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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교인드라망 원문보기 글쓴이: 향성181(219부팀장/기자단)
불기2560년 6월 5일 일요일
음력 5월 초하루 신중기도...
회주큰스님께서 함께 하시어 법우님들의 서원을 담은 축원문을 대중스님들과
정성껏 축원해 주셨고 청정한 마음으로 공양물을 올리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올리는
법우님들로 법당마다 복도마다 뜨거운 기도열기와 환희심이 가득하였다.
큰스님께서는 음력5월 초하루신중기도 법문으로 무문관 수행기간 동안 읽고
외우시면서 큰 법열을 느끼셨던 '증도가, 깨달음의 노래'에 대한 법문을 해주셨다.
음력5월 초하루 신중기도 특별법문입니다.
증도가 유인물 4번입니다.
모두 합장하십시오.
법(法)신(身)각(覺)료(了)무(無)일(一)물(物)이니 본(本)원(源)자(自)성(性)천(天)진(眞)불(佛)
이로다.
나무아미타불.
벌써 또 초하루입니다. 저는 초하루가 닥칠때마다 시간의 흐름이 참 빠르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부지런히 기도하고 수행하는 그러한 불자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이 증도가 이어서 제4편 법신각료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
이 부분을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한문 다시 보겠습니다. 법신각료무일물이니 본원자성천진불이라.
이 대목은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다했으니 부정하는 말이고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했으니 긍정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불교는 때로는 긍정하고 때로는 부정하면서 그 실상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래 5번에 보면 차(遮)조(照)동(同)시(時)라 읽어보겠습니다.
차조동시, 차조동시 바로 부정과 긍정을 동시에 수용한다. 이 말입니다.
이러한 관을 중도관이라 이렇게 말해요.
우리는 세상을 관찰할 때 늘 중도적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법신각료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이라.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좀 이해는 됩니까? 이해가 되신다니 대단한 일인데요.
이것은 깨달음의 세계에서만 얘기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다 방편설입니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서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은 조사들의 말씀은 바로 직설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은 중생에서 부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중생이 부처되도록 하는 어쩔수없는 많은 개념들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무명이니 불성, 또는 번뇌와 열반, 망심과 진심, 이런 말들을 자꾸 꺼다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무슨 궁극체가, 궁극적인 그런 자리가 있는 양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지막에는 뭐가 손에 잡히는 그리고 눈에 보이는 무엇이 있지 않느냐.
늘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완전히 깨닫고 나면 여기서 보이는 것처럼 한물건도 없습니다.
즉,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입니다.
이를 증도가에서는 법신각료무일물이라 딱 한마디로 내놨습니다.
한번 읽이보겠습니다.
법신각료무일물.
그래서, 이런 경우를 법화경에서는 유인물 4번에 보면 상(常)자(自)적(寂)멸(滅)이라.
이래놨어요. 읽어보겠습니다. 상자적멸 항상 스스로 적멸하다 이랬어요.
그걸 또 5번에 뒤에 보면 공(空)공(空)적(寂)적(寂)이라.
바로 공공적적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거는 우리가 아까 외웠던 반야심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어요.
반야의 지혜로 보니 오온이 다 공하더라했어요.
그래서, 오온개공이라 그랬거든요.
오온개공, 그 다음엔 또 뭐지요.
도일체고액이라.
그러니깐, 일체고액이라 도일체고액이라는 말은 일체고통과 액난을 다 건넌다.
이 말이잖아요.
일체가 다 공했음을 철저히 깨달아 버리면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다 건너간다.
이 말이요.
일체가 다 공했음을 철저히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수행을 하는 거죠.
여기서 이 증도가의 이 표현은 뭐냐?
법신 즉 진리를 깨달으면 깨닫고 나면 한 물건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이 말입니다.
깨닫고 나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음을 깨달으면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 들어가 버리면 일체 고통과 액난도 다 벗어난다.
이렇게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 여기봐야 할 단어가 각료라는 말입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각료, 각료 깨달을 각자에 료자는 마친다는 료자도 되지만 여기서 또 깨닫다, 깨닫다는 료자입니다.
그래서, 각료는 깨달아 마침 또는 깨달음입니다.
깨닫는 일입니다.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각료, 각료.
저 창녕쪽에 가면 각료암이라는 아주 아담한 통도사 말사 절이 있습니다. 그 절에 주지스님은 법명이 우보라 해서 저하고 같은 우자를 씁니다. 그래서 같은 동문이고 같은 행자 기수 도반이고 그런 분인데 저는 이 그런 도반들을 만나면 참 마음이란 것이 참 묘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도반이라 하면 다 떨어져서 수십년을 떨어져서 살지만은 그래도 만나게 되면 저 사람은 우리 도반이지, 저 사람은 우리 동문이지, 이런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친근감이 생겨요. 믿음이 가요. 물론 나이도 차이가 많이 나고 여러 가지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은 도반이다. 이 하나, 동문이다. 이 하나만으로도 친근감이 간다. 이 말이지요. 우리 이 한국불교대학은 저 사람이 한국불교대학 출신이다. 또는 한국불교대학에 지금 다니고 있다. 이것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말이 딱 있어요. 그게 뭡니까? 관세음보살이라는 거라. 관세음보살 어디가서 뭐 이렇게 얘기를 나누다보면 대부분 다 관세음보살을 얘기해요. 인사도 관세음보살 이렇게 말하잖아요. 딴 절에 사람들은 대부분 성불하십시오. 그렇게 말하지요. 근데 우리절은 전화를 받아도 관세음보살 서로 인사를 해도 관세음보살 그래요. 관세음보살 소리만 들어도 아 저 사람은 우리하고 같은 사람이구나, 이런 친금감이 생기잖아요. 그래, 전국의 스님들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디가서 스님들한테 관세음보살 해봐요. 아! 저 사람은 한국불교대학 사람이구나 딱 알아차려요. 이게 소문이 하도 많이 나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참 인연이라는게 참 묘하다. 참 인연이라는 것이 대단한 것이다. 이런 생각도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불교대학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간판, 이 간판을 지고 다닌다. 이런 생각을 해야 되고 또 도반들끼리도 좀 잘 사귈 필요가 있습니다. 죽어도 인제는 법형제라, 이렇게 법을 통해서 같은 모임을 갖는 그런 사람은 법도반이라, 법형제라 이래 볼수도 있어요. 한번 읽어보겠어요. 법형제 법형제. 그러니깐, 우리는 도반들끼리, 기수끼리 잘 화합하고 잘 다녀야되지. 좀 마음에 안 든다해서 싸우고 또 뭐 좀 요즘 말로하면 수틀린다 해서 안나오게 되면 본인만 손해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정법도량과 인연을 잘 맺었으니 죽을때까지 이 정법에 의지해서 정법도량에 의지해서 가셔야 합니다. 2041년, 2041년이 33년 기도가 끝나는 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25년, 25년후라 자기 나이에 25년을 보태봐봐요. 그때되면 몇살인고 근데 그때까지는 살아야 되요. 나이가 많든, 적든간에, 그동안에 계속 관세음보살을 불러야돼 그러니까 언제나 관세음보살을 의지하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이렇게 살아야 되요. 그러다가 누구든지 죽지 않을 수는 없는거니까, 죽어도 2041년 이후에 죽으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2041년 이후에 죽게 되는데 죽으면 반드시 염라대왕앞에 불려갑니다. 호출이라 호출됩니다. 염라대왕앞에 떠억 가게 되면, 우리는 인사할 때 뭐라 그랬지요? 관세음보살 염라대왕을 보자마자 관세음보살 해버려야 되요. 지금 염라대왕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한번 불러봐요. 관세음보살 그러면, 염라대왕이 아이쿠, 저 사바세계 거 잘난 한국불교대학에서 온 사람이구나 하고 딱 알아차리고 염라대왕이 자기가 먼저 놀라가지고 벌떡 일어나서 아이고 어서오십시오. 이래할겁니다. 분명히 그래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외우고 정법도량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수행하면 반드시 염라대왕도 일어나서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판관을 불러가지고 저 사람은 거 사바세계에서 그래도 열심히 살려고 수행할려고 한 그런 분이니까 가산점을 판관을 불러 말하기로 50점을 주라 그래할꺼요. 그러면 50점만 보태지면 왠만하면 극락을 가게됩니다. 야튼 극락 갈 수 있는 아주 뭐 좋은 조건을 우리가 갖추고 있는거니까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이고, 스님 뭐 그럴라꼬요. 뭐 그렇게 또 볼 수도 있지만은 우리가 오늘 연휴인데다가 내일이 또 뭐 노는 날이라면서요. 보니까 달력에 빨갛게 되있더라구요. 내일 노는 날이고 오늘 노는 날이고 이런 연휴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나와서 법회동참하시고 또 뭐 여기에 대부분 불교대학 공부시간에 나와서 또 부처님 진리공부하지요. 또 뭐 봉사할 일 있으면 또 봉사를 하고 그러잖아요. 포교도 또 열심히 하고 그러시니까 이 정도면 그냥 잘 하는 편입니다. 아주 썩 잘하지는 않는데 그냥 수우미양가로 나누면 우 이상은 안 되는가 이래 생각이 되요. 그래서, 이 정도면 잘하는거니까 염라대왕앞에 가면 가산점을 좀 받을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아 우리는 잘 났다. 막 자만심이 나서 상을 내는건 안 되지만 스스로 아 우리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야. 스스로 위로는 그렇게 해도 됩니다. 한번 따라해보십시오. 우리는 잘났다. 우리는 아주 잘 났다. 법신각료무일물이라 이 각료를 설명하다가 저 저승까지 갔다 왔습니다. 여튼 우린 저승가서도 당당한 불자가 되있어야 됩니다. 그럴려면 이생에서 부지런히 수행을 하고 있어야 되요.
아무튼 각료라는 말은 깨달을 각자에 깨달을 료, 깨닫는다 료자로 봐야 되요.
각료라 즉 깨달음,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수행으로부터 옵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헛일이요. 오늘 이렇게 모여서 기도하는 것도 또 수행의 일종입니다.
그래서, 교리는 당연히 배워야되요. 그러면 교리를 배우지 아니하고 수행만 하면 됩니까?
그거 아주 위험해요. 교리를 또 안 배운 사람들은 뭡니까?
교리 안 배운 사람들과는 말도 하지마세요.
불교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하는 것은 기본이라. 그래서, 공부하지 아니하고 뭘 기도 잘못하다보면 삿된데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튼 교리도 배워야 되고 또 수행도 해햐 된다. 이 말이지요. 그것을 전문용어로 정혜등지라. 정과 혜가 같이 지녀져야 된다.
정혜등지해야 합니다. 읽어보겠습니다. 정혜등지! 선정과 지혜를 같이 지녀야 된다.
이 말입니다. 계속 깨달음, 각료 깨달음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깨달음의 정의를 최근에 조계종에 이름있는 어떤 큰스님이 말하기로 단순히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이렇게 말했다가 선방에 있는 스님들로부터 아주 호되게 야단을 맞고 욕을 대박으로 얻어 먹은 사람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깨달음은 이해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서 체험의 그런 세상입니다.
체험입니다. 그러니까 내면적 체험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라니를 외우고 이런 기도에 동참하는 것도 다 체험입니다. 이해로써는 안된다.
이 말이죠.
이해한다면 사람들이 다 건강하죠. 건강을 예로 든다면 말이죠.
요즘 사람들 건강에 대한 상식이 얼마나 많습니까? 안 그래요?
건강할라면 어떻게 해요? 담배 안 피면 되고, 술 안 마시면 되고, 스트레스 안 받으면 되고, 부부간에 안 싸우면 되고, 자식하고 안 싸우면 되고, 거 다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지만은 이게 마음대로 됩니까?
이 수행 안하면 이게 마음대로 되냐 이거죠? 이 수행을 하지 않으면은 실천이 되지 않는다. 스트레스 안 받고 싶다고 해서 안 받아지냐 이거죠? 가족들끼리 싸웠는데 이 뚜껑이 안 열릴 수 있냐?
이게. 뚜껑열리잖아요?
근데 근본적으로 스트레스를 안 받고, 근본적으로 뚜껑이 안 열릴려면 수행해야 합니다. 수행하면 아예 그런 마음, 스트레스 받을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입니다.
음, 그래서 불교는 이해하는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있습니다. 이해로는 안된다.
이 말이죠.
이해라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 이랬거든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면 그 달이 손가락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잘못하다 보면 손가락, 손가락 끝에 달이 있는 줄 착각합니다.
우리는 그걸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잘못하는 사람들, 불교 공부 끝을 못 본 사람들은 대부분 다 그런 착각에 빠져있고 또, 교리 공부 좀 한 걸 가지고 상을 냅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우쭐대고 잘났다고 지 잘났다고 상을 냅니다. 그러한 한계를 우리는 벗어나야 됩니다.
전국적으로 요즘 포교사가 많이 생겼는데 우리절 포교사는 그래도 대부분 잘하는 편입니다.
우리절 포교사는 아까도 말했지만은 초,중,고,대,청년회 전체 지도선생님, 법사로서도 활동도 하고 또 우리의 포교사들은 여러 처소에서 봉사도 하고 절수행도 많이 하고, 또 어떤 때는 야간 철야에 기도도 하고 그런걸 많이 보게 됩니다.
근데 이 다른 곳에 있는 포교사들이 욕을 얻어먹는 이유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포교사가 되면 다 됐다고 생각하는거요. 그래서, 스님들도 막 무시해요. 스님들보다 우리가 낫다.
이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또 우리는 더이상 배울게 없다. 더 이상 배울게 없다는 그런 아만에 빠져 있어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다 아이고 뭐 저 포교사 저 사람들 너무 배출하면 안된다.
막 그렇게 말하거든요.
얼마전에 제 부산에 사는 도반 스님을 감포도량 무일선원에서 만나게 됐는데 그 스님 또한 또 그래요. 자기 절에 포교사가 몇 명있는데 밉어 죽겠다는거요.
자기가 뭐 잘났다고 자기를 막 무시하는거요.
그래서, 당신은 여기 필요없으니까 좀 가 달라고 그랬더니 아이고 여기 절 아이면 절 없느냐고 하면서 아주 또 우리가 비아냥된다 하잖아요.
비아냥되면서 상이 높아 가지고 전에는 봉사도 잘하고 열심히 포교도 하고 이랬던 사람인데 포교사가 되고 부터 그렇다는 거에요.
그나마 우리절 포교사들은 대부분 그래도 기도도 열심히 하고, 수행도 열심히 하고, 또, 초,중,고,대, 또는 홍보팀 이런데서도 열심히 하고 해서 다행입니다.
아무튼 포교사가 됐던지 불교공부를 어떻게 했던지 간에 반드시 이 공부는 마음공부로 나아가야 되요. 경전공부에서 마음공부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사경하는 것도 다 마음공부로 나아가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래서 마음공부는 내면적 체험입니다.
이 마음공부는 내면적 체험을 위한 그런 실참이라. 실참! 실지로 내 마음을 닦아가는 것을 실참이라고 말해요.
그래서 오늘 여기와서 108배를 올리고 신중기도를 하는 것도 결국엔 실참이라.
누워서 집에 오늘 같은 날 그냥 편안하게 누워있을 수도 있고 집안에서 그냥 놀수도 있지만은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이 마음공부 때문에 오신거든요.
아무튼 우리들은 전부 수행자가 되야 되고 마음 닦는 그런 불자가 되야 된다는 겁니다.
수행을 통해야 이 깨달음의 소식이 있습니다. 각료! 깨달음의 소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일날, 재일 잘 지키시고 초하루날 꼭 초하루날 찾으시고 이래해야 됩니다.
그리고, 참선할 수 있으면 참선도 하시고 또, 관음정근은 말할 것도 없고 관음정근 하시고 또, 사경하시고 또, 금강경 독송하시고 하는 것들이 다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한만큼 힘이 생겨요. 수행을 한만큼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끝내는 궁극의 자리에 들어가요. 끝내는 궁극의 자리에 들어가는데 그 자리가 무일물의 자리라. 무일물!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요.
이게 한 물건도 없는 자리에 들어가요.
이걸 잘못 보면 또 아주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근데 실상 그대로를 말하자면 무일물이라.
무일물을 가장 최초로 쓴 사람은 육조 혜능이라는 스님입니다. 우리들이 많이 아는 얘기지만 상기하는 의미에서 다시 말씀드리면 전등록등, 선어록에 보면은 5조 홍인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셨는데 때가 되어서 후계자를 지목하게 되었숩니다. 후계자 지목을 법을 부촉한다. 불교에서는 이 법을 늘 얘기합니다. 법! 이 법당이잖아요? 그래서, 법을 인연하고 법을 배우고 하는 것, 그보다 중요한건 없어요. 아무튼 법을 부촉한다. 이렇게 말해놓고는 광고를 내기로 자기가 깨달은 바를 다 내놔라. 현재 자기의 마음상태, 마음 수준을 다 표현하는 글을 다 내라. 숙제를 냈어요. 당시 700명의 스님이 그 절에 있었는데 대부분 스님들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근데 그중에서 가르치는 신수라는 스님이 용기를 내 가지고 저녁에 회랑 벽에다가 글을 섰습니다. 그 글 내용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로 이 1번 내용입니다 신(身)시(是)보(菩)리(提)수(樹) 심(心)여(如)명(明)경(鏡)대(臺) 시(時)시(時)근(勤)불(拂)식(拭) 물(勿)사(使)야(惹)진(塵)애(埃)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앉고, 때묻지 않도록 해라. 안면있습니까? 더러 안면있는 분도 계실겁니다. 십년, 이십년 되신 분들은 이 정도는 다 알겁니다. 아무튼 이러한 게송을 이 신수스님이 벽에 다가 써 붙였는데 그 뒤에 나중에 이 노행자 방앗간에서 방아짛는 행자가 이 소리를 듣고는 이게 게송이 아주 거창한 게송입니다. 이 게송이 나쁘다는 게송도 아니고 보통 공부인의 입장에서는 이만한 게송을 짓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이 게송을 들은 방앗간에 행자 이제 8개월 된 행자가 이 얘기를 듣고는 아 이 사람은 아직도 완전한 경지에는 올라가지는 못 했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행자는 이때 아직 글을 몰랐던 사람이라 글 모른다해서 지혜가 없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행자중에서 아주 일찍이 글을 배운 동자승 하나를 데리고 밤에 몰래 신수 큰스님이 적어놓은 게송옆에 갔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자기가 부르고 중국권이니까 한문으로 불렀겠죠. 부르고 그 동자승이 받아 적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보(菩)리(提)본(本)무(無)수(樹) 명(明)경(鏡)역(亦)비(非)대(臺) 본(本)래(來)무(無)일(一)물(勿) 하(何)처(處)야(惹)진(塵)애(埃)라 보리수 본래없고 명경 또한 대가 아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 앉고, 때 끼이겠는가? 그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보리본무수 명경역비대 본래무일물 하처야진애 보리수 본래없고 명경 또한 대가 아니다. 명경은 뭡니까? 명경! 거울입니다. 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본래무일물이라 무일물 나왔네요. 본래 한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앉고, 때 끼겠는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본래무일물, 본래무일물 여기 그래놨잖아요. 본래한물건도 없다 해놨습니다. 본래한물건도 없다 여기서도 아무것도 없다 그래놨잖아요. 이런 경우를 보면서 저는 사람은 반드시 전생이 있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전생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절에 들어온지 이제 8개월이라 아 그런데 8개월된 행자가 이런 게송을 읊을 정도로 그 지혜가 출중했다. 이 말이죠. 전생부터 공부, 수행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엄청난 내면의 소리가 나올수 있느냐, 이 말이죠. 우리가 생이지지라 날 때부터 아는 사람도 있다했습니다. 날 때부터 지혜가 똑똑한 그런 사람이 없지 않아 있거든요. 날 때부터 지혜수준 높고 날 때부터 복덕의 수준이 높은 사람이 없지 않아 많습니다.
요즘은 흙수저니, 금수저니, 은수저니 그런 말 쓰데요.
사실은 그것이 현실입니다.
날 때부터 금수저 있어요,
날 때부터 아무리 고생하고 노력해도 잘 안되는 흙수저 있습니다.
아무튼 이게 다 과거전생에 업 때문에 그런거라 이건 어쩔 수 없어.
이걸 우리가 부인할 수가 없어 이게.
이 날때부터 천재가 있고 날때부터 둔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똑같은 책을 가지고 가르치는데도 어떤 애들은 잘 알아 듣고 금방 다 터득을 하고 천재소리를 듣잖아요.
어떤 애들은 아무리 지박아도 거 이해를 못해. 옛날에는 공부하다가 지박히는 수 많았거든. 요즘은 지박다가는 그 어머니도 고발당하는 그런 시대가 돼 버렸는데 얼마나 답답하면 자기애 머리를 지박겠습니까?
아무튼 천재, 둔재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똑같은 반에서 똑같은 선생님이 가르치는데도 어떤애들은 천재가 있고, 어떤애들은 둔재가 있거든 이것은 다 전생에 닦는 복과 지혜때문에 이 생에 와서 이래 달라진다.
그렇게 봐야 됩니다.
그럼 이제 우리가 현재적으로 생각하면 공부하고 참선하고 수행하잖아요.
이것은 다 지혜로 다 저축이 됩니다. 공부하고 참선하고 요런것은 다 수행, 우리가 뭐 사경명상하고 요런것들이 다 지혜로 다 저장이 되고
또 반면에 우리가 적선, 좋은 일하고 봉사를 하고 천도재를 지내고 포교하고 이런 것은 복덕으로 다 저축이 되요.
그래서 사람이 살아가자면 꼭 필요한 것이 지혜와 복덕인데 우리 한국불교대학 같은 이런 정법도량에 와서 시키는대로만 잘해도 다음생은 극락 내지는 다음생은 이생보다는 백배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지혜와 복덕이 출중해지면 더 이상 말할게 뭐 있냐?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법회 동참하고 공부하는 것은 다음생, 미래생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한 것입니다.
현재 행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행복,
이것이 다음생까지 연결된다면 얼마나 좋으냐. 근데 그게 연결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진실이며 참으로 진리입니다.
이러한 것을 믿고 정말 부지런히 수행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또 보면 각료라 법신각료무일물이라. 각료, 각료는 이론이나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랬어요.
실참, 온몸으로 수행해야 한다.
진짜 공부는 지극히 내면을 들여다보는 수행이라야 한다. 이 말입니다.
교리 이해를 깨달음이라 한다면 저 불교학자가 다 스님들보다 훨씬 더 도가 높다.
이렇게 봐야 할텐데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불교공부 수준에서 머무르면 안되고 반드시 마음공부로 나아가야 된다.
이 말입니다. 뭐 이런 얘기는 선어록에 얼마든지 이런 비유가 많습니다.
한 스님이 유마경을 강론하는데 어떤 한 객승으로 부터 선방스님으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말하기로 큰스님께서는 그렇게 유마경을 잘 강론하시는데 제불의 법신에 대해서 그렇게 얘기를 하셨는데 그렇다면은 강주스님, 스님의 법신은 어떠한 위치에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강주스님이 법신에 어찌 하나가 있고 둘이 있겠습니까?
선방스님이 음식을 보는 것만으로는 배가 부르지 않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려면 스스로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아주 당돌하게 권유를 했어요.
그러자, 강의하는 강주스님이 그러면 나를 위해서 한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했더니 이 선방스님이 3 내지 5일 강론을 멈추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고요히 앉아서 법신을 스스로 체달하십시오.
스스로 그 마음을 보십시오.
이렇게 권유를 했어요.
근데 이 스님이 또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
그 객스님의 말 선방다니는 객스님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4,5일쯤 지나간 어느날 드디어 큰소리로 말하기로 본래 한물건도 없는줄을 오늘에서야 알았도다.
여기 그래요.
본래 무일물이라 본래 무일물 본래 한물건도 없는줄을 비로소 알았도다.
하마터면 인생을 허비할뻔 했도다. 법신을 깨달으니 한물건도 없구나. 그랬거든요.
그래서 이 경전공부는 반드시 마음공부를 겸해야 한다. 이걸 강조하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아무튼 법신각료무일물이라 법신을 깨달으면 한 물건도 없다.
진리 법신을 깨달으면 진리를 깨닫는다. 그런말을 쓰죠?
진리를 깨달으면 뭐가 있을 줄 알았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번뇌, 망상, 욕심이 욕심이라고 하는 그런 구름이 걷히고 나면 거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툭터져서 그냥 훤할뿐이라.
우리가 번뇌나 망상이나 욕심이나 이런 구름이 늘 끼어 있거든
이것이 다 걷히고 났는데 그 자리에 뭐 있겠느냐.
파아란 하늘 그냥 툭터진 공간밖에 더 있지 않느냐.
툭 터져서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를 맛보라 이거죠.
사실은 이 한 물건이라는 말 자체도 사실은 어패가 있다 이 말이요.
그래서 육조스님하고 고 3번에 보면 3번에 그 내용이 육조혜능스님과 제자 남악회양스님과의 대화입니다.
어디서 남악회양스님이 처음 공부할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때 육조혜능스님이 물었습니다. 남악회양스님에게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집(什)마(麽)물(物)임(恁)마(麽)래(來)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혹시 자기집에 누가 찾아오면 그래요.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상대가 수준이 있으면 한 말씀할거고 수준이 없으면 저 사람 내 놀리나 그러겠죠.
저 물건덩어리 그런 말쓰잖아요. 아이고 자기애한테도 저 스님 자 물건덩어리입니다.이러데.
뭐 그 표현이 나쁜말은 아닙니다.
옛날부터 쓰던 말이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랬을때 이 남악회양스님이 답변을 못했어요.
무슨 물건이라는 말에 딱 거기에 감전된거에요.
무슨 물건? 어떤 사람이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래봐봐요. 나를 물건이라 그래.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그랬더니 남악회양스님이 공부를 많이 한 스님인데도 답변을 못 했어요.
그래서 거기서 8년을 같이 공부했어.
8년. 8년이라는 세월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8년후에야 드디어 스승에게 나아갔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설(說)사(似)일(一)물(物)이라도 즉(卽)부(不)중(中)이라. 이렇게 말했어요.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습니다. 한 물건이란 말도 맞지 않다.
한 물건이라는 말도 빌리면 안된다. 이 말입니다.
그때 스승 혜능스님이 말했습니다. 다시, 가히 닦아서 증득할 수 있는 것이냐?
닦아서 얻을 수 있는거냐? 이 말이요.
그때 말하기로 남악회양스님은 닦아서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더러움에 물들지는 않습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닦아서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더러움에 물들지는 않습니다. 요게 아주 명답입니다.
우리가 번뇌의 구름이 다 걷히고 나면 아주 훤하고 밝은 그런 하늘이 보이잖아요.
그게 증득인데 본래 하늘은 더러움에 물들어 있지는 않아요.
황사가 있다하더라도 황사 물러가면 끝이요. 안 그렇습니까?
바로 그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내용은 한 물건도 없다.
한 물건도 없다했는데 닦아서 증득할것은 있다. 이랬어요.
한 물건도 없다했는데 닦아서 증득할 것은 있다.
법신 진리는 본래 툭터져서 아무것도 없어. 툭터져서 아무것도 없어요.
번뇌의 구름이 없어진 하늘, 거 생각하면 되요. 번뇌의 구름이 없어지면 무일물이라 무일물, 사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 또 대단한 그 무엇이 나타나요.
이게. 자 이렇게 말했어요. 거 위에 봐요.
본원자성천진불이라 읽어보겠습니다.
본원자성천진불,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거 위쪽에 봐봐요.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했습니다.
밝고 밝은 밝고도 맑은 그 자리가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린거 같았는데 거기에 무엇이 나타났는데 거 무엇을 억지로 이름붙여서 천진불이라 이렇게 말해요.
바로 이 천진불은 더럽힐래야 더립힐 수 없는 그러한 주인, 당체가 되는 것입니다.
천진불, 천진 이런 말은 말만 들어도 아주 참 깨끗하고 순수하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잖아요.
거 법명에도 보면 천진불, 천진향 이런 법명을 가진 분들 있죠.
사람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면 천진불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 동자승을 늘 배출하잖아요. 동자승, 그 동자승을 천진불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 애기들은 아직은 때묻지 않은 부처님하고 똑같은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천진불이라.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아무튼 이 천진불은 아주 좋은긴데 천진불이 다 되면 좋은데 대부분 보면 다 천진불이 아니라 대부분 다 때가 묻어서 뺀질불이라 뺀질, 뺀질뺀질하고 뭐 따지기 좋아하고 자기 이속차리고 그러거든요.
아이들도 보면은 대부분 다 천진난만해 애들은 천진불이죠.
근데 애들을 보면 그 속에도 뺀질불이 있어요.
안 그러면 우리 경상도 말로 까졌다.
그래. 까져가지고 까진불이 있어 그런 애들은 봐도 미워. 그냥. 그렇잖아요?
천진불이 되야되요. 근데 천진불은 나이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정말 순수하고 순박한 그런 사람들 없지않아 있어요.
옛날에 경허스님의 상좌 혜월이라로 하는 스님이 계셨는데
그분을 사람들은 천진불이라 이렇게 불렀답니다.
한번은 절 창고에 도둑이 들었는데 야간 순찰돌던 스님
혜월스님이 떡 보니 밤손님이 왔거든요.
그래서, 다가가서 이 밤중에 어떻게 이렇게 왔느냐고?
이렇게 하면서 딴 사람보면 안되니까 짐 그거 올린거 빨리 지고 내려가라고
내가 봐 주겠다고.
그런 일도 있었다고 그래요.
아무튼 혜월스님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한번은 당시에 일제시대라
이 조선총독 미나미지로라는 사람이 총독이 천진불 큰스님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어요. 그러니까 그때 스님이 따뜻하게 대접을 했는데 그때 묻기로 어떤 것이 불법의 진리입니까?
누구든지 물을만한 그런 내용입니다.
어떤 것이 무엇이 불법의 진리입니까?
이렇게 물었더니 혜월스님이 그것은 귀신 방귀끼는 소리다. 귀신 방귀끼는 소리하지 마라. 그런데 이 조선총독이 그 높은 법문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겠죠.
그러니까 자기들은 자기는 아주 당했다. 아주 모욕을 당했다.
아주 괴심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돌아가서 자기 부하들에게 얘기를 했어요.
내가 오늘 가서 모욕을 당하고 왔다. 그러니까 부하 무사 한명이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서 일본도를 들고 스님 찾아갔어요.
스님 앉아서 떠억 좌선하는데 저기서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일본도를 딱 꺼내들고 니 죽이겠다.
이제 이런 표시를 했죠.
그래 스님이 앉아있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 등뒤를 보라. 이래.
니 등뒤를 보라고 등뒤를 가리켰는데 이 사람은 등뒤에 뭐가 있나 싶어서 돌아섰어요.
그때 스님이 벌떡 일어나 가지고 그 미나미지로의 등을 탁 치면서 내 칼을 받아라.
이랬거든. 이 미나미지로가 돌아서면서 떡보니 스님이 자기 등을 치고 있거든요.
과연 큰스님이십니다. 천진불이 되면 인제 두려움도 없어져 우리가 반야심경에도 보면 오온이 다 공하다. 그래 놓고 끝에 가다 보면은 두려움도 없다 이랬거든요.
두려움도 없는 자리에 들어갈려면은 수행을 해야 합니다.
죽음이 닥쳐도 염라대왕을 만나도 두려움이 없는 그런 사람이 되야 되는데 그럴려면 반드시 각료, 바로 깨달음이라고 하는 수행을 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 아래 그 뒤편의 시를 한편 보시면 다시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천진불은 한물건도 없는 그 자리에 나타나는 그 주인공입니다. 한 물건도 없다했는데 없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고 철저히 자유로우면은 그곳에 참나가 나타나는데 그 참나가 바로 천진불이다.
이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다했다가 나중에는 뭐가 나타는데 그것이 천진불이라. 이름이 천진불입니다.
그거 뒤편에 보면 불체, 불체생명지근원(佛體生命之根源) 비대비소비미추(非大非小非美醜) 확연무일이비무(廓然無一而非無) 심즉자성불시심(心卽自性佛是心)이라.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불체생명지근원 비대비소비미추 확연무일이비무 심즉자성불시심이라. 부처의 체는 생명의 근원으로 크지도 작지도 않으며 아름다움도 추함도 아니로다.
텅 비어 하나도 없으나 없는 것도 아니니 마음이 곧 자기 성품이요, 부처는 바로 이 마음이로다. 여기서 확연무일이비무라. 텅 비어 하나도 없으나 하나도 없다 했잖아요.
그런데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말하기로 마음이 곧 자기성품이요. 부처는 바로 마음이라.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2014년 5월27일 그전으로 서너달전에 이 위암이라는 걸 제가 분명이 앓면서 아 뭐 구차하게 이렇게 아프다가 죽을 이유가 있느냐 다 내려놓고 깨끗하게 그냥 정진하다가 죽어야겠다. 이제 삶에 대한 한점 미련마저도 다 버려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한국불교대학 대관음사 누가 띠가든지 말든지 그냥 정진하다가 죽는 길이 최상책이다. 완전히 마음을 비웠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단식을 하는 중에 인제 뭐 에너지만 끊어지면 죽느거니까 그래서, 모든걸 다 쉬었어요.
방하착을 하면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중에 5월27일, 5월28일, 5월30일 이 게송을 계속 제가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었는데 첫 번째 나온 게송이 바로 이거야. 이거.
텅 비어 하나도 없으나 없는 것도 아니니, 오늘 이 말과 딱 부합되는거 같아서 소개를 해놨습니다.
한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확연무일이비무 텅 비어 하나도 없으나 없는 것도 아니다.
음미를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법신을 깨달으면 한물건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 그렇지만은 거 보는 자성이 있는데 본원자성의 이름이 천진불이라.
없다고 봤는데 나중에 천진불이라고 하는 참나가 나타났어요.
모든게 걸림없이 자유롭습니다. 하지만은 그 걸림없이 자유로운 가운데 순수한 참나의 의식은 살아있다. 참나의 의식은 분명하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법회에 동참하고 수행하는 것은 이 자체가 좋기도 하지만은
자유감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거든요. 자유감을 얻고 툭 터져 아무것도 없다것은 자유감이거든요.
자유감을 얻고 또 참나를 회복하려나 참나를 만나려나 하는 그런 기대와 희망도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모이는 것이거든요.
표현은 좀 다르다 하지만은 그 내용은 똑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감과 참나 회복을 전제로 여기에 모였고 반드시 그 자리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 자리에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천일, 뭐 3년 이렇게 어려운 수행은 아니라 할지라도 늘 하던 수행, 사경, 늘 하시고 늘 금강경 읽고, 늘 시간나면 또 참선도 조금씩 하시고 관세음보살 늘 외우시고 주무시기전에 관세음보살 외우시고 이래 하면 참나를 찾고 또 자유감, 우리가 걸림이 많으면 안되거든요.
자유감을 얻어야 되요. 그래서 자유감에 대한 얘기를 자유를 불교에선 해탈이라고 말해요. 대자유, 해탈 이 해탈에 대해서 제가 저만이 생각한 3.3해탈론이라 해서 이론을 내놨는데 해탈하면 이러한 자유가 느껴진다.
적어도 이러한 자유를 우리는 획득해야 된다. 얻어야 된다 해서
3.3 1.자기 감정으로부터의 자유 2.자기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3.자기 한계로부터의 자유.
이 3개의 자유를 또 나누어서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제2의식으로부터의 자유, 번민으롤부터의 자유, 평판으로부터의 자유, 사회 통념으로부터의 자유, 업으로부터의 자유,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 궁극적 가치로부터의 자유.
그래서 3.3해탈론입니다.
이것을 다 설명을 드려야 되는데 지금 BBS 피디가 시간 다 됐다. 그래요.
그래서 지금 몇분 남았습니까? 5분 남았습니까? 5분 남았으면 계속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해탈이라는 말은 대자유란 말이니까 수행하면 자유감이 느껴집니다. 자기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라, 제1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는 욕망이라 하는 것은 오욕을 말해요. 재,색,식,명,수. 재물욕,색욕,식욕,명예욕,수면욕. 이런 것인데.
제일 떼기 힘든것이 명예욕입니다. 근데 정진을 아주 고도의 수행을 하다보면 아이고 이 명예 이거 벌거아이구나 이래 느끼게 됩니다.
그 정도 들어가야 되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가 생겨나야 되고 두번째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라, 모든 병은 모든 병은 다 스트레스로부터 온다 그랬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감포도량에서 1박2일 명상힐링 캠프가 열리게 될 겁니다. 거기 갔다오면 스트레스 다 날릴겁니다. 스트레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야되야되고 또 제2의식으로부터의 자유라 했어요. 이거는 파생된 의식이라 파생된 의식이 뭡니까?
자기가 자기 스스로에게 쏘는 그런 감정입니다. 그걸 두 번째 화살이라 이렇게 말하거든요. 보통 말합니다. 두 번째 화살은 맞지 말라. 두 번째 화살, 두 번째 화살은 대부분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주는 화살입니다.
예를 들면 애를 좀 나무랐는데 애가 당돌하게 엄마가 내한테 해준게 뭐있냐고?
그러면 그게 그날 밤에 잠이 안와요. 내가 저 노무 자슥을 어떻게 키웠는데 말을 저따구로 하는냐고 그러면 잠이 안와, 애는 다 잊었는데 이게 제2의식입니다.
파생된 위식이라 상대는 다 잊어버렸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날아든 파편이 스스로 막 뚫고 들어야요. 그런데 우리가 열심히 수행하면 이런 제2의식, 즉 두 번째 화살을 다 꺽을 수가 있습니다.
이건 수행밖에 없어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금강경을 막 읽어되든지 관세음보살을 집이 떠나가도록 외우든지 그래하면은 그런 감정으로부터 좀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주 깊어지면 그런 감정 자체도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수행이 좋은거죠.
두 번째는 자기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라, 번민으로부터의 자유라 우리가 번뇌라하면은 5번뇌를 말합니다. 탐,진,치,만,의 탐,진,치에다가 교만과 의심 이게 다 번뇌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번민합니다. 거미줄에 얽힌 사람처럼, 늘 번민해요.
번민이 많은 사람은 자기전에 반드시 관음정근을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평판으로부터의 자유라 평판, 상을 주니 마니 하는 그런 평판있죠.
제가 얼마전에 신문을 보니까 이 한강이라고 하는 작가가 맨부커상이라고 큰 상을 받았는데 채식주의자라고 하는 그런 제목으로 받았다 그러데요.
십일년전에 쓴 글을 이제 인제 상을 받았대요.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근데 이 지금 한강이 인터뷰를 하는데 기자회견을 하는데 하는 말에 아 이 사람이 공부가 많이 된 사람이구나. 불자라 그러데요.
난 상에 별로 관심없다. 또 십일년전에 쓴 글 가지고 뭐 그리 대단하냐 뭐 난리냐 그거죠. 자기는 인터뷰하는 이 시간보다는 집에 가서 글이나 쓰는게 편합니다.
이렇게 얘기할정도면 이 사람은 상당한 자유감을 느끼고 있는 사람입니다.
평판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거죠.
그 다음에 세 번째 사회 통념으로부터의 자유, 사회통념,
예를 들면은 여자는 조신해야 된다. 남자는 여자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와야 된다.
남자는 활발해야 되고 또 장남이 제사를 다 모셔야 된다. 그게 다 사회통념이거든요.
이거로부터도 자유를 얻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한계로부터의 자유, 업으로부터의 자유라 업으로부터의 자유란 말은 행위의 습관, 과거의집착 이런데서부터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니까 술,담배 이거 다 업이거든요. 술,담배 끊는거 그거쉽지않습니다.
저는 출가해서 십년까지 술생각이 났어요. 십년 지나가니까 이제 내가 술을 끊었구나. 하는 생각들더라구요. 생각이 나는 것은 아주 업이 살아있는거거든 담배끊는 사람도 아마 십년까지는 힘들겁니다.
업이라는 것은 그만큼 무섭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업으로부터 이 자유를 얻어야되요.
업을 벗어나야되요.
두 번째는 고정관념으로부터의 자유라 고정관념, 지가 생각한 건 다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있거든요. 자기 지식의 절대 주장, 또는 자기 경험의 절대화, 뭐 이런겁니다.
고정관념, 자기 고정관념으로부터도 벗어나야지 발전이 있는 사람이고 자유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세 번째는 궁극적 가치로부터의 자유라 궁극적 가치, 이 뭡니까?
이거는 뭐 아주 차원이 높은 얘기니까 잘 세겨 들어야 되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이런 말이 선문에 있어요.
그건 뭐냐? 궁극적 가치로부터 자유를 얻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도 갇히면 안된다. 이 말이건든요.
한국불교대학 인사법이 관세음보살이다.
딴 사람들은 성불하십시오. 성불할 짓을 하고 성불해라. 이거죠.
관세음보살도 안 외우는 사람이 성불하십시오.한다 해가 성불되느냐? 그건 안되는거요.
말만 이 도가 혀 끝에 있는건 아닙니다.
들어보면 말 잘 한다해서 그 사람 인기 좋고 그런 사람많거든요. 그건 도가 아닌거요?
그게. 정말 실참해야 됩니다.
성불이라 관세음보살 한번 더 외우는게 성불에 다가가는 길이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절에 올 때 열명을 만났다. 자기는 열 번이나 관세음보살 기도가 된거지요. 그게.
그렇게 해서 성불이 되는거지. 성불, 성불해가 될 일이 아닙니다. 이게. 부처님의 가피,
가피 이런것도 궁극에 이르는 말이거든 가피. 부처님 가피주십시오. 가피주십시오.
그래 할 것이 아니라, 계속 기도를 하거나 관세음보살을 외우거나 사경을 하거나 그리 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이니, 보살행이니 이런데도 메이지 말고 자기가 하던 수행을 무던이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궁극적 가치로부터 자유감을 얻는 일도 됩니다. 이게.
그 다음에 그 아래에 지(地)용(溶)해(解)탈(脫) 관세음보살이라.
이것은 감포도량에 요즘 새로 모셔진 관세음보살의 이름이 지용, 땅을 뚫고 온 올라온 바로 해탈한 관세음보살이다해서 지용해탈 관세음보살이란 말을 붙였는데 이 여기서 이 지용, 땅을 뚫고 올라왔다는 말은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났다.
이런 의미도 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평온함을 유지하면서 순수한 참나, 지극히 평온함, 완전한 자유감을 느끼면서도 참나라고 하는 의식이 또렸또렷해야 그 사람이 불교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내용이 만만치는 않아요.
여러번 집에 가셔서 한번 음미를 하시고 읽어보셔야 됩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시겠습니다.
법신각료무일물 본원자성천진불
법신을 깨달음에 한 물건도 없으니 근본 근원의 자성이 천진불이라.
우리는 늘 마음가운데에 텅 비어 있음을, 자유감을 느끼면서 또렷한 자기 주인공, 참나를 언제나 놓지지 않고 살아야겠습니다.
오늘 초하루 법문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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