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바로 그 본헤드 플레이의 어원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상 최악의 본헤드 플레이, 본헤드 플레이의 어원이 된 플레이, 바로 "머클의 본헤드" 라고 불리는 사건이죠.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오늘의 주인공인 프레드 머클에 대해 알고 넘어가죠. 머클은 1907년, 겨우 18살의 나이로 존 맥그로우가 이끌던 뉴욕 자이언츠에 입단한 선수였다. 1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그가 메이저리거로, 그것도 당시 최강팀이었던 자이언츠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였는지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 자이언츠 유니폼은 아무나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루수였던 그는 정확성과 파워를 겸비한 타격과 뛰어난 포구능력을 자랑하는 선수로 맥그로우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유망주였다.
또한 그는 머리도 좋은 선수였다고 하는데, 당대의 맹장 맥그로우가 18살의 그와 작전을 상의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 1번의 플레이로 일생동안 돌머리라는 이미지로 굳어지게 되었죠. 실제로는 머리가 좋은 선수였다고 하는데, 그가 왜 돌머리라는 이미지로 남게 되었을까요? 사건은 1908년 9월23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자이언츠는 컵스와 치열한 선두다툼을 펼치고 있었다. 자이언츠로서는 홈에서 펼쳐지는 맞대결에서 승리할 경우 리그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경기였고, 경기는 9회까지 1:1 로 팽팽한 접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9회말 2사 주자 1루 상황에서 타석에 들어선 19살의 머클은 우익수 방면으로 깊숙한 안타를 날렸다.
1루 주자 무스 맥코믹은 3루까지 내달렸고, 자이언츠는 2사 주자 1, 3루라는 절호의 찬스를 잡을 수 있었다. 안타 한방이면 경기를 승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리그 챔피언의 영광까지 차지할 수 있는 중요한 상황. 타석에 들어선 선수는 유격수 앨 브리드웰이었다. 그리고 그는 컵스 투수 잭 피스트를 상대로 센터로 빠지는 라인드라이부성 타구를 날렸다. 3루 주자 맥코믹은 여유있게 홈까지 들어왔고, 폴로 그라운드에 모인 수만명의 자이언츠 팬들은 극적인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함성을 지르며 그라운드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2 : 1 로 자이언츠의 승리. 자이언츠가 내셔널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자이언츠 선수들, 컵스 선수들, 심판, 팬들 할 것 없이 당시 그라운드에 모인 수만명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자이언츠가 이겼다고… 자이언츠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고… 단 1명만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는 바로 컵스의 명 2루수, 자니 이버스였다. 당대 최고의 2루수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이버스는 미친듯이 열광하는 자이언츠 팬들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자이언츠의 1루 주자 머클이 2루 베이스를 밟지 않고, 그냥 클럽하우스로 들어가 버린 것을… 그리고 그는 중견수 아티 호프먼에게 외쳤다. "야! 빨리 공을 2루로 던져!" 호프먼은 아무런 생각없이 서 있다가 이버스의 외침을 듣자 영문도 모른 채 공을 주워 2루로 향해 던졌다. 그러나 자이언츠라고해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자이언츠의 3루 코치였던 조 맥기니티는 이버스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채고는 재빨리 공을 가로채 외야펜스 너머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클럽하우스 쪽을 향해 외쳤다. "프레드! 빨리 튀어나와 2루를 밟으란 말야 이 멍청아!" 클럽하우스에서 이미 옷을 갈아입고 있던 머클은 화들짝 놀라 그라운드로 뛰어 나갔다. 그러나 컵스 선수들이라고 가만 있을 터인가? 컵스의 감독 프랭크 챈스는 선수들에게 "저놈을 막아!" 라고 소리쳤고, 컵스 선수들은 우르르 달려들어 머클이 2루로 오는 것을 막았다. 그 틈에 이버스는 공을 주워 2루를 터치했다. 이버스가 2루를 터치한 것을 확인한 챈스 감독은 이미 탈의실로 들어가 버린 심판진을 그라운드로 불러내 강력하게 어필하기 시작했다. "똑똑히 보라구. 자이언츠의 1루 주자 머클이 2루를 밟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구. 그런데 방금 이버스가 2루 베이스를 터치했어. 포스 아웃 상태니까 맥코믹의 득점은 무효야.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1 : 1 이라구! 더구나 맥기니티가 한 행동은 명백한 수비방해야! 이 경기는 몰수게임으로 선언해야 해!"
이것은 정당한 어필이었고, 당연히 인정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날 경기의 주심 행크 오데이는 "머클이 2루 베이스를 밟지 않은 사실이 인정되므로 그는 아웃이다. 따라서 3 아웃이 포스 아웃이므로 맥코믹의 득점은 인정되지 않고, 경기는 1 : 1 무승부다" 라고 선언했다. 자이언츠 팬들은 광분했고, 자이언츠의 감독 맥그로우는 내셔널리그 사무국에 그날의 경기를 제소했다. 그러나 사흘 뒤인 9월 26일, 내셔널리그 사무국은 오데이 주심의 판결이 옳은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경기는 무승부로 처리하며 정규시즌이 종료된 후 자이언츠와 컵스가 재경기를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재경기로 승부를 가려야 한다고 최종 결정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경기 이후 자이언츠는 5연패의 부진에 빠졌고, 시즌이 끝났을 때 자이언츠와 컵스는 98승 1무 55패로 동률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자이언츠는 컵스에 2 : 4 로 패함으로서 다 잡았던 내셔널리그 챔피언의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다. 승리한 컵스는 월드시리즈에서도 아메리칸리그 챔피언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4승 1패로 가볍게 따돌리고 월드시리즈를 2연패했다. 1908년 자이언츠가 결국 우승에 실패하자 뉴욕 언론들은 머클의 어이없는 주루 플레이에 대해 대서특필했다. 그 내용은 "머클의 본헤드 (Merkle"s Bonehead)" 라는 제목으로 신문들마다 대문짝만하게 도배되었고,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19살의 어린 선수는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것을 극복해내지 못하고, 평범한 선수로 이팀 저팀을 떠돌다 은퇴하고 말았다.
사소한 실수 하나에도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며 머클의 본헤드, 머클의 본헤드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어떤 선수가 버텨낼 수 있겠는가? 아무튼 프레드 머클이라는 이름은 본헤드 플레이라는 야구 용어와 함께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 기억되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머클은 죽은 뒤에도 자신의 이름은 확실하게 남기긴 했다. 다만 그 이름이 돌머리라는 말과 항상 붙어 다닌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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