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만남 / 양선례
아침에 아이를 가르치고, 부지런히 공문을 처리했다. 11시 40분이 되자, 외출을 내고 목적지로 향했다. 오늘은 제자와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다. 세어 보니 무려 30년 전 제자들이다.
광양서초에서 6학년 8반을 담임하면서 만났던 아이들이다. 당시 그 학교 학생 수는 1,500명이 넘었다. 교장 선생님은 내가 구례 교육장과 맞먹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자랑했다. 전남에 몇 안 되는 복수 교감 체재였다.
열린 교육과 인성 교육을 주제로 교육부와 도지정 연구학교를 연달아 운영해서 승진을 꿈꾸는 선생님들이 모였다. 점수를 노리고 이동한 건 아니었는데 나 역시 4년 동안 5년 치 연구 점수를 모았다. 연이 맞아야 딸 수 있는 점수를 교직 초반에 쉽게 챙길 수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던 거다. 학교를 긍정의 눈으로 바라보며 협조하는 학부모와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들, 열심히 하려고 모인 선생님의 3박자가 잘 맞아서 학교는 바쁘면서도 활기차게 움직였다.
남자 넷, 여자 넷으로 동학년 선생님과의 합도 좋았다. 저경력 교사를 막 벗어났지만(교직 6년 차)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였던 내게 교직 생활의 보람과 동학년의 매력을 듬뿍 느끼게 해 주었다. 어려워하던 체육 수업 교수법과 아이들 생활지도나 학부모 상담법 등을 배울 수 있었다. 그중 한 분은 닮고 싶은 선배여서 물어가며 따라 하면 되었다.
체육 수업은 합반으로 운영했다. 남자 선생님이 주 교사, 나는 보조 교사가 되어 협력 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우스갯소리로 하던 “아놔(여기 있다.), 공!”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던 내게 수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었다. 교육과정에 막 도입된 움직임과 비 움직임 운동,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곤봉과 리본 체조를 가르치던 장 선생님은 교직 멘토로 삼기에 충분했다.
퇴근 후에는 간혹 강당에서 4대 4로 배구했다. 코트가 좁아진 만큼 동료 사이는 끈끈해졌다. 여교사는 공을 바닥에 한 번 튀겨서 넘겨도 인정해 주었다.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는 시원한 웃음이 연달아 터졌다. 잔디밭에서 족발이나 통닭을 먹으면서 동학년 단합대회를 겸했다.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가르쳐 준, 교직 성장을 이룬 획기적인 해였다.
다른 반은 2층에 자리했는데 8반인 우리 반만 행정실 옆인 1층에 교실이 있었다. 독립된 게 처음에는 쓸쓸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곧 익숙해졌다. 비교 대상이 없으니 남의 눈치 보지 않고 특색있게 학급을 운영할 수 있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수학이나 영어 경시대회, 군 육상경기대회에서도 늘 상을 받았다. 엄마들의 뒷바라지로 경시대회를 저녁까지 챙기며 준비하던 시절이라 경쟁이 치열했다. 이번 중간평가에서 누가 몇 개가 틀려 1등을 했는지, 어느 반에서 나왔는지가 학부모 초미의 관심사였다.
7반과 합반으로 하는 체육 수업에서도 시범을 보이는 아이는 우리 반에서 나왔다. 수업은 7반 선생님이 주도하는데 경기에서 승리하는 건 대부분 우리 반이었다. 학기 말에는 졸업생 단 한 명에게만 주는 ‘학교장 상’을 우리 반 두 아이 중 누구로 할 것인지를 두고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가만히 두어도 학급이 잘 굴러갔다. 마흔여섯 명의 아이들과 친구처럼 마음이 잘 맞았다. 그런 마음은 상대적이어서 졸업하고서도 연락하는 제자가 꽤 되었다. 홍민이는 2학기 반장이었다. 리더십이 있거나 공부를 잘하는 건 아니었는데 인기 투표처럼 친구들이 표를 몰아 줬다. 준이에게서 소식은 종종 들었으나, 얼굴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또래 평균보다 작았던 그는 186센티의 키를 자랑하는 훤칠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거리에서 스쳐 지났더라면 몰라봤을 것이다. 10년 차 시청 공무원으로 마흔에 결혼했으나 아직 아이는 없다고 했다. 근사하고 멋진 청년으로 자라서 뿌듯했다.
또 다른 제자 준이는 아픈 손가락이다. 검정고시로 중학교를 마쳤다고 말했지만 그 아이의 흰 머리카락과 빠진 송곳니에서 그가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직 미혼이다. 당시 우리 반 아이들 소식을 전해 주는데, 꽤 많은 아이들이 여즉 결혼을 하지 않아서 놀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더니 실감이 났다.
준이는 종종 스승의 날 무렵이면 전화해서 안부를 물었다. 똑똑하고 잘난 아이들은 선생님을 찾지 않는다. 학원, 방과 후 학교 등으로 굳이 학교가 아니어도 선생님은 넘쳐나고 설사 마음이 동한다 해도 찾아보기까지는 다들 사는 게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홍민이와 연락이 닿아서 이런 자리까지 주선했으니 고맙기 짝이 없다.
저녁에는 홍민이가 보낸 사진이 톡방에 가득했다. 백운산 억불봉(바구리봉, 해발 1,000미터)에 학급 아이들 전체가 소풍 가서 찍은 사진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학급 경영부를 펼쳤다. 지금 같으면 민감한 개인 정보인 학부모의 직업, 종교, 학력까지 고스란히 나와 있었다.(교직에 머물렀다는 증표가 그것 하나라서 나는 교직 초반부터 지금까지의 자료를 다 모아 두었다.) 일일이 수기로 작성하여 ‘수, 우, 미, 양, 가’ 평어까지 정리한 성적표도 보였다.
오랜만에 추억에 젖었다. 말라서 얼굴에 광대뼈가 도드라지게 보이지만 젊고 열정 넘치던 내가 보였다. 짧은 한 시간 남짓의 만남이었지만 오늘이 배불렀다.
준아, 홍민아! 고맙다.
첫댓글 이 글에서 선생님의 교직성활이 다 보여집니다.
하하? 고놈 참 기특하네. 아이들에게도 그 시절이 가장 좋은 기억으로 남았는가 봅니다.
30년 전 제자들이라니요. 정말 보람있으셨을 것 같아요. 잘 사셨습니다. 스스로 칭찬해도 될 만하네요.
30년이 지나도 찾아주는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시군요. 가슴 뿌듯한 날이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잠깐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 봅니다.
그래요, 꽃은 나비 없이 피지 않고 열매는 가꾸는 이의 땀 없이는 가당치 않지요. 읽는 내내 뿌듯합니다.
지금 선생님 모습을 보면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그만큼 아이들 기억속에는 선생님 모습이 저장되어 있지 않았을까요.
30년 전을 기억하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참 예쁘네요.
행복했겠네요.
30년 전 제자들과의 만남,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