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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는 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영석
190901 /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요한복음 21:1-14)
오늘 본문은 ‘그 후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20장에서 예수님이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그 후에 일어난 일이란 뜻입니다.
주님의 수제자를 자처하던 베드로는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너무도 허무하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던 지난 3년간. 도대체 자신이 무엇을 했던 것이지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동시에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했던 일들도 용납되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죽는 데까지도 함께 가겠다고 큰소리 쳤건만, 조그만 여자아이 하나가 두려워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자신의 비굴했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결국 남은 제자들과 함께 다시 옛 생활로 돌아온 베드로는 어부로 물고기 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따라 왜 이다지도 고기는 잡히지 않는지...
아무리 3년간 손 놓고 있었기로서니 이제는 물고기 잡는 기술마저 잊어 버렸는가? 이젠 평범한 어부조차도 될 수 없는가?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도 실패했고, 고기 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베드로의 현 상황을 본문에서는 단 한 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세요.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던 사람이, 그러나 지금은 신앙에 실패한 베드로가 이제 다시 세상일을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이렇게 변명합니다. ‘예수님도 안 계신 마당에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과연 그럴까요?
인간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환경에 눌려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환경을 극복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형은 자라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동생은 금주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같은 아버지 밑에서 자란 두 형제의 서로 다른 인생에 대해 호기심을 가진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먼저 형에게. “당신은 어째서 알콜 중독자가 되었습니까?”
이에 형은 대답합니다. ‘내가 자라며 배운 것이라곤 술 사오는 것이요, 본 것이라곤 술 마시는 것뿐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어 동생에게 금주 운동가가 되게 된 이유를 물었더니, 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자라며 보고 배운 것이 아버지의 지긋지긋한 술주정뿐인데, 그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두 형제의 대답이 똑같습니다.
이유도 두 사람이 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 라는 불가피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환경에 침몰하는 인생을 살아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환경을 극복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들 형제처럼 예수님 당시의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다만 그는 환경에 침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모든 사람의 인생은 결국 ‘그럴 수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단지 그의 인생에 예수님이 계시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철저히 실패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피곤한 삶의 현장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베드로의 인생에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실패 속에서도 성공이라는 결과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혼자 했던 베드로의 실패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하고자 했던 일에서 성공한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예수님이 계셨으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바뀐 베드로의 인생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이유가 환경에서 예수님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적 행동에서 예수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여러분에게 있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젠 그 이유를 환경에서 예수님으로 바꾸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일생동안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돈을 모으려고, 권력을 잡으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복음성가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습니다. 때론 잠깐은 잡은 것도 같으나 결국은 놓치는 경우가 더 많고, 최종적으로는 빈손으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본문에서 ‘잡은 것이 아무것도 없나이다.’는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일 뿐만 아니라 오늘 날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평생을 애쓰고 노력해 보지만 불운한 환경과 냉정한 세상이 주는 것은 매번 ‘빈 그릇’일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 그럴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 그럴 수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 그럴 수 있습니다. 환경이 안 좋고, 시기가 나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세상 불신자들이나 푸념하는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왜 맨날 뭔가를 평가하거나 계산하고 계획을 세우면서 매번 예수님을 빼 놓고 하려 하십니까?
늘 예수님을 빼 놓고 계획하고 추진하니 결과는 빈 그릇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그렇더라도 성도에게는 빈 그릇 중에서도 가질 수 있는 소망이 있습니다.
인생의 빈 그릇은 실망하고 절망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날 찬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의 실패는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기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에, 이 예수님을 믿으신다면 ‘나는 성공할 자’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하세요.) ‘예수님이 계시는 한 / 나는 성공할 자다.’
흔하게 회자되는 명언이 있습니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적이 없다고 믿고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고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 여러분은 기적이 있었으면 하고 살아오셨습니까? 아니면 기적이 있음을 믿으며 사셨습니까?
그 중심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심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패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너는 나를 배신했지만 난 너를 용서하노라.’
이 말씀인즉,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 실망했다면 다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만이 아니라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솔직해 보시자구요. 간절했던 내 기도에 응답이 없을 때, 예수님께 섭섭한 마음이 들진 않으셨는지요?
내가 원한대로는 안 되고, 원치 않는 일들만 생겨날 때면, 솔직히 예수님께 서운했고, 심하게는 실망하진 않았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이젠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망이 들수록 더 더욱 예수님을 믿으려 하는 여러분이 되셔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한 자신에게 실망했다면 이제 그만 스스로를 용서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죄의식과 열등감으로 스스로를 정죄하지도 말고, 스스로가 자신을 저주하기를 멈추고, 믿음의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공이든 부요함이든, 건강이든 형통함이든,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그럴 수밖에 없는 믿음의 이유로 삼아 환경에 짓눌리는 사람이 되지 말고 환경을 극복하는, 그래서 환경보다 큰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도 모두 여러분을 괴롭히는 그 어떤 환경 보다 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괴롭히는 그 어떤 상처 보다 큰 신앙의 사람이 되십시오,
힘들게 하는 그 어떤 원수 보다 큰 믿음의 사람이 되세요.
실패로 몰고 가는 그 어떤 환경보다 큰 사람이 기도의 되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시니까요!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예수님이시게 하세요.
여러분이 잘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믿음이게 하세요.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기도가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친히 부르신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세상에서조차 실패하는 인생을 산다고 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은 실패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실패가 없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실패한 채로 그냥 놔두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의도하신 제자사역을 성공하게 하시기 위해서라도 당신의 제자들을 성공하게 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심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써 세상에서 실패했다면 그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이 실패한 것입니다.
때문에 실패가 없으신 예수님은 가만 계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패한 저와 여러분을 성공하게 하십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시인인 윌리엄 아더 워드는 말하기를 ‘실패는 우리의 선생이지 장의사가 아니다. 실패는 조금 기다리라는 뜻이지 패배한 것이 아니다. 실패는 잠시 후퇴하는 것이지 막다른 골목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실패에서 다시 실패하지 않을 교훈은 배우시되, 실패했다고 징징대거나 죽을 듯이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워드는 또 말하기를 ‘실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성공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을 뿐이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실패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들 성공을 위한 계획들을 세우지요.
그런다고 다들 계획한 대로 성공 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요?
성경은 말합니다. 잠언 16:1에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했고,
잠언 16: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우리가 실패만 생각하고 있으면 실제로 우린 믿으면서도 실패하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만약 여러분이 실패 후에라도 성공을 보길 원하신다면 이미 실패한 실패가 아니라, 장차 성공할 성공에 초점을 맞추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곧 성공케 하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권면을 드립니다.
어느 잡지사 기자가 사업이 부도가 났다가 재기한 어떤 사업가에게 묻기를, '부도가 났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잘 나갈 때 그렇게 친했던 사람들이 다들 외면하고 피하는 것’이었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통상 이런 게 세상인심입니다.
그러나 세상인심과는 달리 예수님은 내가 실패한 자가 되었다고 나를 버리거나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실패했기에 오히려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측은히 여기셔서 나를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며 오히려 붙드시고 세워주시며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실제로 빈 그물 들고 힘들어하는 베드로를 만나 주신 예수님은 베드로의 빈 그물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6절을 보세요.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예수님이 일러주시는 방법대로 할 때 실패는 성공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드리면 꼭 이렇게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 그런데 나한테는 왜 아무런 방법도 말씀을 안 해 주세요?’ ... 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저와 여러분에게도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거나 사람들에게 응답하실 때면 꼭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특별히 제자들에게는 한 말씀을 덧붙이셨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꼭 오른 편, 왼 편, 앞 쪽, 뒤 쪽을 지정하시는 것만이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개별적인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방법을 우선 알려 주셨습니다. -‘믿어라! 기도해라!’
그러므로 믿고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내게만은 베드로에게처럼 좀 더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방법을 알려주시기를 원하신다구요?
그렇다면 일단은 먼저 믿으세요. 우선 기도부터 하세요. 그 다음은 예수님이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와서 병 낫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
눈 먼 자가 주께 와서 믿음으로 간구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열 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간청했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이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내 몸을 보이라.’
신앙과 응답은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먼저 믿읍시다! 먼저 기도하십시다!
그 다음은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 주실 것이고 응답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작하셨으니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예수님이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실패가 바뀌어 성공이 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한 가지만 더 체크해 보고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볼 때면 베드로가 물고기 잡은 기적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종종 간과하고 넘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그 날 베드로는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중 몇 마리를 가져오라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식사를 하게하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이 준비하신 생선 바비큐 그릴 위에는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기 전부터 이미 어떠했다고 했습니까?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5절부터 9절까지의 흐름을 보세요. 고기가 없다 하는 제자들을 향해 배 우편에 그물을 내리게 하시고는 베드로가 고기를 가득 잡고 제자들이 달려들어 서로 도와 배와 그물을 육지로 끌어 올리고 하는 와중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다고 했습니까?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이렇게, 밤새 실패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실패한 고기잡이를 성공으로 바꾸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실패하느라 아직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손수 아침 식사까지 준비해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니,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께 기도하면, 예수님은 우리가 구한 것을 주심을 물론,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도 일일이 다 챙겨 주실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좀 극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성도가 신앙 안에서 겪게 되는 '실패는 감사의 시작'입니다.
실패했을 때 성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감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감사의 시작이 실패여야만 감사의 완성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뭔가가 좀 잘돼야 감사하리라 하지만, 실패했을 때 감사가 없으면 뭐든 잘 될 리가 없습니다. 잘 될 리가 없으니 감사할 일도 없고, 감사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얼마나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이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기적과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12절을 보세요.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이시라면 내게도 응답 해 주실 것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당연하게 믿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아 오셨습니까?
여러분에게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젠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수님에게서 찾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반드시 잘 풀릴 것입니다. 예수님이 도우시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는 날 중에 성공을 볼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이 역사하시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그물이 찢어지듯 여러분의 인생의 영, 육, 물질, 건강, 가정, 사업 등의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은혜와 기쁨을 보게 될 것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니 그럴 수밖에 없음을 믿고, 어떤 환경에서든 인생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예수님에게서만 찾으려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