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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건괵(亮遺巾幗)
제갈량이 여자들 머리 장식용 쓰개(巾幗)를 사마의에게 보내 욕보였다는 뜻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참아야 하는 작은 모욕을 일컫는 말한다.
亮 : 밝을 양(亠/7)
遺 : 보낼 유(辶/12)
巾 : 수건 건(巾/0)
幗 : 머리장식 괵(巾/11)
출전 : 삼국연의(三國演義) 第103回
이 성어는 삼국지에서 유명한 촉(蜀)나라의 제갈량(諸葛亮)이 사마의(司馬懿)와 위수(渭水)에서 대진(對陣)했을 때, 사마의가 상반곡(上方谷)에서 죽음을 면하고 자중하여 움직이지 않자, 제갈량이 부인의 머리 장식 용구를 보내어 그가 용기 없는 아녀자라고 비웃었다는 이야기에서 연유한다.
황석영의 삼국지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한편 공명(孔明)은 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한 뒤로 자주 군사를 보내 싸움을 걸었지만 위(魏)날 군대는 한결같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且說孔明自引一軍屯於五丈原, 累今人搦戰, 魏兵不出).
마침내 공명은 건괵(巾幗; 여인들이 머리에 쓰는 두건)과 흰 비단 옷(縞素)을 함 속에 넣고 서신 한 통을 써서 위군 영채로 보냈다(孔明乃取巾幗並婦人縞素之服, 盛於大盒之內, 修書一封, 遣人送至魏寨).
위나라 장수들은 이 일을 그냥 덮어둘 수도 없어 사자를 사마의에게로 데려갔다. 사마의가 함을 열어보니 여인네들의 쓰는 두건과 치마 저고리와 함께 서신이 들어있었다(諸將不敢隱蔽, 引來使入見司馬懿. 懿對眾吞盒視之, 內有巾幗婦人之衣, 並書一封).
그것을 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중달 그대는 대장이 되어 중원의 대군을 통솔하고 있거늘, 굳은 의지와 번쩍이는 예기로 자웅을 겨룰 생각은 않고, 그저 토굴만 굳게 지키고 앉아 칼과 화살을 피하려고 하니, 그대가 아녀자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소. 내 이제 사람을 시켜 건괵과 흰옷을 보내오. 싸우지 않으려면 두 번 절하고 이것을 받으시오. 혹여 아직도 사내로서 부끄러운 마음이 남아 있거든 즉시 회답하여 기일을 정하고 싸움에 응하도록 하시오(懿拆視其書. 略曰: 仲達既為大將, 統領中原之眾, 不思披堅執銳, 以決雌雄, 乃甘窟守土巢, 謹避刀箭, 與婦人又何異哉. 今遣人送巾幗素衣. 至如不出戰, 可再拜而受之; 倘恥心未泯, 猶有男子胸襟, 早與批回, 依期卦敵).'
사마의는 보고 나서 마음속에 노기가 물끓듯 일어났으나 겉으로는 태연자약하게 웃음을 띠며 말한다. '공명이 나를 아녀자로 알고 있구나(司馬懿看畢, 心中大怒, 乃佯笑曰; 孔明視我為婦人耶).'
즉시 물건을 받아 두고, 사자를 후하게 대접하며 묻는다. '그래, 공명께서는 요사이 침식이 어떠하며, 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은 없으신지(即受之, 令重待來使. 懿問日: 孔明寢食及事之煩簡若何)?'
촉의 사자가 대답한다. '승상께서는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밤엔 늦게 주무시며, 곤장 20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친히 처결하시며, 잡수시는 음식은 하루에 몇 홉에 지나지 않사옵니다(使者曰: 丞相夙興夜寐, 罰二十以上皆親覽焉, 所啖之食, 日不過數升).'
사마의는 웃음 띤 얼굴로 수하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공명이 먹는 것은 적고 하는 일은 많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오래 갈 수 있겠느냐(懿顧謂諸將曰: 孔明食少事煩, 其能久乎)?' 여기서 식소사번(食少事煩)의 성어가 나왔다.
사자는 하직하고 오장원으로 돌아와 공명을 빕고 자세히 고한다. “사마의가 건괵과 여자 옷을 받고 서찰을 읽고도 진노하는 빛이 없고, 다만 승상의 침식이 어떤지와 일이 많은지 적은지를 물었지, 군사 문제는 전혀 꺼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실대로 대답했더니, 그가 '식사를 적게 하는데 일은 많다니, 어찌 장구(長久) 하겠는가?'고 말했습니다.”
공명이 탄식한다. '그가 나를 잘 아는구나(彼深知我也).'
사마의는 과연 최후의 승자였을까?
사마의(司馬懿, 179-251)는 후한말과 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이자, 훗날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진나라의 실질적인 건국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소설 '삼국지연의'로 친숙한 팬들에게는 주인공인 제갈량과 맞서는 라이벌이자 최종보스의 역할로도 유명하다.
오늘날까지 사마의의 행적이 주목받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가 삼국시대를 통틀어 '최후의 승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자신을 키워준 조위(조조의 위나라)를 배신하고 새로운 나라를 열게 되는 드라마틱한 반전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한나라를 멸망시켰던 조위의 흥망성쇠와 맞물려 '역사는 반복된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상징적인 장면임과 동시에, 라이벌인 제갈량이 끝까지 촉한의 충신으로 남았던 행적과 대비되며 이래저래 극적인 효과를 선사한다.
tvN에서 방송된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유비, 조조도 아닌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 편을 통하여 역사속 사마의의 진실과 그가 오늘날 영원한 2인자로 남게된 이유를 조명했다. 중국사 전문가인 이성원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사마의가 태어날 무렵은 후한(後漢, 25년~220년)시대가 말기에 접어들며 황권의 약화와 환관과 외척들의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쇠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조조(曹操)는 여러 군벌을 제압하고 황제인 헌제를 옹립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조조는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천하의 유능한 인재를 모으는데도 공을 들였는데 그중 오랫동안 눈독을 들여 지켜본 인물중 하나가 바로 사마의였다. 사마씨는 한나라를 건국한 공신의 명문가였고,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은 한나라의 고위관료를 지냈으며 청렴결백하고 현명하여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사마방의 8형제중 둘째로 태어난 사마의는 어릴때부터 수재로 이름을 떨쳤다. 당대는 인재을 발탁하는데 있어서 명망있는 인사들의 평판과 천거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조 진영에서 최고의 인재로 꼽혔던 순욱과 최염 등은 일찍부터 사마의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조조에게 등용을 추천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조의 등용을 번번이 사양했다. 당시 정당한 사유없이 나라에서 내린 관직을 거절하는 것은 중죄에 해당했다. 의심많은 조조는 사마의가 정말로 아픈지 감시하게 했고, 그럼에도 사마의는 조조를 속이기 위하여 집안에 은둔하며 치밀하게 환자 행세를 하며 주변 사람들까지 속였다.
하루는 소나기가 내려서 아끼던 책이 비에 맞을까 우려한 사마의가 연기중인 것도 잊고 방밖으로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프다던 사마의가 멀쩡히 걸어다니는 모습을 한 여종이 목격했다. 이에 사마의와 그의 아내 장춘화는 혹여 비밀이 조조의 귀에 새어나갈까봐 여종을 살해하고 만다. 사마의의 용의주도하면서도 냉혹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다.
사마의가 이렇게까지 한사코 출사를 거부한 이유는 아직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하기에는 이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조는 유력한 군웅의 하나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1인자는 아니었다. 사마의가 조조의 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그가 속한 사마씨 가문 전체가 조조와 정치적 공동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선택한 주군이 몰락하면 그 세력에 속한 가문 전체도 풍비박산이 나기 일쑤였다. 난세에 자신과 가문을 지켜야했던 사마의의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을 보여준다.
조조가 사마의를 자신의 휘하로 불러들이는데는 무려 7년을 기다려야 했다. 조조는 그 사이 승상(오늘날의 국무총리)의 자리에 오르며 권력을 더욱 공고히했다. 조조는 두 번째로 사마의에게 손을 내밀며 '이번에도 응하지 않으면 감옥에 넣겠다'고 최후 통첩을 날렸다. 이에 사마의는 결국 조조가 내린 관직을 받아들여 출사하니 그의 나이 29세였다.
그런데 정작 사마의를 불러들이게 된 조조는 그의 관상을 보자마자 낭고상(狼顧相, 이리의 상)이라고 하여 경계했다고 한다. 이리는 몸통은 그대로 두고 고개만 180도 돌려서 뒤를 돌아볼 수 있어서 조심스럽고 신중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이리처럼 몸과 시선이 반대 방향이라는 것은, 사람에 비유하면 행동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낭고상은 겉과 속이 다르고 주인을 배신하는 역적의 관상으로 평가받았다.
눈치빠른 사마의는 조조의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격을 파악하고 있었고,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노력했다. 사마의는 명문가 출신임에도 마부처럼 말이나 가축을 돌보는 일까지 직접 자처하며 극도로 몸을 낮췄다.
조조는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다소 풀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를 크게 중용하지는 않았다. 사마의는 이후 215년 조조의 한중 정벌에 책사로 종군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그의 전략적 안목을 보여주는 일화가 등장한다.
한중을 정복하고 난 직후, 사마의는 조조에게 기세를 몰아 바로 이웃 지역인 서천의 유비까지 점령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중은 서천과 중원을 잇는 최대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사마의는 당시 서천을 장악한지 얼마안되던 유비가 세력을 회복하면 조만간 한중을 공략할 것이고 천하통일은 기약없이 늦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조는 군사들이 지쳐있다는 이유로 사마의의 제안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의는 당시 이미 환갑에 이른 조조가 이미 천하통일의 야심을 이루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조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물러선다. 그리고 훗날 사마의의 혜안대로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며 촉한을 건국하게 되면서 조조의 천하통일은 물거품이 되고만다.
여기서 사마의가 난세에 끝까지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참고 절제할줄 아는 미덕'에 있었다. 후한말과 삼국시대의 난세에 무수한 영웅호걸들이 등장했으나 허무하게 사라져간 이유는 중요한 순간마다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조조, 유비, 손권, 관우 같은 '삼국지'의 대표 영웅이나 군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인내심이 극도로 뛰어났고, 아직 때가 아니라고 판단되면 고집을 부리거나 모험을 걸지 않으며 유연하게 처신했다. 하지만 일단 한번 기회를 포착하고 결단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전광석화처럼 일을 처리하는 단호한 추진력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사마의의 또 다른 생존비결은 가급적 '싸우지않고 이긴다'는 전략이었다. 유비의 맹장인 관우가 형주의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여 조조가 있던 수도 허도를 위협한다. 늙고 나약해진 조조는 관우를 두려워하여 수도를 옮기는 것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배후의 손권을 회유하여 관우를 협공하자는 전략을 제안했다. 사마의는 유비와 손권의 동맹관계가 실제로는 불안정하며, 손권이 형주를 노리고 있다는 것과 관우와의 사이가 좋지않다는 사실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조도 사마의의 책략을 받아들였다.
사마의의 계략은 성공하여 219년 12월, 손권의 기습으로 관우는 형주를 잃었고 본인도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이에 크게 분노한 유비는 대군을 일으켜 손권을 공격하지만 이릉대전(夷陵之戰)에서 참패하며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었다. 유비 본인도 얼마 지나지않아 223년 병으로 사망한다. 이후로 삼국시대는 '1강(위나라) 2약(촉한, 오)'의 판세가 훗날 삼국통일 때까지 영구하게 굳어지게 된다. 사마의의 책략 하나가 삼국시대의 판세를 결정지은 것이다.
비로소 능력을 인정받은 사마의는 조조가 사망하고 아들 조비가 집권하면서 본격적으로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조비는 결국 껍데기만 남아있던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초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사마의를 견제했던 조조와 달리, 조비는 스승이었던 사마의를 측근으로 우대하여 여러 요직을 맡겼다.
226년, 조비가 재위 6년만에 사망하면서 사마의는 진군, 조진 등과 함께 후계자 조예를 보좌할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지명되었고, 표기대장군의 자리까지 오르며 명실상부한 위나라 조정과 군부의 실세로 등극했다.
그 무렵 삼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창업군주 유비가 사망한 이후 절치부심의 세월을 보내던 촉한은, 재상 제갈량이 황제 유선을 보좌하여 국정을 맡아 국력재건에 성공한다. 제갈량은 '한나라의 적인 위나라와 양립할수 없고, 국토가 일개 지역에 머물러서는 안된다(漢賊不兩立, 王業不偏安)'는 국가 이념을 내세워 위나라를 정벌하고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북벌'을 추진했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의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제갈량 VS 사마의' 라이벌전의 시작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사마의를 제갈량의 호적수로 설정했다. 하지만 실제 '삼국지' 정사를 보면 제갈량이 북벌에서 맞서싸운 상대는 사마의만이 아니라 조진, 장합, 학소 등이었다.
심지어 사마의는 첫 번째 북벌에는 참전하지도 않았고 그가 직접 군권을 쥐고 제갈량과 상대하기 시작한 것은 후반부인 4,5차 북벌 정도다. 연의나 드라마 등에서 묘사된 두 사람의 현란한 심리전이나 공성계, 상방곡 전투 등 극적인 장면들의 대부분은 후대 대중문화의 창작이다.
삼국지연의는 주인공인 제갈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마의를 호적수이지만 결국은 제갈량의 책략에 번번이 놀아나는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는 완전한 허구는 아닌 것이, 사마의는 역사상 제갈량과의 야전에서 두 차례 정도 격돌했으나 모두 패배했고 이긴 기록이 전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갈량의 북벌은 실패했고 사마의의 수성은 성공했다는 것이 역사의 진정한 결말이다.
애초에 사마의의 인생철학처럼 제갈량을 상대했던 군사 전략 역시 '참고 때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사마의는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장거리 보급이 어렵고 유능한 인재도 부족하다는 촉군의 약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사마의는 촉군이 이동할 길목하고 요충지를 미리 점령하여 장기간 대치하는 농성전을 펼쳤다.
초조해진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사신을 통하여 여인의 옷과 장신구를 보내며 도발한다. 이는 수비만 하는 사마의가 여인처럼 소심한 겁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고, 당대 남성들에게는 엄청난 모욕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의 심리를 간파한 사마의는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사마의는 사신에게 제갈량의 안부를 걱정하는 척 근황을 물으며 그가 잠도 자지않고 잘먹지도 않으면서 오직 일에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사마의는 이를 듣고 자신을 혹사하는 제갈량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다고 하며, 식소사번(食少事煩)라는 성어의 유래가 된다.
사마의는 곧바로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공명(제갈량)은 큰 뜻을 품었지만 기회를 보는 눈이 없고 모략에는 뛰어나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며 전투를 즐기지만 임기응변에 능력이 없다"고 평가하며 "지금 10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지만 이미 나의 계책에 빠진 상태다. 그는 이제 패해 물러가게 될 것이다"며 승리를 확신했다.
사마의의 이러한 평가는 제갈량의 능력과 한계를 가장 정확하게 묘사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후의 전황은 모두 사마의의 예언대로 실현되었다. 삼국지연의 등 대중매체의 영향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에 비하여 한 수 아래이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 역사에서 사마의는 제갈량의 능력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심리를 유일하게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던 진정한 호적수였던 것이다.
234년 제갈량은 오장원의 진중에서 세상을 떠나고 촉군은 퇴각한다. 삼국지연의는 죽은 제갈량이 사마의를 물리쳤다는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의 일화를 통하여 마지막까지 제갈량의 퇴장을 여운있게 남기기 위하여 엄연한 승자인 사마의를 또 한번 희생양으로 만들었지만 이 역시 정사에는 존재하지않는 가공의 이야기이다.
어느덧 조조와 유비도 제갈량도 모두 사라진 삼국시대에 끝까지 살아남은 사마의는, 말년이 되어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다. 조위는 조조와 조비와 조예의 시대를 거쳐 4대 황제 조방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칠순에 접어든 사마의는 조씨 일족들의 견제를 받으며 퇴물 취급을 받고 있었다. 사마의는 어릴 때 조조를 속였던 것처럼 일부러 꾀병을 부리며 관직에서 물러났고, 염탐을 하러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치매에 걸려 정신이 혼미한 척 열기까지 불사했다.
249년 실권자 조상이 황제 조방을 모시고 수도를 비운 틈에 사마의는 정변을 일으켜 정적들을 몰살하고 정권을 탈취한다. 바로 위나라의 몰락과 사마씨 정권의 등장을 알리는 고평릉사변(高平陵之變)이다.
조위의 정권을 장악한 사마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의 정치적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조조를 그대로 벤치마킹했다. 사마의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과 나라를 배신했고, 후대의 평가를 우려하여 본인이 직접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후계자들에게 찬탈의 기반을 차근차근 마련해 줬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반대파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숙청하는 모습도 조조와 흡사했다.
사마의가 생전에 절대 권력을 누린 시간은 짧았다. 그는 고평릉 사변을 일으키고 권력의 정점에 오른뒤 불과 2년만인 251년에 사망했다. 하지만 그가 수립한 사마씨의 권력은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 그리고 손자 사마염에게 계승됐다.
사마씨 정권에 의하여 263년 촉한이 가장 먼저 멸망했고, 265년에는 위나라가 멸망하며 진이 건국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280년 오나라마저 정벌하여 100여년에 걸친 난세를 끝내고 통일을 이뤄낸다. 사마의는 사마씨 후손들에게 고조(高祖 宣皇帝) 황제로 추존되며 결국 자타공인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사마의가 생전에 남겼다는 어록이다. "겸손하고 또 겸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사마의의 놀라운 인내력과 처세술은 난세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생존 비결로는 본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마의는 '역사의 승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의 후손들이 세운 진나라는 건국 과정에서의 온갖 모순과 부족한 정통성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단명했고, 이후 중국은 오호십육국 시대라는 또다른 난세에 휘말리게 되며 진의 삼국통일은 그 의미가 빛이 바라게 됐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과 삼국지연의의 등장 등으로 활발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라이벌 제갈량이 시대의 명재상이자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반면, 사마의는 주군인 조조와 더불어 권신의 대명사이자 '배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악역으로 굳어졌다. 그렇다면 과연 사마의를 진정한 최후의 승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내의 최고수 사마의에게 배우는 처세학
성공이 가까워질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직장인이 느끼는 스트레스 강도의 최고봉은 업무가 아니다. 대인관계가 그 주인공이다. 업무는 실패해도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대인관계는 한 번 엉클어지면 모든 게 뒤죽박죽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겉으론 하하허허 웃지만 사실은 견제하는 상사, 틈만 노리는 동료, 뒷통수를 치는 후배 등 만만치 않은 ‘관계 스트레스’가 곳곳에 잠복해 있다.
여름과 겨울을 다 겪어야 성장한다
사마의는 '삼국지' 후반부에 등장한다. 그의 존재감은 엔딩으로 갈수록 더욱 무겁게 힘을 발휘하며 궁극의 순간에 모든 것을 거머쥔 최후의 승자가 된다. 사마의는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사마방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모두 8명. 모두 뛰어난 수재들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사마의는 가장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그는 당연히 각 제후들의 주목을 받았고 가장 먼저 조조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사마의는 불응한다. 원래부터 명문가였던 사마의는 환관 가문 출신인 조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조조가 누구인가. 시대를 좌지우지 하는 간웅으로 머리 쓰는 일이라면 둘째가라면 서운한 존재. 조조는 사마의가 병을 핑계로 자신의 부름을 거절하자 사마의를 감시한다.
그 감시의 기간은 몇 년 동안 계속 되었다. 감시하는 조조나, 감시 당하는 사마의나 보통 사람은 아닌 관계로 몇 번의 위기와 기지 넘치는 위기 탈출의 순간들이 찾아온다.
한 번은 사마의가 평소 보던 책들을 거풍(햇빛 잘 들고 바람 부는 곳에 책을 놓고 말리는 것)하고 있었다. 어느날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사마의는 감시를 잊고 무심결에 뛰어나가 책을 걷어 들였다. 그것을 사마의 집에 있던 여자 종이 본 것이다. 아차하는 심정이 들었던 사마의는 이 사실을 부인에게 이야기했고 부인은 곧바로 아무도 모르게 여종을 죽임으로써 위기를 모면했다. 어찌보면 잔인하고 무서운 성정이지만 그만큼 냉정한 절제력과 판단력이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또 한 번은 자객이 사마의를 찾았다. 자객은 칼을 들고 내리쳐서 사마의가 반항하면 죽이고 가만히 있으면 살려두라는 명령을 받았다. 자객이 사마의의 방에 몰래 들어가 칼을 빼어들고 내리치는 순간 사마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자객은 칼을 멈추고 돌아가 조조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조조는 사마의가 풍이 있어 자신의 부름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
몇 년 후 조조는 사마의를 다시 불렀고 이번마저 거절하면 힘든 상황이 올 것을 느낀 사마의는 조조의 참모로 들어간다. 조조는 애초부터 사마의의 재주는 높이 샀지만 인간적으로는 사마의를 믿지 않았다. 관직도 낮은 직책으로 주고 일도 하찮은 일을 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가 될 조비에게 항상 '사마의는 낭고의 상(이리처럼 뒤돌아볼 때 몸은 안 돌아서고 고개만 돌리는 것)이라 믿으면 안 된다. 그는 절대 남의 밑에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일렀다.
그러면서도 조조는 사마의를 자신의 아들인 조비의 휘하로 보냈다. 당시 조조는 조비와 조식 그리고 조창이라는 아들 셋 중에서 후계자를 결정하기 위해 고민 중이었다. 결국 조비로 후계자 자리는 정해졌다. 사마의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그는 조조의 눈을 피해 조비와 함께 일을 하면서 미래의 권력인 조비의 신임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조조와 조비의 의심을 풀기 위해 하급관리로 일하거나 심지어는 가축 기르는 일마저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일을 해 조조의 의심을 푸는 한편 조비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후계자 결정전에서 사마의의 조언을 받은 조비는 훗날 왕위에 올라 사마의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한편 조조는 항상 사마의를 제거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촉의 제갈량이란 존재와 맞상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인재로 사마의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훗날 조 씨의 ‘위’가 사마 씨에게 멸문지화를 당하는 씨앗이 된다.
조조가 죽자 왕위에 오른 조비는 사마의에게 막중한 권한을 주면서 촉의 제갈량과 맞서게 한다. 사마의는 촉뿐이 아니라 위나라의 북쪽의 화근의 씨앗을 토벌하면서 조비의 충실한 부하가 된다. 조비가 '내가 동쪽에 있으면 그대는 서쪽에 있고 내가 서쪽에 있으면 그대는 동쪽에 있다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조비의 측근이 된다.
그리고 조비가 병으로 죽으면서 그의 아들 조예가 왕위에 오른다. 조비는 사마의를 조진, 진군, 조휴와 함께 조예를 받드는 보정대신으로 임명해 조예를 보좌하게 한다.
모든 공은 윗사람에게 돌려라
여기서 사마의의 처세학의 기본인 '자세를 낮추고 모든 공은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가 빛을 발휘한다. 사마의는 조조의 친척 가문인 조진에게 승리의 모든 공을 돌렸다. 아울러 어떤 말이든 온화하게 하고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극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조진은 항상 사마의를 견제했다. 하지만 사마의는 조진과 맞서지 않았다. 모든 자리에서도 조진에게 상석을 양보했고 조그마한 공조차도 모두 조진에게 돌렸다.
한 번은 승전을 하고 고향을 찾은 사마의가 잔치를 벌였다. 술을 거나하게 먹은 사마의가 시 한 수를 지었는데 시의 내용이 그야말로 겸양의 표본이다. '성공하고 고향에 돌아와 나라와 왕께서 나를 처벌하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이다. 그의 처세가 보통의 수준을 넘어선 것을 알 수 있다. 이쯤 되자 조진도 사마의의 처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갑자기 조진이 죽고 조예마저 병상에 드러눕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다.
전쟁터에 나가있던 사마의는 조예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다. 조예는 위중한 가운데 자신의 아들인 조방을 부탁한다. 그때 조방의 나이는 불과 8세. 조예는 조진의 아들인 조상과 사마의에게 또 다시 위나라의 장래를 부탁한 것이다.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를 잇는 3대의 위왕들로부터 후계자를 부탁받는 최측근 대신이 된 것이다.
당시 실세였던 조상은 사마의를 경계해 직급을 올려주는 대신 모든 병권을 빼앗았고 그를 24시간 감시했다. 위협을 느낀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은퇴하곤 낙향했다. 그러면서도 아들인 사마소와 사마사에게 항상 겸손하라고 지시해 자식들의 벼슬만은 유지할 수 있게 한다.
조상은 심복인 이승을 보내 사마의를 테스트했다. 이승은 형주자사로 가는 길이라며 사마의를 병문안 했지만 사마의는 말귀도 못 알아듣고 먹는 것은 다 질질 흘리는 흉내를 내며 이승의 눈을 속인다. 이승은 조상에게 돌아와 사마의는 이제 죽을 날만 남았다고 보고한다. 조상은 그 말을 믿고 사마의에 대한 의심을 거둔다.
어느 날 조상은 왕인 조방을 모시고 고평릉으로 갔는데, 그 순간 사마의는 아들들과 함께 측근 군대를 동원, 궁을 접수한다. 그리곤 '직급을 버리면 살려준다'며 조상을 회유해 조상 스스로 무장을 풀게 한다. 그리고 곧바로 누명을 씌워 조상과 그의 가족과 측근을 몰살, 권력을 장악한다.
이로써 위나라는 이제 사마 씨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리고 72세에 사마의는 죽고 그의 아들을 이어 손자인 사마염이 서진을 세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모사꾼 이미지의 사마의이지만 그는 전장에서는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그것은 사마의가 제갈량의 북벌을 무려 6번이나 막아낸 것으로 증명된다. 물론 모든 전투에 다 참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마의의 존재는 불세출의 귀재인 제갈량마저 좌절감에 빠지게 할 정도로 뛰어났다.
오장원에서 맞선 사마의와 제갈량. 위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온 사마의는 제갈량의 촉군에 비해 우세했지만 지구전을 감행했다. 사마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제갈량은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사신을 보냈다. 심지어 사신의 손에 여자 옷을 들려서 보냈다.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아낙네처럼 웅크리고 앉아 나오지 않느냐. 나와서 일전을 겨루자'는 편지도 함께 보냈다.
체면을 중시하는 보통의 장수라면 크게 자존심이 상해 흥분해 뛰쳐나와 제갈량의 묘수에 걸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마의는 오히려 제갈량의 의도를 뛰어넘는 기지를 발휘했다. 촉의 사신에게 주연을 베풀며 제갈량의 동태를 살폈다.
사신은 '승상께서 장 10대 이상의 모든 일을 관장하시는데 먹는 것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취중진담을 발설함으로써 제갈량의 신상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흘리게 된다. 제갈량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사마의는 지구전을 지속한다. 결국 제갈량은 죽고 사마의는 자신의 최대의 라이벌의 마지막을 확인한다.
실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사마의의 '자기 절제 처세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마의는 또한 항상 스스로를 경계했다. 성공에 가까이 갈수록 위험도 가까이 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 몸을 낮춘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이해하는 분별력, 그리고 자신의 단점을 이해하는 용기가 진정으로 남자에게는 필요한 것이라고 설파했다.
우화가 있다. 한 소년이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100원 짜리와 50원짜리 동전을 주며 하나를 가지라 하면 소년은 항상 50원짜리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소년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하지만 소년의 선택은 더 현명한 것이다. 소년은 '내가 100원짜리를 선택하면 앞으로 50원짜리를 계속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이익과 성과의 유혹에 휩싸이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한 단계씩 성장할 수 있는 끈기와 인내가 필요한 것이다.
사마의는 물론 4대에 걸쳐 조 씨의 위나라를 위해 봉사했지만 결국 자신의 손자가 황제가 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 기본이 되는 것이 바로 보스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현명한 선택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누구보다 무서운 눈을 가진 조조를 뛰어넘어 조비, 조예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무서운 절제의 힘 덕분이다.
사마의는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사람과, 어떤 상황에서도 조조나 조비의 욕이나 단점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100% 알아채 경계심을 불러 일으키는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조조가 시행했던 수많은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한번은 조조가 사마의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경은 왜 발바닥이 손과 얼굴보다 하얀지 아는가?' 사마의는 당연히 모른다 말했고 조조는 '그것은 항상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사마의의 속내가 다른 사람을 충분히 속일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한 발언이었다. 이런 말을 듣고도 사마의는 단 한 번도 조조에게 책을 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사마의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칼과 창을 보면 날카로운 부분이 쉽게 마모된다. 그 이유는 남을 베고 찌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자신도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조직에서 핵심인력이라는 인재들이 그 누구보다 가장 상처받기 쉽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조직의 핵심 인력은 항상 많은 일을 그리고 두드러지는 일을 하기 마련이다. 공도 클 수 있지만 무엇보다 실패의 쓰라림도 최전선에서 먼저 맞기 때문이다.
사마의는 항상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움직일 때는 누구보다 먼저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의 쿠데타가 불과 3000명의 병력으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과감성과 결단력 그리고 핵심을 장악하는 전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직장인이 사마의의 처세학에 배울 수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때를 기다리자'이다. 물론 전제 조건이 따른다. 그것은 '실력을 겸비하면서'이다. 직장생활은 기다림의 연속일 수 있다. 결과를 기다리고, 지시를 기다리고, 승진도 기다리고 그리고 그 기다림 끝에 자신의 능력의 최대치가 과연 이 직장에서 어떤 정도일 수 있나를 가늠할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고민한다. 계속 갈 것인가, 이직할 것인가, 아니면 사표 내고 다른 것을 할 것인가를. 그 어떤 것도 정답은 없다. 하지만 사표를 내는 것은 승부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직하는 것은 새로운 전쟁터로 옮기는 것뿐이다. 계속 가되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떻게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사마의는 보여주었다.
사마의의 처세는 조금은 비굴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후손이 중원을 통일해 진나라를 세운 결과의 기본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작은 재주를 빛나게 닦아 큰 재주로 만들어 적을 만드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인들이여,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자리가 빛나 보이고 성공이 눈 앞에 다가온다고 느낄 때 한걸음 멈추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당신의 그 한 순간이 결승점을 통과하는 다른 동료의 등을 보는 결과를 빚어낸다 하더라도 다음 경기의 승자는 당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亮(밝을 량/양)은 회의문자로 亮(량)은 동자(同字)이다. 어진사람인발(儿; 사람의 다리 모양)部와 高(고)의 생략형 '高에서 안의 口(구)를 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부수(部首)는 사람, 사람이 높은 곳에 있으면 똑똑히 보이므로 '밝다'의 뜻이 있다. 또 고명(高明)한 인사는 남을 보좌(補佐)할 수 있으므로, 전(轉)하여 '돕다'의 뜻이 되었다. 그래서 亮(량/양)은 ①밝다, 환하다 ②분명해지다(分明---), 뚜렷하게 되다, 밝아지다 ③날이 밝다, 날이 새다 ④빛을 내다, 밝히다, 빛나다 ⑤드러내다, 나타내다 ⑥우렁차다, 크다, 분명하다(分明--) ⑦돕다 ⑧미쁘다(믿음성이 있다) ⑨높이다 ⑩참으로 ⑪진실로(眞實-) ⑫빛, 불빛, 밝음 ⑬양암(諒闇: 임금이 부모의 상중(喪中)에 있을 때 거처하는 방)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환하게 밝음을 양명(亮明), 아랫사람의 사정 따위를 밝게 살핌을 양찰(亮察), 소리가 매우 맑음을 형용하여 이르는 말을 양랑(亮朗), 사정을 잘 알아서 용서하거나 허용함을 양허(亮許), 마음이 밝고 곧음을 양직(亮直), 창살 없는 창을 일컫는 말을 양창(亮窓), 소리가 맑고 깨끗함을 청량(淸亮), 맑고 밝은 모양을 유량(瀏亮), 바르고 성심이 있음을 정량(貞亮), 단정하고 진실함을 단량(端亮), 삼가 밝힘이나 삼가 정성을 다함을 인량(寅亮), 임금을 도와 천하를 다스림을 익량(翼亮), 도자기가 땅 속에 오래 파묻혀 있은 탓으로 썩어서 그 광택을 잃는 현상을 실량(失亮), 제갈량이 여자들 머리장식용 쓰개를 사마의에게 보내 욕 보였다는 뜻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참아야 하는 작은 모욕을 일컫는 말을 양유건괵(亮遺巾幗) 등에 쓰인다.
▶️ 遺(남길 유, 따를 수)는 ❶형성문자로 遗(유)는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貴(귀; 많은 보배, 재산, 가진 것, 유)로 이루어졌다. 물건이 어디로 가버리다, 잃는 일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遺자는 '남기다'나 '끼치다', '버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遺자는 辶(쉬엄쉬엄 갈 착)자와 貴(귀할 귀)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貴자는 양손에 흙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귀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遺자의 금문을 보면 새집을 떨어트리거나 버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遺자의 본래 의미도 '버리다'나 '떨어뜨리다'였다. 후에 遺자는 '남기다'나 '전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는데, 길 위에 떨어트린 물건을 선조들이 남기고 간 유산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遺(유, 수)는 ①남기다, 남다 ②끼치다, 전하다 ③잃다 ④버리다, 유기(遺棄)하다 ⑤잊다 ⑥두다, 놓다 ⑦떨어지다, 떨어뜨리다 ⑧빠지다, 빠뜨리다 ⑨쇠퇴(衰退)하다 ⑩빠르다 ⑪더하다, 더해지다 ⑫음식을 보내다, 음식을 대접하다 ⑬오줌 ⑭실수(失手), 그리고 ⓐ따르다(수) ⓑ좇다(수)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마음에 남는 섭섭함을 유감(遺憾), 건축물이나 전쟁이 있던 옛터를 유적(遺跡),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음을 유기(遺棄), 사후에 남겨 놓은 재산을 유산(遺産), 끼치어 내려옴을 유전(遺傳), 죽은 사람의 뒤에 남은 가족을 유족(遺族), 사후에 남겨진 물건을 유물(遺物),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유골(遺骨), 죽은 사람의 몸을 유해(遺骸), 갖추어지지 아니하고 비거나 빠짐을 유루(遺漏), 활자 따위가 책이나 활판 가운데서 빠짐을 유탈(遺脫), 죽음에 임해서 남기는 말을 유언(遺言), 유언하는 글을 유서(遺書), 잃어 버림을 유실(遺失), 죽은 사람이 생전에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을 유지(遺志), 마음에 둠을 유의(遺意), 남이 잃어버린 물건을 주움을 습유(拾遺), 남김없이 모조리를 무유(無遺), 남편이 죽고 남긴 자식을 고유(孤遺), 자면서 모르는 가운데 정액이 나옴을 몽유(夢遺), 보태어 채움을 보유(補遺), 냄새가 만 년에까지 남겨진다는 뜻으로 더러운 이름을 영원히 장래에까지 남김을 일컫는 말을 유취만년(遺臭萬年), 마땅히 등용되어야 할 사람이 빠져서 한탄함을 이르는 말을 유주지탄(遺珠之歎), 오래 전하여 오늘에 이른 풍속을 일컫는 말을 유풍여속(遺風餘俗), 청렴결백하거나 선정을 베푼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감당유애(甘棠遺愛), 계책에 빈틈이 조금도 없음을 일컫는 말을 산무유책(算無遺策),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게 함을 보과습유(補過拾遺), 있는 힘을 남기지 않고 다 씀을 이르는 말을 불유여력(不遺餘力), 큰 바다에 남아 있는 진주라는 뜻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현자나 명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창해유주(滄海遺珠) 등에 쓰인다.
▶️ 巾(수건 건)은 ❶상형문자로 앞치마 모양을 본떴다. '건'의 음은 손을 닦는 것의 뜻에서 유래하며 전(轉)하여, 행주의 뜻이 있다. 한자(漢字)의 부수(部首)로서는 베, 천에 관한 글자의 음부(音符)로 쓴다. ❷상형문자로 巾자는 '수건'이나 '헝겊', '두건'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巾(수건 건)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허리에 두르는 천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깃발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렇지만 모두 '천 쪼가리'를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에는 차이가 없다. 갑골문에 나온 巾자를 보면 마치 긴 막대기에 천이 걸려 있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巾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수건'이나 '헝겊', '두건', '덮다'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다만 일부 글자에서는 단순히 모양자 역할만을 하는 예도 있다. 그래서 巾(건)은 (1)헝겊 따위로 만들어 머리에 쓰는 여러 가지 물건의 통틀어 일컬음 (2)두건(頭巾) 등의 뜻으로 ①수건(手巾) ②헝겊, 피륙 ③두건(頭巾) ④공포(功布: 관을 닦는 데 쓰는 삼베 헝겊) ⑤책을 넣어 두는 상자(箱子) ⑥덮다, 덮어 가리다 ⑦입히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관례 때에 쓰는 관을 건관(巾冠), 수건과 빗으로 세수하고 머리를 빗음을 건즐(巾櫛), 베나 비단으로 막을 쳐서 꾸민 수레를 건거(巾車), 부인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쓰개의 하나를 건괵(巾幗), 두건을 만드는 베를 건포(巾布), 비단을 바른 상자를 건급(巾笈), 옷이나 책 따위를 넣어 두는 작은 상자를 건연(巾衍), 상주가 두건 위에 덧쓰는 건을 굴건(屈巾), 머리카락이 흘러 내려오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 모양의 물건을 망건(網巾), 얼굴이나 손이나 몸을 씻은 뒤에 물기를 닦기 위해 사용하는 면 따위의 천으로 네모지게 만든 물건을 수건(手巾), 두건이나 기타 머리에 쓴 것을 벗김을 탈건(脫巾), 검은 베로 만든 유생의 예관을 유건(儒巾), 음식을 차려 놓은 상을 덮는 보자기를 상건(床巾), 씻거나 닦거나 하는 데 쓰는 수건을 식건(拭巾), 물건을 덮는 데 쓰는 보자기를 부건(覆巾), 건을 쓰고 띠를 띤다는 뜻으로 관복을 갖추어 입음을 이르는 말을 착건속대(着巾束帶), 제갈량이 여자들 머리장식용 쓰개를 사마의에게 보내 욕보였다는 뜻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참아야 하는 작은 모욕을 이르는 말을 건괵지욕(巾幗之辱) 등에 쓰인다.
▶️ 幗(여자의 모자 귁, 여자의 모자 괵)은 형성문자로 帼(귁)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수건 건(巾; 수건, 두건)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國(나라 국)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幗(귁, 괵)은 ①여자(女子)의 모자 ②머리 덮개 ③여자(女子)의 머리꾸미개 ④부인(婦人)들이 상중(喪中)에 쓰는 쓰깨, 그리고 ⓐ여자(女子)의 모자(괵) ⓑ머리 덮개(괵) ⓒ여자(女子)의 머리꾸미개(괵) ⓓ부인(婦人)들이 상중(喪中)에 쓰는 쓰깨(괵)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부인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쓰개의 하나로 건괵(巾幗), 제갈량이 여자들 머리장식용 쓰개를 사마의에게 보내 욕보였다는 뜻으로 큰일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참아야 하는 작은 모욕을 이르는 말을 건괵지욕(巾幗之辱)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