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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firenzedt.com/24836
이태원 핼러윈 축제에서 158명의 희생자가 난 지 보름여. 우리 사회는 지금 참사의 충격을 넘어, 하루가 멀다하고 드러나는 권력 엘리트와 지배 집단의 맨얼굴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고 있다. 책임 회피와 보신주의, 공감 능력 부재, 무엇보다 “웃기고 있네”가 압축적으로 보여준 국민에 대한 조롱이 그것이다.
대중문화와 한류를 연구하는 홍석경 필자는 이태원이 배경이었던 한류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를 불러내, 다문화성과 포용성, 도전성이 상표처럼 보였던 ‘글로벌 코리아’의 민낯이 사실은 획일성과 억압성, 후진성임을 통렬히 비판한다. 그리고 상상한다. <이태원 클라쓰>의 젊은 여주인공 ‘조이서’가 권위적이고 냉소적인 이 지배 엘리트들의 뺨을 드라마에서처럼 시원하게 올려붙이기를. [편집자 주]
✔ 드라마를 통해 다문화성과 포용성의 해방구로 묘사된 이태원
✔ 소수자들도 노력을 통해 긍정적인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
✔ 질서정연한 한국, 가고 싶은 이태원에서 일어난 믿지 못할 참사
✔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거침없는 어법, 파시스트의 언어 난립
✔ 실패를 겪어본 적 없는 엘리트 집단의 공감 부재 역시 우리의 비극
나는 대중문화연구자이고 한류 연구자이다. 현재진행형 역동성인 한류를 연구한다는 것은 계속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 시점을 한국 안팎으로 움직여가며, 한류의 내용이 얼마나 외국의 문화를 창의적으로 수용하여 만들어진 혼종문화인지 확인하는 동시에, 그것을 다시 수용하는 세계 곳곳의 한류 현상이 보여주는 다차원의 수용 메커니즘을 관찰하며 세계의 현재와 미래를 진단하는 일이다. 협소하게는 미디어산업 시장에 대한 질문에서, 크게는 세계 속 한류의 수용이 문화 세계시민주의의 핵심적 증거라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론적 방법론적 도전에 대응하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세계 속에서 도달한 위치는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개발도상국 출신인 한국이 도달한 (선망의 대상이라는 의미에서의) 선진국의 자리, 이것이 단지 경제적 성공일 뿐 아니라 세계인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문화적 내용을 동반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이 겪은 식민지, 전쟁, 가난, 군사독재로 점철된 과거를 생각할 때 놀랍고도 역사적으로 유니크한 성공사례이다.
<이태원 클라쓰>의 나라
세계 속 한국의 의미를 잘 드러내는 드라마로, 팬데믹 기간에 인기를 끌었던 웹툰 원작의 <이태원 클라쓰>(2020년 1월31~3월21일 방송)가 있다. 박서준이 연기한 ‘새로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주인공이 아버지를 죽인 식당업계의 거물인 원수를 같은 업종에서 복수한다는 줄거리인데, 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형적인 복수극 스토리 자체보다 그 과정에서 새로이와 함께 식당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물들을 통해서, 그리고 이태원이라는 장소의 다문화성과 포용성(inclusivity)을 통해서 창출되었다.
고등학교 중퇴인 주인공, 프로젝트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대학가기를 때려친 천재 소녀, 외국인은 영어를 한다는 생각을 뒤집고 한국어만 할 줄 아는 흑인혼혈 청년, 그리고 트랜스젠더. 이처럼 한국 사회의 소수자들로 이루어진 등장인물 세팅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여러 고정관념을 뒤엎는 것이다. 학벌 경쟁에서 자발적으로 벗어난 청년들, 20대 초반의 여성, 검은 피부의 한국인, 외모와 다른 성정체성.
이들 중 무엇보다 통쾌한 인물은 기성세대 앞에서 착하고 예의 바른 아이이기를 강요받는 한국 청년들에게 시원하기 짝이 없는 배우 김다미가 연기한 ‘조이서’다. 한국 사회의 소수자인 20대 초반의 여성 이서는, 다짜고짜 반말로 욕하고 뺨을 때리며 나이와 권위로 짓누르려는 친구의 모친인 중년 여성의 뺨을 함께 때릴 수 있는 인물이다. 방송 당시 이 장면은 유튜브에서 시청자들이 찾아보고 다시 돌려보는 유명한 “사이다” 장면이 되었다.
한국 드라마를 매우 많이 봐온 필자가 기억하기에,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 친구의 엄마라는 중년 여성에게 뺨 때리기를 되돌려주는 장면은 이 드라마가 처음이다. 세대간 수직적 위계가 강한 한국 사회는 픽션 속에서조차 이러한 권능을 젊은 여성에게 줄 수 없었다.(이 글을 쓰다 보니 상대가 중년 남성이었으면 아무리 조이서라고 해도 뺨 때리기를 돌려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이태원 클라쓰>는 곧 넷플릭스에 탑재되어 세계 각국에서 시청률 톱10에 올랐고, 일본에서는 <록뽄기 클라스>라는 리메이크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무대는 이태원. 이태원의 구석구석, 장면이 나오자마자 어딘지 알아볼 수 있는 이태원 세계 음식거리와 녹사평, 경리단 길의 이곳저곳이 항시적 배경으로 등장했다. 한류 팬들에게 이태원이 서울의 한복판임을 알리는 야경의 남산 타워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면서, <이태원 클라스>는 팬데믹 기간 중 가장 사랑받은 대표적인 한류 드라마가 되었다.
팬데믹 기간 동안 필자가 속한 서울대 한류연구팀이 수행한 시청자 인터뷰에서 세계의 시청자들은 놀랍게도 <이태원 클라쓰> 같은 드라마는 중국과 일본은 만들 수 없고 오직 한국이니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의 보수화되고 침체된 사회 분위기에 비해, 자국 뉴스를 통해 접하는 팬데믹마저 잘 극복하고 있다는 한국은, 사회의 소수자일지라도 노력을 통해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이며 안전한 장소로 이해되고 있었다.
게다가 외국의 한국 드라마 시청자가 스스로를 투사해보기 좋은 역사를 지닌 외국인 거주지인 이태원이라는 장소, 그곳의 포용성 높은 인물들의 이야기는 개도국 출신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그리고 개도국의 폭력적인 과거를 극복하며 성취한 것으로 읽혀졌다. 한국은 새로이의 비극적 일생이 보여주듯 아직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으나 청년들이 힘을 합해 무언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고 거침없이 기획하고 도모하고 연대하고 즐길 수 있는 장소, 게다가 세계로 열린 장소로 재현되었다. 이 드라마 속에서도 핼러윈은 이태원이라는 마을 전체가 사람으로 가득 차는 축제이며, 길 위에서 첫사랑의 여인을 기적처럼 마주치는 마술 같은 시간이고 공간으로 등장한다.
가보고 싶은 곳, 이태원의 글로벌 축제 핼러윈
당연한 결과로 팬데믹 동안 한국은 매우 여행하고 싶은 나라로 부상했고, 팬데믹이 끝나가는 기간에 재빨리 한국으로 여행을 온 유튜버 인플루언서들은 전국을 다니며 실시간으로 한국의 이곳저곳 이모저모를 전 세계에 중계했다. 10월 초 모든 PCR 의무가 사라지면서 세계의 청년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10월 말 핼러윈이야말로 3년간 대면 축제를 하지 못한 한국의 청년들 뿐 아니라 외국 여행자들과 한국의 외국인들이 함께 이태원 공간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자리가 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이태원은 글로벌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힙한 나라의 가장 힙한 공간 중 한 곳이고, 특히 핼러윈이라면 청년들은 이태원으로 놀러 나가야 하는 것이 되었다. 어떤 축제가 비난할 이유가 있겠느냐만, 이태원 핼러윈은 이러한 이야기와 조건 속에서 누구나 텔레토비로 분장하거나 토끼 머리띠를 하고 하얀 익명의 가면이나 화려한 가발을 쓰고 놀러 나와 모르는 사람들과 말을 섞고 춤을 추고 놀 수 있는 기회이지 일부 기독교통합주의자들의 비판처럼 “이교도”의 축제, 망자의 날이 아니다.
대중문화가 아니면 일상 속에서 춤추는 문화가 없는 한국 사회에 핼러윈은 어쩌면 얼굴을 가렸다는 조건이 사회적 자아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축제, 즉 카니발의 의미가 뒤섞인, 수입된 축제이면서도 로컬의 요구에 부응해 변화한 축제라 하겠다. 외국 음식점이 많은 만큼, 그리고 우리보다 자유롭게 춤추는 문화가 발달한 외국인이 많은 곳, 홍대 앞, 강남에 이은 힙한 장소 이태원. 한국인에게 이태원의 핼러윈은 더도 덜도 아닌 로컬이 변화시킨 글로벌 축제문화였다.
그런데 이 이태원의 작은 골목에서 158명이 압사하는 참사가 벌어졌다.(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 바로 그 이태원의 그 핼러윈 축제 기간에. 26명의 외국인 희생자가 포함되어서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즐기는 핼러윈 기간의 핼러윈 축제 사고라서, 그리고 그것이 팬데믹 기간 동안 질서의 나라였던 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벌어진 사고였으며, 서울이 한국의 위상변화에 부응하여 해외언론 동아시아 특파원들의 아지트가 되었기 때문에 전 세계 언론의 큰 주목을 끌었다. 세계 전체가,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도 실패한 팬데믹 컨트롤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질서정연한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는지 깊은 관심과 의구심을 표했다.
현장에 부재했던 한국 공권력 책임자들이 설왕설래 책임을 전가하는 동안 외국 언론은 입을 모아 “피할 수 있는 사고”였음을 강조하며 참사의 원인과 책임을 묻는 분석 기사를 냈다. 초등 시절부터 핼러윈 캔디를 얻으러 다니면서 자란 세계의 20대 청년들에게, 이 참사는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우리를 통치하는 정치인의 수준
이미 벌어진 일, 죽은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뒤통수를 맞은 것과 같은 뉴스의 충격 이후, 사고의 원인과 책임을 물으며, 당장에 사회적 애도를 통해 집단적 트라우마를 줄이고 희생자의 가족과 친지들을 돌보는 일이 전면에 등장했다. 그런데 꽃뿐인 분향소가 만들어지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용산구와 서울시의 지자체장과 경찰 책임자들, 행정안전부 장관은 직함이 무색하게 줄지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유감”을 표시했다.
경찰력의 배치와 예상가능했던 상황을 대비하지 않은 구조적이고 원천적인 책임은 조사되지 않고, 현장에서 사태를 수습하려 동분서주했던 소방서장이 기소되었다. 국가기구의 수장인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책임을 묻는 대신 112 신고를 수신한 말단 경찰에게 호통을 쳤으며, 사건의 기록 폐기가 시도되거나 접근이 차단되었고, 우려했던대로 조사받던 공무원이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조사과정에 또 다른 죽음이 없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불행하고도 슬픈 일이지만 군중이 있는 곳에 안전사고 가능성은 늘 있고, 사고 가능성을 100% 피할 수 없다면, 인명 사상을 줄이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위험을 인지하는 집단적인 능력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즉 공무원들이 현실의 위험신호를 인지하고 국가가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될 뿐 아니라 항상 가동하고 있어야 한다. 이태원 참사는 수많은 개도국형 재난 이후 만들어진 매뉴얼에도 불구하고 위험신호에 국가는 반응하지 않았고, 반응할 수 있는 조건, 즉 충분한 인원 배치와 명령체계가 확보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희생자 가족과 국민이 납득할만한 사후 조치와 애도의 제스쳐는 없었다. 책임의 불똥이 튈까, 피하다 보면 다른 더 큰 사건이 덮거나 자극적인 이슈가 뉴스의 전면에서 뒤로 밀어내주지 않을까, 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대통령실은 해외순방 중 외교 활동이 아닌 영부인의 대국민 홍보사진을 대거 방출하고 있고, 여론은 희생자 명단의 유가족 동의 없는 공개를 두고 치열하게 공박을 벌이고 있다.
공론장을 오염시키는, 이견이 불가한 어법
세월호의 교훈으로, 이태원 참사 후 이 정부는 애도의 기운이 커지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다했고, 성공적으로 목표를 달성 중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공감 능력이 없었던 당시 대통령에게 떨어진 분노의 불길을 알기에, 희생자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참사의 희생자가 인간적 얼굴을 갖게 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대통령은 매일 분향하며 슬픔을 과시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158명의 희생자. 이들의 이름 공개는 “개인정보 보호”와 “유가족 2차 가해”, “희생자의 정치적 이용”, “죽음의 포르노그래피” 등 이론이 불가한 이 시대의 가장 파워 넘치는 담론을 통해 공격되었다. 어느 누가 이 수사들과 싸울 수 있는가? 상대를 이런 수사로 단죄하는 것이 공론장의 승리인가? 롤랑 바르뜨는 이견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위와 같은 어법을 파시스트의 언어라고 했다.
또한 사망자를 숫자로만 표시하는 것은 산업자본주의 시대의 산재나 전쟁의 사상자를 칭하던 수사법, 비극에서 개인을 지워버리고 인간성을 휘발시키는 어법이다. 게다가 개인정보보호법이 전제하듯 공개된 이름만으로 어떤 구체적 개인을 알아볼 수 없다. 오히려 시절의 인기 작명에 따라 이름을 얻은 수많은 동시대 청년들의 여러 얼굴이 떠오른 것은 나뿐일까.
그 이름들을 읽으며 나는 동명을 지닌 과거와 현재의 여러 학생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들이 저 158명에 속하지 않은 것은 좀 더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사실이, 이 참사가 발신하는 폭발적으로 비극적인 메시지이다.
“웃기고 있네”, 국민을 조롱하는 이 땅의 엘리트
10·29 이태원 참사에서 연민과 공감의 능력이 없는 주체로 등장한 사람들은 현 정부의 구성원이다. 카메라가 도처에서 국회의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잡아내는 청문회 현장에서 야당 의원의 질의 시간에 “웃기고 있네”라고 글로 말하다가 들킨 청와대 수석들과 “폼나게 사표 내고” 싶으나 못 낸다는 행정안전부 장관. 그 중에서도 최고치는 한덕수 국무총리가 아닐까.
외신기자 회견장의 총리는 마치 나처럼 고귀한 인물이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 죄인마냥 이런저런 질책성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것이 퍽이나 못마땅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앉아 있었다. “어디까지 정부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외신기자의 직접적 질문을 받자, “영어통역이 잘 안 들린다, 이 경우 누구의 책임이냐”라고 되받았다. 표정이 일그러지며 깊은 경멸을 감추지 못하던, 질문했던 외신기자의 얼굴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자가 속으로 했을 욕을 차마 쓸 수는 없지만 상상할 수 있다.
이어서 일본 기자의 “주최자가 있는 10만 명 정도 모이는 행사였다면 경찰을 얼마나 투입했을 건가”란 질문에는 “뉴욕 양키즈와 보스턴 레드삭스의 월드시리즈가 있었다면 굉장히 많은 경찰 인력을 투입해야겠죠”라는 농담을 던졌다. “나는 이렇게 긴장된 순간에도 농담을 할 수 있는 명철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에요, 미국식 농담도 할 수 있는 미국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를 말하고 싶었던 걸까. 외신기자들이 아무도 웃지 않자, “그렇지 않냐”고 되물어서 긍정을 끌어내려고까지 했다.
학벌주의 한국인의 선망인 하버드 대학교 경제학 박사로 정권에 상관없이 여러 차례 장관과 총리를 역임하고 미국대사와 김앤장 고문까지 지낸, 한국 사회 최고 엘리트 과정을 거친 보수 정치인은 158명이 희생된 참사에 대해 이처럼 조롱과 냉소로 일관했다. 실패나 비극, 특히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사과해본 적 없는 인생이 지닌 공감의 부재가 지금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엘리트 집단과 국민의 분리의 증거처럼 다가왔다.
한국의 보수는 박근혜와 나경원, 대다수 여당 의원들이 그랬듯, 자신의 이해가 직접 관련되면 광화문 사거리에서 돗자리를 깔고 무릎 꿇어 절을 하며 지지를 호소해 지나가는 촌노에게 불쌍하다는 마음을 자아내게 할 정도로 효율적인 퍼포머들이다. 그런데 자신의 이해와 관련 없는 타인의 죽음과 비극 앞에서는 조롱과 냉소를 감추지 못한다. 마치 너희들에게 닥치는 일은 너희들 잘못일 뿐이라는 듯. 이들의 과격 지지자들은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할 때 옆에서 폭식을 했었다.
우파의 기운(affect)은 본디 우월감에 기초한 유미주의(唯美主義)이다. 여기에서 ‘미’는 물론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이다. 이 유미주의에는 잔인함과 혹독함, 우월감이 내재하기 때문에, 쉽게 혐오를 생산하고, 권력을 지닌 엘리트를 스타로 추종한다. 나의 판단과 나의 감각이 최고라는 어긋난 개인성이 주는 환각. 한국의 경우, 법을 직업으로 하는 검찰 집단이 선택적 정의를 실행하면서도 저어함이 없는 것은 이런 보수적 특권의식 때문이고, 이를 동경하고 지지하며 대가로 얻는 경제적 이익 뒤에 잠잠한 추종자들이 있다.
(하략)
첫댓글 다 읽었어. 고마워.
칼럼 읽으면서 참 시대 역행한다 싶음.
그동안 여당집권하면서 하던짓이 글에 녹아 있음. 그저 겉만 버지르르.. 일단 사람들 좋아하는 걸로 끌어보는데 실상은 텅 비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