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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2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마태 8,28-34 )
“What have you to do with us, Son of God?
Have you come here to torment us
before the appointed time?”
말씀의 초대
아모스가 불의를 고발하는 목적은 불의한 자들을 단죄하는 데 있지 않고, 그들을 회개시키는 데 있었다. 주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예배는 순전히 겉치레요, 외적인 행사로 변해 버렸다. 그 예배는 주님과 맺은 계약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의를 감추는 가면이 되었다. 아모스는 악습을 고치지 않으면 재앙이 내릴 것이라고 경고한다(제1독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기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 그 고장 사람들은 재산의 소유를, 소외된 사람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자유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 주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를 바라시지만, 현실 사회는 오히려 주님께서 마련하신 생명보다 재물(경제)을 선택하고 있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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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마귀 들린 사람 둘이 주님 앞에 다가와,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소리를 질러 댑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은 반(反) 하느님인 것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질적, 금전적인 것에, 또는 명예욕이나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누구보다도 주님을 잘 알아보면서도 주님을 멀리하려 듭니다. 세상의 죄가 그들 속에 꽉 들어차서 주님께 나아가려는 마음조차 못 먹는 사람들입니다.
너와 내가 지은 죄들이 모여서 세상의 죄(공동의 죄)가 되고, 세상의 죄는 더 무거운 것이 되어 다시 각 개인에게 돌아옵니다. 누가 마귀가 들렸다고 한다면, 그는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훼방하는 이간질꾼, 훼방꾼이 곧 마귀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이 고장에서 그러한 훼방꾼을 내쫓으시고 인간을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로 회복시키시려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오히려 주님께 그 고장을 떠나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는 그들이 재산욕 때문에 주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마귀 들린 상태로 있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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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본 대로, 마귀 들린 사람 둘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시비를 겁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이 사는 무덤가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떠나게 해 달라고 먼저 청합니다.
마귀 들린 이들은 사납고 강했으나 예수님 앞에서는 약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에 돼지들 속에 숨어 버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리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들은 존재합니다. 이른바 ‘귀신의 힘’을 빌려 장사하는 이들입니다. 도시 곳곳에 버젓이 간판을 걸고 점을 치고 있습니다. 찾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호기심에서 찾든 불안 때문에 찾든 정답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을 찾는 것이 정답입니다.
유다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마귀 들린 이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사막 문화권에 속합니다. 4월부터 10월까지는 거의 비가 오지 않습니다. 뜨겁고 더운 날씨가 계속해서 이어지기에 돼지고기는 여차하면 상합니다. 의료 시설이 빈약했던 유목민들이 상한 고기를 먹고 고생도 했을 것입니다. 더러는 죽기까지도 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돼지는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고, 율법에서 금하는 고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예전에는 ‘잘 먹어야 본전’인 음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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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인들은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천하게 여겼습니다. 특히 돼지고기는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어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었습니다. 유다인들 가운데에는 돼지고기 먹지 않는 규정을 어겨 순교한 이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정신은 어디서 온 것일까요? 율법에 대한 복종심이 그 정답입니다.
그러기에 마귀들이 돼지 떼 속에 들어가 죽어도 결코 애석함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특별히 마태오 복음은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기록된 복음입니다. 부정한 돼지 떼 속으로 부정한 마귀들이 들어갔으니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마을 주민들은 당황한 나머지 예수님께 떠나주시기를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속 머무르시면 더 많은 돼지들이 죽을까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 전체에는 이방인을 낮추어 보는 시각이 숨어 있습니다. 이방인보다 이스라엘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언제든지 예수님을 찾아갈 수도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은 관상을 하면서 얻는 바가 있었으면 합니다.
먼저 마귀 들린 두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을 찬찬히 보십시오. 이때도 마귀 들렸다 해서 그저 두 사람의 모습을 흉측하게만 보려고 하는 선입견의 유혹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하십시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우리 이웃의 모습 그대로일지 모릅니다.
그 두 사람과 예수님의 대화 내용을 잘 살피면서, 그 사람들 안에 들어 있던 마귀들이 나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에도 머무십시오. 그 마귀들이 빠져나가기 전의 두 사람의 모습과 빠져나가고 난 뒤의 두 사람의 모습을 찬찬히 들여다봤으면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내적 움직임의 요소들과 돼지 떼가 비탈을 내리달려 물속에 빠지는 것과 같은 외적 환경의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는 상관관계에 대해 깊이 알아들을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그다음으로 머물러야 할 장면은 주변 사람들입니다. 먼저 예수님과 두 사람 간에 벌어진 사건의 현장에 함께 있으며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취하는 행동들을 살펴봅니다. 이어서 그들의 증언을 듣고 몰려온 주민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등을 그들의 표정이나 말투나 행동들을 통해 미루어 짐작해 낼 수 있으면 합니다.
역시 오늘의 관상을 통해서도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선과 악이 뒤섞여 있고, 밝음과 어둠이 혼재하고 있으며, 존재의 깊은 곳에서의 열망과 일상에서의 추구 간에 어떤 괴리가 놓여 있는지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몰입과 집착
-김민수 신부-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주체성을 상실한 자입니다. 다시 말해,
더러운 영에게 지배당하고 조종당하는 노예 처지에 놓여 있는 자입니다.
21세기 과학문명이 첨단을 달리는 이때에 더러운 영의 존재는
돈, 권력, 명예에 집착하여 자신의 영혼을 잃어가도록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강남에
아파트를 소유한 이가 그것을 팔아 강북으로 이사를 했는데, 얼마 후 아파트
투기가 일어나면서 강남 아파트 값이 천정 모르고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너무나 속이 상해 밤잠을 설치기까지 했습니다. 일을 하면서도 아깝게
팔아 버린 아파트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나는 그에게 소돔과 고모라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롯의 아내가 산으로 탈출하면서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하고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듯이,
형제님도 이미 팔아 버린 아파트를 자꾸 생각하면
삶이 경직되고 미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몰입과 집착은 구별됩니다. 몰입은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로서 현재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행위라면, 집착은 과거의 경험에 얽매여
있고, 이기적이며, 심하면 자기 파괴적인 중독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도
더러운 영은 우리를 물질주의, 쾌락주의, 소비주의에 집착하게 하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과거 노예 생활을 그리워했듯이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현존은 더러운 영에서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을 통해 온전한 한 인간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돼지와 같이 살아도 이승이 좋다?
-김찬선신부-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악령이란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존재라는 것,
자기를 괴롭히는 분으로 하느님을 여기는 존재라는 것은
더 이상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언젠가 얘기를 한 것 같으니 말입니다.
다만 오늘 제 눈에 들어온
“때가 되기도 전에”가 무슨 의미인지 묵상하고자 합니다.
악령은 사람에게서 계속 머물 수 없으면
돼지 안에서라도 계속 머물게 해달라고 합니다.
악령이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계속 머무는 것입니다.
악령은 하느님과 만나는 것이 기쁨과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세상에 머무는 것을 집착하기에
돼지에 기생해서라도 세상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참으로 저를 반성케 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도 그렇게 싫고
세상을 떠나라는 것이 나에게도 괴롭힘이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다른 것이 아니라 재가 바로 악령이다.”
개똥밭에 뒹굴어도 이승이 좋다는 옛말처럼
하느님께 가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돼지와 같이 살더라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좋은 악령적인 비참함!
우리 인간은 이 악령적인 비참함을 비참함으로 보지 못하고,
때를 앞당겨 비참함을 끝내주려는 주님의 사랑을 괴롭힘으로 여깁니다.
돼지를 치던 이들도 그렇습니다.
돼지를 잃는 것이 아까워 주님을 떠나라고 합니다.
돼지를 불어나게 하셨으면 계속 있어달라고 하였을 텐데
돼지를 잃게 하니 아무리 주님이어도 상관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은 주님이 아니라 악세사리이고 귀찮은 빈대입니다.
내 안의 돼지들
-전삼용신부-
성소의 길을 가는 사람치고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또 무언가 내가 원해왔던 것들을 버리지 않고 그 길을 선택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포기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의 자유, 또 어떤 사람은 모성애나 부성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저의 경우는 결혼이었습니다. 저는 꽤나 결혼하고 싶었나봅니다. 왜냐하면 어렸을 때부터 행복하기 위해서는 예쁜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다보면, ‘왜,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을까?’라는 한탄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주님의 뜻’과 그것에 반하는 ‘우상’들이 있을 뿐입니다. 여자가 우상은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이 내가 사제가 되는 것이라면 그 뜻 앞에서는 결혼하려고 하는 마음은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우상이 되고 맙니다.
일 년의 지독한 고민 끝에 결혼을 포기하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평소에는 한 마디도 안 하던 주위의 여자애들이 제가 신학교 들어간다고 하니까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왜 그 전에 말하지 않고... ^ ^) 어쨌건 다 버리고 그렇게 신학생이 되었지만 이런 선택의 갈등은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주님의 뜻’과 그 뜻에 반하는 ‘우상’이 놓여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다라인들이 사는 지방으로 가십니다. 그 곳 입구에는 마귀 들린 사람이 있습니다. 마귀가 한둘도 아니고 군대로 들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두 마귀 들린 사람은 그 동네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이 사람들 안에 수많은 마귀가 들어있듯이 그 동네 사람들도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수많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바로 돼지를 키우고 있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돼지는 모세의 법에 의해 부정한 동물로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보관이 힘들어 부패가 쉽게 되어 그것이 법으로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과학으로 증명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돼지고기는 마늘이나 술과 같은 음식들처럼 사람의 몸을 달궈 정욕을 증가시킵니다. 구약에서 돼지고기는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는데 그런 이유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스님들이 고기와 술, 마늘 등과 같이 정욕을 증가시키는 음식을 먹지 않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그 동네는 아직 주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우상이 가득한 마을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마을에도 당신의 생명을 전해 주시기 위해 들어가셨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 자신들이 마귀에서 치유되기를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들 스스로 예수님께 달려 나와 자신들을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과 우상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마을에 들어가셨으니 마귀는 사라져줘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귀 들린 사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습니다. 돼지는 부정함과 우상의 상징임으로 곧 마귀의 상징입니다. 마귀가 들어간 돼지들은 곧 낭떠러지로 떨어져 바다에 익사해 죽습니다.
바다의 심연이나 땅 속, 즉 밑으로 내려가는 곳은 곧 지옥을 상징합니다. 마귀들과 그 우상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종국에 도달할 목적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 마을 사람들에게 마귀 들린 상태로 돼지들처럼 부정한 것들을 좋아하며 살지 말고 깨끗하게 치유되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하느님인지 우상인지, 그들의 선택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마을 사람들의 선택은 하느님이 아니라 그동안 해 오던 더러운 돼지들의 삶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와 자신들의 마을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좋아하는 우상들을 모조리 잃게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느님보다는 우상을 선택했기 때문에 깨끗해진 사람의 운명이 아니라 바다에 떨어져죽은 돼지들의 운명을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또 하느님도 인간이 원하지 않으면 결코 그 사람 안에 들어오시지 않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도 아직까지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지 못하는 우상들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내라고 하시는데 십일조를 내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을 선택하게 한 내 안의 우상이 아직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하는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도 역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우상을 주님의 뜻보다 우선적으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가 모두 다 내 안에 들어찬 우상들 때문인 것입니다.
즉, 내가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아직 돼지 몇 마리가 뛰어 다니고 있기 때문이고 나는 그 돼지들이 좋아서 그 쪽만은 주님께서 좀 오시지 말아 줬으면 하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심정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행복하지 못함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들 때문에 두려움과 걱정 속에서 약간의 지옥의 고통을 맛보며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의 내면 한 구석을 더 점령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오릅니다.
가시나무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외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양승국신부-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언젠가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으스름한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친 후 산보에 나섰습니다. 무심코 다다르게 된 한 장소에는 ‘장묘사업소’라는 안내 팻말이 붙어있더군요. 호기심이 발동해 팻말을 따라가 보니 점점 깊은 산중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데, 왠지 모를 이상한 기운과 더불어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순간 머리끝이 섰습니다. 마침내 도달한 정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불빛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올라가면서 이런 곳에서 야간경비를 서시는 분이 계실까, 궁금증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무덤가에서 거처하던 마귀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은 왜 하필 무덤가에서 살았을까요? 어떻게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한,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덤가에서 잠을 잘 생각을 했을까요?
일반적으로 무덤은 인적이 드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마귀 들린 두 사람은 사람들을 피해 다니고 있었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세상 사람들은 마귀 들린 사람들을 철저하게도 외면하고 배척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 그래서 무덤가에 거처를 둔 사람의 몰골을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마귀에 시달리느라 외모에 신경이나 쓸 수 있었겠습니까? 가꾸지 않은 꾀죄죄한 얼굴, 산발한 머리, 빨갛게 충혈된 눈, 마귀가 활동할 때 마다 끔찍한 고통에 괴성을 질러댔을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기피대상 1호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도 인간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몇 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 지식축척에 대한 욕구, 사랑받고 싶어 하는 욕구,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어딘가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이 세상 그 어떤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못했습니다. 가정도 그들을 버렸습니다. 교회도 그들을 단죄했습니다. 사회는 그들을 죽은 사람으로 봤습니다.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해 철저한 외로움과 고독 속에 살아가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십니다. 자비의 손길을 펼치시어 그들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선 당장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 당신의 품안으로 편입시키십니다. 우선 당장 당신 성삼위의 공동체에 이름을 올려주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하느님은 이 세상 어딜 가도 받아주는 곳 한 곳 없는 왕따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처럼 우리의 예수님은 인간대접 못 받는 사람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살아가다보면 우리 역시 철저하게 따돌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다들 혀를 내두르며 우리를 피해갑니다.
그런 순간이 왔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끝난 것이 절대로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세상에서 철저하게도 소외된 우리라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무리 우리 몰골이 형편없다 할지라도, 아무리 우리가 망가진 인생을 살아왔다 할지라도 예수님만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당신 사랑의 공동체로 받아들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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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자리
-장경선 수사 -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에게 물질적 재산은 더없이 중요한 듯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경제적 손실이 났다고 느낀 마을 주민들은 도저히 예수님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영혼을 치유받고 참된 인간이 되어가는
것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재산의 득실에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몇 년 사이 온 나라가 “경제 살리기”라는 구호에 매달려 온갖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은 보편적인 가치관을 살려줄 정의나 도덕성에
대한 관심은 희박해져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잘못된 마음을 고쳐주시고, 지친 영혼에 새 힘을 불어넣어주시겠다고 해도
우리가 삶의 목표를 경제적 이득을 얻는 것에만 둔다면 예수님께서 서 계실
자리가 없겠지요. 어쩌면 그때 우리도 그분께 ‘이곳을 떠나주십시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각박하게 물질적인 삶만을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분명 기대하지 않았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롭게 북녘을 향해 날아가는 철새 무리의 잔잔한 춤사위를 볼 수 있고,
낮은 땅에 청량한 보라색 제비꽃이 피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힘겨운 삶 속에서 고통을 당하며 슬퍼할 때에도 수많은 작은 생명들이
이 세상이 환희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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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대한민국
-송동림 신부-
올해 초 보건복지부가 전국의 성인(1864세) 12,849명을 대상으로 ‘2006년도 정신질환 실태’에 대한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성인 6명 중 평균 1명이 1년에 한 가지 이상의 정신질환을 경험하고 있는데, 이들 가운데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는 환자는 10명 중 1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현황에 따르면 지난 2002년부터 2007년 사이 인격 장애 환자는 27.4퍼센트, 충동조절 장애 환자는 143.2퍼센트 증가했다고 합니다.
특히 사회에 대해 극단적 분노를 표출하는 반사회성 인격 장애 환자의 경우도 최근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실의 배경에는 비정상적인 가정환경, 사회의 구조악, 폭력적인 미디어 문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력적인 미디어 문화의 악영향이 심각합니다. 한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인터넷·영화·텔레비전 등을 통해 접하는 광고가 약 30,000개라고 합니다. 광고에 노출된 시간이 고등학교에서 보내는 전체 시간을 초과할 정도입니다. 밤낮으로 무방비 상태에서 환상을 심어주는 광고에 무자비하게 세뇌당하고 있습니다. 외모·집·가족·능력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하고, 자학하게 하며 끊임없이 욕망을 부추깁니다. 물질주의·소비주의·황금만능주의·개인주의를 부추깁니다. 타인에 대한 불만·불신·불안을 자극합니다.
종교적으로는 하느님한테서 멀어지게 하여 교회 공동체성을 파괴합니다. 비판력을 지닌 어른들도 종종 흔들리는데 광고 세뇌에서 견뎌낼 어린 영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광고를 통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익숙해져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잘못된 사상이 우리의 무의식을 서서히 잠식해 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마귀는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을 그럴듯하게 숨기면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마치 스파이와 같이 숨어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을 뿐더러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스파이처럼 마귀도 교묘히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고 하느님께 대항하거나 하느님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마귀나 악령은 단절·대립·분리·분열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폭력적인 미디어에서 돌려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예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악령의 영향권을 벗어나 성령이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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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 이성주 신부-
하루를 살면서 여러분들은 예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기 위하여 손을 얼마나 많이 펼치시고 계신가를 생각해 보신 일이 있습니까? 저는 하루를 반성하는 늦은 밤에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오늘도 당신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고, 또 저 자신만을 믿었습니다. 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통해서 악의 세력을 물리치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유혹을 물리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은 곧 악의 세력을 물리칠 힘을 얻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삶은 악의 세력에서 해방을 주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서도 마귀를 쫓아냄으로써 해방을 주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원치 않고 오히려 예수님께 자기 고장을 떠나가 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유대 율법에 금지되어있는 돼지고기를 먹는 이방인들에게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마귀를 쫓아내려 하시는데, 자기들의 돼지 떼에 마귀가 들어감으로써 돼지들이 물 속에 빠져 죽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서워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원하지 않게 됩니다.
그들이 정말로 하느님의 능력을 무서워한 것입니까? 사실 그들에게 있어서 더 무서운 것은 하느님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들의 경제적 손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돼지 떼를 잃어버렸기에 앞으로 또 무슨 손해를 입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저는 "떠나가 달라"는 이방인들의 목소리가 자꾸만 제 귀에 울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당신 목숨까지 내놓는 손해를 감수하시는데, 우리는 조금만 내가 손해를 입어도 그냥 가만있지 않고, 또 주님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죄를 지을 때는 속으로 "주님 저에게서 좀 떠나주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합니다. 한술 더 떠서 주님께 손을 벌리기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다른 어떤 힘과 관계를 맺으려 합니다. 주님은 결국 우리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분으로 머무시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까? 복음에 나오는 마귀들도 주님의 능력을 알기에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하고 소리 지르는데, 우리는 내가 좀 손해 입는다고 관계를 깨뜨리려고 합니다. 성령의 7가지 은사 가운데 "두려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은 하느님을 그냥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창조자,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진정한 경외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나를 헤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와의 관계를 더 친밀히 하시는 분이십니다. 내가 손해본다고 생각하는 것 그 갑절로 하느님은 나를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도록 해주십니다.
악의 세력은 뿔 달린 도깨비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악의 세력은 내 것을 손해보지 않으려는 나의 마음 안에서 자리잡고, 나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 안에서 하느님을 그냥 무서운 분으로만 만듭니다. 그리고 세상의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께 떠나가 달라고 청합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오늘 복음의 이방인이 바로 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라는 단어 앞에 구원자라는 단어를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구원자이신 그분의 삶은 공생활 시작부터 악의 세력과의 싸움이었고,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도 유혹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 손을 펼치시고 우리와 관계를 계속해서 맺으려 하십니다. 그 손을 뿌리치지 맙시다.
성당에 들어가면서 성전 입구에 놓인 성수를 이마에 찍으며 바치는 기도를 떠올려 봅시다
"주님, 이 성수로 저의 죄를 씻어주시고
마귀를 몰아내시며 악의 유혹을 물리쳐주소서.” 아멘...............
마귀들의 종말
-김순중 수녀-
어떤 힘센 사람이 내가 가는 길을 날마다 막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에서처럼 ‘그들이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라고 할까?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사나워지는 경험을 해보았는가, 아니면 어떤 행위가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내 몸에서 돌출되는 경험이 있었는가? 이것이 바로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한 근본적인 악의 체험이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안에 선이 자리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0)
자신의 힘으로 죄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나운 자와 겨루어 이길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한테서 오신 거룩하신 분, 한 분뿐이시다. 그 사나운 자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예수께서 “가라.” 하시자 그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죽고 말았다.
또 하나 눈여겨봐야 할 것은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사람들은 악을 추방하시는 예수님을 반기기보다는 자기들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 그들은 지금 갖고 있는 것을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적당히 악과 어울려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이정희 수녀-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 마귀 들린 사람과 마주치는데, 그 당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볼 때 유다인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경우도 없었거니와 이방인들과 만나는 것 자체가 불결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시고 마귀가 들려 사나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유다인들이 보기에 가다라는 이방인 지역이라 불결한 곳이고 무덤 역시 불결한 곳이다. 거기다 마귀가 들린 그 사람은 너무나 사나워 어느 누구도 그들과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예수님을 보고 오히려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정체성이 드러난다.
지난 부활절에 세례를 받은 교우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은 “세례를 받고 나서 생활의 기쁨이 없어졌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그게 무슨 말인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분은 “예수님은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러 오셨다는데, 나는 세례를 받고 나서 생활에 걸림돌이 더 많아졌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을 때는 마음 편히 살았는데 예수님을 따르려니 생활 속에서 걸리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분은 돼지떼 속에 묻혀버리고 싶은 심정이 드는 때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마음 안에 ‘사나운 것들’, ‘마귀’, ‘돼지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자유 의지’를 가지고 삶을 더욱 책임있게 ‘선택’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물에 비친 내 얼굴
-양승국신부-
"예수께서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이르렀을 때에 마귀 들린 사람들이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물에 비친 내 얼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마귀 들린 사람들 한 무리를 만나십니다. 마귀, 악령, 사탄!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치는 존재들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의 몰골이 어떤지 상상이 가십니까?
언젠가 아마도 악령에 들리지 않았겠나 추측되는 한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정말 온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서 머리칼이 저절로 일어섰습니다.
악령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서 하느님을 모욕하고 거스르는 영적인 존재이겠지요. 인간의 구원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 인간을 파괴시키고 타락시키는 존재일 것입니다.
인간을 위험이나 악에서 보호하고 안전하게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성인들이나 천사들과 대립되는 개념이겠습니다. 결국 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여정에 있어서 걸림돌이 되는 존재,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악의 세력이 악령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만나셨던 악령 들린 사람들의 처지는 참으로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밤낮으로 지독한 악령에 시달리다보니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겠지요. 극도로 쇠약해진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쉴새없이 악의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다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눈은 핏빛으로 충혈 되었겠지요.
악령으로 인해 죽음의 고통을 겪고 있던 이 사람들 역시 예수님은 당신 자비와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가련한 인간의 처절한 아픔에 진심으로 가슴아파하시며 당신 자비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악령에 걸린 탓에 인간 사회에서 추방되었던 사람들, 물에 비친 자신들의 몰골에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무덤 근처에서 짐승처럼 살아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슬픔이 예수님의 측은지심을 건드립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악령은 오늘날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는데, "오늘 내게 있어 악령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적어도 제게 있어서 가장 센 악령은 "활동주의"입니다. 자주 저는 이런 유혹에 빠집니다.
"열심히 사는 게 기도지", "당장 내 앞에 던져진 이 시급한 일들, 그걸 제쳐놓고 어떻게 여유부리면서 묵상에만 전념할 수 있겠어?", "우리 같이 바쁜 사람들에게 때로 기도는 사치스러운 일이지", "나중에 연례피정 가서 집중적으로 기도해야지", "내일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기도 빼먹지 않고 꼬박 꼬박 바쳐야지" 등등.
제게 있어 가장 대적하기 힘든 이 힘센 악령들과 잘 맞서기 위해 한 가지 결심을 해봅니다.
내일부터는 적어도 가장 기본적인 기도만큼은 시간 맞춰서 빼먹지 않고 바칠 것을 다짐합니다. 적어도 하루에 세 번, 사목 하는 가운데서도 그 날 복음을 되새겨서 묵상하고, 가능하면 삶 가운데 열매맺도록 노력하기를 결심합니다.
마귀와 돼지떼의 죽음
-김웅태신부-
오늘 복음은 마귀와 돼지떼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귀의 기원에 대해서는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태초부터 마귀가 있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이미 죽은 사악한 사람들의 악령이 악한 것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사람드러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죄를 진 천사들에 이야기와 함께 악한 자들의 악령이라고 그들은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귀들은 공기 중에 가득차 있으며, 무덤과 같이 음침한 곳에서 살며, 흐린 물에서는 언제나 볼 수 있다고 했고, 사람들에게 붙어서 병을 주고 괴롭힌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막에서 살면서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가 들린다고 유대인들은 당시에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어제 복음에 이어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건너 오셨습니다. 거기에서 무덤 가운데 사는 포악한 마귀들린 사람 둘과 만나십니다. 마귀 들린 자들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아직 때가 되기도 전에 우리를 괴롭히시려고 오셨습니까? .. 합니다. 그 "때"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야훼께서 약속해 주신 "메시아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마귀들은 정복당하고, 전멸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전통적인 사고 방식이었기 때문에 아직 그 때가 되지 않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를 회피하는 무덤에 사는 마귀들린 이들에게도 가까이 다가 가십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쫓아내시려거든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러자 돼지떼는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리 주민들은 예수께 달려와 떠나 달라고 간청합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즉, 마귀들려 사람답게 살지도 못하고, 험악한 마귀의 행패 속에 갇혀 있는 그 두 사람의 해방을 위하여서도 예수님은 마음을 쓰시고 보살피시며, 은혜를 베푸시지만, 동네 사람들은 물질적인 손해를 봤다해서, 타인의 구원에 따른 자신들의 재산상의 손해가 두려워, 예수께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는 사실에 문제성이 있다고 보겠습니다. 동네 주민들은 자기들의 돼지떼가 죽어 재산의 손해를 봤다는 것만을 문제 삼고, 마귀들렸던 사람들에게는 어떤 기쁜 일이 이룩되었는가를 생각 못하는 주민들! 타인의 구령에 자기 재산에 손해가 된다해서 자기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익만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죄악성임을 오늘 복음은 지적하는 것입니다.
자기 것을 지키려 할 때, 그들의 태도에서 나타난 모습은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예수께 "떠나 달라!" ... 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손해를 보기 싫어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고, "떠나달라!"고 한 오늘 복음의 주민들처럼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아멘.
차라리 예수를 볼모로 잡아라.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거친 풍랑을 잠재우자 배는 어느덧 호수 건너편에 다다랐다. 풍랑을 잠재운 기적은 마태오복음의 이적사화 집성문(마태 8-9장) 가운데 네 번째 기적이었다. 예수께서 먼저 배에서 내리셨을 것이고, 제자들도 따라 내렸을 것인데, 제자들에 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제자들은 배경에 머무르면서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스승의 구마기적사화를 지켜볼 것이다. 이는 다섯 번째 기적에 해당한다. 공관복음은 예수께서 마귀 들린 많은 사람들을 치유하셨다고 하지만(마르 6,13) 이에 대한 구체적인 보도는 두 편에 달한다. 이는 “마귀와 돼지 떼”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5,1-20; 마태 8,28-34; 루가 8,26-39)와 “악령에게 사로잡힌 아이”에 관한 구마사화(마르 9,14-29; 마태 17,14-20; 루가 9,37-43)이다. 원전(原典)에 가까운 마르코복음은 마귀와 마귀 들린 사람의 성질, 습관, 태도 등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마귀의 고백, 예수님과의 대화, 구마 수행방법, 구마결과 및 반응에 관한 서술을 잊지 않고 있으며, 대략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를 장식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마태오와 루가는 상당부분 수정을 가하였고, 특히 마태오는 내용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을 인용한 부분으로서, 마르코의 “구마와 마귀에 의해 익사한 돼지 떼” 대목(마르 5,1-20)을 대폭 축소시켜 보도하고 있으며, 내용도 많은 부분 변질시켰다. 마태오에 의하면 배가 도달한 호수 건너편은 “가다라” 지방이었다.(28절) 마르코는 “게라사” 지방이라고 하는데,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동남쪽으로 무려 55Km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마귀 들린 돼지들이 달리기에 너무 먼 곳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호수에서 약 10Km 떨어진 “가다라”와 그 주변, 즉 가다라 지방이라고 고쳤다. 마르코에 의하면 배에서 내린 예수께서는 곧바로 무덤 사이에서 나온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를 만났다고 하는 반면, 마태오는 복수형인 “마귀 들린 사람들”로 고쳤다. 이는 예수께서 대적하는 상대가 쉬운 상대가 아님을 암시하면서, 역으로 예수님의 권능이 우세함을 드러내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그들의 성질은 “사납다”는 말로 아주 짧게 묘사된다. 마귀들이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대목은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가진다. 쫓겨난 마귀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 물 속에 빠져 죽는 사건(32절)이 가다라 마을에 알려지자(33절) 온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떠나 달라고 청한다(34절).
마르코복음은 예수께서 마을 사람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듯 배를 타고 떠나려 하시는데, 마귀로부터 치유된 사람이 제자 되기를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부탁은 거절당하고 은혜 입은 일을 선포하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예수의 명령을 받은 그 사람은 데카폴리스 지방(요르단 강 유역을 일컫는 10개 도시의 총칭)을 두루 다니며 예수와 그 하신 일을 선포한다.(마르 5,18-20) 마태오는 마을사람들이 예수께 떠나 달라고 청한 대목을 그냥 넘기기 않는다. 그냥 넘기지 않았다는 말은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다. 가다라 지방 사람들이 예수를 거절하는 것은 곧 불신(不信)으로 인정된다. 그들의 불신은 수많은 돼지들을 손해(損害) 본 것에 기인한다. 마르코는 호수에 빠져 죽은 돼지 떼가 약 2,000마리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마르 5,13)
마태오가 전하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의 원전(原典)을 대폭 축소하면서 자신의 편집의도를 가미(加味)하였다. 마태오는 의도는 결국 앞서간 대목, 즉 호수 반대편에서 가르치신 예수추종의 대목(8,18-22)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자들이 추종하게 될 예수님은 세상의 마귀들을 깡그리 소탕하는 권능을 지니신 분이며, 이 분을 추종한다는 것은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마태오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의 “마귀 하나”를 복수로 수정함으로써, 수많은 마귀 떼를 쫓아내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의 권능을 한층 과시하는 동시에 예수추종의 진정한 의미를 재삼 강조하는 이중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그들 곁에 예수를 머물게 하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도래한 하느님나라와 구원에 관한 복음과 가르침을 듣고 배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이는 곧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놓친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장 다시 배를 타고 가파르나움으로 건너가실 것이기 때문이다.(9,1) 예수 때문에 손실을 입었다면 예수를 볼모로 잡아두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 옛날 이집트의 재상 요셉이 동생 베냐민과 아버지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식량을 사러왔던 10명의 형들 중에 시므온을 볼모로 잡아 두었던 것처럼 말이다.(창세 42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