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유모에 관한 애틋한 심경을 적은 ‘유모의 행적에 대한 기록’을 일기에 남기기도 했다. “유모의 손자 대까지는 신공(身貢)을 징수하지 말고 또 잡아다 부리지 마라. 그 후소생은 여러 대가 지나도 절대로 외손에게 상속하지 마라. ○···그렇게 함으로써 내 지극한 뜻을 잊지 마라.”일기에는 총 25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370여 명은 지식 엘리트 계층이고, 승려 60여 명, 노비가 250여 명이나 된다. 1697년 10월20일에는 덕립이라는 노비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노 덕립이 새벽닭이 울 때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이 노의 나이가 올해 여든인데, 부부가 지금껏 해로하고 자손이 60여 명이나 된다. 실로 세상에 드문 복이다”라고 썼다.1696년 3월11일 일기에는 암행어사의 태만과 부정부패 행태를 비판하는 대목도 있다. “○암행어사는 가는 곳마다 미적대며 머물렀다. 어제는 무위사에 묵고 이어서 방향을 틀어 도갑사로 갔으며 제 맘대로 유람하면서 무쉬(武倅)들에게 의복 등의 물건을 받아내어 항상 말 10여 마리의 짐을 지니고 다닌다고 한다.
그 하는 짓이 놀랍지 않은 것이 없다. 정말 한심하다.”윤이후는 은퇴 뒤 해남 일대 해안과 섬에 둑을 쌓아 농지를 간척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벌여 나갔다. 간척 농지를 조성하는 것은 해남윤씨 집안이 대대로 재산을 증식해온 방편이었다. 그는 죽도, 속금도, 두모동 제방 공사의 계획 단계부터 실행, 사후처리까지 전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이 일기에 실린 <일민가>는 이미 알려진 작품이다. 그밖에도 윤이후가 부르고 쓴 시와 산문 250여 편이 수록돼 있다. 하영휘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등이 공을 들여 번역한 흔적이 역력하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 일기 속 공간과 현재 위치와 지도 등 1272쪽에 이르는 대작이다.이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