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非人不傳'의 줄기세포

옛말에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말은 중국의 서예가인 왕희지가 그의 제자들에게 남긴 어록으로 알려져 있다.
이문열의 소설 『금시조』 본문에도 이 말이 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
“왜 제자로 거두시지 않으셨소?”
“비인부전(非人不傳). 운곡께서는 왕우군(왕희지)의 말을 잊으셨소?”
“그럼 저 아이에게 가르침을 전하지 못할 만큼 사람답지 못한 데가 있단 말씀이오?”
동양의 전통 사회에 있어서의 사제 관계는 이처럼 지엄한 약속 같은 게 전제되어 있었다.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사람됨이 합당하지 않으면 함부로 무언가를 전해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무언가는 기술이라고 해도 좋고, 예능이라 해도 좋으며, 또한 좀 철학적인 색깔로 덫칠하여 도(道)라고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인부전’의 오묘한 뜻은 현대의 교육학 이론에 딱 들어맞는 것이 아니어서 문맥에 따라선 시대착오적인 느낌도 가지고 있다.
사람답지 못한 것을 사람답게 하는 것에 교육의 참뜻이 있는 것이라면, 제자가 아니라면 몰라도 제자에게 가르칠 기회마저 스승 스스로 저버린다면 어찌 사표(師表)의 예라고 할 수 있을까?
가르침을 통해. 혹독한 훈련의 과정을 겪음으로써 몽매의 비인(非人) 상태를 깨달음의 인(人)의 경지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사표의 진정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비인부전’의 뜻이 사람들의 가슴으로 파고들게 한 계기가 된 것은 TV 드라마 『허준』이 방영될 즈음이었다.
2000년 2월8일에 방영된 내용에 의하면, 허준은 이를테면 버들골의 슈바이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마을의 환자들을 밤 지새우면서 보살피는 바람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린다.
반면에 허준의 스승인 유의태의 아들 유도지는 환자를 외면함으로써 과거에 합격할 수 있었다.
유의태는 그의 아들에게 ‘비인부전’이라고 꾸짖으면서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내용은 드라마 『허준』의 원전인 『소설 동의보감』에 ‘비인부전’이란 이름의 장(章)으로 실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부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다.
이 사실은 교과서 속의 문학 작품이 본격의 정전(正典) 못지않게, 예컨대 드라마『허준』 열풍처럼 사회문화 현상의 관련성을 반영하려는 경향을 예상할 수 있는 대목이다.
5년 전의 허준은 우리에게 우리 시대가 갈구하는 의인의 표상이었고, 한편으로는 탁월한 의술로 환자들의 희망을 투사했던 일종의 문화영웅이었다.
드라마 속의 허준은 5년 정도의 세월을 거치면서 현실 속에 황우석으로 재현되었다.
그의 줄기세포는 난치병 환자들의 희망이면서,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한국인의 애국주의적인 열광의 아이콘이었다.
전국민적인 기대로 인해 그의 이름은 소위 ‘신화’로 포장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달 이상을 끌면서 온 나라를 시끄럽게 했던 줄기세포 사건은 우리를 아득한 혼돈의 공황 상태로 몰아넣게 된다.
한편 황우석의 추락 과정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드라마틱하게 전개되어 갔다.
이미 몇 달 전부터 일부 과학자들 사이에, 황우석 교수팀의 성공이 충분한 난자 공급에 기인한 것이어서 그 효용성이 의심된다는 평가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올해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이 인위적으로 조작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이제는 줄기세포에 관한 원천 기술이 있네, 없네 하는 문제로까지 치닫고 있다.
올해의 10대 뉴스 중에서 톱에 오를 만한 뉴스거리가 된 줄기세포 사건은 드라마 허준의 ‘비인부전’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탁월한 줄기세포의 원천 기술이라고 해도 인간됨의 척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과연 그것을 떳떳하게 세상에 전할 수가 있을까?
이미 불법 난자. 논문 조작. 뒷돈거래설 등의 말들이 나오고 있는 판에 말이다.
우리 학계에 적잖이 퍼져 있는 학문의 비양심은 정치판의 비리, 사회의 부정부패, 도덕적인 타락 등에 걸맞은 성격의 악질이다.
단죄의 정도에 있어서는 서로 높낮이를 잴 수 없다고 하겠다.
올해 우리가 잃은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희망이었던 줄기세포였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얻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학문의 양심에 관한 심오한 성찰이 아닐까?
송희복(경남신문 객원논설위원·진주교대 교수)
첫댓글 온 국민이 각성하여 실추된 한국의 위상을 다시 끌어 올려야 하겠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는 한국을 건설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