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제전’
알다시피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해마다 여름철에는 장마에 태풍에 다소 피해는 있지만 그래도 더위를 한방에 싹 날려줄 소재들이 있었는데 올해는 좀처럼 그런 전선들이 한반도를 비껴가는 모양새다.
사실 우리 동창 모임 중 ‘경산회’는 가장 오래된 모임이다. 예전에는 자주 참석했는데 한 2-3년 전부터 ‘이상하게 매월 첫째 주 토요일에는 항상 중요한 약속이 생겨서.’ 하고 뜸했었다.
물론 우리 동창회는 해마다 회장단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매우 활성화되어있고 항상 동창회 카페를 통해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어 매우 유익한 동창 모임이다. 거기에 파생되어서 ‘소모임’도 많은데 그중 ‘경산회’ 만큼 끈끈하게 지속되어온 모임도 드물다.
동창회라는 ‘큰 집’이 지탱하기 위해서는 회장단이라는 ‘석가래’나 ‘기둥’이 단단히 지지를 해주고 그 ‘큰 집’의 ‘안방’이나 ‘건넌방’, ‘행랑채’에서 활발하게 소 모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유는 아니지만 하여간 지난달부터 매달 첫째 번 토요일 ‘경산회’ 모임은 모든 약속에 앞선 일정으로 잡았다. 사실 지난 달 오랜만에 청계산 등산을 갈 때는 조금 계면쩍은 마음도 들었지만 친구들 만나 이야기하고 땀 흘리면서 그런 마음은 스르륵 말끔히 사라졌다. 항상 그들은 열린 마음으로 거기에 있었고 나도 거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번 자유산행은 더운 여름에 등산보다 피서 겸 해서 모이는 것이라 덜 의무적이지만 그래도 돌아온 신입은 홍기민 여사(나는 항상 내 와이프를 이렇게 칭한다.)까지 대동하고(모시고) 망월사역으로 갔다. 올해로 3년째 8월 자유산행은 망월사 계곡이란다.
과연 민형이 말대로 지하철은 최고의 냉방을 자랑하며 1시간 남짓한 승차에도 쾌적했다. 지하철에서 내리면서 성률이를 만났는데 예전에 성률이가 ‘홍삼나라’할 때 얘기부터 최근 근황까지 역구내로 가는 짧은 시간에 10년 세월을 뚝딱 되돌아 봤다. 역시 오래된 친구를 모처럼 만나도 그 사이의 ‘절대시간’이 빛 속도가 되는 것이 신기하다.
역 대합실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며 잠깐씩 역 밖으로 나가면 역시 더웠다. 그늘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아직 안 온 친구들 기다리면서 여기저기 친구들과 잡담하면서도 모두들 정겹다. ‘雜’이지만 ‘情’이다. 모두들 모이고 목적지인 망월사 계곡으로 향했다. 큼지막한 수박을 작대기에 매달고 둘이서 들고 가는 풍경은 영락없이 소풍가는 길이다.
한참 산등성이를 넘어 찾아간 명당자리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2미터 정도 폭포(그냥 물길) 아래 대여섯 명이 발을 담글 수 있는 물웅덩이가 고작이다. 우이동 계곡 등 수많은 계곡의 수려한 경관을 기대했던 나로선 다소 의아했지만 그래도 계곡이라 그늘이 지고 사람들이 없어 한적한 우리만의 ‘명당자리’라는 얘기에는 공감이 갔다.
물웅덩이에 발 담그고 돌로 뚝도 쌓고 물위에 상도 차리고 덕종이가 가져온 양주(22년산?)와 민형이가 가져온 보드카, 막걸리, 소주 등 주류를 물에 담가놓고 수박 반으로 쪼게고 이렇게 우리들만의 연회를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이 컴컴해지면서 소낙비가 세차게 내리고 천둥과 우박까지 퍼붓기 시작했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에 돌멩이까지 같이 내려오며 몸을 친다. 한동안 주변이 어수선해졌으나 이네 그들은 벌거숭이가 되었다. 거의 한 시간동안 끊임없이 내리는 소낙비를 맞으며 양주나 보드카는 자연스럽게 ‘미즈와리(언더락)’가 되었고 퍼먹는 수박은 이네 화채가 되었다. 물이 급속하게 불어 아까 생각한 물길은 진정한 폭포가 되었고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그들은 그 속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10대가 되어 마냥 그 여름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가 언제 이렇게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웃고 떠든 적이 있던가?’ 그들은 50년을 ‘빽도’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시각 의정부 일대에 순간 엄청난 폭우가 내려 근처 코스트코가 침수되는 등 난리였단다. 속옷까지 모두 젖은 알몸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상태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몸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으나 친구들의 흥에 겨운 열기는 더욱 하늘을 찔렸다. 엉거주춤 서있는 상태로 소나기를 무작정 맞으며 나눈 술잔들은 모두가 공감하듯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
비가 조금 그치는 사이 빠르게 간식을 먹고 하산했다. 모두가 흥건한 채로. 그런데 그즈음 오늘의 자유산행 2막이 열리고 있었다. 나와 몇 사람은 선두에서 먼저 하산하여 망월사역 근처 동네에서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도 나머지 일행이 내려오지 않더니 관희가 먼저 내려오면서 자기 등산화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철수하면서 쓰레기를 모두 비닐 봉투에 넣고 내려왔는데 자기 등산화를 비닐 봉투에 넣었다고 하여 쓰레기봉투를 버린 쓰레기통까지 뒤졌으나 문제의 등산화는 없었다. 다시 돌아가 계곡을 뒤졌는데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
결국 나중에 확인해보니 관희 등산화, 관희 와이프 휴대용 의자, 수박 파먹는데 요진하게 쓴 성률이 부삽을 보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의자나 부삽은 그렇다 치고 등산하면서 등산화 놓고 온 사람은 민형이 말대로 기네스 감이다.
하산하며 2차가서 맛있는 김치찌개에 술 먹고 3차가서 또 술 먹고 모두들 아쉬워하며 헤어졌는데 일부 친구들은 4차를 했단다. 그러는 사이사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가 너무 정겹다. 특히 그간 별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던 친구들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세삼 마음이 통하는 것을 보며 나 자신 그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고 인생의 소중한 순간이 된다. 아직도 마르지 않은 옷을 입고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는데 오전에 지하철에서 느꼈던 시원함이 없었다. 하루 종일 온 몸으로 느꼈던 시원함 상쾌함이 지하철 냉방을 능가하고 남았던 것이다.
계곡에서 비를 맞으며 나는 갑자기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봄의 제전’이 생각났다. 소나기 속에서 비를 맞으며 술잔을 기우리며 엉거주춤 ‘난장’을 즐기는 친구들의 모습이 이 발레곡 안무가 니진스키의 발레를 떠오르게 했다. 100 여 년 전인 1913년 파리에서 초연되며 큰 소동을 일으켰던 이 ‘봄의 제전’은 그때까지 ‘백조의 호수’ 같은 발레의 우아함을 추구했던 파리지앵에게는 충격이었다. 불협화음에 가까운 음악에 원시의 야만성을 표현한 춤사위 등 대자연의 혼돈과 원초적 에너지를 표출한 이 ‘봄의 제전’은 그 소동 이후 발레로 여러 가지 편곡된 연주로 100년 이상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전문가들은 이 곡을 고전이다 현대음악이다 다투고 있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소나기를 흠뻑 맞으며 원초적인 모습으로 여흥을 즐긴 우리들도 50년 가까이 같이 지냈지만 그 귀중한 절대시간 보다는 ‘몸과 마음이 흠뻑 기쁨에 젖었던 오늘 하루, 우리 인생에 있어서 절정의 하루였다.’고 얘기하면서 오늘 이 ‘현대’에 살고 있다. 가끔씩 우정을 나누면서 말이다.
이렇듯 이번 자유산행은 우리에게 소중한 ‘여름의 제전’이 되었다.
경산회를 위해 애쓰는 민형, 병진, 태호, 찬엽이 등등 모든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오래오래 계속 보자.
첫댓글 정말 멋진 후기다.. 기훈이 빼어난 솜씨로 쓴 후기가 메인이고.. 내가 쓴 건 예고편 ㅎㅎ^^
기훈이 글로 기승전결이 제대로 맞춰진 것 같다.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던 얘기 거리가 꽤 많았나 보네. 얼마나 요란했고 흥겨웠는지 짐작이 간다. 후기 너무 좋았다. 수고했다.
멋진 글 솜씨에 비를 맞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떠드는 친구들 영상이 자연스레 돌아가네.. 감사^^
기훈이의 맛깔 난 글로 인해 경산회와 동창들의 50년 우정이 새롭게 다가오네.
한꺼번에 후기가 올라오니 더욱 계곡피서 맛이 되살아난다.
등산가서 등산화 잃어 버린 게 기네스 북(?)에 올라 가야할 일이라면,비 오는 날 우산들고 나갔다가,우산 잃어 버리는 것도
기네스 북에 올라가야 하나?허허허허!
자유산행에 같이 간 친구들에게 평생의 추억을 남겨 드리고 싶어서 산신령께 맡겨 둔 거라네.혹시 필요한 사람 신으라고...
그 안에 등산 양말도 들어 있으니 신는 분은 양말 안 사셔도 될껄세.흐흐흐! 그래도 홍기민 여사가 조카뻘 되신다고 하니
잃어 버렸던(?)가족을 찾았으니 더 큰 걸 얻었다고 생각하네.등산화를 새로 사 주겠다던 친구들 이름이 기억에 새롭네.
4명이었어.안 사주면 차후에 이름 공개수배 합니다.허허허!
기훈이의 유려한 글 잘 읽고 간다.
홍기민여사 본관은 풍산이고 '기'자가 돌림자 맞아. 그 위는 '희'자고 아래는 '석'자야. 그날 친구들 증언으로는 관희 형제들이 돌림자를 안 쓴 것 같은데 하여간 조카뻘 되니까 내가 조카 사위뻘 되는거네....ㅎㅎㅎ
기훈아!어려운 고백(?)을 해 줘서 고맙다.
"자수해서 광명 찾자"는 어릴 적 간첩 신고 표어가 문득 떠 올랐다.
후후후후후!
기훈의 글솜씨에 마치 내가 자네들과 그 자리에 함께 한 듯한 느낌이~ 모든 벗들이 정겹고 사랑스럽다. 특히 기네스맨 관희가!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