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싸우는 법 / 정선례
젊은 날 즐겨 들었던 조이(JOY)의 터치 바이 터치(Touch By Touch)를 들으며 청소기를 돌렸다. 청소기 막대가 스탠딩 마이크처럼 쥐고 롤러장에서 백스텝 밟던 추억을 떠올리며 현란하게 골반도 흔들었다. 가사는 잘 모르지만 흥얼흥얼 내 맘대로 노래도 따라 부르며 청소에 흥을 올리고 있던 그때, 정원에서 나무 손질을 하던 남편이 나를 부른다. “어 왜?” “아니 뭐 한다고 몇 번을 불러도 못 듣고 말이야. 저번에 사 온 반바지 그거 뭐라고 하고 바꾼다고 했지?” 잔뜩 짜증이 났는데, 아마 몇 번을 불러도 내가 못 들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나 역시 내 흥을 방해했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말이 나간다. “꼭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바꾸나 그냥 맘에 안 들면 반품하고 다른 걸로 달라고 하면 되지.”
엊그제 새로 산 옷 얘기다. 내 옷을 사면서 디자인이 예쁘고 시원해 보이는 남자 반바지가 있어 충동구매를 하나 했다. 하지만 옷을 입어 본 남편은 자기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아니 그리고 집에 반바지가 벌써 몇 벌이 있는데 왜 물어보지도 않고 사”, “그럼 어떡해? 도로 바꿔 와?” “그래 뭐 하러 집에 많은 반바지를 또 사냐? 어울리지도 않는걸. 내일모레 읍내 간다며 그때 가서 바꿔 갖고 와”남편의 논리정연한 얘기에 반박할 말이 없다. 옳은 얘기를 하는 게 분명하지만 내 귀엔 오래된 축사에서 돌아가는 환풍기처럼 윙윙 소리로 들린다. 내 안에 그간 가라앉혀 두었던 말들이 아욱을 치대면 일어나는 시퍼런 거품이 일렁인다. 더 있다가는 말다툼만 커질 것 같아 예정에 없던 밭일을 나간다.
굽은 산길을 돌아가는데 갑작스레 너도밤나무 잎들이 부스럭거린다. 푸른 밤송이들이 달린 가지를 타고 날다람쥐가 오르락거린다. “아이구, 깜짝아, 너구나 다람쥐 녀석”, 가던 길을 재촉하려는 찰나 돌부리에 그만 발이 걸려 넘어졌다. 옆에 끼고 가던 바구니가 저만치 내팽개쳐진다. 아침부터 마음을 곱게 먹지 않은 대가인 게 분명하다. 주저앉아 무릎을 보니 낡은 일 바지 안으로 선홍색 자국이 퍼진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가서 연고라도 바를 일이지만 남편의 성난 얼굴이 아른거린다. 얼른 근처 개울물에서 상처를 씻어 냈다. 흩어진 것들을 챙겨 올라가니 이내 무성한 풀들이 가득한 산밭이 눈앞에 보인다. 그나마 산짐승들이 싫어하는 강낭콩를을 심었는데 잡풀이 대잔치를 벌이고 있다. 분노의 호미질에도 일의 진척이 오르지 않아 호미 대신 낫으로 땅속 잡초 뿌리를 마구 베어 냈다. 비로소 강낭콩이 밭의 주인으로 자리한다.
적요한 숲에서 짝을 찾는 고라니 울음소리가 골짜기에 가득하다. 시간을 확인하고 산밭에서 내려왔다. 수돗가에서 장화를 씻고 있는 남편이 보인다. 얼굴이 수박 속처럼 달아오른 것이 예초기로 논둑을 베고 온 모양이다.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려고 애써 남편의 눈길을 외면했다.
새콤하게 익은 열무김치에 매실액과 참기름을 넣고 통깨까지 솔솔 뿌리니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거실 한가운데 둥그런 양은 밥상을 펴놓는다. 남편 앞에는 냉면 사발 그득하게, 내 앞에는 국 사발 가득 열무국수를 담는다. 노동 후 허기에 묵언의 젓가락을 든다. 아뿔싸. 가운데 놓인 열무김치를 집으려는데 여러 줄기가 딸려 올라온다. 어찌할까 망설이는 찰나 남편의 젓가락이 다가온다. 열무김치를 사이에 놓고 남편의 젓가락과 내 젓가락이 춤을 춘다. 동시에 피식 웃음이 터져 버렸다. 무더운 여름, 땀 흘린 후에 먹은 비빔국수가 너무 맛있었기 때문인지, 남편의 젓가락 도움에 내 자존심의 끈이 순간적으로 풀려버렸는지 더 커진 웃음이 온 집안에 퍼졌다. 일순, 마음의 허기가 채워진다.
원래부터 옳고 그름이 분명한 남편과 틀에 갇혀 있기를 싫어하는 내가 함께 살다 보니 부딪칠 때가 많다. 문제는 서로 달라서 불편한 것을 종종 짜증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는 것. 마치 심지도 않았는데 어김없이 솟아나는 산밭의 잡풀처럼 내 안에도 잡초가 자리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앞으로도 이 사람과 같은 상에 마주 앉을 많은 날을 위해 이제 내 마음의 잡풀을 제거해야 할 때. 위급한 순간에 그이 말고 누가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며 나 말고 어느 누가 딸아이의 늦은 귀갓길이 염려되어 잠 못 들겠는가. 부부만큼 편하고 만만한 사이가 또 있을까? 부아가 나더라도 숨 몇 번 내쉬다 보면 측은지심으로 가볍게 넘기는 게 부부일 것이다. 우리네 삶이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어쩌겠는가. 우리의 부부싸움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고 여름의 하루가 또 그렇게 기억 속에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