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인 평화활동가 캐시 켈리 여사가 [나눔문화]의 서울평화나눔아카데미의 ‘세계 평화활동가 초청프로그램’의 하나로 2004년 10월 한국을 방문한다. 지난 2003년 전쟁의 바그다드 현장에서 IPT 총괄 Coordinator로 활동한 캐시 켈리는 역시 바그다드에서 평화나눔 활동을 펼쳤던 박노해 시인과 최창모 교수를 만나 [나눔문화]의 활동과 한반도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캐시 켈리는 10월 13일 나눔문화 포럼과 14일 평화나눔아카데미에서의 발표를 통해 그 자신이 몸으로 써 내려간 평화의 철학과 평화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예정이다. 아래 글은 최창모 교수가 캐시 켈리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쓴 글로, 그녀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분들께, 함께 나누고자 한다. / 편집자 주
|
바그다드에서 캐시를 처음 만나다. 박노해 시인, 캐시 켈리, 최창모 교수 |
박노해 시인과 내가 처음 캐시 켈리를 본 것은 전쟁의 후폭풍이 몰아치던 바그다드에서였다. 지난 2003년 4월 14일 오전 10시 30분, 모래 먼지가 자욱한 방바닥에 시트 한 장 달랑 깔고서 잔 캄캄한 공포의 첫 날 밤을 보내고, 아침에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바그다드 시내 곳곳에서는 불타는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름다워서 더 비극적인 바그다드의 티그리스 강변에 자리 잡은 낡고 반쯤은 파괴된 한 모텔 로비에서 우리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이라크 평화 팀 Iraq Peace Team, IPT>을 이끌고 있던 그녀와 사전 약속도 없이 (전쟁터에서 약속이라는 건 애당초 없다) 찾아간 모텔 로비에서 우리는 금방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캐시의 몸은 무척 작았다. 너무 작아 바람에도 날아갈 듯 연약한 여성이었다. 시인은 그녀를 보자마자 마치 ‘전쟁터의 작은 새’같다고 말했다.
전쟁터의 작은 새
|
세계를 향한 그녀의 평화메세지는 저 작은 컴퓨터에서 시작된다 |
캐시는 자신의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전쟁터지만 그녀의 방은 마치 어린 아이의 방처럼 아기자기 꾸며져 있었다. 전 세계의 어린이들이 보내준 것들이라며 여기저기 놓여있는 소품들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특히 자신이 돌보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들이 그린 평화 그림을 보여주며 설명을 길게 했다. 캐시는 직접 끊인 따뜻한 차를 내 놓았다. 그리고 달콤한 건포도를 접시에 담아 내 놓았다. 살림 잘하고 가족 잘 보살피는 조신(操身)한 주부의 손길만 같았다.
반전평화운동은 투사(鬪士)가 하는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작고 부드럽고 겸손하고 섬세한 이 여자에게서 나는 총과 폭탄으로도 꺾지 못할 그 무언가 강한 무기 같은 힘이 느껴졌다. 이 ‘작은 거인’이 어떻게 전쟁의 한 복판에 서서 전 세계를 향해 반전과 평화를 조용히 부르짖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야만적인 폭력의 역사에 맞서는 연약한 인간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하는 사람 같았다. 남근적인 폭력과 야만으로 가득 찬 이런 세상에도 모성적인 ‘인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26번의 체포, 구금으로도 가둘 수 없는 미소
|
걸프에서 아이들과 함께. 야만과 폭력이 설치는 전쟁터에서도 캐시는 온유한 미소를 잃지 않는다 |
캐시 켈리는 시카고 남부 태생이다. 시카고 남부는 백인과 흑인의 갈등이 심한지역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흑인들에 대한 탄압과 싸움을 보며 자랐다. 그러나 캐시는 “백인이 흑인보다 우월하다고는 믿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학교 선생으로부터 베트남 전쟁의 부당함을 배웠으며, 홀로코스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전쟁과 학살의 잔인함을 깨달았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난한 자를 위해 일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미국의 명문가 집안 출신이면서도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고 입대를 거부해 2년 간 감옥에 갔다 온 남자와 결혼했단다. 지금도 전 남편은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운동 선배이며, 조언을 많이 듣는다고 했다.
캐시는 1979년부터 본격적인 ‘운동’에 뛰어 들면서 미국 내에서는 입대 반대 운동, 대안학교 운동, 중남미 빈곤해결을 위한 옥수수 심기 운동 등을 펼쳤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사라예보 내전 등 분쟁 현장을 돌며 직접 평화운동을 펼쳤고, 급기야 1990년 걸프전을 반대하는 28일 간의 단식과 함께 2,000명의 반전-평화 팀을 조직하여 포탄이 쏟아지는 이라크 남부 바스라 시에서 몸을 던져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캐시는 26번이나 체포되어 짧게는 2-3일씩, 길게는 1년이 넘도록 구금된 경험이 있다. 2003년, 바그다드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캐시는 다시 구속 수감되어 6개월간 형을 살고 최근 석방되어 다시 열정어린 반전-평화 활동을 펼치며 이번「나눔문화」의 초청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이다.
전쟁터에서 평화를 심는 여자
|
캐시 켈리의 사무실에 장식된 나눔문화 달력과 꼬마 비둘기, 평화마음모으기 티셔츠
|
그녀는 전쟁터에서 평화를 심는 여자다. 그녀는 힘과 폭력이 인간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에서 인간이 살아남고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천착해 온 여성이다. 참된 사랑이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지 간에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되어질 최선의 미래의 모습을 기대해 주는 것이라 했던가?
캐시가 꿈꾸는 평화의 세상이란 무엇일까? 캐시는 대답했다. “평화란 정직한 삶입니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롭게 사는 것입니다. 또, 일상에서 폭력 없는 삶을 살아 내기 위해, 현미경으로 미세한 것을 찾아내듯이, 현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눈으로 물론 자신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캐시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제2차 세계대전 때 반전운동을 펼친바 있었던 다비드 달링거(David Dallenger)와 바브라 데밍(Barbara Deming)을 꼽았다. 바브라 데밍은 “우리는 타인의 일부입니다(We are a part of an another).”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이다. 그리고 예수와 간디, 톨스토이의 이름을 덧붙였다. 캐시는 박 시인이 설명한 “영성 없는 운동만큼이나 운동 없는 영성도 문제다,” “과학 없는 영성, 사회성 없는 영성, 인류의 구조적 모순과 고통을 끌어안지 않는 내면적 영성은 허구다,” “앞으로 인류는 폐쇄적이고 형식적인 기존 종교의 틀을 벗어나 생활영성, 예술영성, 운동영성이 요구될 것”이라는 믿음에 전적인 동의를 표했다.
캐시에게 영향을 준 책 중에는 알베르 카뮈의 미완성 소설《아멘》과 톨스토이와 존 허시,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이 있었다. 신 · 구약성서와 꾸란도 좋아한다고 했다. 그녀는 얼마 전 ‘큰 수술’을 받았다며 가슴 쪽을 가리켰다. 심장 쪽인지 유방 쪽인지는 묻지 않았다.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가라는 물음에 캐시는 즉석에서 “We Shall Over Come”을 불렀다. 우리도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전기도 없는 바그다드는 원시의 어둠에 젖어 총소리만 쩡쩡 울리는 한밤중이었지만, 노래소리는 촛불 켠 전쟁터 작은 방의 깨진 창문을 넘어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으로 펴져나가는 듯 했다. 시인은 그 날 밤 캐시가 준 양초램프의 희미한 불빛아래서 “전쟁터의 작은 새 - 캐시 켈리에게 바침”이라는 시를 썼다.
시카고에서 다시 만난 캐시
|
박노해 시인이 한국의 일간지에 보도된 캐시의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
|
시인과 나는 바그다드에서 캐시와 작별한 후 뉴욕에서 열린 세계평화운동가 컨퍼런스에 참여한 뒤 보스턴을 거쳐 그녀를 다시 만나러 시카고까지 날아갔다. 캐시가 23년간 살고 있는 작은 둥지이자 <광야의 목소리> 사무실을 겸해 쓰고 있는 집에서 우리는 사흘을 그녀와 함께 지냈다. 방 3개와 거실 2개, 작은 부엌이 전부인 이층엔 컴퓨터와 각종 서류들로 어지러웠다. 벽에는 이라크관련 포스터와 지도 등 많은 자료들이 붙어 있었으며, 그야말로 그녀의 소박한 생활공간이자 운동가로서의 면면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함께 미시간 호수를 산책하기도 하고, 밥을 먹고, 밤새워 토론도 하면서 우정의 깊이를 더해갔다. 손수 끓여 준 렌즈 콩 스프(lentil soup)로 저녁을 먹기도 했다. 캐시는 팝콘을 너무 좋아했다. 한밤중에도 손수 팝콘을 튀겨주며 박시인에게 팝콘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박시인이 빙그레 웃자, (실은 별로 ^^) 감옥에서 옥수수 심고 튀겨 나눠먹던 얘기를 했다. 두 사람은 감옥에서 만들어 먹던 음식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캐시는 핵미사일 기지에 옥수수를 심다 구속된 이야기를 하면서 가난한 중남미 민중에게 옥수수는 생명의 열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시인은 팝콘을 한 줌 집어 입에 넣으며 “이제부터 팝콘을 좋아하겠다.”고 해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캐시의 집, 아니 사무실은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붐볐다. 자원봉사자들의 출근과 동지들의 방문,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과 심지어 노숙자들까지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캐시는 그들에게 단 한번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웃으며 반갑고 따뜻하게 대하는 모습이 천사와 같았다. 헤어질 때에는 반드시 포옹을 해 주었다. 유명한 영화배우 숀팬도 캐시의 후원자였다. 캐시가 가는 곳은 늘 TV카메라가 비추고 있었고, 부시정부의 눈 또한 따라다니고 있었다. 인상적인 것은 캐시 켈리의 사무실 청소에서 빨래, 전화 연락, 자동차 운전, 모든 것이 회원들의 자원봉사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미국 사회의 나눔문화가 인상깊었다. 시인은 “한국사회가 너무 바쁘다. 이렇게 참여해야할 386세대들까지 이제는 자기아이 경쟁력 키우기에 전력하고 있다.”고 한숨을 지었다.
캐시의 사무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스테파니(27세)는 캐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캐시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가슴에 담고,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여성이다.”
한반도 위급상황 시 언제라도 달려오겠노라고 약속한 Voice in the wilderness의 평화활동가들. 빨간옷이 스테파니아, 오른쪽 끝에 계신분은 한국출신의 정복동 수녀님이다.
캐시 켈리를 기다리며
|
캐시 켈리와 최창모 교수
|
캐시를 한국에 초대하며 내가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가 다녔던 그 어떤 곳에서도 맛보지 못한 따뜻한 사람의 감동을 느끼게 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우정 때문이 아니라, 작은 몸의 여성으로 가장 거칠고 황량한 전쟁터를 쫓아다니며 살아온 그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진정어린 환대를 하고 싶어서이다. 작은 분단 한국의 거친 역사를 온몸으로 뚫어내며, ‘지구위에서 64억 인류와 함께 평온한 저녁을 맞이 하기 위하여’ 치열하게 정진하고 활동하는「나눔문화」의 친구들을 만나게 하고 싶다. 오늘도 ‘전쟁의 현실을 낙타의 걸음으로 걷는 우리 나눔문화의 친구들 모두의 따뜻한 환영과 참여를 기다린다.
최창모 교수는> 연세대 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스라 엘 히브리대학에서 유대묵시문학과 유대교-기독교 비교연구를 했으며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히브리학을 전 공하는 건국대 히브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지난 해 미-이라크 전쟁 발발 당시 직접 이라크 전쟁의 현장으로 뛰어들어 그곳 의 참상을 보고 사무치게 느끼며 평화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