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9층 탑
이차돈이 신라 최대의 성지인 천경림(오늘의 오능, 토속신앙 중심지라고 한다.)에 불교 사찰인 흥륜사를 짓는다. 이에 토속 세력들이 이차돈을 죽음으로 몰자, 왕실에서는 힘에 의하여 528년에 불교를 공인한 후에 흥륜사를 완성한다. 신라 왕실은 더큰 사찰을 짓고자 하나 토속 세력의 반대가 심하였다. 이에 왕실에서는 왕궁을 짓는다고 하여 공사를 시작한 후에 꿈에 황룡이 나타나서 공사를 방해한다는 소문을 퍼트린다. 이에 황룡사라는 절로 이름을 비꾸자 황룡의 방해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569년에 완성하였다. 이것은 사찰 건립에 토속 세력의 반대가 심하였음을 뜻한다. 이에 왕실에서 여론 몰이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신라 불교는 결국 왕실의 보호하에 호국 불교로 받아들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호국 불교의 또 하나의 상징으로 645년에 9층 목탑을 짓는다.
자장 율사는 신라 왕실의 진골이다. 그는 중국에서 공부할 때 신인을 만나서 계시를 받는다. 9층 탑을 지으면 주변의 9나라가 조공을 한다. 이것도 언론-플레이다. 9는 수의 의미에서 최고의 수를 나타내므로 많은 나라가 조공한다는 뜻이다.
왜 왕실이 주도하여 불교를 받아들였을까? 신라는 귀족 세력이 막강하여 화백제도로 왕을 뽑았다. 귀족세력이란 토속 신앙에 뿌리를 둔 지역 세력이므로 왕실의 강화에는 걸림돌이 되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는 왕권의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에 ‘왕즉불’사상의 불교가 가장 적합하였다. 불교의 발상지가 카스트 제도가 확립되어 있는 인도였으므로 부처=왕, 귀족=보살 백성=중생 이라는 신앙에서는 왕이 절대적 위치가 된다. 지금도 절에 가면 ‘삼단 신앙’이라 하여 불단, 신중단, 영단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탑을 세운 장인은 아비지로서 백제 사람이다. 아비지는 자기의 조국 백제에 대한 애국심과 장인으로서 탑에 대한 애정으로 고민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백제의 장인을 초청한 것은 건축 기술이 백제가 신라를 앞섰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신라 불교는 호국불교로서 왕실에서 앞장 서서 받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