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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0대 연산군·거창군부인의 연산군묘(燕山君墓, 사적 제362호)는 조선 제10대 연산군(燕山君. 1476~1506, 재위: 1494~1506,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과 거창부인(居昌夫人 愼氏)의 쌍분묘(雙墳墓)이다.
묘소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묘, 오른쪽이 거창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연산군묘비 전면에 ‘燕山君之墓(연산군지묘)’, 후면에 ‘正德八年二月二十日葬(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 부인 신씨의 묘비 전면에 ‘居昌愼氏之墓(거창신씨지묘)’, 후면에 앞구절은 파손되었고 뒷구절에 ‘六月二十六日葬(유월이십육일장)’이라 새겨져 있다. 묘소 밑에는 재실이 있다.
같은 묘역 안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 연산군의 딸(휘순공주)와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쌍분이 조성되어 있다.
묘의 역사: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유배지 강화 교동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나, 강화도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묘소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에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묘소 위쪽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1537년(중종 32)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 본래 연산군묘역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난 두 후궁의 제사를 맡게 되었는데, 한 명은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이고, 또 한 명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이다.
이 후 1449년(세종 31)에 성비 원씨가 세상을 떠나자 먼저 묘를 조성하였고, 1454년(단종 2)에 의정궁주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임영대군의 장자 오산군묘가 조성되면서 오산군파에서 묘역을 관리하였다.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묘의 이장을 요청하여 임영대군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임영대군은 거창군부인의 외할아버지로, 임영대군의 첫째사위가 거창군부인의 아버지인 신승선이 된다. 즉, 거창군부인 신씨는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1476년 음력 11월 6일~1506년 음력 11월 6일, 재위: 1494년 음력 12월 29일~1506년 음력 9월 2일)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성종에겐 첫 번째 아들이 되는 연산군은 1479년(성종 10)에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고,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년(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왕으로서의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위 3년 동안은 별 문제 없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즉위 4년째인 1498년에 무오사화(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다시 1504년에 갑자사화(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임사홍 중심의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무오사화 이 후 정사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을 폐지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가 바닥이 났으며, 잔혹한 형벌로 포악한 성정을 보여 왕으로서의 자질을 잃었다. 결국 1506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 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1506년(중종 1)에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1476년 음력 11월 29일~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기거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정궁주 조씨(義貞宮主 趙氏)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1454년 음력 2월 8일)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 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작호를 내렸고, 1454년(단종 2) 음력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에 봉작되었다. 1501년(연산 7)에 구문경과 결혼하였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다.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세종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능양위가 되었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으며, 반정 이후 구수영이 중종에게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이혼을 주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제15대 광해군·문성군부인 광해군묘(光海君墓, 사적 제363호)는 조선 제15대 광해군(光海君. 1575~1641, 재위: 1608~1623,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과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柳氏)의 쌍분묘(雙墳墓)이다.
묘의 구성은 왕자 묘제의 예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 혼유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광해군묘, 오른쪽이 문성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터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있다.
묘의 역사: 1623년(인조 1)에 문성군부인 류씨가 강화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음력 윤10월 29일에 양주 적성동(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먼저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641년(인조 19)에 광해군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10월 4일에 문성군부인 묘 우측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광해군(光海君) 이야기: 광해군(재세: 1575년 음력 4월 26일~1641년 음력 7월 1일, 재위: 1608년 음력 2월 2일~1623년 음력 3월 13일)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75년(선조 8)에 태어났다.
광해군에 책봉된 후,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가 된 후엔 남도로 내려가 왜군을 무찔러 왜란의 승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왜란이 종결된 후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인목왕후가 간택 된 후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왕세자의 지위가 위협 받기도 하였으나,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토의 복구사업에 전념하였다. 창덕궁을 비롯한 궁궐과 종묘사직을 중건하였고,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다시 간행하였으며,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안정에 힘을 썼다. 또 당시 명나라와 후금(청)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외교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왕위 계승에 대한 불안감으로 친형 임해군을 죽였고, 붕당정치에 휘말려 계축옥사 등의 여러 역모사건으로 광해군을 배척한 세력(소북)과 영창대군을 죽이기도 하였다. 심지어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인목왕후를 폐하여 서궁에 유폐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 폐모살제와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서인(西人)들이 1623년에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광해군은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후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고, 1641년(인조 19)에 제주도 유배지에서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이야기: 문성군부인 류씨(재세: 1576년 음력 7월 21일~1623년 음력 10월 8일)는 본관이 문화인 문양부원군 류자신과 봉원부부인 정씨의 딸로 1576년(선조 9)에 태어나, 선조의 왕자 광해군과 결혼하여 문성군부인에 봉해졌다. 1592년(선조 25)에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608년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광해군 사이에서 3남을 낳았으며, 1622년(광해 14)에 광해군의 외교정책의 잘못을 지적한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문성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에 강화도 유배지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양주 성묘(南楊州 成墓, 사적 제365호)는 조선 14대 선조(재위 1567∼1608)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의 사친(生母)인 공빈 김씨(恭嬪 金氏, 1553~1577)의 단분묘(單墳墓)이다.
묘의 구성: 성묘는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의 사친인 공빈 김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왕릉제도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공빈 김씨가 1610년(광해 2)에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되면서 성릉(成陵)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이다.
성릉으로 추봉된 이후에 왕릉의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여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과 호석을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광해군 묘비 전면에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 후면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辛巳七月初 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이라 새겨져 있다.
묘의 역사: 1577년(선조 10)에 공빈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풍양 조씨 시조묘소 뒤인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610년(광해 2)에 공빈 김씨가 공성왕후로 추존되자 묘를 능으로 추봉하고 석물을 다시 조성하였다.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어 현재의 성묘(成墓)가 되었다.
공빈 김씨(恭嬪 金氏) 이야기: 공빈 김씨(재세: 1553년 음력 10월 11일~1577년 음력 5월 27일)는 본관이 김해인 해령부원군 김희철의 딸로 1553년(명종 8)에 태어났다.
선조 즉위 후 선조의 후궁이 되어 1572년(선조 5)에 임해군을, 1575년(선조 8)에 광해군을 낳았다. 그러나 1577년(선조 10)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즉위 후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존하는 일에 힘을 썼다. 하지만 광해군은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의 양자입적으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대신들은 공빈 추존을 반대하였다. 광해군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610년(광해 2)에 공빈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휘호를 자숙 단인(慈淑 端仁), 능호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였다.
그 후 1615년(광해 7)에 명나라의 왕후추존고명을 받았고, 신주를 종묘 선조실에 부묘하였다. 이로써 광해군은 후궁 소생이 아닌 왕후 소생이 되었으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의 모든 호칭을 폐하여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남양주 안빈묘(南楊州 安嬪墓, 사적 제366호)는 조선 17대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의 후궁 안빈 이씨(安嬪 李氏, 1622~1693)의 단분묘(單墳墓)이다.
묘의 구성: 안빈묘는 조선 17대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봉분 앞에 묘표석, 상석, 향로석, 혼유석, 동자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을 배치하였으며, 묘표석 앞면에는 ‘조선국안빈경주이씨지묘(朝鮮國安嬪慶州李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묘의 역사: 1693년(숙종 19) 음력 10월 23일에 안빈 이씨가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음력 12월 5일에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안빈 이씨(安嬪 李氏) 이야기: 안빈 이씨(재세: 1622년 음력 9월 6일~1693년 음력 10월 23일)는 본관이 경주인 이응헌의 딸로 1622년(광해 14)에 태어났다. 병자호란으로 봉림대군이 청에 볼모로 잡혀가자 심양까지 따라가 봉림대군을 모셨다고 한다. 효종이 즉위한 후 후궁이 되어 숙원(淑媛)이 되었고, 1661년(현종 2)에 숙용(淑容)을 거쳐 숙의(淑儀)에 봉작되었다. 그 후 귀인(貴人)을 거쳐 1686년(숙종 12)에 안빈에 책봉되었다. 효종 사이에서 1녀(숙녕옹주)를 낳았으며, 1693년(숙종 19)에 72세로 세상을 떠났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글과 사진: 문화재청)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