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글을 읽으며 너무너무 동감합니다.
저는 6남1녀의 장남 며느리인데...
밑으로 시동생2과 시누이1명을 결혼시키면서(시부모님이 시골에계시는관계로.....)시댁의 집안 어른들등등에게 수많은 욕(?)을들었답니다.
정말이지 평생들을욕이란 욕은 다~~ 들었답니다.(차마 입에 담기싫은 모욕적인 말들,쏟아지는 손가락질과,매서운 눈총....)
그렇다고 그들이 욕한만큼 큰일을 책임줘 주지도 않으면서.........!!!
힘이들고 괴로워도 묵묵히 시아버님과시어머님을 대신하면서 저는 집안 어른들의 모든손가락질을 격었어요.
3번의 힘든과정을격으면서,시아버님과 시어머님,신랑,시동생의 신뢰를 거머쥐었습니다.
지금은 큰며느리의 말이라면 시어른들의 절대적인 지지속에 시동생들이나 시누이도 감히 무엇이라 할수없을만큼의 신뢰를 받고있습니다.
님!.....님!.....님!
제게는 중학1학년에 다니는 큰딸아이를 두고있답니다.
저는 제마음을 위로합니다.
동서의 철없음이 꼭 딸아이와 똑같아요.
제딸이 커서 결혼한후에 내동서처럼 윗동서를 속상하게하면 어쩌나,시어른들의 걱정듣는 며느리가 되지는 않을런지......
이러한 마음이 들더라구요.그러기에 딸아이를 다그쳐보기도한답니다.
그러한 제마음을 시어른들은,신랑은,시동생들은,내아이들은 다~~알고있더라구요.....다만 밖으로 표현은 않할뿐....
철없는이를 나무라고 질책한다면,나도 그와같은 사람이 될뿐이니까.....
진실은 언젠가 빛을 발한답니다.
너무나 깊숙히 묻혀있기에 약간의 기다림이 필요하지요........
더도말구 덜도말구 10년만 살아봐....*^^*
10년이 가기전이라도 상대는 이미내게 고개 숙이며 지내고 있을꺼예요.
감히나를 따라올수없음에 원통해하면서........^^
님! 마음편히 가지고 행~~~복 하세요.
행복을 만드세요.예쁘게~~~~~~~~~~
--------------------- [원본 메세지] ---------------------
결혼 11년하고도 반이 지났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눈물과 함숨과 보람과 웃음, 그리고 행복을 얻기까지....
이혼의 위기에서,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서로가 참고 노력한 이해의 댓가로 지금 최상의 파라다이스 같은 행복도 누리게 되었다.
지금 내리는 비 때문인지, 감미로운 음악 때문인지 울적하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 왔다.
며칠전 산행을 할때,
가지고 가려고 준비했다가 잊고 가서 북한산에서 다시 막걸리를 샀었다.
지금 냉장고에 있는 막걸리를 한병 꺼내어 마시고 있다.
비도 오고..오늘따라 식구들은 다 잔다.
괜실히 눈물이 핑 돌고 흘러나오는 음악과 마시는 술에 취기가 올라온다
며칠후에 시부모님 생신이 돌아온다.
생신을 앞두고 동서에게 여러 감정들이 밀려온다.
몇년전 도련님에게 결혼할 여자 친구가 생겼다.
시어머님이 이제 며느리가(나) 생겼으니,
일을 나눌수 있다고 한시름 놓았듯이 나 역시 많은 일들 중에서 동서가 생겨 일을 나눌수 있겠다라는 마음을 솔직히 갖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전부터 시댁에 놀러를 자주 왔었다.
어느날은 어머니가,
동서 될 사람이 놀러 온다면서 저녁을 뭐 해먹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난, 삼겹살이나 구워 먹자고 하였다.
도련님과 여자 친구가 왔고 고기를 사러 나가려 하자,
그녀는 게찌게를 좋아 한다면서 게찌게를 해 달라고 하였다.
나 같으면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라고 했을텐데.....
그래서 게를 사다가 찌게를 하였고 난 작은 아이를 업고 어머니와 저녁 준비를 하였는데 그녀는 주방에 와서 일을 전혀 거들지 않았다.
게를 발라 먹고 게껍질을 그대로 식탁 유리위에 올려 놓고 불편해 할까봐 대충 식사를 하고 물러나 주신 어른들을 뒤로 하고 내 몫으로 남겨 놓은 게찌게가 조금 남았을 뿐인데 더 달라고 하였다.
난 내 몫의 게를 다 줬다.
(눈물이 핑 돌았다..친정에 가면 게 좋아한다고 엄마가 해 주셨는데..)
다 먹은 게껍질을 그대로 놓고,
일어나더니 소파에 앉아 도련님에게 "오빠 커피 줘.." 라고 말했다.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시아버지와 시아주버님 될 사람들과 마주 앉아서 엉덩이가 다 보이도록
다리를 꼬고 앉아서 커피와 과일을 먹고 그대로 갔다.
설겆이를 도와 준다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
난, 그들이 커피를 마실때 아이를 업고 게국물에 식어버린 밥을 먹었다.
그런 식으로,
결혼전에 수없이 다녀 가면서도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한동안 난 그 애가 시댁에 온다면 짜증부터 났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그렇게 자주 가던 시댁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결혼 직전에 시아버님 환갑 잔치를 했었는데,
부페에서 집으로 돌아와 술과 음식을 먹었는데도 자리 차지하고 앉아서 도련님 친구들과 술 마시더니 그대로 늦었다면서 몸만 빠져 나갔다.
한번은 결혼전에,
시할머니와 시이모, 시이모부님들을 뵈러 의정부에 갔었다.
저녁을 먹는데,
보신탕을 못 먹었기에 지금의 동서와 난 삼겹살을 먹었다.
결혼도 하기전이라 어려웠을 어른들 앞에서,
상추에 고기를 싸더니 "오빠..아."하며 넣어 주었다.
모두가 황당했다.
돌아오는 길에 뒷자리에 앉은 우리 부부를 전혀 의식치 않고,
앞자리에 앉아서 기어에 손을 포개고 운전을 하기도 했다.
결혼하기전,
양쪽 집안 인사를 하기 위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을때도 나는 놀랬다.
자신의 두 남동생을 포함한 친정 부모님과 나를 포함한 시댁 식구들이 있었음에도 둘이 손을 잡고 뽀뽀를 하고 무릎에 앉고.....
도련님이 원망스러웠었다.
그러다가 동서 될 사람때문에 힘들어 하는 내게
결혼식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아주머니가 내 등을 도닥거리며 말했다.
"자네 동서가 아니라 자네 동생이라 생각해.." (같은 희귀성)
또, 시이모님은
"10년만 참아 봐....응?.....
내가 막내였기에 부담없이 시댁에 갔었는데 세월이 10년정도 흐르고 나니형님이 그동안(10년) 얼마나 나 때문에 속이 상했을까를 알겠더라....
하지만,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때마다 형님이 내게 잔소리를 했더라면 난 형님과 사이가 나빠졌을 것이고 형님에 대한 감사함을 알수 없었을텐데....세월이 흐르면서 내 스스로 알게 되었고 난 형님을 존경하게 되었어..너도 참아 봐...10 년만......"
갈등은 있었지만 10년을 참기로 했다.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나 하나 꾹 참고 쥐죽은 듯 있기로 하여 동서에겐 한마디도 안했다.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시댁 어른들과 시아주버님이 계시는데,
다들 앉아서 T.V를 시청하는데도 동서는 이불을 덮고 누워서 봤다.
함께 식사를 해도 밖으로 필요한 것들을 가지러 일어나지를 않았다.
그러면 어머니나 내가 항상 일어나야 했다.
새댁이면서 어려워하는 것도 없이,
어른에게 "내가.."란 표현을 쓰며 어영구영,
시부모님과 내 남편에게 반말을 하는 동서를 보노라면 항상 불안했었다.
작년 여름엔,
메리야스를 입고 우리 가족을 배웅하는 아버님의 배를 두번 툭툭 치면서
"아유 이 똥배 좀 봐...배 좀 집어 넣어어어...."
너무 황당했다.
우리가 분가하여 몇년을 살았을 때의 일이다.
임신한 동서는 내게 어른들과 살아보니 어떻냐고 물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남의 집에 며느리로 들어온 처지라지만 손아래 동서와 시어른 흉을 볼수는 없었다.
그래서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다.." 라고만 했다.
동서는 이사를 할 시기에
전세금을 빼서 이자돈을 굴리고 시댁에 들어와서 살면서 애를 어머니에게 맡기면서 자신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다.
동서는 나이는 나보다 어리지만 속은 너무나 영악한 사람이었다.
수없이 많은 이해하기 힘든 동서의 행동들...
동서가 결혼하고 처음 찾은 시골 큰댁.
가자 마자 인사하고 부엌으로 가야 하는 상황에서 어른들 술상을 봐서
안방에 갖다 드리자 동서는 그 옆에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시부모님과 형님 내외 앞에서 도련님을 가리키며
"오빠는 참 장가를 잘 들었다..나 같은 직업 가진 여자 얻어서..."
"오빠가 얼마나 벌어? 나보다 조금 벌면서..."
"돈 몇푼 못 벌면서...주는 대로 쓰긴..."
도련님이 안스럽다.
이제 난 내일 이후로 며칠 힘들것이다.
이 나라의 며느리들이 겪었을 명절의 부담보다도 더 힘든
시부모님 두 분의 생신을 치룰 걱정으로 이 밤에 마음이 무겁다.
결혼하고 시부모님의 첫 생신때 난 임신중이었다.
신기할 정도로 잠을 너무나 많이 잤었다.
아침에 남편 출근 시키고 다시 누웠다가 눈을 뜨면 밖은 어둠이 깔렸었고 어떤때는 3 ~ 5시에 눈을 뜰 정도로 잠을 많이 잤었다.
시부모님 첫 생신을 앞두었을때도 잠이 많았었다.
임신중이었고 잠은 많았고,
이사를 한지 며칠 되지 않았던지라 피곤함에 몸의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며칠 전에 가지 못하고 생신 전날까지 몸을 추스리다가 몸이 좋지 않아
잠깐만 누워 있다가 시댁에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누워 있다가 눈을 뜨니
5시가 넘었었고 깜짝 놀라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먼저 갈테니 퇴근하고 시댁으로 오라고.....
남편은 어차피 늦었으니 퇴근하고 집으로 데리러 온다면서 함께 가자고 하였지만 난 늦었음에 마음이 급하였으므로 혼자 버스를 3번 갈아타고 시댁으로 갔다.
죄책감에 기가 죽어 들어서는 내게 어머니는 현관에서
"이제서 뭐하러 오냐? 차라리 내일 오지.... 아파서 누워 있더라도 일찍 와서 여기서 누워 있지..... 얼마나 죽을 정도로 아파서 시아버지 생신에 며느리가 이제서야 나타나니?....."
물론,
큰아버님의 며느리인 형님이 나보다 먼저 와 있어서 어머니는 그 형님 앞에서 미안한 마음에 내게 한마디 하셨겠지만 그때는 너무나 서운했었다.
(지금은 충분히 그 입장을 이해한다.)
시어머니와 아버님의 생신은 5일 차이고,
아버님의 생신은 며칠 앞당겨 주말을 정하여 치루게 되었다.
친정에서 겪었던 것보다 시부모님의 생신 분위기는 달랐다.,
시아버님의 생신때는,
청주(보은, 해인)나 수원, 의정부 등지에서 손님들이 많이 방문을 한다.
40~50 명정도의 손님으로 인하여 너무나 바쁘고 정신이 없으며 거실과 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찬다.
난 시아버님을 존경하고 아주 좋아한다.
아버님은,
가족끼리 저녁만 먹는다고 아무리 오지 마라고 하셔도 온다.
그러면 찾아와 주시는 손님들을,
소홀히 할수는 없기에 준비를 부족함 없이 해야한다.
아버님은 일단 방문한 손님들에게는
최상의 접대를 하기를 원하시기에 매년 생신때면 무척 힘이 든다.
지금 결혼한지 11년.
자신의 생일에,
쉴수 있는 혜택을 주는 회사에 남편은 시아버님 생신날짜를 적어서 낸다.
그리고 그날 쉬면서 새벽 시장 보는 것과 어머니와 나를 돕는다.
항상 내가 어디에 살았든 어머니 생신 전날부터 시댁에 와서 아버님 생신을 치루고 뒷정리를 다 한후에 내 집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어머니 생신 다음날부터,
방 4개의 커텐과 거실 커텐을 다 빨고 겨울용으로 다시 달고,
그릇 정리에 대청소....
많은 종류의 음식을 제대로 잠도 못자고 준비하면서
토요일 점심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음식준비와 설겆이의 반복...
그리고 손님들이 가신후엔,
그들이 입고 덮었던 의류와 이불을 정리하고 그릇과 수저를 닦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마지막으로 방과 거실의 뒷정리와 세탁기를 돌린다....
명절보다 더 힘든 두 분 생신이 있는 이 가을이 조금은 부담스럽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시부모님이지만 힘은 든다.
11일 어머니 생신을 앞당겨 동서네랑 7일에 식사를 미리 했지만
가까이 사는 나는 생신 당일날 새벽에,
시댁에 가서 미역국에 간단한 반찬을 준비하여 아침을 차려 드린다.
7일날 식사를 한후에 도련님은 내 눈치를 보며 상품권을 하나를 건냈다.
작은 것이지만 형수님 필요한 것 사서 쓰시라고 말하면서,
곧 일본 출장을 가는데 필요한 것을 말하라고 하였다.
난 속으로 "그냥 도련님이 잘 사시는게 저 위하는 거예요..." 라고 했다.
도련님을 20살때부터 지켜 봤었다.
너무나 착한 시동생....
함께 살때 무척 더웠던 여름날 샤워를 맨 마지막으로 하러 들어가면
"형수 가게에 담배 사러 가는데 캔맥주 하나씩 마실까요?" 라고 하며 어른들을 어려워하는 나를 위한 배려를 자주 해 줬었다.
가끔 전화를 하여 "영숙씨 저예요.." 라고 하면
난 목소리를 야시시하게 내며,
"오머나..서방님. 보고 싶었어요..어쩌면 한번도 찾아주시지 않나요?"
라고 말할 정도로 우린 친하고 서로 잘 웃는다.
도련님은 상품권을 내게 건네며 조심스럽게 ,
형수 미안한데요.... 토요일에 친구 돌집에 저만 가려고 했더니
* * (동서)가 꼭 따라 가고 싶다고 해서요....."
난 뭐라 할말이 없었다.
지금부터 난 시댁을 자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그런데 토요일에 돌집에 가면 밤늦게나 온다는 말인데....
내 생각엔 동서가 처음 맞는 시어른의 생신이 아니고 벌써 4년째 지켜봤으므로 상황을 봐서 금요일에 일 끝나자 마자 와도 난 목요일 이후론 어머니와 시댁에서 너무나 바쁘게 준비를 하고 있을텐데 어떻게 손님들이 많이 와 있을 토요일 저녁에 돌집에 간다는 생각을 과연 할수 있을까?
돌집에 간들 그들이 감사하다고,
겉으로는 말을 할지라도 속으로 비웃는 것을 왜 모를까?
시아버지 생신 전날 준비하지 않고 며느리가 돌집을 찾았다고...
남편은 그런 말을 하는 시동생에게
준비할게 많으니 일찍 왔다가 저녁에 잠깐 다녀오라고 하였다.
한편으론,
그런 동서에게,
지금까지 한마디 말씀도 하지 않은 어머니에게 서운함도 있었다.
며칠전 산을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섰다가 어머니를 만났다.
난 동서 토요일 늦게나 올지도 모르는데 둘이 준비할수 있을까를 여쭈었다. 얘기 끝에 어머니는,
"말해봤자 생각이 없는 철부지에게 무슨 말을 하겠니?
도리어 말하는 사람에게 서운하다고 생각할텐데.....
네가 말 안해도 엄마는 다 알고 있어......"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철부지 동서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손을 놓고 싶지만 내가 손을 놓으면 어머님이 힘이 드시는데....
형님과 시부모님 앞에서,
미국에 가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피아노 개인 레슨하는 사람들이 돈을 아주 잘 번다면서 이민 갈 생각을 하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하는 동서.....
도련님을 가리키며
"난 오빠가 장남이었으면 시집 안 왔어..둘째라 온거야..."
이런 동서에게 한마디의 충고는 아직도 잔소리일까?
10년...
그래 10년의 기다림을 난 동서에게 주련다.
"동서"라 생각지 않고 "동생"이라 생각하리라.
지도 10년 살아보면,
자신의 주변에서 친구들을 보며 형님과 동서와의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되겠지....그러면 스스로 느끼고 고치겠지.....
나를 기준으로 지켜 본 수없이 많은 동서와의 일들...
흐흐..나도 어쩔수 없나보다.
술 한잔 마시니 내 허물보다 동서의 흉을 들춰 냈으니..
이 밤에 누워서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아침이면 후회할 부질없는 짓을 나이 먹어서 하고 말았음에.....
이번에도 분명 나는 몸으로,
동서는 봉투로 대신하겠지만 시부모님은 그 진실을 알아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