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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성탄말씀 제1강
임마누엘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 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오늘 말씀은 마태가 전하는 성탄 메시지입니다. 그는 세리로서 사람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던 사람입니다. 그 누구하나 함께 해줄 수 없어 인생이 고독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성육신하셔서 함께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변화되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랐을 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약속된 메시야요 예수님 탄생이 자신과 같은 죄인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라고 증거 합니다.
I. 소망의 예수님(1-17)
1절을 보십시오. 마태는 예수님을 누구의 자손으로 소개합니까?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예수님의 족보인데 한마디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 두 분 공통점이 있습니다. 축복의 때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합니다. 구체적 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축복의 때 임에도 기꺼이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 창세기 22장 18절에서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브라함의 씨에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축복의 때에 하나님을 위해서 성전을 지어드리고자 하였을 때 사무엘하 7장 12,13절에서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다윗의 후손을 왕으로 세워 그 왕 위를 견고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한 언약의 말씀대로 메시야를 보내주셨습니다.
사실 1절의 계보는 족보를 의미하는데 족보란 한 집안의 내력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288개 정도의 성씨가 있습니다. 요즘 와서는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그것이 큰 관심사가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족보를 통해 자신이 뿌리가 있고 뼈대 있는 집안의 사람이라는 정체감을 갖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족보에 언급된 사람들을 통로로 쓰셔서 신실하게 약속을 이뤄오셨습니다.
2절에서 1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족보를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특이 한 점은 족보에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라나, 한나 같은 조신한 여인들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허용하기 힘든 loser 여인들입니다. 더 나아가 족보에는 솔로몬부터 바벨론에 사로 잡혀 갈 때까지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불순종의 죄악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로 수치를 당하는 아프고 절망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저자는 족보를 열네 대씩 삼등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일곱은 완전수입니다. 열넷은 일곱이 두 번 있는 것으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게 구원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상을 통해 이스라엘의 족보를 통해서 배우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아기 예수님은 약속대로 변함없이 오신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형편에 따라 쉽게 약속을 잊거나 바꿔 버립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예수님을 아브람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게 하시겠다는 한 가지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죄악과 약점 투성이인 각종 유형의 죄인들을 인내하시고 훈련하시고 변화시켜 통로로 쓰셔서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특히 솔로몬 왕 이후로는 우상숭배가 심해지고 죄에 빠져서 점점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나라는 망하고 많은 백성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셨습니다. 겸손케 하셔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사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유다 땅에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잊지 않고 우상숭배와 각종 죄로 황폐했던 그 땅을 회복시키며 예배하게 하시고 다윗의 혈통을 계속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언약에 신실한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unfailing love 곧 변함없는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쓰임 받은 사람들 역시 온전히 은혜로 쓰임 받게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고 예수님이 소망입니다.
족보에 언급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든 백성들이 흠모했던 다윗의 범죄는 가히 충격적입니다. 다윗을 포함한 인간은 구제불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해도 회개할 때 믿음의 사람이 될 때 구원하시고 또 구원 역사에 귀하게 쓰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족보를 보면 과거를 묻지 않으시고 쓰실 자를 들어 쓰셨습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랑하고 하나님 편에 선 자를 쓰셨습니다.
우리에게 유다나 혹은 두 명의 형제와 잠을 자고 그 아버지와 잠을 잔 다말보다 더 비극적인 사람이 있습니까? 직업적인 창녀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역사보다 더 절망적인 나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약속대로 또 우리와 함께 하시고자 메시야 예수님이 태어나셨습니다.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다시 성령으로 오셔서 소망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이를 볼 때 우리는 누구도 소망이 있습니다. 어떤 절망적인 순간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귀하게 우리를 쓰십니다. 하나님에서서 멀어지고 더 무관심한 이 세대에서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복음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소망 가운데 자신을 한계 짓지 않고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귀한 삶을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임마누엘(18-25)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잉태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당시 유대사회에서 남녀가 약혼을 하면 이미 법적으로 부부와 동일했습니다. 약혼한 사람이 순결을 어기면 돌로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한 후 마리아를 만나 꿈 같이 기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나님의 전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였습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자기와 약혼을 해 놓고는 이게 뭔가 배신감과 분노가 치밀어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제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라 했지만 이해시킬 수 없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를 사랑했으므로 허물을 덮었으나 죄를 묵인 할 수 없으므로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조용히 물러서고자 했습니다.
다같이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은 아마 이 모든 상황으로 고민하며 기도하는 중에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주의 사자가 요셉을 꿈속에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요셉에게 마리아를 데려오게 하고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오해를 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나셨기에 죄가 없으십니다. 무죄하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죽임 당하므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아름다운 믿음과 순종으로 아기 예수님이 태어 나셨고 하나님께서 가정을 지켜주셨습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무엇이라 짓도록 하였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라는 이름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 할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는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정치적 현실적 구원과는 달리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심을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사람들에게 여러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 인생에서 죄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근본 문제로 보셨습니다. ‘죄’ 요놈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 문제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이 왕 되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는 것 곧 교만, 탐욕,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불신과 불순종, 감사하지 않는 원망이 죄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살인이 오고 간음이 오고 도적질이 오고 거짓말이 왔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도덕적인 부패가 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왕 되어 나름대로 사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살 때 정말 행복과 참자유와 평안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단과 죄의 종 되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죄의 본성이 있음으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으면서도 회개하기는 보다 죄에 담대해 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고통하고 죄 때문에 망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슬프고 심각한 것은 이 죄는 한번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죄로부터 구원을 받지 못할 때 그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 불 못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죄 때문입니다. 세상이 죄로 물들어 있고 내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어 하나님의 통치가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사람의 근본 문제는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이런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할 구원자 이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태어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벌을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나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망권세를 파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이미 최고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보내어 주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22,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려하심입니다. 이사야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것이요 그 아기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가 소중한 이유도 어려움도 기쁨도 함께 동고동락하며 함께 중보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함께하면 힘이 되지만 사람이 얼마동안 같이 있어 줄 수는 있어도 일평생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설사 같이 있어줘도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다정했던 부부도, 헌신적인 사랑으로 자녀를 섬긴 부모도 영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노인이 되면 더 민감하게 느끼신다 하는데 인간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예수님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로 영접할 때 이제로 부터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성육신하사 육신으로 계실 때도 늘 죄인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죄인들과 각종 병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사 고쳐주셨습니다. 때마다 말씀을 가르치시며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는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 속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셨으면 성령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서 함께 하겠다고 하셨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기 원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생각할 때에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적극적으로 우리와 기도와 말씀으로 삶으로 함께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실제적인 학과 공부나 취업 결혼 자녀양육 양들 문제도 장래문제 속에서도 임마누엘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받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유대가 북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왕 르신의 연합군에 의해서 공격을 받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들의 연합군이 공격한다는 소문에 사시나무 떨듯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두 잘 아시는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도 때마다 위험과 두려운 일들을 많이 겪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그러나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람이 변화됩니다. 저도 살면서 저 자신 포함해 사람 변화가 참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우리 자신들이 증인들입니다. 성탄을 전하는 마태는 세리 레위였습니다. 그는 이기적이고 돈에 한 맺혀 돈과 자신만 아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그와 친구 되어 함께 하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삼년 동안 함께 하시며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고독과 소외감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사랑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 마태로 변화되었습니다. 마태는 이 사실에 감격하여 마태복음의 시작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끝장 28장에도 “보라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로 마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구나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IT기술과 BIO생명과학, 빅테이터 활용, AI(인공지능)등 기술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시대입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삶은 편리해졌지만 그 내면은 개인적이 되어 가고 더욱 황폐해져갑니다. 혼자 사는 가구가 500만이 넘고 캠퍼스 양들 대부분 혼 밥에 익숙합니다. 학생들은 마음을 닫고 험한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오직 돈과 출세를 위해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SNS나 카톡으로 외로움을 덜어 보지만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저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현실로 인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양들과도 임마누엘 하셔서 함께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변함없이 누구와도 함께 해 주십니다. 마태의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님은 우리와 양들과도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시는 다정한 친구가 되십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형통합니다. 표적이 나타납니다. 표적으로 말씀을 확신케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백세나 되어 아이를 낳고 이삭이 흉년 중에도 백배의 축복을 받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셔서 라반과 에서와 세겜 사람들의 공격에서 보호하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을 때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노예 살이 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금방노예에서 풀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함 하셔서 노예 살이, 죄수 생활을 극복할 힘을 주셨습니다. 아무 일도 사고나 위험이 일어나지 않는 무사태평이 형통이 아니고 현재의 부르심을 잘 감당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삶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전도가 이루어집니다. 전도를 위해 도전해야 하지만 내 노력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1장 21절에는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여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하사 여러 표적과 기적으로 복음 전파를 이루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흩어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하나님은 안디옥 교회에서 함께 하셔서 수다한 사람들이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도전 할 때 친히 계획하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예비 된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은 저 와도 함께 해주셨고 지금도 함께해 주십니다. 저는 아버님이 일찍 타계 하신 후 희생적이신 어머님의 함께하심과 사랑으로 성장했습니다. 성장하며 저의 욱했던 성질도 어머님에 사랑으로 녹게 되었습니다. 어머님은 저를 잘 키우자 최선을 다하셨고 동시에 불면 꺼질까 하며 보호 하셨습니다. 제가 아빠 역할을 경험해 보면서 ‘아들아 인생은 이렇게 사는 거야’하는 보통 아버지들의 믿음직한 울타리를 경험하지 못한 부재와 내 안의 큰 빈자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목격하며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외로움 허무로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고생하시는 어머님께 효도해야지 하는 큰 짐과 부담을 늘 안고 있었지만 동시에 허무한 인생에 늘 고생하시는 어머니 보며 고생만 하는 이 세상 ‘어머님은 왜 나를 낳아 이 고생 하는가’ 생각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꼭 살아내고 싶지도 않았고 살 자신도 없었습니다. 청년기에는 정욕 죄를 정복하고 다스리지 못하고 본성으로 합리화를 하면서도 죄의식과 무력감에 시달렸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 공부에 초청되어 1:1 공부와 목자님들의 포기치 않는 사랑, 섬김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믿기 전 후의 저의 가장 큰 변화는 인생을 살 이유도 의지도 힘도 없던 상한 갈대 같은 제가 믿음으로 의지를 갖고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점입니다. 신앙생활 초기에 영적인 세계에 발 드려 놓기를 겁내하며 목자님들을 힘들게 하였고 영적인 비밀인 순종을 잘 배우지 못했습니다. 결혼과 선교역사 자립과 물질생활에서도 많은 시간을 이론적인 믿음에 갇혀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불신의 죄를 회개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하게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장 11절로 정죄치 않으시고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죄를 사해주시는 십자가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게 하셨습니다. 빌라도를 동정하던 인본주의를 회개하고 어머님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자 결단할 수 있었습니다. 이사야 41장10 말씀으로 임마누엘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사 두려움을 극복케 하셨습니다. 생명 역사에 한 구석 모퉁이로 라도 쓰임 받고 중심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항상 갈대처럼 믿음이 연약하여 큰 헌신을 드리지 못했지만 그 어떤 삶보다 귀한 생명을 돌보고 복을 나누는 행복한 목자의 삶으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해 동안 임마누엘 하나님은 전체 모임에서도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함께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사무엘하, 열왕기상 학생회에는 로마서까지 풍성한 말씀을 끊임없이 공급해 주셨고 보너스로 사고와, 어려움, 잠시 멀어진 양들로 고난을 주시므로 한해 빌립보서 4장 6-7절 말씀잡고 감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에 뿌리 내리며 견뎌 내도록 연단하셨습니다. 믿음으로 학생회를 소망 가운데 기도하게 하시고 변화를 이루시고 주인들을 세우십니다. 이방양인 소피자매와 김지성, 최요한, 정영호 형제가 목동선서 하였습니다. 2세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나 김상미 목자 세우시고 CBF 예배를 시작케 하셨습니다.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각 지구에서 자립적으로 또 동역하며 기도하므로 선교지 모임의 리더로 좋은 영향력 끼치는 좋은 동역자로 성장케 하셨습니다. 본국을 위해 힘써 기도하는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케 하셨습니다. 유럽수양회 참석했던 저의 동역자도 이로 인해 인정하고 감사하고 큰 감동받고 왔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모임에서 변함없이 수양회 연극을 섬겼고 또 주일 찬양을 인도하는 요한주니어 목자님이 본가에 가서 비교도 당하고 아픔을 겪는 것을 보았는데 공무원 시험 통해 합격도 기뻤지만 인격적으로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을 만난 것에 함게 기뻐했습니다. 남들은 10년 넘게 탄원서 받아가며 국가직 전환을 투쟁하였는데 목자님은 국가직공무원으로 무임승차하는 보너스도 받게 되었습니다. 남 다윗 목자님과 최 유성 목자님 가정에도 자녀를 주심으로 애국자 되게 하셨습니다. 유남태 형제 신수경 자매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마리아처럼 2세를 잉태케 해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우리 각자에게 여러 모로 임마누엘하신 주님께 감사 찬양 드립니다.
가정에서도 긍휼을 베푸사 국립대 입학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지방 의대 입학한 막둥이로 내가 드리지 못한 기쁨을 어머님께 드릴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입학 후 강권 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도록 기도할 때 기숙사에서 다친 것이 계기가 되어 기이하게 인도하사 아들에게 하늘같은 레지턴드 4년차 목자를 붙이셔서 1:1 말씀을 받고 쎈터에서 예배드리며 어리지만 성장하게 돕고 계십니다. 맞이인 딸도 대전에서 반주하며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도 훈련소 입 대시 훈련소나 잘 마칠 수 있나 걱정하며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마음을 담대하게 하시고 지켜 주사 철책선 안의 GOP에서 군 생활을 잘 마쳐가게 하셨습니다. 복학하는 그도 목자로 살도록 인도해주시고 믿음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전 선교지 파송과 동시에 발령을 포기한 동역자는 학년 초가 되면 학교를 다니며 기간제 교사 모집에 10-15군데 이상 서류 넣고 면접을 반복합니다. 저로 서는 전적으로 1:1 역사를 섬기도록 못함에 동역자로 미안함이 크지만 사람들의 눈을 가리셔서라도 꾸준히 일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십니다.
제가 직장에서 빈 시간에 유튜브 통해 간증이나 설교를 함께 듣는 일을 통해 간접 전도케 하시고 산 믿음 배우며 깨어 있게 하십니다. 그 분들 중에는 이전에는 교회 다녔고 청년회장 한분도 계신데 본래 믿음으로 잘 회복하지 못함에 안타까웠습니다. 현재 내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은혜로만 우리가 서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한양을 얻기 힘든 때 좋은 양들을 두 명이나 인도해 주셨지만 통화만하고 1:1 한번 제 대로 섬기지 못하고
목자심정과 믿음 없이 행한 것을 회개합니다. 캠퍼스 가까이 이사해서 섬기고자 했던 것도 진척 없이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회개하고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라도 한 시간 절대 기도와 양식 말씀을 깊이 있게 먹는 것으로 영성을 유지하며 성경 속 하나님이 아닌 임마누엘 하나님을 고백하며 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제 24, 25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두 가지를 순종하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다음으로 천사의 말대로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자신의 자녀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는 천사의 임마누엘의 메시지를 깊이 영접한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님의 임마누엘의 사랑을 요셉처럼 깊이 영접하고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성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국 임마누엘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한 아기가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위하여 임마누엘 예수님이 한 아기로 탄생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 하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사명인의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