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정치]
1709년 조선 개혁보수의 탄생
김홍도의 '포의풍류도' 18세기 후반 노론의 낙론계가 이끌었던서울 양반의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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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9년 어느 봄날, 충남 보령의 한산사(寒山寺)에 한 무리의 선비들이 찾아옵니다. 노론 영수 송시열의 적통으로 평가받던 충청 지역 대학자 권상하의 제자들입니다. 당대 엘리트답게 모임의 목적도 지극히 학구적이었습니다. 성리학의 주요 논점에 대해 논해보자는 것이었죠. 화기애애했던 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목소리가 높아졌고,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권상하 문하의 양 날개인 한원진과 이간이 좀처럼 간극을 좁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측의 논쟁은 한산사 모임 이후에도 이어졌고, 결국 스승 권상하가 한원진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됐습니다.
송시열의 수제자로 평가받았던 조선시대 학자 권상하. 1719년 김진여필(金振汝筆) 초상화 황강영당(黃江影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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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이이가 벌인 ‘사칠논쟁(四七論爭)’과 함께 조선 지성사의 양대 논쟁으로 꼽히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역사의 큰 물줄기는 작은 갈등에서 촉발되곤 합니다. 충남의 한 산사에서 벌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논쟁이 100년간 이어질 것이라고는, 더군다나 집권 세력인 노론의 대분열을 가져올 것이라고는 이때만 해도 어느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호락논쟁’-노론을 두 동강 내다
동문수학하는 이간과 한원진이 치열하게 다툰 지점은 ‘인성과 물성의 차이(人物性同異)’, ‘감정이 발하기 전 마음의 본질(未發心體)’, ‘성인과 범인 마음의 차이(聖凡心同異)’ 였습니다. 이중 가장 큰 논쟁으로 확대된 것은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입니다. 과연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도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덕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양측의 입장은 이렇게 나뉘었습니다.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됐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고르게 덕성을 받았다. 인간은 동물보다 덕성을 온전히 유지한다는 것 정도만 다를 뿐이다.” (이간)
“만물은 태극에서 시작됐지만 기질(氣質)에 따라 근본이 제각각 다르다. 어떻게 인간과 동물이 같은 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한원진)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통해 우주 만물의 움직임과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진은 퇴계 이황이 선조에게 군왕의 도를 설명하기 위해 만든 『성학십도(聖學十圖) 』중 제일태극도( 第一太極圖). [중앙포토] |
이 논쟁이 시작됐을 때만 해도 금방 사그라드는 듯 했습니다. 스승 권상하가 한원진을 두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울ㆍ경기 지역 노론 선비들이 달려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확대됩니다. 이들이 스승과 동문들로부터 외면당했던 이간에게 대거 동조하면서 이는 권상하 문하를 넘어 조선 지성계를 달구는 뜨거운 이슈로 달아올랐습니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선 '보수=영남'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이때만 해도 노론의 핵심 기반은 서울과 충청이었습니다.
이 무렵 충청 지역을 권상하가 잡고 있었다면 서울은 김창협·창흡 형제가 주도했습니다. 김창협의 영향을 받는 서울 노론계가 이간의 편을 들자 한원진을 지지하는 권상하 측 충청 노론계가 이에 반발했고, 이때부터 노론은 호론(湖論)계와 낙론(洛論)계로 쪼개집니다. 호(湖)는 기호·호서(충청)지역, 락(洛)은 낙양, 즉 서울 지역을 가리킵니다.
오랑캐 청나라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굴욕의 역사가 서린 삼전도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항거하던 인조가 서울 삼전도(지금의 송파구 석촌동)에서 청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중앙포토] |
호락논쟁이 한 세기나 지속되며 조선의 지성계를 흔들었던 이유는 그 귀결이 가져올 후폭풍 때문이었습니다. 이 결과에 따라 그동안 금수(禽獸)로 여긴 청나라에 대한 인식도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론계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따르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과 동물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엄격하게 구분 해야 한다→ 오랑캐는 금수에 가깝다→ 오랑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인정할 수 없다.
반면 낙론계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에서는 다릅니다.
사람과 동물은 하늘로부터 동등한 성품을 받았다→ 오랑캐와 명·조선은 근본이 다르지 않다→ 청나라도 실력을 갖추면 정통이 될 수 있다.
이런 사고의 틀을 따라 낙론계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김창협은 ‘정통론’에 대해서도 기존과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정통에서 정은 '사정(邪正)의 정'이 아니라 '편정(偏正)의 정'의 이미이니 구역의 넓고 좁음으로 말할 따름이다…선악·화이를 가릴 것 없이 천하를 하나로 한 자가 곧 정통이니 이외에 다른 논의는 옳지 않은 것이다.” (김창협, 『삼연집(三淵集)』 中)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와 쓴 『열하일기』단국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낙론계의 이런 대청인식은 춘추의리(春秋義理)에 따라 중화와 오랑캐를 엄격하게 구분했던 송시열의 사상과 비교해보면 매우 현실주의적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낙론계는 호론계의 비판에 직면합니다. 호론계는 낙론계의 사상이 ‘화이무분(華夷無分)’, 중화와 오랑캐에 대한 구분이 없으며, ‘인수무분(仁獸無分)’,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지 못한다며 공격했습니다. 반면 낙론 측은 호론 측의 입장이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천하가 선하게 되는 길을 막는다(沮天下爲先之路)’며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그동안 노론에서 '무오류-절대 존엄'으로 받들어졌던 송시열에 대해서도 "그 시기에 적합한 가르침을 폈을 뿐"이라는 과감한 목소리를 냈습니다.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노론 호론계는 북벌을 통해 병자호란의 수치를 씻어야 한다는 노선을 고수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노론의 울타리를 넓힌 낙론
18세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충격에서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지배층들의 내적 고민과 갈등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청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자리잡으며 그동안 조선이 추구했던 북벌의 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또한 청나라가 이룩한 문화 발전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겼습니다. 국내로 눈을 돌려보면 서울·경기 지역에서 상업 발전을 통해 중인층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조선 사회를 지배해왔던 화이관(夷狄觀)이나 신분제 등 주자-성리학적 틀에 균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청나라 시대의 자명종. 서양 문물을 일부 수용한 청나라의 문화발전은 조선 지식인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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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호론과 낙론 측은 정반대로 돌파구를 찾고자 했습니다. 호론 측은 정통과 이단, 중화와 이적,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엄격히 하는 방식으로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고, 낙론 측은 성리학 틀 안에서 최대한 현실을 인정하며 탄력적으로 대응하자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런 낙론계의 사상은 기존의 북벌론을 넘어 청나라와 적극적으로 교역하고 상공업을 발전시키자는 이용후생론으로까지 확대됐습니다. 또한 중인층과 서얼들의 신분상승 욕구에 대해서도 성리학의 틀 안에서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훗날 북학파를 이끈 박지원과 홍대용 같은 학자들이 이러한 낙론계의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대표적 인사입니다.
조선 노론 낙론계의 학맥도. 북학파의 거두인 홍대용, 박지원은 낙론계에 속했다. 조성산 『18세기 호락논쟁과 노론 사상계의 분화』에서 인용 |
때문에 박지원의 작품을 보면 곳곳에 북벌의 허구성이나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 등 낙론계의 분위기가 강하게 투영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명(明)을 위해 원수를 갚겠다 하면서, 그까짓 머리털 하나를 아끼고, 또 장차 말을 달리고 칼을 쓰고 창을 던지며, 활을 당기고 돌을 던져야 할 판국에 넓은 소매의 옷을 고쳐 입지 않고 딴에 예법이라고 한단 말이냐?” (『허생전』 中)
“천하의 원리는 하나뿐이다. 범의 본성(本性)이 악한 것이라면 인간의 본성도 악할 것이오,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라면 범의 본성도 선할 것이다.”(『호질』 中)
노론의 낙론계에서 성장한 박지원은 조선 후기 대표적 실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청나라와의 적극적인 교역과 상공업 육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
노론은 수구꼴통에 정조의 적대세력?
일부 저술가들의 영향으로 노론은 '수구-꼰대-기득권층'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특히 정조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영화를 보면 이런 구도가 더욱 두드러지며, 더 나아가 조선이 망한 것도 노론이 정조의 개혁을 막았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나치게 도식화된 측면이 있습니다. 실제 역사와도 다릅니다.
정조시대를 다룬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노론은 정조의 정치를 사사건건 방해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세력으로 그려졌다. [사진제공 KBS] |
호락논쟁을 기점으로 갈라선 노론의 호론계와 낙론계는 정치적으로도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낙론계가 대거 참여한 노론 시파(時派)는 정조에 협력했습니다. 시파라는 명칭 자체가 시(時), 시대변화에 유연하게 움직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반대파에선 '시류에 영합한다'는 좋지 않은 의미로 썼습니다만…) 시파는 정조 집권기에 가장 협조적인 세력 중 하나였습니다. 정조가 죽기 전 따로 불러 후사를 부탁한 인물이 노론 시파의 김조순이라는 점에서도 드러납니다. (2017년 9월 2일자 'YS 키즈와 정조 키즈' 참조)
김조순 초상화. 정조는 자신이 사망한 후 정계를 맡길 인물로 노론 시파의 신진 세력이었던 김조순을 선택했다. [사진 위키백과] |
정조와의 협력 여부를 떠나 노론의 낙론계는 사상적으로도 '수구-꼰대'로 치부되기엔 '억울한' 측면이 있습니다. 낙론계의 철학은 북학파가 상공업 발전을 주창하는 토양을 제공했으며, 청나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었습니다. 또한 성인과 범인의 근본은 다르지 않다는 낙론계의 성범성동론(聖凡性同論)은 서얼 차별이나 엄격한 신분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싣기도 했습니다.
요순 시대를 이상으로 삼았던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 사진은 정조 표준 영정이다. 정조는 노론의 시파, 남인, 소론과 협력해 정국을 이끌었다. [사진 판미동] |
반면 호론계는 노론 벽파(壁派)로 연결됩니다. 이들은 정조의 정적과도 같았던 정순왕후의 오라비 김구주와 연대해 정조와 정치적 대척점에 서게 됩니다. 김구주가 아니더라도 노론 벽파는 근본적으로 정조와 같은 길을 걸어가기는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노론 벽파를 구성한 호론계는 정통과 사이비의 구분을 강조했고, 이것이 그들의 존재론적 이유이자 정치적 '어젠다'였습니다. 따라서 모든 당파를 초월하고자 했던 정조의 탕평론과 결합하기엔 궁합이 맞지 않았습니다. 근본이 다른 남인도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배신자’ 노론 시파와 손을 잡는다는 것도 일종의 '자기 부정'으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처럼 완고한 태도를 고수했던 이들은 18세기 이후 정치사회의 변동을 따라잡지 못한 채 위축되기 시작합니다. 벽파는 정조가 사망한 뒤 잠시 정권을 장악했지만 1806년 ‘병인경화(丙寅更化)’를 계기로 궤멸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서 사라집니다. 이후 지방 유학(儒學)세력으로 남은 이들은 훗날 개화기 때 위정척사 운동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정조와 각 당파의 협력 관계. 같은 노론에서도 시파와 벽파는 정조의 국정운영에 대한 입장이 달랐다. |
호락논쟁의 유산-보수의 진화
박지향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영국 보수당이 300년 가까이 존속한 이유 중 하나로 ‘변화와 혁신’을 꼽습니다. “영국 보수당의 개혁보수주의는 역사와 전통이 귀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지만 변화에 대해 거부하지 않고 어떤 때는 선도적으로 변화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
특히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끌었던 19세기 중반 도시 노동자 다수를 유권자로 끌어들인 선거법 개혁이나 공중보건법, 식품의약법, 직공거주법, 굴뚝소년법, 공장법을 제정하는 등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주도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18세기, 100년 간 이어진 호락논쟁도 실상 보수 집권층이던 노론계의 혁신 과정이었습니다. 같은 동문의 사형-사제간에 시작된 논쟁은 순식간에 조선 지성계를 휩쓸었습니다. 전통적 화이관과 신분제가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이들은 고민을 거듭했고, 향후 보수 정치의 진로를 놓고 두 패로 나뉘어 경쟁했습니다. 양 측 입장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이런 경쟁과 혁신을 선택했기 때문에 노론은 이후에도 집권세력으로서나 지성계의 최대 계파로서나 생명력을 계속 연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입니다. 그런 점에서 호락논쟁이 시작된 1709년은 혼란에 빠진 조선의 보수가 다시 몸을 추스르고 재정비를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호락논쟁은 어쩌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지리멸렬한 보수 세력에게 하나의 시사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한국의 보수는 '과거와 다른 환경'을 직시해야 했던 18세기 조선의 보수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왼쪽), 바른정당 유승민 대선후보가 지난해 5월 2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스튜디오에서 선거관리위원회 주최로 열린 마지막 TV토론에 참석해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은 보수 적통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다.[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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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지방선거를 마치면 보수 세력은 반공, 성장 위주 경제, 지역감정 등의 어젠다가 더이상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이 건전한 보수 세력이 자리 잡아야 한국 정치도 발전이 가능합니다. 2018년은 한국 보수가 다시 살아난 해로 기억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한국 정치의 범보수세력은 가치관과 노선을 두고 두 세력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습니다. 18세기 호락논쟁 못지않은 과감한 혁신의 과정을 기대해봅니다.
※이 기사는 이경구 『호락논쟁을 통해 본 철학논쟁의 사회정치적 의미』·『김창흡의 학풍과 호락논쟁』, 허태용 『호락논쟁은 어떻게 계승된 것인가 - 사상 계보 그리기의 어려움』, 조성산 『18세기 호락논쟁과 노론 사상계의 분화』·『17세기 후반~18세기 초 김창협·김창흡의 학풍과 현실관』, 이상익 『율곡학과 호락논쟁』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 기자,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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