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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팔공산
2024년 12년 01일(일요일)
산행코스 : 수태골(08:50) - 용바위(10:00) - 서봉(10:55) - 비로봉(11:40) - 동봉(12:15) - 염불암(13:15) - 동화사(14:00) - 동화사주차장(14:30)
산행거리 : 11.6km
수태골
소나무와 참나무가 한몸이 된 연리지
상수원보호구역이라 계곡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펜스로 막혔습니다.
태동최선생묘소 입구
용바위를 지나갑니다.
용바위(장군봉)
수태골로 들어서 서봉으로 오르는 중간에 있는 용바위(장군봉)
10m정도 줄잡고 내려가야 합니다.
서봉을 향하여
용바위능선에서 바라본 수태골 방향 파노라마
관봉, 환성산, 중앙 케이블카 승강장(신림봉)
당겨본 관봉, 노적봉
당겨본 환성산, 초래봉
용바위와 그 뒤로 수태골주차장
당겨본 용바위(장군봉)
당겨본 대구광역시
가마바위봉
당겨본 가마바위봉
용머리능선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서봉 방향 파노라마
서봉
가야할 서봉
좌우로 조망이 탁 터져서 시원하게 조망을 감상합니다.
지나온 능선
서봉 정상이 보입니다.
서봉
서봉 정상에서 바라본 팔공산 비로봉 방향 파노라마
하늘정원, 비로봉
팔공산 비로봉, 동봉
동봉의 우측 방향입니다.
중앙으로 팔공CC골프장도 보입니다.
팔공CC너머 노적봉을 지나 관봉에 으르면 갓바위 부처님을 만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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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케이블카 정상과 그 뒤로 환성산, 초례봉
서봉의 옛이름인 삼성봉
서봉갈림길
파계재 5.1km, 한티재 7.2km, 갓바위 8.4km, 동봉 1.1km, 부인사 3.8km
뒤돌아본 서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팔공산 방향 파노라마
하늘정원, 청운대와 그 아래로 오도암
비로봉은 1960년대 말 팔공산 공산성 터에 군부대가 들어서고, 비로봉에 방송국 송신시설이 자리를 잡으면서 군사보안의 이유로 반세기 가까이 통제되어 왔으나, 시민들의 요청에 의해 2009년 11월 1일부터 군사시설에서 해제되면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습니다.
팔공산 비로봉, 동봉
동봉, 관봉, 팔공CC
오도재
수태골주차장 2.9km, 서봉 0.4km, 동봉 0.7km
서봉에서 비로봉으로 가는 길에는 마애약사여래좌상이 있습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은 대구 팔공산 비로봉의 정상 가까운 절벽에 새겨진 거대한 크기의 마애약사불상입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큼직하며, 탄력 있고 우아한 얼굴은 이목구비가 세련되고 단아하다. 둥근 어깨는 탄력 있어 보이며, 허리는 잘록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무릎에서 밖으로 내려뜨린 오른손과 무릎 위에 얹어 약 그릇을 들고 있는 왼손의 세련성 등은 이상적인 사실주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왼쪽 어깨를 감싼 옷은 몸의 굴곡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편인데 옷주름은 자연스럽고도 규칙적이며, 가슴에서 옷깃이 한번 뒤집히는 등 8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팔공산 마애약사여래좌상(八公山磨崖藥師如來坐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호)
광배(光背)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으로,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표현되어 있으며 연꽃무늬와 덩쿨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었습니다. 대좌(臺座)는 위와 아래를 향하고 있는 연꽃잎을 새겼으며, 이들을 받치고 있는 용 두 마리가 표현되어 있어 화려한 모습입니다. 병고에 허덕이는 수많은 중생들의 돈독한 믿음을 받았던 이 약사불은 우아하고 화려한 사실주의 양식의 작품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보입니다.
불전함
지나온 서봉
마애약사여래좌상과 이별하고 팔공산 비로봉으로 이동합니다.
팔공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은 되었으나 아직 팔공산 정상부에는 군사시설이 있는지라 팔공산 등산코스에는 여전히 철조망을 통과하는 길이 존재합니다.
팔공산 정상 방송국중계탑
동봉 0.4km, 하늘정원 1.1km
지나온 용머리능선, 서봉과 마애약사여래좌상터가 보입니다.
팔공산 제천단
팔공산 제천단은 나지막하게 자연석을 원형으로 쌓아올린 형태입니다. 선돌 모양의 신위석 2개와 남근공물(男根供物)을 함께 갖춰 치성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팔공산 제천단에서는 민간단체들이 2003년부터 개천절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04년 7월 24일 ‘달구벌 얼 찾는 모임’에서 비로봉 정상부에 제천단 표석을 세웠습니다. 방문객은 해마다 늘어 1월 1일 달구벌 얼찾는 모임에서 원단제, 2월 4일(입춘)에는 무속인 단체가 천제 겸 산신제, 2월 27일에는 전국의 상생회(성명학 모임)가 천제를 지내기도 합니다.
팔공산은 옛날부터 산천에 제사를 지내던 큰 산으로 중악(中岳)이라 불리기도 했습니다. 신라가 삼국 통일 이후 팔공산에서 국가 단위의 제사를 지냈는데, 팔공산 제천단은 산천에 제사를 지내던 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렇지만 최근 동봉 표지조사에서 제사관련 유물과 유적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되어, 팔공산 비로봉 제천단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는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팔공산 비로봉
팔공산은 봉황의 모습으로 대구분지를 감싸는 대구의 진산입니다.
최고봉인 비로봉(1,192m)이 봉황의 머리이고, 동봉(1,167m)과 서봉(1,150m)이 솟아오른 봉황의 날개라고 합니다.
동화사 자리가 봉황의 아기궁이라서, 겨울에도 오동나무 꽃이 필 정도로 따뜻합니다.
뒤돌아본 팔공산 비로봉 정상
가야할 동봉
수도사 갈림길
수도사 5.3km, 비로봉 0.3km, 동봉 0.2km
석조약사여래입상과 그 뒤로 동봉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은 대구광역시 팔공산 정상 부근의 화강암석에 조각되어 있는 불상으로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약사여래는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기 때문에 불상도 서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의 바로 뒷편이 해발 1,156m 동봉입니다.
팔공산 동봉 석조약사여래입상(八公山東峰石造藥師如來立像)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
높이 6m의 양각(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고, 불상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거대한 광배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반쯤 뜬 눈은 가늘고 길게 표현되었는데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두 볼은 살이 찐 편이고 입가엔 미소를 띠고 있어 온화하고 자비스러운 불심을 느낄 수 있으며 신체에 비해 얼굴은 좀 크게 표현되었습니다.
거대한 불상을 올려다보며 예불을 드리는 예배자들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귀는 길어 어깨에 닿을 듯하며, 목은 너무 짧아서 삼도(三道)의 표현이 뚜렷치 않습니다.
양손과 발은 모두 신체에 비해서 지나칠 정도로 크게 표현되었습니다.
오른팔은 아래로 길게 늘어뜨려서 손가락을 자연스럽게 표현하였지만 조각 수법은 고르지 못합니다.
왼팔은 가슴 위로 들어 올려 외장(外掌 : 손바닥을 바깥으로 함)했습니다.
법의(法衣)는 통견(通肩 : 어깨에 걸침)이고 옷자락은 무릎 아래까지 내려뜨렸습니다.
단순한 옷주름만이 표현되었고, 법의 밑으로 직립한 두 발끝과 발가락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옷자락도 양팔에 걸쳐 넓게 늘어뜨려졌는데 마치 도포 자락을 연상케 합니다.
이 불상은 손과 발에서 기형적 조법이 나타나기는 하나 거대한 입상에 잘 조화되어 있는 옷주름이나 얼굴 모습 등의 조각 솜씨로 보아 경산시의 관봉석조여래좌상(冠峰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31호)과 양식적으로 유사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동봉으로 올라갑니다.
뒤돌아본 팔공산 정상부
동봉 정상이 보입니다.
동봉 정상
서봉 1.1km, 파계재 6.2km, 한티재 8.3km, 갓바위 7.3km, 도마재(신령재) 2.7km
동봉 정상에서 바라본 팔공산 비로봉 방향 파노라마
서봉
팔공산 비로봉
응달인 등로는 눈길 때문에 미끄럽습니다.
도마재, 은해봉과 갓바위가 있는 관봉까지 조망되는 팔공산 능선과 팔공산CC
염불봉을 우회합니다.
염불봉(해발 1042m)에서 내려오는 데크계단
갓바위 6.85km, 도마재 2.05km, 비로봉 1.00km, 동봉 0.50km
우측 소월길 종주코스 능선
당겨본 군위군 화산 풍력발전기
동화사 갈림길
동봉 0.7km, 갓바위 6.6km, 동화사 2.9km, 염불암 0.8km
급경사 등로를 지나갑니다.
뒤돌아본 염불봉
염불암 0.3km, 염불봉 0.6km
염불암 0.8km, 염불봉 0.1km
영불암 극락전
정면 3칸 맞배지붕의 극락전 앞 유리관 속에 보관되고 있는 청석탑
염불암 청석탑(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
청석탑 (靑石塔)이란 벼루를 만들던 흑색점판암으로 만든 탑으로 이 탑은 화강암인 바닥돌 외에는 모두 점판암을 사용했습니다.
팁의 몸돌은 없어졌고 10층의 지붕돌만 포개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하부 3층과 상부 1층을 제외한 나머지는 파손이 심해 각 층마다 빗물받이면에 돌을 괴어 지붕돌받침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고 있습니다. 지붕의 두께의 얇고 물이 떨어지는 면은 평평하며 네 귀퉁이가 위로 솟아 있어 대단히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지붕돌의 체감율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넓은 바닥돌 위에 놓인 작은 탑이기 때문에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극락전(極樂殿) 편액
극락전 내부에는 삼존좌상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특히 삼존좌상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1841년 작품으로 모시바탕에 채색된 관경변상도입니다.
관경변상도는 관무량수경에 나오는 극락의 세계를 표현하였는데, 그림의 중앙에 극락의 연못이 있고 상단에는 연화좌에 앉아서 법회를 열고 있는 삼존좌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삼존좌상인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동화사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보살좌상(桐華寺念佛庵 摩崖如來坐像─菩薩坐像,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높이는 여래좌상 4m, 보살좌상 4.5m. 염불암 경내에 우뚝 솟은 암석의 서·남면에 얕게 부조되었으며, 서면의 여래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남면의 보살좌상은 관음보살(觀音菩薩)로 추정됩니다.
선으로 간결하면서도 힘있는 윤곽을 나타내고 있는 이 두 불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됩니다.
남면의 보살좌상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
높이 4.5m인 남쪽면 '관음보살(觀音菩薩)'상은 옷이 길게 흘러내려 양 무릎이 노출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채꼴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코와 입 사이가 짧아서 기형적인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꽃줄기를 잡고 있습니다.
서면의 마애여래좌상(同華寺 念佛庵 磨崖如來坐像)
서쪽면에 새겨진 높이 4m의 여래좌상은 아미타불(阿彌陀佛)로 연꽃이 새겨진 화려한 대좌(臺座) 위에 앉아있습니다.
얼굴은 네모나며, 눈은 가늘게 뜨고 있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대좌의 높이에 비해 양 무릎이 넓게 표현되어 균형은 잡히지 않고 있으나 비교적 안정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신체는 복부아래에만 옷이 표현되어 있으며 비록 선으로 새겼지만 대좌의 정교한 수법이 주목됩니다
산영각(山靈閣)
산영각(山靈閣) 편액
산신탱
뒤돌아본 염불암
석주문
입차문래(入此門來), 막존지해(莫存知解)라고 쓰여진 돌기둥이 있습니다.
'이 문에 들어올 때에는 지해(知解)를 두지 말어라’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무해공기(無解空器) 알음알이 없는 빈 그릇이라야
대도성만(大道成滿) 크나 큰 도를 가득 이루리라.
동봉 2.8km, 염불암 0.7km, 동화집단시설지구 1.5km, 동화사 1.2km
동화사 부도암 부도(桐華寺 浮屠庵 浮屠,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4호)
부도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모신 것입니다. 이 부도는 바닥돌과 몸돌, 지붕돌을 갖춘 팔각원당형으로 크기가 작습니다. 팔각원당형(八角願堂形)의 부도 양식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한 것입니다. 이 부도는 팔각원당형 부재석의 구성이 단조롭고 지붕돌의 모서리가 없어졌으며, 그 모습이 투박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부도암(浮屠庵)
부도암은 부도가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하여 부도암이라고 합니다. 조선 효종 9년(1658) 도오(道悟) 스님이 창건하였습니다. 그 뒤 정조14년(1790)에 춘파(春坡)가 중수하였는데, 이 때 절 뒤의 서쪽 산기슭에서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1960년 완전 개축하였습니다.
부도암은 원래 개울 건너 서쪽 산기슭에 12기의 부도가 있는 곳에 있었으나 뒤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현재는 비구니 수행 도량입니다.
부도암(浮屠庵) 편액
무애당(無碍堂)
스님들의 생활공간입니다.
무애당(無碍堂) 편액
수선당 (修禪堂)
스님들의 선방인 수선당
수선당(修禪堂) 편액
관음전(觀音殿)
부도암은 비구니선방이 되어 관음전만 개방되어 그곳에서만 참배를 하라고 알림판에 적혀있습니다.
관음전(觀音殿) 편액
관세음보살살과 신중탱
동화사 설법전(說法殿)
설법전이란 고승대덕(高僧大德)이 경전과 선을 설하는 법당입니다. 3층 건물인 설법전의 2층에는 스님들의 발우공양 장소인 선열당(禪悅堂)이 있으며, 1층에는 신도님들이 공양하는 후원이 있습니다. 설법전에는 따로 불단을 모시지 않았습니다.
설법전 주련
補陀山上琉璃界(보타산상유리계) 보타산 위의 유리세계에 머무시는
正法明王觀自在(정법명왕관자재) 정법명왕이신 관자재(관세음) 보살님
影入三途利有情(영입삼도이유정) 그 그림자 삼도에 들어가 유정(중생)을 이롭게 하며
形分六道曾無息(형분육도증무식) 그 모습 육도에 나누어 일찍이 쉼이 없으시네
因脩十善三祗滿(인수십선삼지만) 삼아승지겁 다하도록 십선 인행(因行) 닦으시어
果備千華百福嚴(과비천화백복엄) 온갖 영화의 과보 갖추어 백복으로 장엄하셨네
逈寶山王碧海間(형보산왕벽해간) 아득히 보타산왕(관세음보살)은 푸른 바다에서
佩珠瓔珞白衣相(패주영락백의상) 주옥과 영락을 차고 있는 흰옷 입은 모습이네
無量光中化佛多(무량광중화불다) 한량없는 광명 속에 화신불 많지마는
仰瞻皆是阿彌陀(앙첨개시아미타) 우러러 뵈는 분 모두 아미타부처님이시네
설법전 주련의 글씨는 행서 기분을 낸 해서체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묵선자 박지명입니다.
설법전(說法殿) 편액
설법전의 편액 글씨는 해서체로 단아하며, 글씨를 쓴 사람은 묵선자 박지명(墨禪子 朴志明)입니다.
봉서루(鳳棲樓)
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입니다.
현재는 주로 제사나 재를 지내는 장소로 사용됩니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현재는 봉황 꼬리부분 자연석 위에 알을 상징하는 둥근 돌 세 개를 놓아두었습니다.
桐華寺 鳳棲樓 柱聯 (동화사 봉서루 주련)
佛葉難鳴樹摩能 (불섭난명수마능) 부처님, 가섭, 아난, 마명, 용수, 달마, 혜능이시여
威光遍照十方中 (위광편조시방중) 부처님의 위광은 온 세상에 가득하고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 개 강에 뜬 달도 본래는 하나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네 가지 지혜를 원만히 밝히신 많은 성인들도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모두 법회에 임하시어 중생을 이롭게 하시네
華阿方般法涅呪 (화아방반법열주) 화엄경, 아함경, 방등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 주문이라
기둥에 걸린 주련 글씨는 행초서체이며, 묵선자 박지명(墨禪子 朴志明)의 작품입니다. 주련의 글귀는 석문의범(釋門儀範)과 향화 청가영(香花請歌詠)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봉서루(鳳棲樓) 편액
봉서루 편액은 단아한 해서체로, 쾌선 유기성(快善 柳箕城 1693~1764) 스님의 글씨입니다.
영남치영아문(嶺南緇營牙門) 편액
1595년부터 동화사에서 활동했던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중 이 절을 영남 지역 승병의 총본부로 사용했습니다.
승군은 다른 말로 치군(緇軍)이라고도 합니다.
치(緇)가 승려들의 옷을 뜻하는 한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남치영아문은 '영남 지역에 설치된 승려 군영의 문'을 의미하고, 이 편액이 봉서루에 걸려 있는 것은 동화사가 임진왜란 중 영남 지역 승군 본부였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진품은 동화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낙관엔 ‘을축(乙丑 1925) 초동(初冬) 달성후인서(達城後人書)'라고 쓰여있습니다.
호가 석재(石齋)이며 본관이 달성 서병오( 達城 徐丙五 1862(철종 13)∼1935)선생은 대구출신으로 일찍이 군수를 지냈습니다.
육화당( 六和堂) (종무소)
부처님께서는 공동생활에서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할 여섯 가지의 중요한 윤리덕목(倫理德目)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을 육화(六和)라 합니다. 육화(六和)는 신, 구, 의, 계, 견, 리(身, 口, 意, 戒, 見, 利)로서, 첫째는, 몸으로 화합하여 동주(同住)하여 같이 살고, 둘째는, 입으로 화합하여 다툼이 없으며(無諍), 셋째는, 뜻으로 화합하여 어김이 없으며(無異), 넷째는, 계율을 화합하여 같이 지키며, 다섯째는, 견해를 화합하여 같이 행하며, 여섯째는, 이익을 화합하여 고르게 나누어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화의 정신은 대통합을 상징합니다.
육화당(六和堂) 편액
법화당(法華堂)
대웅전 앞마당 좌측에 있는 건물입니다. 평면은 정면 7칸으로 좌우에 날개채를 붙여 'ㄷ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대석 기단 위에 원형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습니다.
법화당(法華堂) 편액
화엄당(華嚴堂)
동화사 승가대학 학사, 대웅전 앞 마당 왼쪽에 있으면 법화당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화엄당(華嚴堂) 편액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보물 제1563호)
지금의 대웅전은 영조 3년(1727) 에서 영조 8년(1732) 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절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대웅전의 기둥과 기둥사이에 지붕을 받치는 여러 개의 포가 놓인 다포식 건축입니다. 내부 불단 위에는 삼세불상(三世佛像)인 석가모니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를 봉안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닫집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특히 주목 할 수 있는 것은 대웅전 정면의 문짝에 새겨진 꽃살문으로 이는 부처님께 꽃을 공양한다는 불교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가공하지 않고 아름드리나무를 기둥으로 사용하여 시각적으로 자연미와 함께 건물의 안정감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건물로써 기둥은 자연곡재를 사용하였고 조각이 매우 장식적인 조선 후기의 시대적 수법을 잘 지니고 있습니다.
桐華寺 大雄殿 柱聯 (동화사 대웅전 주련)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무여불) 천상 천하에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으시고
十方世界亦無比 (시방세계역무비) 시방세계에도 역시 비교될 분 없어라
世間所有我盡見 (세간소유아진견) 세간에 있는 것은 내 모두 보았지만
一切無有如佛者 (일체무유여불자) 일체 부처님같이 존귀한 분 없어라
기둥에 걸린 주련은 행서체로 추사체로 쓴 것인데,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 1862~1935) 선생이 쓴 것으로 전합니다.
쾌불대, 노주
쾌불대 (掛佛臺)는 영산제, 수륙제 등 야외법회 때 쾌불을 걸어 고정시키는 석조물(지주)입니다.
노주(露柱) 는 선원(禪院)의 경내에 있는 석제 또는 목제의 기둥을 말하는데, 등롱(燈籠:수레에 켜는 등)과 함께 선가(禪家)에서 비정(非情:생명이 없는 존재)을 가리키는 비유어로 많이 사용됩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편액 글씨는 단아한 해서체입니다. 글씨를 쓴 분은 쾌선(快善) 유기성(柳箕城 1693~1764) 스님입니다.
스님은 칠곡 출생으로 팔공산 송림사에서 득도하였고 글씨에 능통하였습니다.
봉황문의 일주문 글씨도 스님의 글씨입니다.
대웅전에는 주불로 석가모니불이 협시로 좌, 우에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을을 모시고 있습니다. 후불탱화는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모습인 영산회상도입니다. 항마촉지인 수인을 하신 석가모니와 6보살, 사천왕, 10대 제자와 제석, 범천, 신장들이 대칭구조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웅전 석가영산회상도(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2호)
고종33년(1896) 화승 진철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한 내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항마촉지인 수인을 하신 석가모니와 6보살, 사천왕, 10대 제자와 제석, 범천, 신장들이 대칭구조로 그려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원색을 사용하였으며 본존과 보살상은 가는 먹선으로 윤곽선만을 표현한 반면 십대제자와 신장상들의 얼굴은 음영처를 하였으며, 보살상의 보관과 사천왕상의 지물 일부에는 금박을 이용하여 사실적인 표현을 강조한 것이 특징입니다.
대웅전 닫집
대웅전 천장의 닫집에는 세마리 용과 여섯마리의 봉황이 조작되어 있습니다.
삼층석탑
무위문
영산전 영역의 대문입니다.
무위문(無爲門) 편액
종정 진제법원(宗正 眞際 法遠)대선사의 글씨입니다.
영산전(靈山殿)
맞배지붕에 겹처마 형식의 건축으로 1920년 중건하였습니다.
영산전(靈山殿) 편액
글씨는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1835(헌종 1)∼1919)이 (七十一翁)71세때 쓴 글씨입니다.
영산전에는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하여 석가삼존불을 중앙에 석가모니불, 좌측에 제화갈라보살, 우측에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고, 좌우에 십육나한산이 좌우로 열좌해 있습니다.
중앙 석가모니불, 좌우에 제화갈라보살, 미륵보살
종문(宗門)
종문(宗門) 편액
종정 진제법원(宗正 眞際 法遠)대선사의 글씨입니다.
염화실(拈華室)
염화실은 염화미소(拈華微笑)에서 온말로 사찰에서 조실스님이나 방장스님이 거처하시는 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염화실(拈華室) 편액
묵선자 박지영(墨禪子 朴志明)이 쓴 글씨이고, 행서체입니다.
금장당(金杖堂)
금장당(金杖堂) 편액
산신각(山神閣)
산신각(山神閣)은 대웅전 서편 뒤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산신을 모셔 놓은 당우로,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된 산신을 조상(彫像)하여 봉안 하거나 탱화로 모시기도 합니다.
산신각 주련
一拳拳倒黃鶴樓(일권권도황학루) 한 번의 주먹질로 황학루를 엎어버리고
一踢踢翻鸚鵡洲(일척척번앵무주) 한 번의 발길질로 앵무주를 뒤 집어버린다.
有意氣時添意氣(유의기시첨의기) 의기가 있을 때 의기를 더하면
不風流處也風流(불풍류처야풍류) 풍류가 아닌 곳 또한 풍류로다 .
기둥에 걸린 주련은 묵선자 박지명(墨禪子 朴志明)이 행초서체로 쓴 글씨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해사 김성근(海士 金聲根:1835(헌종 1)∼1919)의 글씨입니다.
산신탱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조상하여 탱화로 모시고 있습니다.
조사전(祖師殿)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조사전(祖師殿) 편액
조사전은 동화사를 거쳐간 역대 고승의 영정을 모셔둔 곳입니다.
조사전에는 초창주로 알려진 극달화상과 보조국사, 사명대사, 세장, 두여, 의첨, 지화, 총륜,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석우스님 등 영정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칠성각(七星閣)
칠성각은 대웅전 서편 뒤 맨위쪽에 위치한 건물로,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전각입니다. 칠성은 수명장수(壽命長壽)를 상징하는 신으로 가람(伽藍) 수호의 기능도 가지고 있습니다.
‘칠성(七星)’이란 북두칠성을 일컫는 것으로, 사찰에 칠성을 모시게 된 것은 중국의 도교사상이 불교와 융합되어 나타난 현상입니다. 칠성이 부처님으로 화한 경우가 보통인데, 칠성광여래를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됩니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성행한 전각으로 운문사, 옥천사, 선암사의 칠성각 등 수많은 예가 남아 있습니다.
칠성각 주련
靈通廣大慧鑒明(영통광대혜감명) 영통하고 광대한 지혜는 거울같이 밝아서
住在空中映萬方(주재공중영만방) 공중에 계시면서 모든 곳을 비추시네.
羅列碧天臨刹土(나열벽천임찰토) 푸른 하늘에 늘어서서 찰토에 임하여
周昭人世壽算長(주소인세수산장) 인간 세상을 두루 밝혀 수명을 늘려 주시네.
주련의 글씨를 쓴 사람은 묵선자 박지명(墨禪子 朴志明)입니다.
칠성각(七星閣) 편액
편액의 글씨는 “임자년(壬子年) 가을에 시산(詩山)이 썼다”고 새겨져 있으나, 시산이 누구의 호(號)인지 불분명합니다.
동화사의 칠성각 안에는 1857년(철종 8년)에 그려진 삼존 형식의 칠성탱화(七星撑畵)가 있습니다.
칠성광여래를 주존(主尊)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손에 금륜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좌우에 협시로 배치됩니다.
뒤에는 철종 8년(1857년)에 그려진 삼존 형식의 칠성탱화가 있습니다.
특히 조선시대 가장 성행한 전각으로 운문사, 옥천사, 선암사의 칠성각 등 수많은 예가 남아 있습니다.
원음각(圓音閣) (옛종각)
설법전 옆에 위치해 있으며 실제 종각의 역할은 하고 있지 않고 전시용으로만 활용하고 있습니다.
원음각(圓音閣) 편액
통일범종루(종각)
범종과 법고, 운판, 목어 등 사물을 갖추고 있습니다.
예불시에는 법고, 범종, 목어, 운판의 순서로 사물을 치며, 범종은 지옥 중생을 비롯하여 일체 중생의 해탈을 위해, 법고는 축생의 고통을 쉬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법구입니다. 목어는 수중 중생을 위해, 구름 모양을 새긴 운판은 허공 세계에 사는 중생인 날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면서 치는 것입니다.
통일범종루의 목어는 굳게 다문 입에서 돌출된 날카로운 이빨과 부릅뜬 눈을 가진 잉어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법고는 높이가 두어 길 되는 큰 북으로 영남 승군을 호령하던 승군 본영이 동화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통일약사대불과 짝을 이루어 통일을 염원한다는 뜻으로 통일범종루라고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통일범종루(統一梵鐘樓) 편액
옹호문
옹호문(擁護門)은 다른 사찰에서는 사천왕문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2003년 낙성하였습니다.
문 내부의 양측에 동방 지국천왕, 남방 증장천왕, 서방 광목천왕, 북방 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옹호(擁護)란 중생과 불법(佛法)을 돕거나 감싸서 지키는일.
옹호문((擁護門) 주련엔
擁護聖衆滿虛空(옹호성중만허공)~허공을 가득 메운 옹호성중(擁護聖衆)이여
都在毫光一道中(도재호광일도중)~모두가 부처님의 지혜의 도리 중에 있도다.
信受佛語常擁護(신수불어상옹호)~부처님의 말씀 잘 간직하며 늘 옹호(擁護)하고
奉行經典永流通(봉행경전영유통)~경전(經典)을 받들어서 길이 유통(流通)케 하네.
옹호문(擁護門) 편액
서방광목천왕(좌) 북방다문천왕
서방광목천왕은 크게 부릅뜬 눈으로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나쁜 것을 물리치기 위해 손에 용과 여의주를 쥐고 있습니다. 여의주는 잘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 용을 보내 비를 뿌리는 등의 벌을 주기도 합니다.
북방다문천왕은 사천왕 중 우두머리로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면서 불법을 듣고 불자들에게 불법을 전하는 신입니다. 한손에는 보탑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보당을 들고 있습니다. 보탑은 부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인간에게 많이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며, 보당은 부처님의 가사를 뜻하는 것으로 이 곳에 부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동방지국천왕(좌) 남방증장천왕(우)
동방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백성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으로 항상 손에는 비파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남방증장천왕은 불자들의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시켜주며, 들고 있는 금강검으로 불자들의 남아있는 번뇌를 끊어 지혜가 생기게 합니다.
봉황문(鳳凰門) (보물 제2204호 2022년 12월 지정)
동화사 봉황문은 동화사이 일주문으로 선조 11년(1633)에 처음 건립된 대구 동화사 봉황문은 지금의 용호문 자리에 건립되었으나 1965년 현 위치로 옮겨졌습니다.
봏황문은 단칸 팔작지붕으로 주심포와 주간포가 있는 다포식으로 내부천장은 우물반자 형식으로 양측단에 용두2개가 걸려 있습니다.
주기둥 상부에 비스듬히 부재를 덧댄 형태와 주기둥 옆에 보조기둥 2개를 세운 형태가 혼합된 형식으로 드문 사례입니다.
팔공산동화사봉황문(八公山桐華寺鳳凰門)’ 편액은 기성 쾌선(箕城 快善·1693~1764) 스님의 글씨입니다.
편액에는 ‘갑자춘성(甲子春成)’이라는 관지만 있을 뿐 도서는 없습니다. 1725년부터 1732년까지 절을 중창하면서 이에 대한 기록을 모아 편찬한 ‘팔공산동화사사적’에 기성의 서문이 있는데, 이 편액은 팔공산에 머물며 절의 중창에 관여했던 기성이 1744년에 쓴 것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가로획을 굵고 세로획을 가늘게, 왼쪽보다는 오른쪽을 무겁게 쓰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글씨입니다.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大邱 桐華寺 磨崖如來坐像, 보물 243호)
지상에서 높이 위치한 이 불상은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개성있는 모습입니다.
얼굴은 부피감을 느낄 수 있는 비교적 풍만한 모습인데, 세부표현은 평면적이며, 짧은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고, 어깨는 반듯합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에 대어 손끝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습니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규칙적으로 얇게 빚은 평행의 옷주름선이 나타나있습니다.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입니다.
주변 가장자리는 타오르는 불꽃무늬를 그대로 이용하였고,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대좌는 구름 위에 떠 있는데, 구름무늬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어서 이 불상에 활기찬 생동감을 주고 있습니다.
원만한 얼굴, 장식성이 강한 대좌(臺座)와 광배의 표현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대구 동화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43호)
암벽에 돋을 새김한 불상을 마애불이라 합니다. 이 마애불좌상의 손모양은 오른손에 무릎에 대고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배꼽 앞에 놓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습니다. 옷은 양쪽 어깨를 모도 덮은 통견입니다. 머리와 몸 뒤의 광배는 두 줄의 선으로 표현하였고, 그 가장자리를 불꽃무늬로 장식하였는데 표현이 정교합니다. 불상이 앉아 있는 연꽃대좌가 구름 위에 떠있어 사뿐히 내려앉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구름무늬의 사실적인 표현으로 불상이 더욱 생동감있게 느껴집니다. 이 불상은 체구에 비해 얼굴이 풍만하고, 화려하고 장식적인 대좌와 광배, 형식화된 옷주름의 표현으로 보아 통일후기의 것으로 보입니다.
불상의 높이는 1.06cm, 대좌 높이는 39cm, 광배 높이는 1.5cm입니다.
동화교 삼거리
팔공산 단풍
첫댓글 팔공산 함산해서 즐거웠구요
멋진사진 잘보고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팔공산 에서 이글 대장님 종주 분들 만나뵙서 방가웠어요! 팔공산 참 매력적인 산인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종주로 도전해보고 싶네요! 이글 대장님 비롯해 종주 분들 팔공산 산행 수고하셨습니다!
합산하여 즐거운 하루였는데 남긴 영상 즐감하고 갑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팔공산 함께해서 즐거웠습니다.
베어님도 뵙게되어 반가웠어요.
대장님 남겨주신 영상 즐감잘했습니다.
수고많이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