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도탁스 (DOTAX) 원문보기 글쓴이: 초코맛딸기바
롬멜
사막의 여우로 유명한 그 롬멜
최근 들어 거품이 많이 빠졌지만
과거 거품이 워낙 엄청나기에 아직도 명장이라고 불림
롬멜이 잘싸우는 건 맞음
전술적 능력이 매우 뛰어남
근데 전략적 능력이 너무 심각하게 처참해서
그 뛰어난 전술적 능력이 의미가 없음
정확히 말하자면 롬멜은 전술적 능력'만' 뛰어남
롬멜이 대대장이였다면 명장 맞음
전략적 능력이 크게 요구되지 않는 대대장에게
제일 중요한 건 전술적 능력이니까
근데 롬멜은 대대장이 아니라 육군 원수임
장군이라는 위치는 전술적 능력은 기본에 전략적 능력까지 요구가 되는 직위임
그래서 난 롬멜'장군'은 절대 명장이라 불릴 수 없다고 생각함
이 글은 '장군'인 롬멜이 전략적으로 얼마나 무능한 지에 대해 설명한 글이고
내용의 출처는 아래 연구가들의 책들임
주내용은 마틴 크레벨드의 Supplying War
(이 책은 읽어본 사람이 꽤 많을 듯 '보급전의 역사' 가 이 책임)
보조내용은 데이비드 스타헬의 독소전쟁 시리즈
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은 엄청난 전술적 능력을 보여주며
'사막의 여우' 라는 별명을 얻음
근데 실상 이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보여준 엄청난 승리들은
전략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는 승리였음
무엇보다 북아프리카 전선은
어떤 가정을 하더라도
추축국의 전략적 약점 때문에
결국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선이였고
실제로도 결국 패배했음
이 전략적으로는 아무 가치도 없는 승리를 위해 롬멜이 벌인 트롤짓은
안그래도 지옥인 동부전선의 독일군들을 더 힘들게 함
애초에 독일 최고사령부 늑대굴이 연합군을 이기라고 북아프리카에 롬멜을 보낸 게 아님
최대한 버티면서 적에게 피해를 강요하고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느리게 밀리라고 롬멜을 보낸 거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매우 간단한 팩트 정도는
연합군에 비해 전략적 식견이 부족한 독일 사령부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독일 사령부는 롬멜의 광기는 알지 못했음
롬멜은 북아프리카에 가자마자 놀라운 전략을 세움
병사들 사기가 나쁘니 방어전보다는 공격전으로 분위기 전환을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알렉산드리아까지 공격한다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불가능할 엄청난 미치광이적 발상을 함
이게 얼마나 미치광이적 발상인지는 지도를 보면 됨
트리폴리에서 알렉산드리아 까지의 직선거리가 1,580km임
직선거리니 실제 거리는 당연히 더 멈
참고로 베를린에서 모스크바의 직선거리랑 비슷한 거리임
거기다 북아프리카의 기반 인프라가 훨씬 빈약하단 걸 감안하면
사실상 베를린-모스크바보다도 훨씬 먼 거리
병사들 사기만 올릴 생각이였으면 그냥 공격해서 승리하고 다시 방어를 들어갈텐데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그냥 알렉산드리아까지 뚫어버리겠다는 이 경이로운 상남자 전략
롬멜이 북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보자면
당시 북아프리카의 영국군과 추축군 전선은 '수르트'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음
근데 여기는 항구가 없음
그래서 추축국은'트리폴리' 항구를 통해서 보급을 받아야 했음
그리고 '트리폴리'에서 전선이 형성된 '수르트' 까지의 거리는 무려 500km 인데다가
두 도시 사이엔 철도가 없어서 트럭이랑 차로 수르트까지 보급을 해야했음
(트리폴리에서 물자를 내리고 그 물자를 트럭과 차량으로 수르트까지 보내는 거)
이 상황에서 롬멜이 알렉산드리아까지 공격하겠다고 하자
히틀러가 개입을 함
"롬멜은 트리폴리에 도착하자마자 증원군을 요청하기 시작하였으며
히틀러는 OKH 총장 할더의 반대를 묵살하고 그에게 제 15 기갑사단을 증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의해 독일아프리카군단(DAK)의 보급에 필요한 자동차수송 능력은 6천톤으로 늘어났다.
이는 러시아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1개 군단당 배당된 수송부대 양의 10배에 해당하였으므로
롬멜의 무리한 요구가 바바롯사(Barbarossa)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OKH 병참감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게다가 롬멜이 더 많은 증원부대를 받거나 혹은 500km의 한계를 초과하여 진격한다면
차량의 부족이 계속 일어날 것은 당연하였다.
또한 해안을 통한 연안해상수송도 문제 해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인식되고 있었다.
따라서 히틀러는 롬멜에게 트럭들을 보내주면서,
더 이상의 지원을 필요로 할 어떠한 대규모의 공격도 취하지 말 것을 명백히 지시하였다."
히틀러는 늑대굴의 반대에도 롬멜에게 통 큰 지원을 하는 데
사실 히틀러는 롬멜의 알렉산드리아 공격 전략을 당연히 드립으로 판단하고
그냥 지원 좀 해달라고 징징되는 거라고 생각했음
(상식적으로 알렉산드리아 공격이 말이 안되고 애초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시간끌기가 목적)
그래서 그냥 이거 먹고 징징거리지 좀 말라는 의미로 늑대굴의 반대에도
롬멜에 '엄청난 지원'을 한 거임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심정으로....
하지만 롬멜한테 알렉산드리아 공격 전략은 드립이 아니였고
롬멜은 진지하게 공격을 시작함
그리고 이 공격은 대성공을 거둠
그 뛰어난 전술능력으로 무려 살룸까지 진격을 한거임!
크.... 지도 가장 왼쪽에 수르트에서 단번에 살룸까지
알렉산드리아랑 나름 가까운 살룸까지 진격했으니
롬멜은 이제 알렉산드리아 점령이 멀지 않았다는
망상에 빠지게 됨
그리고 롬멜은 기가 살아서 독일 최고사령부 늑대굴에
"뭐 방어를 해? 시간을 끌라고? 이 무능한 것들아 ㅋㅋㅋ 공격해서 이기면 되는 데 왠 방어?"
"지원이나 좀 해라. 내가 알렉산드리아 얻어 줄테니"
ㅇㅈㄹ를 함
하지만 롬멜이 망상에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하고 있을 때
이탈리아군은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기 시작함
우린 좆 됐다는 현실을....
"11월이 되자 필연적으로 위기가 발생하였다.
11월 9일 밤 20,000톤의 물자를 싣고 가던 5척의 호송선단이
케이프 본(Cape Bon)에서 영국 함대에 의해 모두 격침되었다.
그 후 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항이 "실질적으로 폐쇄되었다"고 선언하였다.
11월에 건너온 보급물자는 30,000톤이라고 하는 참담한 숫자로 떨어졌고
한편 해상에서의 손실은 30%로 증가하였다"
영국 지중해 함대의 함대 운용에 지중해 바다가 털리고 있고
독소전이 시작되어
독일군의 장비손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이 상황에서
롬멜은 보급을 더 달라고 당당히 외침
그것도 그냥 보급을 달라고 한 게 아님
말도 안되는 양의 보급을 달라고 함
"롬멜은 보급부대에 8천 대의 트럭을 증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당시 러시아에서 작전했던 독일의 기갑군(Panzerarmee) 4개 군을 전부 합한다고 하더라도
1만 4천 대의 트럭밖에 모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OKH, 폰 린텔렌, 더욱이 뭇솔리니조차도 이 요구를 거부하고
롬멜에게 또다시 공격할 경우 보급상황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롬멜은 계속해서 두 번이나 경고를 무시하고 재차 전격전을 감행한 후,
1월 29일 벵가지에 재입성했다."
참고로 당시 소련과의 동부전선에서 추축군이 상대한 소련군의 수는
롬멜이 당시 북아프리카에서 상대한 연합군 수의 최소 50배에 달했고
동부전선에 독일군 역시 어마어마한 숫자가 투입되었지만
그 이상으로 전선이 너무 길고 넓어서
병력 밀집도는 북아프리카 전선보다도 낮은 개판 상황이였음
근데 롬멜은 이지랄을 한거임
그리고 롬멜은 보급상황이 나빠지자 이탈리아 해군을 욕하기 시작함
물론 재해권이 밀리기 시작해서 보급상황이 나빠진 건 팩트임
그리고 지중해의 추축국 해군은 이탈리아가 담당함
또 이탈리아 해군은 세계 4위의 해군으로 영국 지중해 함대보다 강한 전력을 가지고 있음
따라서 롬멜의 그 참피적인 전략적 안목으로 이 상황을 겉으로만 단순하게 봤을 때
이탈리아 해군 탓 하는 게 이상하진 않아 보임
하지만 속사정을 들춰보면 이탈리아 해군한테 동정심이 일어날 수 밖에 없음
이탈리아가 2차대전에서 참피로 잘알려져 있지만
최소한 이탈리아 해군은 참피가 아님
이탈리아 해군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롬멜이 하는 트롤링도 최대한 막아보려는 엄청난 노력을 함
얘네들은 충분히 할만 큼 했음
2차대전 추축국의 제일 큰 약점은 전략 자원이 없다는 거임
이 전략 자원을 바다를 통해서 수입해와야하기 때문에
영국의 해상봉쇄를 풀지 못한다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음
(해상봉쇄를 안풀고도 전략 자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바로 소련 침공)
특히 북아프리카 전선에 보급을 하기 위해서는 꼭 지날 수 밖에 없는
지중해 역시 오른쪽의 수에즈 운하와 왼쪽의 지브롤터를 전부 소유하고 있는 영국의 통제 아래 였음
이 당시 이탈리아 해군은 일본해군과 마찬가지로 죽창메타 해군이였음
즉 , 함대결전과 같은 전투에 올인한 해군이란 뜻임
이런 해군 구조는 보급과 같은 보조 능력이 해군 규모에 비해 모자랄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장기적인 작전 능력이 부족하다는 약점이 있음
고로 이런 해군에게 답은 단기전임
하지만 현실적으로 단번에 승부가 날려면 압도적인 차이가 있어야 됨
비슷한 진짜 강자들끼리의 싸움이라면 단번에 승부가 나지 않음
그리고 영국 해군은 진짜 강자임
영국 지중해 함대는 그 영국 해군이고
영국 해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진정한 대양해군임
예전에 비한다면 형편없이 약해진 현재의 영국해군이라지만
현재 영국 왕립보조전대의 보급 능력은 러시아 해군을 근소하게 능가한 세계 2위임
EU 해군 보조능력 비교에서 압도적인 수치를 보여주는 왼쪽의 RFA가 바로 영국 왕립보조전대
보조 전대의 능력이 좋아야 대양 작전을 오래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대양해군임
지금보다 훨씬 강한 과거의 로열네이비는 당연히 지금보다도 더 보조전력이 강한 대양해군이였고
따라서 영국 지중해 함대는 이탈리아 해군보다 전력이 약함에도 이탈리아 해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음
어떻게? 이탈리아 해군이랑 안싸워 주는 거임
이탈리아 해군은 단기간에 승부를 봐야되서 싸워야되는 데
영국 지중해 함대가 안싸우고 시간을 끌면
보조전력이 약한 이탈리아 해군은 결국 부하가 오고
그럼 안싸우고도 이기는 게 되버림
그러나 싸우려는 이탈리아 해군과 안싸우려는 영국 지중해 함대의 술래 잡기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엄청 유리할 수 밖에 없음
바로 석유 때문에
영국은 석유를 공급 받을 수 있음
하지만 추축국은 아님
루마니아에서 석유가 나오긴 하지만 양이 충분하지는 않았으며
더군다나 루마니아의 석유는 독일이 우선적으로 공급 받았음
이탈리아는 많이 받을 수 가 없었지...
도망다니는 영국 지중해 함대와 싸울려면 영국 지중해 함대를 찾아가서 따라 잡아야되는 데
그게 다 석유가 소모되는 짓임
이탈리아 해군은 처음에는 영국 지중해 함대랑 싸울려고 했지만
영국 지중해 함대가 잠수함을 뿌리고 도망다니면서 지연전을 시작하자
전략을 바꿈
그냥 가만히 있는 거임
석유 안쓰고 존버하며
그리고 정찰기를 이용해서 영국 지중해 함대가 사정권에 오면 격퇴하겠다는 전략
흡사 현대의 핵무기 같은 역할임
사실상 못쓰더라도 그냥 존재한다라는 거 자체가
상대에게 부담이 되는ㅇㅇ
더군다나 이탈리아 해군은 이탈리아 답지 않게 상당히 준비성이 투철했음
전쟁시작전에 이미 충분히 많은 석유를 쟁여둘 정도로
(독일 육해공군 , 이탈리아 육공군은 석유 많이 안쟁여나서 전쟁시작후에 부랴부랴 민간석유를 공출함)
근데 이탈리아 해군이 석유를 많이 쟁여 놨다는 사실을 이탈리아 육군이 알게되고....
이탈리아 육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석유를 빼앗아서 씀
그리고 이 사실이 이탈리아 육군이랑 같이 작전하던 롬멜에게 들어가 버리고...
석유가 부족하던 롬멜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승리를 들먹이면서 이탈리아를 압박
결국 이탈리아 해군의 석유를 공급받는 데 성공함....
석유 없는 해군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한데
그 석유를 뺏어감 ㅋㅋㅋㅋ
이탈리아 해군이 그냥 가만히 있으니
영국 지중해 함대는 자신보다 강한 이탈리아 해군에 정면대결은 못걸고
잠수함 위주로 물자 수송선을 공격하는 통상파괴전을 실시
그리고 롬멜은 이거에 상당히 빡쳐서 이탈리아 해군을 또 압박함
이탈리아 해군이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서
소중한 물자들이 바다에 가라 앉는다고 ㅋㅋㅋㅋ
그래서
이탈리아 해군은 왜 자신들이 가만히 있는 지 롬멜에게 설명함
1. 영국 지중해 함대랑 싸우면 이기는 건 맞다
2. 그래서 영국 지중해 함대는 우리랑 안싸우고 피하기만 한다.
3. 영국 지중해 함대는 석유를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다.
4. 그러나 우리 이탈리아 해군은 석유 비축분이 떨어지면 끝이다.
5. 우리가 석유를 안쓰고 가만히 있음으로써 약 20~30%의 수송선이 적 잠수함에 요격 당하고 있지만
냉정히 말해서 우리가 가만히 있기 때문에 나머지 70~80%의 수송선이 생존하는거다
6. 우리가 수송선을 호위하기 위해 움직인다면 석유 비축분이 가파르게 떨어질 것이고
비축분이 전부 떨어지는 순간 영국 지중해 함대는 이 지중해에서 가동가능한 유일한 함대가 된다.
7. 그렇게 되면 지중해에서 떠다닐 수 있는 우리 수송선은 0척이 된다.
8. 따라서 우리 이탈리아 해군은 그냥 가만히 있어야 된다.
이탈리아 해군의 이 설명에도 롬멜은 이 걸 이해 못함
전략적 관점에서 이탈리아 해군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이해 못하고
그냥 이탈리아 해군이 가만히 있는다고 까기만 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자신이 역공세를 통해
이탈리아 해군의 병신짓(?)까지 커버할 대승리를 해주겠다면서
석유만 계속 뺏어감
더군다나 롬멜의 강력한 항의로 인하여
이탈리아 해군이 수송선 호위를 위해 움직여야되면서
이탈리아 해군의 석유 비축분은 가파르게 위험수준에 도달
전력 가동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게 되어
사실상 무력화되버림
롬멜은 세계 4위의 강력한 해군을 영국보다도 더 많이 무력화 시킴
"이탈리아군은 롬멜을 단념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히틀러가 중부 지중해의 영국군 요충지인 몰타 섬을 점령하고 싶어하는 점을 이용하여
롬멜의 아프리카에서의 공격 재개를 저지하려고 했다.
이탈리아군은 7월말 이전에는 실행할 수 없는 대규모의 상륙작전을 계획함으로써
롬멜로 하여금 가을까지 공격을 연기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탈리아 해군 말을 듣고 롬멜이 후퇴를 했었다면
상황이 실제 역사보다는 훨씬 좋았을거임
그러나 롬멜은 전략적으로 의미 없는 승리를 위한 전술을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음
"5월 26일에 롬멜은 공격을 개시했다. 추축동맹군은 6월 22일에 토브룩항을 파괴되지 않은 채로 점령하였다.
그렇지만 추축동맹군은 이 성공을 이용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6월의 선박 손실량은 5월에 비해 거의 늘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의 연료부족 때문에 아프리카행 선박의 톤수가 3분의 1로 떨어지고,
한편 양륙한 보급물자는 15만톤에서 3만 2천톤으로 떨어져 버렸다.
게다가 연료부족으로 이처럼 얼마 안되는 물자조차 벵가지가 아닌 트리폴리에서 하역해야만 했다.
롬멜군의 상황은 현재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 없던 데다가 이 문제가 겹치면서 롬멜은 퇴각하든지
아니면 현지 조달에 희망을 걸고 적진 돌파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군 남부총사령관(케셀링)의 동의를 얻은 이탈리아군 최고사령부의 항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롬멜은 토브룩에서 노획한 보급물자로 나일 강까지 갈 수 있다고 주장하고,
공격 속행을 결심하였다. (중략) 다시 650km를 전진한 후
피로와 격화된 저항과 그리고 "곤란한 보급사정" 등으로 인하여
아프리카 기갑군은 7월 4일 진격을 정지했다.
롬멜 자신이 후에 인정한 바와 같이 이 지점에서 정지한 것은 차라리 행운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롬멜은 2개 대대와 전차 30대로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했을지도 모르지만 병참선은 더욱 길어졌을 것이다."
알렉산드리아는 영국 지중해 함대가 있는 큰 항구고
따라서 영국 함대의 함포사격 지원을 영국군이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만약 롬멜이 알렉산드리아에 도달해서 알렉산드리아를 공격했다면
그냥 쳐 맞고 더 비참히 후퇴했을 거임
당시 북아프리카의 제공권도 영국이 가지고 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추축군은 항구에 정박한 채로 지원사격을 날리는 전함을 어찌할 방법이 없었음
그래서 북아프리카 전선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선이였던 거임
동부전선에서 소모되는 물자가 너무 심각해서
북아프리카에 보낼 석유가 독일에겐 없었고
그래서 롬멜이 이탈리아 해군 석유를 빼앗아 쓴 건 데
그 이탈리아 해군 석유도 롬멜이 억지로 움직이게 하여 의미 없이 석유만 쓰게 만들어 고갈되어버림
영국 전함이 정박해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려면 공군이 필요한 데
이탈리아 해군이 무력화된 시점에서
요격당하는 수송선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니
원래도 그리 좋지 못했던 북아프리카 보급은 좆망....
그래서 지중해 따위에 쓸 석유가 추축국은 없었음
북아프리카 전선은 추축국의 약점 때문에
결국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선인 데
그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전선에서
롬멜이 한 트롤 짓의 결과로
얻은 것은 사막의 여우라는 롬멜의 이름
승패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하는 의미 없는 수 많은 전술적 승리들
이정도고
잃은 것은 세계 4위의 해군인 이탈리아 해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고철덩이가되고
원래라면 동부전선으로 가야할 많은 물자가
북아프리카로 가다가 영국 잠수함대에 요격당해
지중해 저 용궁으로 가고
적인 연합국한테 전술적 가르침을 줬다는 거?
아무리 봐도 잃은 게 훨씬 더 큰 거 같지 않음?
롬멜이 그냥 수르테에서 존버 했으면
영국 북아프리카군이 계속 보급을 받으면서 규모가 몇십만까지 커지더라도
그래서 수르테가 밀리더라도
영국군이 피해를 많이 봐서 트리폴리 공격하는 데 다시 준비 기간이 필요할테니
시간을 벌게 될 것이고
트리폴리만 남았다 하더라도
석유비축분이 남아있는 이탈리아 해군 때문에 트리폴리는 지켰을 확률이 높음
트리폴리 공격을 위해선 이탈리아 해군을 먼저 무력화 시켜야하고
그럼 영국 지중해 함대가 이탈리아 함대랑 싸워야함
지원함대가 와서 이 해전을 영국이 이긴다 할 지라도
영국 해군에 많은 피해를 줬을 테고
그럼 또 영국은 재편성 시간이 필요해서 그 재편성 시간동안 또 시간을 벌었을 거임
장군으로써 롬멜은 충분히 무능함
의미도 없는 일에 너무 소중하고 중요한 많은 것을 다 날려버림
그가 거둔 수 많은 전술적 승리들로 저 잘못을 커버하기엔
잘못의 결과가 너무 심각하게 큼
"많은 저작물들이 2차 대전의 독일군 야전원수들을 뛰어난 군사경영자로 묘사한다.
동시에 독일군 기갑지휘관들은 흔히 혁명적인 군사개념을 새로이 고안해낸 위대한 혁신가들로 소개되곤 한다.
하지만 기록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서술은 실제 일어난 역사와는 거리가 먼 허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을 수 있다.
독일군 야전 지휘관들은 1941년 여름 전역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고난과 역경들은 고사하고,
심지어 바르바로사 작전에 처음부터 내재되어 있던 계획과 개념상의 실수들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1941년 8월. 이제 독일군의 보급체계는 지나치게 길게 늘어나 있었고
집단군들의 공세역량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었으며 재정비 또한 미처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장군들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모스크바로의 즉각적인 공세를 요구했다."
"스스로가 지휘 중인 군대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무능력은
그들뿐만 아니라 전역 자체가 내재하고 있던 오점이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이 진격 도중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학습하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심지어 전선 지휘관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광대한 소련 연방을 상대하면서 나타난 여러 어려움들을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이이상 작전을 지속할 경우 발생하게 될 군수 및 군사적 대가에 대해 계산해 볼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설사 매일 매일 눈앞에서 이어지는 전투들로 인해 미래 계획에 신경 쓸 시간이 조금도 없었다 해도,
과거 수 주간 소련 연방의 열악한 도로와 붉은 군대의 끊임없는 역습을 상대하면서 무언가 깨달을 만한 기회는 충분했다.
기계화 부대가 지속된 전역으로 인해 한계에 도달하지는 않았을까?
과연 어떻게 해야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리기 전에 다음 공세를 실시할 수 있을 만큼 보급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전선에 뚫린 구멍을 메우고 제대로 점령되지 않은 영토를 마저 처리할 예비대는 어디 있을까?
물론 그들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아예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공평을 기하자면 대부분의 문제점들에 긍정적인 해결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각 야전 지휘관들은 나름대로 이 끔찍한 상황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은 전략적 시야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장군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어떤 방식으로든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 지휘관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들은 독일이 정말 어떤 위기에 처해 있었는지 제대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기이한 실수가 어째서 발생했는지 설명하기 위해선 잠시 과거로 물러나 독일 장군들의 과거 배경을 살펴봐야 한다.
이들 모두는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서 복무했고, 특히 할더, 룬트슈테트, 만슈타인, 케셀링, 클라이스트 등
몇몇은 아예 동부 전선에서 제정 러시아와 싸웠다.
독일에게 있어 1차 대전의 러시아는 아무리 좋게 봐도 결국 만만한 상대였다.
1914년 탄넨베르크에서의 극적인 승리는 이러한 관점의 전형적인 실례였고,
이러한 기억들은 당시 초급 장교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독일은 다중전선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결국 1917년 러시아를 무릎 꿇렸다.
‘고물 장비를 쓰고 졸렬한 지휘를 받는, 낙후된 땅의 소작농군대‘라는 러시아군에 대한 편견은 그렇게 완전히 굳어졌으리라.
한편 같은 전쟁의 서부전선에서는 독일군이 패배를 맛보았고,
따라서 독일의 앞길을 가로막는 진정한 장애물은 서부에 존재한다는 잘못된 결론이 도출됐다.
그렇게 1941년이 되었다. 프랑스는 패배했고, 영국은 고립되었다.
소련 연방은 독일과 사실상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소련의 국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장군들이 붉은 군대를 과소평가 하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고,
난관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시작하자 1차 대전의 기억들이 다시금 독일 장군들을 지배했다.
1914년 9월, 독일군이 결국 서부전선에서 방어로 전환하면서 이후 4년간 이어진 참호전의 악몽이 시작되었다.
연합군이 ‘마른 강의 기적’이라고 부른 이 사건으로 인해
1914년 신속하게 승리를 쟁취한다는 독일군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당시 마른 전투에서 직접 싸웠던 구데리안을 포함한 많은 후대 독일 장군들에게,
이때 실패한 이유는 지나치게 야심적인 전략 목표나 연합군이 우세한 전장 상태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독일군이 실패한 유일한 이유는 과도한 조심성 탓에 파리로 밀고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해 어떻게든 결정적인 승리의 성취에 매달렸다면, 그들은 결국 승리했을 것이었다.
이 어긋난 교훈은 2차 대전의 초기 전역에서 정말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곧 공세주의가 독일 장군들을 사로잡았고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이들은 독일군을 한계 이상까지 밀어붙이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할더와 그의 장군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에 대해 잘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의 실수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이 소위 ‘전격전의 대가’들은 전략적인 면에서 ‘전격전’의 근본적인 토대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들의 공세와 전공이 절정에 달해있던 시기조차도.
이것은 절대 가벼운 실수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보면
당시의 독일 장군들이 그들 스스로의 성공 공식과 그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는 했는가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물론 사상적, 인종적 편견이 부채질한 과도한 자신감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것은 유일한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명백한 장군들의 실패에 있다.
독일 장군들은 역동적인 기동을 유지하는 한 제한적인 작전적 목표는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와 프랑스, 발칸반도의 경우에는 이정도만 해도 전략 목표까지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련은 달랐다. 물론 개전 초 그들의 공식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성공조차도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심지어 스몰렌스크 전투를 통해 독일의 공세전력과 소련의 방어전력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 이후조차도,
장군들은 모스크바를 향한 또 다른 대공세를 제안할 뿐이었다.
그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이제 그러한 종류의 대작전에 필요한 근본적인 토대까지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의 문제는
그들이 작전적 사고에 매몰되어 이를 심지어 전략보다도 우선시했다는 것이다.
작전 요소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독일군 내부에서조차 지적되고 있던 오점이었다.
전임 육군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는 젊은 장교들이 전략적 맥락으로 작전을 평가하는 방법을 배우기보단,
무기체계의 효율 극대화에만 몰두하고 있다며 불평을 늘어놓은 바 있다.
결국 독일군은 지나친 작전 중심 사고방식으로 인해
현재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판단하는 능력이 거세되었고,
어떻게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이해 없이 전략적으로 무의미한 전투들을 그저 계속할 뿐이었다.
장군들은 점령할 다음 도시와 섬멸할 다음 소련군과 같은 당장 당면한 과제들에만 집중했다.
이런 편협한 시각은 심지어 1943년 여름까지도 이어졌다.
그들이 마침내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스탈린그라드에서 재난이 일어난 뒤였고,
그제야 군 내부에서 히틀러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1941년 여름, 독일의 전략적 상황이 점점 절망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장군은 거의 아무도 없었다.
결국 장군들은 너무 근시안적이었다.
그들은 소련군의 1941년 겨울 역공세가 남아있는 모든 환상을 박살낸 뒤에야 당면한 현실을 깨달았다."
"그러므로 전문적 관점에서 보면 바르바로사 작전에서
독일군을 이끈 사람들은 작전적으로는 유능했으나 전략적으로는 서툴렀다.
극소수의 일부를 제외한 히틀러의 장군들 대부분은 전선 후방에서 벌어진 절멸전쟁에 협조했고,
결국 붉은 군대와의 전쟁에 있어 무능했다.
오늘날 많은 독일 장군들이 소위 ‘명장’으로 여러 매체와 과도하게 무비판적인 역사서들을 통해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1941년 독일군 최고 지휘관들은 ‘보헤미아 상병’의 그릇된 군사적, 이념적 목표 대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의 전쟁은 곧 전략적 수렁과 대량학살로 얼룩졌지만,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사임한 장군은 단 한명도 없었다."
"그들은 결국 진실로 히틀러의 군대였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자네 2차대전도 관심이 많은가
만슈타인 구데리안은 깔 수 없지 ㅠ
전투에선 이기지만 전쟁에서는 패하는
뭐 그런건가
지랄 결국 마지막에 독일 장군들 전체를 까내리네
롬멜이 괜히 사막의 여우고 원수까지 달았겠냐
사기가 중요한 그 시기에 아프리카에 지원도 없었는데 지 혼자서 고군분투해서 그만큼 버틴게 대단하니까 히틀러도 자기 업적 선동에 쓴거아녀
@분당동불주먹 뭐 일단 체급자체가 상대가 안되니까 효율전 전술이 중요했고 독소전쟁 중반까지는 잘 먹혔지
프랑스랑 주변국가 다 쳐먹은것만해도..
소련에 미국까지 건드려서 문제지
롬멜 나중에 찬밥신세되어서 전방인 동부전선이 아닌, 후방인 노르망디 인근으로 배치받음
소비에트도 사실 랜드리스 없었으면 멸망 아니냐?
@이즈미 사카이 전시 동안 이루어진 접촉과 특히 무기대여법에 따른 인도 물자는 미국이 매우 뛰어난 경제-기술력을 지닌 나라라는 널리 퍼진 인식을 확인시켜주었다. 측근들과 같이 있는 자리에서는 스탈린조차 미국과 영국이 "무기대여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1941-42년에 너무 많은 것을 잃었기 때문에 독일에 대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민간인들에 갈 의복과 다른 소비재 대부분은 관료들이 착복했다. 조금 남은 것들이 호의에 고마워하는 수령자들에게 떨어졌다.
실패한 제국 1권,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저, 김남섭 옮김, 아카넷, 2016년, 82~8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