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 앞에서
개미 허리가 두손을 맞잡고 멀쩡한 눈에 안경이라 시건방진 촌놈!!
별똥별
어릴 때 여름밤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멍석에 드러누워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쳐다보는 것이 여간 황홀하지가 않았다. “너는 장차 뭐가 될래?”라고 어른들이 물으면 서슴없이, 별이 되겠다는 것이 한결같은 나의 대답이었다. 해나 달이 되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다시 물으면 꽃밭 같은 별밭이 더 좋다고 대답했었다. 숙직실에 홀로 기거하시면서, 아직 중학교 문전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인 내게 연립방정식과 논증기하를 가르치는 데 재미를 느끼시던 김승태(金承泰)라는 걸출한 미남 선생님도 같은 질문을 하셨다. 너는 사교성이 없는 데다 별이 되겠다고 하는 걸 보니 철학을 하든지 박계주 같은 작가가 되겠다고 하셨다. 아랫목 구석에 『殉愛譜』라는 너덜너덜 떨어진 소설책이 보였다. 겨우 철학자 소설가라니 어린 마음에 조금 서운했다.
내가 별을 좋아한 것은 암흑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두 해 전에 나는 나이 열 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다. 취학이 늦어진 건 아버지가 일제의 징용을 피하려고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이사를 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내 또 이사를 하는 바람에 2학년을 마치고 집에서 놀다가 일본이 항복하는 꼴을 보게 됐다. 원자폭탄이 나의 복학을 도운 셈이지만 나의 초등학교 기간이 7년이 되고 만 건 순전히 난리 때문이었다.
땅덩어리가 갈라졌으니 인심인들 좀 흉흉했겠나? 음력 사오월, 보리는 미처 여물지도 않아 풋바심할 형편도 못 되는데 여투어 둔 묵은 식량은 바닥이 나고 누렇게 부황증이 난 얼굴로 나물을 뜯고 송기를 벗기던 그러한 한촌에도, 관솔불이나 산초 기름 불 따위로 밤을 밝히던 두메산골에도, 머리에 먹물깨나 든 사람들은 은연중에 좌익과 우익으로 사상이 갈렸고 조무래기들도 툭하면 편을 갈라 병정놀이를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도 철을 탔다. 나는 해마다 두세 직씩 학질을 앓으며 늦모내기를 하는 무논에서 거머리한테 두 다리의 무릎 아래를 온통 내맡겨야 했다. 중학교에 가면 이런 걸 면하려나 싶었다.
김승태 선생님은 나를 경기중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당신의 외갓집이 서울에 있으니 기식은 당신이 해결해 주겠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안동사범학교가 더 좋다고 하셨지만 두 군데 다 원서도 내 보지 못한 채 끝내 읍내에 있는 6년제 공립농업중학교에 들어가고 말았다. 물론 학비 때문이었지만 경기중학교에 원서라도 한 번 내 볼 걸 하고, 아직도 짠하다. 이것이 내 생애의 첫 번째 상처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한다.
육이오가 터졌다. “경기중학에 갔더라면 어찌 됐겠노?”라고 하시며 내 눈치를 살피시던 아버지의 힘없는 모습을 나는 입때껏 잊지 못한다. 6년제 농업중학교가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농업고등하교로 분리되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해에 동생이 중학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한 해 묵기로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영남의 명문인 K고등학교니 무슨 고등학교니 하고 떠들어댈 때 나는 그 옆에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나 쓰곤 했다. 졸업 무렵 진학상담 때가 되어서야 이런 사정을 알게 된 담임선생님께서 깜짝 놀라시며 학비 때문이라면 선생님께서 대어 주시겠다며 아버지를 학교로 불렀다. 실제로 학비를 지원 받은 건 아니지만 이리하여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처로 나갈 수는 없었다. 사흘돌이로 똥통을 메고 농장에 들락거려야 하는 읍내의 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도 감지덕지했다. 그 해에 같은 읍내에 막 창설된 사립 인문계 고등학교가 처음으로 신입생을 뽑고 있었지만 학생들이 본체만체했다.
대학을 보내 줄지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고 싶었다. 보통고시 시험공부를 했다. 시험에 합격하자 나를 대학에 보내 주는 쪽으로 집안 분위기가 굳어졌다. 그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의대냐 법대냐를 두고 갈등을 느꼈지만 상대적으로 돈이 더 많이 든다는 의대를 내심 별로 탐탁찮게 생각하던 차에, 의대는 미리 누울 자리부터 보자는 거 아니냐는 아버지의 말씀에 나는 환호작약했다. 나는 신이 나서 부랴부랴 설쳤지만, 독일어나 물리학을 선택해야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의 최고의 학과라는 데에 원서를 낼 수 있다는 걸 그때서야 알고는 망연자실했다. 실업학교여서 그런지 그때는 학교당국이 진학에 대해 퍽 무심했던 것 같다. 물리학은 한 학기를 배우다가 학생들이 백지 동맹을 하는 바람에 아르바이트 대학생인 선생이 울며 떠난 뒤로는 다시는 배워 보지 못했고, 독일어는 처음부터 시간표에도 없었다. 망할 놈의 학교! 우리 고장에는 학원도 없을 때라서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대구에 갔다. 독일어나 물리학을 개설한 학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로 귀가 하려다가 간 김에 영어와 수학 강좌를 들어 보았지만 별로 새로운 것도 없고 시간만 허비했다. 독일어나 물리학을 독학하자니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선택과목에 히트를 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K대 법학과의 선택과목 중에는 보통고시 시험과목인 「정치문제」가 들어 있었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K대학교 법학과에 들어가고 말았다. 이것이 내 생애의 두 번째 상처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한다.
똥통을 메고 농장에나 들락거리고, 축산 작물 과수 소채 토양 비료 육종 등 실업 과목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보통고시 공부를 한 고삼 학생이, 영어 수학 국어 선택과목만 3년 동안 들이판 인문계 출신 고삼 학생과 겨루는 것은 맞수의 장기판에서 차포와 오졸을 떼어놓고 두는 것과 뭣이 다른가. 참으로 분하다.
학비 때문에 중퇴하기로 했다가 번복했다가 하기를 거듭하면서 6년이 걸려 대학을 나왔다. 졸업 후 남들처럼 서울에 남든지 절에 들어가든지 할 형편이 못 되어 산골자기에 오두막을 지었다. 이태를 넘기자 부명(父命)이 떨어졌다. “독립 해라!” 어쩌겠는가? 눈물을 뿌리며 부득불 산방을 떠나와야 했다. 패자가 하는 말은 변명으로 들릴 것이다. 이것이 내 생애의 세 번째 상처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한다.
별이 되겠다던 아이가 판검사가 되려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환로에 들어서긴 했지만 사무관이면 군수를 하고 서기관이면 시장을 하던 그 시절에 나는 사무관 서기관 때에도 시장 군수는커녕 도시락을 들고 다녔고 그 흔해빠진 훈장도 하나 못 탔다. 선생님의 말씀마따나 나의 천품이 비사교적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박계주의 『殉愛譜』같은 소설도 쓰지 못했다. 다만 일각에선 문학으로 쳐 주지도 않는 수필이란 걸 끼적거리는 사람이 되었고, 칠십이 가까워서야 이름 없는 지방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얻었을 뿐이다.
별이 되겠다던 아이는 어버이의 밤하늘에 슬픈 획을 그은 별똥별이 되고 말았다.
첫댓글 ....땅의 기운이 어디서 어디로 움직이는가. 우레는 일어나는 곳에서 일어나고 두견이는 우는 곳에서 운다. 땅의 기운은 움직이는 곳으로 움직인다.. 역사는 가는 곳으로 간다. 잉어는 뛰고 솔개는 높이 날아라./ 박주병의 '한강' 가운데서
반갑습니다..
세월이 빠릅니다.
신춘문예 열병을 앓고 있습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