 있었던가. 인생을 깊이 파지 않는 영웅이 있었던가. 그렇다 있었다. 앗시리아가 있었고, 스파르타가 있었고, 케사르, 나폴레옹 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찌 됐나. 그들은 다 자기의 조상을 따라 사자의 무덤, 공작의 사해(死骸) 속으로, 돼지의 썩어진 가운데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찍이 인생에 충실하여 망한 나라가 있고 망한 개인이 있던가. 그렇다 있었다. 유대 그렇고 아테네 그렇고, 소크라테스 그렇고, 허다한 진리의 순교자들이 그렇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나라가 망한 지 이미 수천 년이 되어도 유대 민족은 망하지 않았고, 세계의 끝에서 끝으로 유랑은 한다 하여도, 경제로 학문으로 사상으로 세계를 지배하는 실권은 그들에게 있으며, 세계역사의 숙제로 깉어 있는 조국회복을 실현하려 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도시국가의 사반세기의 역사는 지나간 지 이미 오래라 하여도 그들이 깊이 찾아서 밝혀놓은 인생의 철리는 오늘날도 오히려 세계 문화의 일골자(一骨子)를 이루고 있고, 철학을 말하는 자는 수천 년 전 맹독 밑에 쓰러진 노철인을 누구나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종교, 도덕, 예술, 학문, 인류문명의 정신을 파악하려는 자는, 한때는 짐승같이 학대를 받고 초로처럼 쓰러졌던 그 모든 겸손한 순교자의 영 앞에 꿇어앉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보고 그대들은 무엇이라 말하려는가. 깊은 뿌리 없이 높이 서는 거목이 없고, 가늘게 발원하는 샘물 없이 넓게 흐르는 대하는 없다. 인생을 깊이 기르지 않는 민족마다, 뽑힌 나무 같고 막힌 강류 같은 것이다. 능히 일시를 깉어 있을는지 몰라도 그 운명은 결정된 것이다. 적로(赤露)는 능히 유물주의로도 세계에 웅비한다 하지마라. 대가가 패망함에 그 부조(父祖)의 여덕이 탕자(蕩子)의 잔명(殘命)을 능히 잠시 보존 못하는 것 아니다. 시간은 정당한 심판을 내릴 때가 올 것이요, 이미 오려 하는지도 모른다.
참 위대는 겸손에서야 나온다. 겸손한 태도로 인생의 밑바닥을 깊이 파, 거기서부터 쌓아 올라오는 자만이 생활의 높은 탑을 쌓을 수가 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모세는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심히 겸손하다’ 하였다. 청년 혈기에 일시 만용으로써 민족을 구하려다가 실패하고 40년간 광야에 고요히 있어 침사명상(沈思瞑想)에 지나던 것과, 바로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하나님이 노를 발(發)하리만큼 사양하던 것과 아울러 이 시를 음미해보면, 지면에 있는 모든 사람보다 심히 겸손하단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 것이요, 그렇다면 우리가 깊이 배울 만한 것이 있다. 조선 민족의 부족이 있다면, 심각성의 부족에 있다. 생각의 부족, 사상의 빈곤이 우리의 모든 불행, 모든 고난의 근본 원인이다. 이 백성의 평화성도 좋고, 근후(謹厚)도 좋고, 예의도 좋고, 지교도 좋고, 지금은 부족하지만 옛날엔 많았다는 용기도 좋고, 다 좋다. 그렇다, 다른 미덕을 다 구비한다 하여도 정신의 심오한 것이 없고 사상의 철저한 것이 없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신체 모든 기관이 다 건전한데 양심 하나만이 흐린 셈 아닌가. 깊은 종교적 신앙을 가지지 못한 민족, 고상한 도덕적 이상을 가지지 못한 백성, 아아, 그 백성을 어찌할꼬. 그대들은 이 역사적 신(新) 계단에 다다라서 무엇이 급무라 하는고. 정당조직, 군대양성, 외교, 무엇, 무엇. 말하기를 그만두라. 시체에 무장을 해서 그대들은 무엇을 하려나. 짐승에 의관을 시켜서 그대들은 무엇을 하려나. 우선 인생을 가르치라. 그것이 제일 급무라. 인간에 대하여 깊이 깨게하고, 진실한 생명에 대하여 열심을 발하게 하라. 그러면 개개가 모세 같을 것이요, 개개가 크롬웰 같을 것이니. 신명을 아끼지 않는 용기도, 세계를 놀래는 지혜도 깊이 내려판 방촌간(方寸間)에서 나옴을 그대들은 모르나. 자연계에 눈을 향해보라, 무엇을 가르치나. 하늘의 현묘한 빛을 누가 잘 비추던가. 깊은 창해 아닌가. 흐르는 구름의 자유분방한 맘 누가 잘 헤아리던가. 잔잔한 시냇물 아닌가. 높은 산의 장엄한 정신을 누가 잘 알던가. 고요한 산중호(山中湖)가 아닌가. 굉굉한 폭포의 음향 어디서 나온 것인가. 바위틈에서 소리 없이 흐르는 시내가 길러낸 것 아닌가. 자연에서도 그렇거니 인생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인이고 민족이고, 문제를 깊이 정신적으로 대하는 자는 서고, 피상적으로만 취하는 자는 넘어진다. 일찍이 일본에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가 있었을 때, 눈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그것은 하나님의 책망이라 하였다.(우찌무라) 그럴 때 일부 소수의 사람을 제(除)한 외(外)는 거기 귀를 기울이는 자가 없었고, 유명한 기독교계의 지도자라 하는 사람까지도 그런 것 아니라 과학의 부족이라 하였다. 허나 2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그때 만일 일본이 자기네의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으로 알아들었던들, 일본에 오늘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도, 또 일본의 패망이 과학의 부족 물자의 결핍에 있다하면 구철(舊轍)을 또 밟는 일이다. 오늘날은 다소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오늘날 일본의 이른 원인이 그들의 교만에 있음을 알 것이다. 일본보다 더 작은 국력을 가지고도 현명하게 겸손하면 각축하는 열강의 중간에 있어서도 능히 평화와 행복을 누려간다. 산간 소국 스위스 같은 것은 그 실례다. 38선도 미ㆍ소의 대립도 그것과 다른 게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노라 해서 우습게 들리고 미신으로 들릴이만큼 지혜롭고 문명한 민족이라면, 그만큼 그 문명의 대가의 쓴 잔을 마시고야 말것이다. 듣는 귀를 가진 자에게는 하나님의 책망 아닐 게 없고 하나님의 책망을 들은 자는 불행할진저. 저는 가만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라, 이 38선에 걸터앉은, 딸 같은 조선아, 네 무너지다 남고 삭다가 남은 그 가슴을 파라. 네가 38선에 우왕좌왕하면서도 네 지혜가 다 한 줄을 알지 못하나. 네가 미(美)에 끌리고 소(蘇)에 짓밟히면서도 네 힘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하나. 이제라도 파, 어서 파. 모세와 같은 광야 40년이라도 이제라도 파기 시작하라, 네 가슴을. 그리하여 주여 당신은 만대에 우리 안택이니이다 할 때까지. (일만칠천일을 넘으면서)
성서연구 1947.12월, 3월 6,7호
저작집30; 20-61
전집20; 11-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