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청평리 670번지 오봉산 기슭에 위치.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 신흥사의 말사.
6.25전쟁이전에는 38선 이북에 위치한 오봉산이 북한측 영토였고 전쟁후 우리나라 영토가 되었고 절 반대편에서 오봉산 등산이 시작된다. 절 뒤편으로 내려오는 하산로에는 밧줄에 의지해서 내려오는 험한 등산로가 기억에 남는 코스였다. 소양강댐 선착장에서 배타고 나온후 옥돌에 구워먹었던 맛있는 춘천닭갈비 가 생각난다.
공주와 상사뱀의 설화가 전해오는 청평사
소양호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0분쯤 호수를 가르고 가면, 아름다운 오봉산(779m) 기슭에 포근히 안겨 있는 청평사가 나타난다. 현재인 청평사는 고려 광종 4년(973년), 중국의 영현 선사가 이곳 오봉산에 절을 짓고 백암선원이라는 참선도량을 처음 창건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폐사가 되었다. 고려 선종 6년(1089) 과거에 급제했던 이자현은 관직을 버리고 이곳 청평산에 들어와 선(禪)을 즐기며 은둔했다. 그는 청평사 주변에 자연경관을 살린 대규모의 정원을 가꾸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사각형 모양이 되도록 사다리꼴로 석축을 쌓고 계곡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연못에 오봉산이 비치도록 했다. 조선 명종 때 보우선사가 중창 복원하였다. 청평사는 높이 9m 에 아홉가지의 소리를 낸다는 구성폭포와 유리알처럼 맑은 물과 주위의 경관이 빼어난 청평사계곡을 끼고 있다. 현재는 보물 164호인 회전문과 3층석탑 등이 남아 있다.
1068년(문종 22) 춘주도(春州道, 지금의 춘천)의 감창사(監倉使)로 부임한 이의는 오봉산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옛 터에 다시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다. 이 절이 대찰의 면모를 갖춘 것은 이의(李顗)의 아들 이자현에 의해서다.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하여 대악서승이 되었던 그는 뜻하는 바가 있어 벼슬을 버리고 아버지가 세웠던 보현원으로 들어갔다. 당시 이곳에는 도둑과 호랑이와 이리가 들끓었지만 그가 들어오자마자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이자현은 문수보살의 진신을 두 번이나 친견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자현은 모든 것이 맑게 평정된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 문수 보살의 큰 지혜로 불법를 깨달아 얻는 도량이라는 뜻으로 절 이름을 문수원(文殊院)으로 바꾸고, 많은 건물을 비롯한 여덟 암자를 지었다.
그 뒤 고려 말의 고승 원진국사 승형 스님이 이 절에 와서 이자현의 유적을 찾다가, ‘능엄경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이곳에 머물면서 『능엄경』을 공부하였다. 그 뒤 승형 스님은 불법을 선양할 때 언제나 『능엄경』을 으뜸으로 삼았는데, 우리나라 선종에서 『능엄경』을 숭상하고 나아가 근본경전으로 삼게 된 것도 이자현이 문을 열고 승형 스님이 다시 천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1367년(공민왕 16) 당대의 고승 나옹 스님은 공민왕의 청에 따라 2년 동안 머물렀으며, 8암자 중 복희암에서 특히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승려가 된 뒤 이 절의 단향원에 살았으며, 그 때 지은 시 6수가 『매월당집』에 수록되어 있다. 1550년(명종 5) 허응 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청평사로 바꾸었고, 1555년(명종 10) 허응 보우 스님은 왕명에 따라 청평사 주지로 부임한 다음, 2년 여에 걸친 대대인 중창불사를 하여 회전문(廻轉門) 등 여러 건물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청평선사(淸平禪寺)로 바꾸었다. 현재 그 때의 건물로는 보물로 지정된 회전문만 남아 있다.
조선 후기인 1711년(숙종 37)에 중수가 있었지만, 1861년(고종 17) 다시 불탔다가, 그 뒤에 중창하였다. 그러나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 때 극락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그 뒤 한동안 폐사처럼 남아 있다가 공철(空徹) 스님에 의해 극락보전과 삼성각을 중건되었고, 1979년 해탈문과 적멸보궁을, 1984년 요사와 경운루(淸平樓), 서향원(瑞香院)을 다시 지었으며, 1988년 대웅전을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사찰 내에 있는 영지(靈池) 등 고려정원은 일본 교토[京都]의 사이호사[西芳寺]의 고산수식(枯山水式)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이다.
청평사로 오르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계곡 한가운데에서 뱀 한 마리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채 뱀을 마주 내려다보고 있는 공주 동상이 나타난다. 이 동상은 청평사에 전해오는 전설로, 당나라 태종의 딸 평강공주와 상사뱀에 얽힌 설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놓은 동상이다.
이 바위는 자연 암석으로 거북의 형상을 닳았다고 하여 거북바위라고 한다. 예전부터 거북이가 물을 바라보게 되면 청평사가 융성할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의 아래쪽에 신규선(申圭善)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사람은 1915년에 청평사를 정비하고 청평사의 역사서인 청평사지(淸平寺誌)를 편찬하도록 한 사람이다.
청평사 계곡의 구송폭포는 등선폭포, 구곡폭포와 함께 춘천의 3대 폭포로 꼽힌다. 구성폭포 곁에는 공주굴이 위치하고 있다.
진락공(이자현) 중수 문수원 비(碑) , 이자현(李資玄)의 부도 1089년(선종 6)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을 버리고 이곳 보현원에 들어와 산 이름은 청평산, 절 이름을 문수원으로 바꾸고 선을 즐기며 은둔했다.
부도밭 각산당 석진 대화상의 부도가 있다. 화상의 諱는 석진(石眞)이며 법호(法號)는 각산(覺山)이고, 속명은 손동룡이다. 충남 당진군에서 출생하여 15세에 마곡사에 출가하였으며 백양사와 마곡사 총무국장을 하였고, 관악산 삼성암과 약수산 약수사 주지를 거쳐 청평사 주지를 역임하였다. 1990년 향년 46세(법납 30)에 입적하였다.
영지 명문 바위, 바위의 윗면에 한문으로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이 시는 스님이 깨우침을 얻고 나서 지은 시라는 뜻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알려져 있다. 시의 내용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심생종종생 心心種種生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심멸종종멸 心滅種種滅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여시구멸이 如是俱滅已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처처안락국 處處安樂國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영지(影池) 이 연못은 고려시대 이자현이 조성한 것으로 조선 초기 김시습의 한시에도 언급되어 있다.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부용봉에 있던 견성암이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라고 한다.
회전문(回轉門, 보물 제168호)은 조선시대 중기의 건물로, 본래 천왕문의 기능을 가졌던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중앙의 1칸을 넓게 잡아 통로로 하고, 좌우 협칸에는 사천왕을 안치할 수 있도록 하였고, 회전문의 상부에는 홍살문(紅箭門)처럼 살대를 가로로 배열하여 금문(禁門)임을 나타내고 있다.
문의 이름을 회전문이라 한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일명 공주탑이라고 부르는 삼층석탑이 세워진 배경에 대한 전설처럼, 공주와 상사뱀에 얽힌 전설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곧 공주를 괴롭혔던 상사뱀이 이 문으로 들어서려 했다가 하늘의 노여움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 돌아섰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생에게 윤회의 삶을 깨우치기 위한 것으로, 고통과 생사의 세계를 끊임없이 흘러 다니며 유전(流轉)하는 중생들의 삶을 되돌려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경운루 회전문을 통과하면 눈앞에 바로 나타나는 건물이다. 중층 건물의 경운루에 걸려있는 편액은 慶雲樓(경운루) 라고 적었다.
범종루 종(鐘)은 시간을 알리거나 사람들을 모을 때, 혹은 의식을 거행할 때 쓰였다. 특별히 절에 있는 종은 불교를 의미하는 梵자를 붙여 범종(梵鐘, 梵鍾)이라고 부른다. 이 범종소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유되기도 하며, 이 소리를 듣게 되면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던 중생까지도 구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옥 중생을 구제(제도)하기 위해 친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나한전, 우측에는 관음전을 배치한 아주 협소한 공간이다. 대웅전 맞은 편에 이처럼 회랑을 만들어 우천시에도 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도록 하였다.
나한전 석가모니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부처님의 제자들인 16나한(아라한의 줄인 말)을 봉안한 법당이다. 나한은 원래 소승불교의 수행자 중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 고승을 지칭하는 말이였으나, 온갖 번뇌를 끊고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의 이치를 터득하고 아라한(阿羅漢)과를 증득하여 마땅히 존경과 공양을 받을 만한 큰 성인이라는 뜻으로 응공이라고도 한다. 나한은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미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성인이므로 초자연적인 신통력이 있으며, 부처님으로부터 미륵불이 출현할때까지 중생을 교화하라는 수기를 받은 분들이다.
관음전 불교의 자비사상을 상징하는 관세음보살을 부속전각에 모셔놓은 법당을 관음전이라고 한다, 또한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좌협시로 모셔지기도 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대웅전 청평사의 중심 법당,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겹처마에 맞배 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그리고 대웅전 편액은 각산당 석진 스님의 글씨이다.
대웅전 안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좌상이 협시하고 있는 석가삼존상이 봉안되어 있고 후불탱은 영산회상탱으로 모두 근래에 조성하였다. 대웅전 신중탱, 대웅전의 감로탱 , 대웅전의 천불탱
극락보전은 정면과 측면 각 3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보개형(寶蓋形) 닫집으로, 닫집의 상부 평판 속에 황룡 한 마리를 그렸다. 불단에는 아미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상이 협시를 이루고 있다.인하대학총장 이재철 봉서(仁荷大學總長 李在徹 奉書)라고 적힌 극락보전 편액
공주탕은 평강공주가 목욕재계를 하고 속세에 찌든 마음을 깨끗이 씻어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청평사 우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100여 미터를 올라가면 만날 수 있다.
공주와 상사뱀 설화
중국 당나라 태종의 딸, 평강공주는 매우 아름다운 미모를 갖추고 있었다. 궁중을 출입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연정을 품고 있었지만, 신분의 차이가 있어 감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한 말직의 청년은 뜰을 거니는 공주의 모습을 보는 순간 짝사랑에 빠져 그녀를 흠모하다가 마침내 상사병을 앓다가 죽게 되었는데, 청년은 죽는 그 순간 맹세를 했다.
“이 세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 내 죽어서라도 그녀와 함께 하리라.”
어느 날 낮잠에서 깨어난 공주는 몸이 이상하여 살펴보니, 난데없이 뱀이 몸을 휘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뱀은 밤이고 낮이고 떨어질 줄 몰랐고, 이 사실을 안 왕과 왕후가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뱀을 쫒으려 하였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죽고만 싶었던 평강공주는 마침내 궁중을 뛰쳐나왔고, 죽기 전에 명산대천이나 유람하겠다며 중국 천지를 다 돌아 다녔다. 그리고 배를 타고 고려로 와서 금강산 구경 길에 올랐다가 청평사가 유명하다는 소문을 듣고 참배하고자 하였다. 청평사 계곡을 건너 회전문 앞에 이르렀을 때 상사뱀은 공주가 걸음을 걷지 못하도록 요동을 쳤다. 10여 년 동안을 함께 있었지만 한번도 이와 같은 일은 없었으므로 공주는 이상히 여기며 타일렀다.
“나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한번도 너를 거슬려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내가 좋아하는 절 구경을 못하게 하느냐? 만일 들어가기 싫거든 잠깐만 여기에 떨어져 있으라. 속히 절 구경을 하고 돌아와서 너와 함께 가리라.”
이 말을 들은 뱀은 곧 몸에서 떨어져 나왔고, 10년 만에 홀몸이 된 공주는 폭포를 맞으며 몸을 씻고 절 안으로 들어갔다. 법당과 절의 이곳저곳을 살피던 공주는 스님의 가사를 만들기 위해 아름다운 비단과 바늘이 널려 있는 방을 발견했다. 문득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옷인 가사를 만들고 싶다는 충동으로 아무도 없는 그 방으로 들어간 공주는 열심히 바느질을 했다. 그리고는 황급히 뱀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뱀이 다시 공주의 몸을 감으려 하는 순간,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벼락이 떨어져 상사뱀이 새까맣게 타 죽어 버렸다. 마침내 뱀으로부터 해방된 공주는 부왕에게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아뢰었고, 태종은 부처님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절에 공주탑을 세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