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복은 음력 6월에서 7월 사이에 들어 있으며 하지(夏至) 후 셋째 경일(庚日)을 초복(初伏), 넷째 경일을 중복(中伏), 입추(立秋) 후 첫 경일을 말복(末伏)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혹은 삼복이라 한다. 복날은 10일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린다. 그런데 때로 입추가 늦어지는 해가 있으니, 이런 해에는 말복도 따라서 늦어져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복이 넘었다는 뜻이다. 올해는 양력 7월 11일이 초복, 7월 21일이 중복 그리고 월복을 해서 8월 10일이 말복이 된다.
복(伏)에 대해서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희(劉熙)가 지은 사서(辭書)《석명(釋名)》에 기록이 남아있다고 하는데 이 伏은 오행설(五行說)에 있어서 가을의 서늘한 금기(金氣)가 여름의 더운 화기(火氣)를 두려워하여 복장(伏藏 : 엎드려 감춘다)한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라고 전해지고 있고, 최남선의《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는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즉 복(伏)은 꺽는다는 뜻으로, 복날은 여름 더위를 꺽는 날이다. 더위를 피하는 피서가 아니라 더위를 정복한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경(庚)'은 '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의 일곱 번째 천간(天干)으로 '뜯어 고친다'는 뜻과 함께 '새로운 시기를 연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다.
복은 원래 중국의 속절(俗節 : 제삿날 이외에 철이 바뀔 때마다 사당이나 조상의 묘에 차례를 지내던 날)로 진(秦)·한(漢) 이래 매우 숭상된 듯 하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상고하면《사기(史記)》'진본기(秦本記)에 이르기를 진덕공(秦德公) 2년(기원전 679년)에 처음으로 삼복 제사를 지냈는데, 개를 잡아 성(城)의 사대문(四大門)에 달아매고 충재(蟲災)를 방지했다"라는 내용이 전한다. 이로 보아 삼복은 중국에서 유래된 속절로 추측된다.
삼복은 일년 중 가장 더운 시기[혹서(酷暑)]여서 '삼복더위'라는 말이 생겨났다. 조선시대 궁궐에서는 종묘(宗廟)에 피,기장, 조, 벼 등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더위를 이겨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빙고(氷庫)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다
삼복이 되면 사람들은 너무 더워 입맛을 잃고, 또한 땀도 많이 흘려 몸이 많이 약해진다. 어린이들은 낮이 되면 시냇가에 몰려가 물장난을 치며, 밤이 되어도 집밖에서 논다. 집안은 무덥고, 또한 더위로 잠도 잘 안오기 때문이다. 어른들도 한낮이 되면, 일손을 멈추고 나무 그늘에서 바람을 쏘이며 땀을 식히고 낮잠을 자기도 하며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산간의 시원한 계곡에 들어가 탁족(濯足)을 하며 더위를 식히기도 했다. 폭포가 있는 고장에서는 '폭포 물맞기' 놀이를 했고, 해안 지방에서는 바닷가 백사장에서 모래찜질을 하면서 더위를 이겨내기도 했다.
또한 삼복 더위가 한창 심할 때는 더위를 먹거나 전염병에 걸리는 등 건강을 해치기 쉽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위를 식히기 위해 시원한 과일을 먹고, 몸의 건강을 되찾기 위해 고기를 먹었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 같은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왕족이나 고관대작이 아닌 보통 사람들은 여름에는 얼음을 구경할 수 조차 없었다. 다만 수박이나 참외를 나무 그늘 그윽한 시냇물 속에 담가 두었다가 나누어 먹음으로써 시원함을 맛볼 수 있었을 뿐이다.
우리 조상들은 더위를 찬 것으로써만 피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위를 이겨내기 위해 오히려 맵고 뜨거운 것을 먹으려 했으니 이른바 '이열치열(以熱治熱)'을 실천했던 것이다. 삼복 더위 때 먹는 것으로 육개장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쇠고기를 삶아서 알맞게 뜯어 매운 양념을 넣고, 푹 끓인 국이다. 이 국은 뜨겁고 매워, 먹는 사람이 눈물까지 흘리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오히려 몸 속이 시원해지고, 입맛이 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육개장 속에 넣은 고기는 여름내 허약해져 있는 몸에 영양을 보충해 주고,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육개장은 원래 개장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 중국에서는 복날이 되면 벌레를 좇는 의식으로 성문 밖에서 개를 죽였는데, 이 풍습을 본떠 우리 나라에서는 복날 개를 잡아먹게 되었다 한다. 개를 잡아 그 고기로써 끓인 국이 개장국(拘湯)인데 보리밥과 함께 먹는다. 그 조리 방법은 육개장을 끓이는 방법과 같다. 복날에 특히 개장국을 먹었던 것은, 개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고, 또한 다른 고기보다도 영양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고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아, 복날에 고깃국을 끓여 먹되, 개고기가 아닌 쇠고기를 넣어 끓인다. 그래서 이 고기국을 육개장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농가에서는 중병아리를 잡아 그 배를 가르고 인삼과 대추와 찹쌀을 넣어 계삼탕(鷄蔘湯)을 끓여 먹는다. 또, 밀가루로 만든 국수에 닭고기를 넣어 먹기도 했다. 이렇게 닭을 먹으면 몸의 원기가 회복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계삼탕은 삼복 때가 아니더라도 기운을 돋우고, 입맛을 되찾는데 좋은 음식으로, 오늘날까지 삼계탕(蔘鷄湯)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복날에는 동짓날과 마찬가지로 팥죽을 먹기도 한다. 팥죽은 색이 붉으므로 나쁜 귀신을 쫒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팥죽에는 찹쌀로 새알심을 만들어 넣어 먹는다. 삼복 중에는 밀가루로 전병(煎餠)을 부쳐 먹는다. 밀가루에 물을 부어 질죽한 밀가루 물을 만든 다음, 그 속에 호박이나 감자 등을 썰어 넣고 잘 섞은 후, 숟가락이나 국자로 떠서 번철(燔鐵 : 지짐질에 쓰는 솥뚜껑을 젖힌 모양의 무쇠 그릇)에 기름을 두르고 지진다. 이렇게 만든 밀전병은 밥 반찬으로 간장을 찍어 먹는다. 또한 흰떡을 가늘고 짧게 썰어, 돼지고기와 호박 등의 양념을 넣고 떢볶이를 해 먹는다. 이러한 음식들은 여름철에 많이 나는 채소로 만든, 소박한 계절의 별미라고 할 수 있겠다.
삼복 기간이 지나면 더위는 한풀 꺾이고, 산들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이 때부터 여름은 서서히 물러가고 가을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복날은 특별한 명절은 아니지만, 그 풍습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복날에는 과일이 많이 팔리고, 또한 보신탕이라고 불리는 개장국도 많이 찾는다. 또한 시원하고 맛 좋은 물을 찾아 약수(藥水)터에 모이는 사람들이 유달리 많아진다.
삼복에 얽힌 속담으로, "삼복에 비가 오면 보은(報恩) 처녀의 눈물이 비오듯이 쏟아진다."는 말이 전해진다. 대추나무는 삼복 중에 열매가 열린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비가 오면 그 열매가 떨어져 익는 것이 얼마 안 된다. 대추나무를 심어서 그 대추를 팔아 먹고 사는 충청 북도 사람들은 대추를 위해 비가 오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보은의 처녀들은 이 대추를 팔아 시집갈 때 그 비용으로 쓰므로, 그런 속담이 생긴 것이다.
복날과 관계 있는 속신(俗信)으로는 '복날에 시내나 강에서 목욕을 하면 몸이 여윈다.'는 것이 있다. 이러한 속신때문에 복날에는 아무리 더워도 목욕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복에 목욕을 하였다면 중복과 말복 날에도 목욕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경우에는 복날마다 목욕을 해야만 몸이 여위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삼복과 개장국(拘湯 : 보신탕)
△ 하필이면 왜 복날에 개를 많이 먹을까?
한의학자 이영종 교수(경원대)의 이론에 의하면 "여름은 그 자체가 불[火]이다. 게다가 더위의 절정인 삼복은 경일(庚日)로 화기(火氣)가 왕성하면서도 쇠[金]에 해당한다. 따라서 복날은 불이 쇠를 녹이는 화극금(火克金)이므로, 쇠를 보충하기 위해 개를 먹어야 한다. 개에게 쇠의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고 한다. 영양학적 측면 이상으로 동양의학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여기서 이냉치열(以冷治熱)이 아닌, 더울 때 더운 음식을 먹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을 선택한 것도 같은 맥락(脈絡)이다. 더위를 근본적으로 이기는 현명한 처사인 셈이다.
복날에 개장국을 끓여 먹는 풍속은 여러 세시기(歲時記)에도 나타난다. 이들 기록은 개고기의 효능과 복중(伏中)에 개장국을 절식(節食)으로 즐기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의하면 "복날에 개장국을 끓여 조양(助陽)한다."는 기록이 있고, 또《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개장국을 먹으면서 땀을 내면 더위를 물리쳐 보허(補虛)한다."고 하였다. 또《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에는 황구(黃狗)의 고기가 사람을 보한다고 하여, 황구를 일등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볼 때, 개장국은 우리 민족이 건강식으로 널리 즐겼음을 알 수 있다.
허준이 저술한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개고기는 성질이 따뜻하고 맛은 시고 짜며 오장을 편안하게 하며 몸의 허약한 것을 보충하고 혈맥을 조절하고, 장과 위를 튼튼하게 하며, 골수를 충족시켜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고 양기를 돋구어 기력을 증진시킨다."는 기록이 있어 개고기의 효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방에서는 사람의 몸도 사계절의 변화와 같은 변화를 겪는다고 보아 여름에는 나무나 풀이 울창하게 피어나는 것처럼 몸의 양기가 모두 몸의 표면으로 나오고 속은 찬 기운만 남는다고 한다. 여기다가 여름에는 찬 음식을 많이 먹게 되니까 속은 점점 더 차가워지게 되며, 속이 차가우면 소화기능이 떨어지고 설사도 잦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의 기운도 점점 떨어지게 되어 거꾸로 더위에 이기는 저항력은 점점 약해져서 몸의 표면은 점점 더워진다고 한다. 이럴 때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으면 속이 따뜻해지면서 기운이 생기고 더위를 이길 수 있는 저항력도 생긴다고 한다.
예전부터 덥디 더운 복날에 개장국이나 계삼탕을 먹은 이유는 이렇게 더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이다. 더위를 피하기보다는 맞붙어 싸운다고나 할까? 다만 같이 개장국이나 계삼탕을 먹어도 더위에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이 생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개장국이나 계삼탕을 먹으면 가슴이 답답하고 더더욱 더위를 느끼는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원래부터 속에 열이 많은 소양인체질일 경우가 많다고 한다.
△ 개고기의 연원
늑대과에 속하는 개가 가축으로 길들여진 시기는 대충 신석기 시대로, 역사학자들은 신석기시대 유물에서 다른 동물의 뼈와 함께 개 뼈가 발견되고 있어 이미 이 시기에 개를 식용한 증거로 들고 있다. 후기 철기시대(기원전 450∼50년)의 골족(갈리아족) 유적을 발굴했을 때 요리찌꺼기 속에서 소·양·염소·돼지·말과 같은 정육점 동물들의 해골 외에 개의 해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문화인류학자 '마빈해리스'는 그의 저서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서 "농경사회에서 소는 그 사회의 중요한 노동제공 수단으로 중요시되어서 감히 일반인이 식용할 수 없는 가축이었고, 대신 개가 주요한 육고기의 섭취원이 되어 왔다"고 언급했다.
문헌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개 식용의 역사는 중국 측 자료에 먼저 나타난다. 《논어》에서는 제사에 개고기를 쓴다는 기록이 있고, 《소학》에는 제사와 손님 접대에 군자는 소를 쓰고 대부는 양 그리고 선비는 개를 쓴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사마천의《사기》'번역등관열전'에는 무양후(舞陽候) 번쾌가 개도살을 생업으로 하면서 한고조 유방(劉邦)과 은둔하고 있었다고 씌여져 있고, 같은 책 '자객열전'에는 진시황을 암살하러 갔던 당대 최고의 검객 형가(荊軻)가 연나라에서 개백정이며 축(거문고의 일종)을 잘 타는 고점리(高漸離)와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개고기 음식문화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벽화에 개를 잡는 장면이 보이고, 역사적 근거로는 《고려사》에 '개고기를 구워먹었다'는 구절이 있다. 또한 유교가 지배하던 조선조 《왕조실록》에 중종 31년 김안로가 개고기를 좋아하여 아첨배들이 개고기를 뇌물로 바치고 벼슬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고,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 잔칫상에 황구(黃狗)를 삶은 구증(拘蒸)이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정약용(丁若鏞)의 둘째아들 정학유(丁學游)가 지은 《농가월령가》8월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며느리 말미받아 본집에 근친(覲親)갈 제, 개 잡아 삶아 건져 떡고리와 술병이라"
다산 정약용도 멀리 남도 바닷가로 유배 간 형 정약전(丁若銓)에게 올린 편지에서 개고기의 영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지극히도 형을 아꼈던 다산은 형의 몸을 걱정하여 개고기 조리법까지 상세히 적어 보내면서 애꿎게 개고기를 타박하는 사람들의 잘못된 선입견을 지적하기까지 했다.
△ 보신탕 논란 (2001년 7월 15일자 한국일보에서 정리)
개고기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식이다. 중국 광둥성과 일본에서도 '향육'이라는 이름으로 식용 혹은 약용으로 개고기를 먹지만, 우리만큼 대중적이지는 않다.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은 만큼 한국 내에서는 논란도 많다. 해방 이후, 특히 최근 들어 애완견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이 늘면서 개고기는 혐오식품의 하나로 낙인 찍혔다.
한국의 개 식용문화가 문헌상 외국에 최초로 소개된 것은 1847년으로 당시 프랑스 선교사 달렌은 ‘조선교회사(朝鮮敎會史)’라는 책에서 "조선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는 개고기”라고 썼다. 소와 돼지에 비해 값이 싼 개 역시 가축 대용으로 여겨졌음에 틀림없다. 이에 앞서 삼국시대 벽화에도 도살된 양, 돼지와함께 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음식이 바로 보신탕인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이 간판마다 개장국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야만인 습성이니 못하게 하라"고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음성화한 음식문화로 존재하던 개고기 요리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된서리를 맞았다.
외국 관광객들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에서였다. 큰길가에 자리했던 식당들은 뒷골목으로 쫓겨나거나 간판 이름을 바꿔야 했다. 이 때 탄생한 명칭이 '보신탕' 혹은 '영양탕'. 개장국이라는 고유의 명칭은 잊혀졌다.
보신탕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마다 여름이 다가오면 거르지 않는 홍역처럼 논쟁에 휘말렸던 것. 이중 특히 유명한 주장이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의 '보신탕 반대론'. 서양의 애완견 문화 속에서 개고기 식용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냈다. 최근에는 개고기를 도살하는 과정에 대한 문제 제기도 이어지고 있다.
개고기 반대 운동본부는 동물학대 방지 차원에서 개고기 식용 반대를 주장하고 있다. 회원 박신정(36·여)씨는“가족처럼 함께 생활하는 개는 다른 육고기와는 다르다"며 "인간이 아닌 동물 전체에 대한 관심을 갖자는 취지로 초복을 맞아 개고기 추방대회를 갖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회사원 오모(30)씨는 "64년 일본 도쿄 올림픽 당시 미국에서는 야만스럽게 날 것을 먹는다는 이유로 스시(생선회)를 문제삼기도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그들도 즐기는 요리가 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문화 다원주의로 음식을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개고기 식용 문화가 계속되는 한 '타협할 수 없는' 논쟁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