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 가더이다
가을이 이슥해진 시월 하순이다. 근교 산행지를 어디로 나설까 떠올리니 무난한 데가 북면 일대였다. 이른 아침 배낭에 도시락을 챙겨 담아 현관을 나섰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외동반림로의 반송 소하천을 따라 걸어 원이대로에서 북면으로 가는 17번 버스를 탔다. 명곡 교차를 지나 소답동을 거친 천주암에서 내려 암자를 향해 오르다 뒤를 바라보니 시내는 엷은 안개에 가려졌다.
찻길에서 암자로 오르는 들머리 찻집과 식당을 지나니 전에 없던 사학 재단 생태학습장의 높게 둘러친 울타리가 눈에 거슬렸다. 시내 한 사학 법인 소유의 땅과 천주암 사찰과 경계선으로 분쟁이 있었는지 통행로에 바짝 붙여 삭막한 펜스가 둘러쳐져 못내 마음에 걸렸다. 종교 단체와 사학 법인 간의 문제였지만 천주산을 오르내리는 여러 사람이 보기에는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철제 펜스가 둘러친 등산로를 올라 암자 샘터 약수를 받아 마시고 천주산 숲길로 들었다. 맞은편에는 나보다 먼저 새벽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이들을 더러 만났고 뒤따라 올라오는 산행객도 보였다. 산행 도중 가만 생각해 보니 오늘이 주중 평일이 아닌 일요일임을 확인하고 머리가 끄떡여졌다. 백수로 지내는 생활이다 보니 가끔 날짜와 요일 감각이 무뎌 헷갈린 경우가 있었다.
산행 중에 휴대폰 앱으로 달력을 검색해 봤더니 오늘이 상강이었다. 내가 가끔 시청하는 기상 유튜버 소 박사는 내일 아침부터 기온이 급전직하해 산간 내륙은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고 했다. 평소 집에서 텔레비전을 전혀 시청하지 않아 나는 날씨마저도 정보화시대 대열의 낙오자인 줄 알았는데, 산행 중 기상 전문가의 유튜버를 통해 날씨 정보를 획득할 수 있음이 새로웠다.
천태샘 약수터로 오르는 길섶에는 이즈음 계절을 장식하는 보라색 꽃향유가 가득 피어 있었다. 약수터에 이르니 누군가 이른 아침 빗자루로 깨끗하게 쓸고 바닥에 먼지가 일지 않도록 물까지 뿌려 놓았더랬다. 한 번만이 아닐 테고 매일 아침 샘물을 받아 가며 봉사하는 분이 있을 듯했다. 쉼터에 앉아 고개를 젖혀 단풍이 물들어가는 낙엽활엽수를 쳐다보니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쉼터에서 일어나 만남의 광장 고갯마루를 넘어 천주산 정상으로 가질 않고 함안 경계 고개를 향해 갔다. 길섶에는 여전히 꽃향유 일색이라 자연스레 열병을 받으며 지나갔다. 함안 경계 고개까지는 산행을 나선 이들을 간간이 만났는데 나는 상봉을 향해 비탈을 올랐다. 상봉은 장롱처럼 생겼다고 농바위라고도 불리는 암반으로 천주산 정상보다 해발고도가 조금 더 높은 봉우리였다.
오솔길에 늦게까지 핀 구절초와 미역취꽃은 이제 거의 저물어가는 즈음이었다. 정상이 가까워진 너럭바위에 서니 사방이 탁 트여 전망이 무척 좋은 데였다. 구룡산이 백월산으로 건너가면서 이어진 낮은 산 사이로 마을과 들판이 펼쳐졌다. 발아래는 북면과 주남저수지는 물론이고 진영 일대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바위에 퍼질러 앉아 지자기를 흡입하면서 가져간 도시락을 비웠다.
바위 쉼터에서 일어나 상봉으로 가 정상에 섰더니 사방은 역시 탁 트였다. 난간이 없는 낭떠러지라 고소 공포가 느껴져 가장자리로 나가지 않은 채 전망을 굽어보고 작대산 방향의 등산로로 내려섰다. 내가 십여 년 전 봄날에 고사리를 비롯한 산나물을 채집하던 산등선인데 근년에는 찾지 않아 숲의 생태가 바뀌어 있었다. 가파른 비탈에 설치된 데크 계단을 따라 구고사로 내려갔다.
구고사로 가는 도중 바위에서는 맞은편 작대산이 버티었고 칠원 무기 일대와 산정 저수지가 드러났다. 독경 소리가 그친 인적 없는 산중의 작은 산사는 고요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약사전을 둘러 법당 뜰에서 손을 모으고 절집을 나와 양미재를 향했다. 가랑잎이 삭은 부엽토 길을 걸으니 발자국을 뗄 때마다 올가을에 쌓인 낙엽이 부스럭거렸다. 가을은 이렇게 깊어 가고 있더이다. 22.1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