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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모르게 소리친 소리에 스스로가 황당해한다. 자신도 황당한데 남들은 어떻겠는가. 당황한 나에게 윤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내, 내 머리카락! 여기에 보험금이 달려있단 말이야......."
점점 줄어드는 목소리에 자신이 초라해진다. 그깟 머리카락 두 가닥에 이렇게 말하는 자신을 저 잘난 남자 두명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리고 주위에서 자신을 구경하고 있는 저 많은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역시나, 내 말에 이 윤은 비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바다야 그냥 가자. 미쳤나봐"
"타"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주먹을 꽉 쥔 내가 불쌍해 보였을까. 아니면 그 첫만남에 바다도 자신의 순애보가 시작될 걸 알고 있었을까.
나는 이제와서 그 사실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우리의 불쌍한 순애보가 첫 막을 올린건 그 순간부터다.
"바다야..?"
이 윤도 뭔가 불안함을 느꼈는지 바다의 옷깃을 꽉 잡고 바다를 쳐다본다.
"타라고. 내가 지금 지갑을 안들고 왔어. 뒤에 타. 돈 줄게"
돈을 준다는 말에 반응한걸까, 아니면 그 금발의 미남인 바다라는아이와 친해지고 싶었던걸까. 언 1년이나, 아니 1년밖에 지나지않았는데
그때의 내 생각은 전혀 모르겠다. 그냥 타라는 명령조에 말없이 차를 탔었다. 그렇게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서
"다왔어"
짧은 음성에 정신을 차리고 차에서 내리자 가득 있는 검은 양복의 사나이들. 비로소 이 자들의 정체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맨 앞에 있는 오전에 만났던 검은 머리의 미남.
"다녀오셨습니까, 바다님"
"현랑, 손님 모셔라"
"네"
아침에 나를 도와줬던 그 사람은 날 알아보더니 놀라움으로 눈동자가 살짝 커진다. 이 사람의 이름은 현랑인가. 드디어 알게 되었다.
"윤씨, 어서오세요.. 손님도 안으로.."
이 윤이 주먹으로 한가닥 한다는 소문은 사실이었나보다. 이렇게 조폭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들락날락 하는 걸 보면.
커다란 저택의 문이 열리고 몇명 검은 남자들이 서 있었지만 생각했던것보다 가득, 우글거리지 않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애들은 다 부산으로 내려갔나?"
바다의 물음에 현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반은 부산으로 나머지 반은 인천으로 가셨습니다. 두목님은 사업상의 일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현랑의 대답에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시 명령을 내린다.
"현랑, 손님께 차라도 내와."
"네. 바다님"
현랑이 곧 차를 내오기 위해 안채로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윤의 애교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역시 이 윤과 바다라는 사람은 어떤 관계가 있는게
확실한듯하다.
"바다야~ 오늘 사람들도 없는데 같이 자면 안돼??"
"안돼"
바다는 딱 잘라 거절하고서는 구석에 있는 방으로 몸을 피신했다. 그냥 일 때문에 들어간거겠지만, 내 눈에는 그저 피신한 걸로 밖에는
보이지않았다. 나는 어서 이 불편한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저.."
"왜,"
바다가 없어서인지 다시 싸늘해진 이윤에게 어떻게 돈 이야기를 꺼낼수 있을까. 배짱도 없는 내가. 나는 그냥 말을 돌리고 진짜 묻고싶은걸
물어보기로 했다.
"여, 여기는 어디야?"
"조직 '데미안'이다. 들어는 봤지? 바다는 여기 부두목이고 난 그냥 여기 조직원"
이 윤. 역시 한주먹하는거 맞구나. 대한민국을 장악한다는 조직 데미안의 부두목과는 연인사이고 자신은 이 조직의 일원.
이러니까 아무도 안 건들인 거였어.
"손님, 차 내왔습니다."
어색한 분위기에 딱 맞춰 현랑이 돌아왔다. 늘 방긋웃는 현랑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도저히 이 곳에 있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 저는 최가한이라고 해요!"
"저는 현랑이라고 합니다, 가한씨."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정말 조폭소굴인 이 곳에 왜 있는거지
"현랑. 내 지갑 어딨지?"
구석의 방에서 고개를 내밀어 묻는 바다에게 현랑이 어디선가 지갑을 가져와 내민다.
"여깄습니다, 바다님."
지갑을 받은 바다는 날 보며 거만하게 돈을 내민다.
"자, 2000만원. 이정도면 됐냐?"
엄청난 거액의 수표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어서 가. 여긴 너같은 녀석이 있을 곳이 아니니깐."
안그래도 가고 싶었던지라 좋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 지각이다!!"
일어서면서 본 시계는 벌써 아르바이트 시간이 훨씬 넘어있었다. 스튜디오 빌리는데 거액이 든다고 늘 난리인데 오늘따라 더 늦고 말았다.
"나, 나 어떡해.. 아씨.. 여기 어디예요? 여기서 여의도까지 어떻게 가요?"
"제가 데려다 드리죠.. 그래도 되겠습니까, 바다님."
부드럽게 날 다독여주며 바다에게 의사를 묻는다. 전속 비서같은거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보디가드? 도저히 힘쓸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으니
아무래도 비서쪽이겠지.
"마음대로"
바다의 허락에 현랑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와 같이 집을 나왔다.
"타시죠"
아까 타고온 차와 다르지만 여전히 고가의 차에 숨이 막혔지만 그래도 언제 이런 좋은 차를 타보겠나, 싶어서 두근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차때문에 두근거리는건지, 아니면 나의 순애보때문에 두근거리는지 전혀 구분하지 못했던 아직은 어렸던 19살의 나.
현랑과 가한이 나가자 윤이 아양을 떨며 바다에게 묻는다.
"바다야아~ 가한이라는 녀석한테 꼭 돈 줘야돼? 그냥 꺼지라고 했으면 겁먹고 사라졌을텐데."
"됐어"
바다의 쌀쌀한 말투도 이제 질렸다는듯 윤은 바닥에 들어누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뭔가 생각나서 말한다.
"최가한... 저 녀석 우리 학교에서 꽤 공부하는 녀석이었나봐. 오늘 교무실에서 얼핏 들었는데 성적이 많이 떨어졌다나?
집안도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 같던데 그래서인가? 시형이 알지? 내 친구.. 그 녀석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들었는데,
동생이 백혈병이고 부모님은 사업 빚만 잔득 진 채 돌아가셨대."
윤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베베꼬며 말을 이었다.
"불쌍하다, 그치?...어 바다야??"
혁재가 일어나서 바다를 찾았지만 이미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빈 방에 윤만 덩그러니 남아 홀로 서 있다. 윤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차가 멈추고 나는 방송국 스튜디오 앞에 도착했다. 현랑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여기인가요, 가한씨?"
"네에, 현랑씨.. 저 감사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편하게 말 놓으세요."
"하, 하지만 현랑씨도 제게 존대를.."
"전 어렸을 때 부터 바다님을 위해 이렇게 교육받았기에 이게 편하답니다."
"아아... 그렇구나.. 그럼 현랑..아? 나중에 또 만나면 그때 한턱 쏠게. 오늘 고마웠어"
"그럼 크게 쏘셔야합니다. 전 이만 가겠습니다."
현랑이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한다. 그 멋진 회색의 차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때까지 내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내 발걸음을 때지 못하게 하는 걸까. 그리고 현랑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나이는 몇 살이길래 일일히 다 존댓말을 쓰는 걸까.
"왜 늦었어?!"
스튜디오에 들어가자마자 엄청난 잔소리가 쏟아진다. 한명 한명씩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 겨우 촬영이 끝난다.
"저기, 머리카락 말이예요"
사진작가님께 학교에서 잇었던 일을 말하자 내가 원하던 대답을 해 준다.
"그래, 분명 보험이 들어있어. 내가 알아서 처리해주마."
"감사합니다!"
조금 일이 꼬이긴 했었지만 오늘 하루의일과도 이렇게 끝이났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을 보다가 가영이를 보기 위해 병원으로 향한다.
오늘은 화장도 다 지웠으니까 가영이한테 쫓겨나지는 않을것같다. 병원 입구에 서서 다시 한 번 거울로 얼굴을 확인하고 발검을을 떼려는데
어디선가 들었던 목소리가 들린다.
"야."
"바다?"
검은 밤에도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 분명 밤인데 바다로 인해 주위가 낮으로 바뀐 것 같다. 이 금발이 이렇게나 빛이 났던가.
"동생한테.. 가냐? 어차피 동생은 싫어할텐데 가서 뭐하려고?"
심장이 멈추는것같았다. 어째서 바다가 내 동생에 대해서 알고 있는거지?
"가영이 일을 어떻게 알아?"
"그냥 오늘은 집에 가지 그래?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데려다줄게"
내 질문은 들리지도 않는걸까. 자신의 할 말만 하고서는 운전석에 올라탄다. 동생이 입원한 후로 나는 한번도 동생을 보지 않은적이 없다.
늘 푸대접을 받고 욕을 들어먹어도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이니까. 그런데 나는 왜 이녀석의 말에 끌려가고 있는걸까.
"동생대신 여장하고 일하면 재밌냐?"
빨간불에 신호가 걸렸을때였다. 서로 아무말이 없어 어색함만 맴돌던 차 안에 바다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자극시킨다.
"후우.. 하기 싫지?"
그 중저음의 편안한 목소리에, 어떻게 내가 여장하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냐고 화를 낼 것도 잊어버리고 그저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얼떨결에 대답해버린다.
"네, 네에"
"편하게 대답해. 나 너랑 동갑이야"
이 얼굴이 19살이라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이 윤이 반말을 하고 있어서 설마, 하긴 했었지만 적어도 25살은 되 보이는데.
"그래, 하기 싫겠지.. 나도 하기 싫으니까."
슬픈 목소리가 차안에 울러퍼졌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내 일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느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다시
차안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도저히 입을 땔 수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내 머릿속에 이 사람이 조폭이라는 사실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여기가 너희 집이지?"
"으, 응"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차 문을 열었는데 바다가 내 팔목을 잡는다. 차가운 손바닥의 체온에 깜짝 놀라 어깨가 움츠러든다.
" 얇네.. 밥은 제대로 먹고 사냐?"
깜짝놀라서 나도 모르게 손을 뿌리쳤다.
"자, 잘먹고 살아! 원래 살 안찌는 체질이야"
"왜 빨개지고 그래?"
바다의 질문에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숨을 내쉰다. 진정할 필요가 있었다. 이대로가다간 이 사람에게 휘둘릴것만 같았다.
"폰있냐?"
"으응, 일단 모델이니까.."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자 재빠르게 내 폰을 뺏더니 자신의 번호라며 번호를 저장해준다.
"내일 일단 이윤이랑 같이 현랑 차 타고 와라. 내일은 내가 좀 바빠서 데리러 못가거든. 그럼 난 간다"
"..야! 내가 왜..!!!"
내가 왜 차를 타고 가, 라는 그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바다의 차는 출발해버렸고 내 시야에 보이지도 않았다.
조금 더 내가 빨리 말했더라면, 그 때 거절했었더라면 그러한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다녀왔어요"
"가하나~!"
집에 들어가자 술냄새가 방에 가득차있고 이모는 힘겹게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모. 술 좀 그만 마시면 안돼?"
"어허! 내 삶의 자그마한 행복을!"
"아, 몰라.. 뒷처리 알아서 해. 난 피곤해서 잘거야."
좁은 방 안. 옆에서는 이모가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술을 마시고 있고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 쓰고 바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 얼굴에 19살. 그리고 조폭의 부두목. 이 윤의 연인.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겨우 이게 다였지만, 풀 네임을 알았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이바다'라고 저장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왠지 새어나오는 흐뭇한 웃음을, 도저히 감출수가 없었다.
"히잉.. 우리 바다 어디간거야?"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 현랑에 옆에서 칭얼거리는 이 윤. 현랑은 한숨을 쉬고 파를 썰며 말한다.
"윤씨께서 가한씨의 사정을 이야기하셨다면서요.."
"응.."
풀 죽은 윤의 목소리에 '탁탁' 썰리던 도마위의 소리도 멈춘다. 현랑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서가.. 아닐까 싶네요"
"어?"
"바다님이.. 이곳으로 오게 된 사연말이예요..벌써 14년 정도 됐나요..?"
"아아.. 그렇구나.."
윤, 괜히 이야기했다는듯 입술로 엄지손톱을 깨문다. 자신의 행동에 후회할 때나 뭔가에 대해 집중하여 생각할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현랑은 그런 솔직한 윤의 반응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자신도 조금은 의문이었다. 어째서 바다가 가한의 일에 신경을 쓰는가.
"나왔어."
"바다님, 오셨습니까?"
한경은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고 정중히 인사를 한다. 웅크려잇던 윤은 벌떡 일어나 바다에게 달려간다.
"바다야아아아!! 나만 두고 어디갔다 오는거야!"
"바람 좀 쐬러."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 바다는 방안으로 들어가버린다. 누구도 출입 불가능한 바다만의 공간. 윤도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 서서 바다의 그림자만을 바라본다. 애절하고 슬픈 눈빛으로.
그 구석에 위치한 작은 방에서 바다는 짧은 자유를 맛본다.
"최가한.. 피식.."
아까 잠깐이지만 느꼈던 가한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오랜만에 웃어본다.
한태유.
19살.
작고 여린 외모와 그보다 더 여린 마음씨를 지니고있다.
시형과는 고1때 처음만나 쭉 사랑을 나누고 있다.
남자답지 못한 성격에 친구도 제대로 못사귄 그에게 가한이는 시형못지않게 소중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