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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6일 성 바오로 미키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1,1-19
복 음 : 마르 6,53-5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53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54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55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56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참 좋은 가장(家長)이자 최고의 디자이너
-하느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퍼뜩 떠오른 주제는 ‘우리의 참 좋은 가장-하느님’이었습니다.
세상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는 물론 세상 종말까지 참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 애쓰시는 우리의 참 좋은 가장 하느님이십니다.
교회의 순교사를 봐도 이런저런 우여곡절의 과정을 통해 참 좋은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교회를 통해 서서히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오늘은 일본 순교성인들인 성 바오로 미끼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 미사를 봉헌합니다.
오늘날 일본을 생각하면 참으로 각별한 느낌이 듭니다.
성 바오로 미끼는 약 450년전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시기에
예수님과 똑같은 나이인 33세 짧은 나이에 순교한 예수회 회원이었습니다.
그는 교토에서 동료 신자들과 체포되어 나가사키까지 무려 1000km 600마일, 2500리 길을
교회의 찬미감사歌인 테데움(Te Deum)을 부르며 걸어가 동료 신자들 25명과 함께
1597년 2월5일 십자가에 달려 순교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처럼 십자가위에서 박해자들의 용서를 청하는 기도의 강론으로 최후를 마쳤습니다.
이때 바오로 미키와 순교한 25명은 사제 22명과 예수회 일본 수사 3명이었습니다.
참으로 혼돈스러운 세상도 이런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서서히 인류가정으로 형성됨을 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교회의 순교역사입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창세기의 시작입니다.
첫 절을 보면 창조 이전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참으로 어둡고 무의미(無意味)하고 무질서(無秩序)한 무(無)의 심연(深淵)같은 장면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의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살 수 있는
가정의 터전으로 만들어 가시는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하느님의 디자인 솜씨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은 최고의 디자이너입니다.
하여 강론 제목은 '우리의 참 좋은 가장이자 최고의 디자이너-하느님-'으로 정했습니다.
창조과정을 통해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면서 가장인 하느님을 중심으로 가정(家庭)이 형성되는 모습입니다.
흡사 균형과 조화가 갖춰지고 질서가 잡혀가는 아름다운 세계 가정 같습니다.
오늘은 넷째 날까지 창조과정을 보여줍니다. 각자의 영역과 한계가 분명해집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라는 예전의 강론 주제가 생각납니다.
창조전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바로 그러합니다.
창조과정을 통해 분명한 한계가 설정되고 하느님 중심의 균형과 조화, 질서가 잡혀가니
“천국에는 한계가 있다.”라는 말이 그대로 통합니다.
창조과정 중에 후렴처럼 되풀이 되는 말마디가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입니다.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가장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뿐이시고,
그분은 좋으시며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은 정말 좋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좋은 세상이 악과 고통이 범람하는 세상으로 변했는지에 대한 답은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창조 과정의 넷째 날까지 매번 후렴처럼 도합 4회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는 말마디가 참 기분이 좋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수도원 세상을 꾸미려 노력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우리의 영원한 참 좋으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입니다.
어제의 신선한 체험도 잊지 못합니다.
바로 수도원 화장실과 샤워실 빈 마루바닥 공간을 원장수사가 말끔히 정리, 정돈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네요!”
“정리의 천재같네요!”
“인테리어에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것 같네요!”
진심에서 우러난 청담(淸談)을 나눴습니다.
창세기의 혼돈스러운 모습이 창조과정을 거치면서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운 질서 있는 모습으로 변한 것과 흡사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르꼬 복음 사가가 예수님의 활약상을 요약한 집약문으로,
우리의 참 좋은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님께서
참 좋은 가정을 만들기에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그대로 창세기의 창조과정을 보는 듯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광경입니다.
이들 삶의 중심에 자리 잡으신 예수님을 터치하여 연결, 소통하는 순간
병고의 혼돈스런 모습들에서 본연의 모습으로 치유, 회복되는 모습들
모두가 예수님 가정의 한 식구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구원을 받았다’라는 말마디의 뜻을 나누고 싶습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희랍어 ‘에스존토(eszonto)’의 뜻은 육체의 치유 그 이상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그 말마디의 뜻은 ‘육신의 좋은 상태(wellness)’만이 아니라
‘온전한 상태(wholeness)’를, ‘가정에의 복귀(coming home)를 뜻했습니다.
그야말로 고향집에 돌아 와 우리의 영원한 가장이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터치하여 만남으로
영육의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받은 모습들을 보여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고향집에 돌아온 우리 모두에게
전인적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시고, 이어 당신을 중심으로 한 균형과 조화, 질서가 잡힌,
당신 보시기에 참 좋은 가정공동체를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나라에 가까운 나라인 일본에서는 직원 전원이 로봇인 호텔이 생겼다고 합니다.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처우 개선이나 연봉 인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육아 휴직이나 병가 등을 내지 않을 테니 훨씬 매력적일 것 같습니다.
더욱이 작년에 있었던 구글 딥마인드라는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 대결로 인해서
로봇 역시 높은 지능으로 생각과 판단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지요.
그래서 인간은 앞으로 10년 이내에 직업의 3분의 1일을 로봇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전문 일자리까지 잠식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까지 주는 로봇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모든 인간들에게 반드시 필요할까요?
우선 인간의 일자리를 잠식함으로 인해 이 안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이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경영자 몇몇의 만족을 위해서 대다수가 아픔과 상처를 받는다면 분명 필요한 상황이 아닙니다.
따라서 무조건 편리함과 생산성, 그리고 유용성 등의 쉽고 편안한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리 옳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삶 안에서 쉽고 편안한 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노력도 없이 쉽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며, 특별한 운이 자신에게만 계속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누군가가 아픔과 상처를 받을 수 있다면 분명한 잘못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오셨던 그 상황을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왜 굳이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을까요? 그냥 알아서 해주시면 당신도 편하고, 우리도 편하지 않을까요?
왜 힘든 길을 직접 선택하셔서 하느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당하셔야 했을까요?
어쩌면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지 말라는 주님의 직접적인 모범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도 한 번에 단박에 이루어지는 것, 그냥 알아서 나에게 좋은 것은 다 달라는 마음 등을 통해서는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느낄 수도 없으며, 이러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소외되는 그 누군가가 분명히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쫓습니다. 그런데 그냥 쫓는 것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이라도 대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고 전해줍니다.
그들의 간절함이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 없이 예수님을 쫓았던 사람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부정적인 모습만을 바라보면서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편하고 쉬운 방법으로만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의 간절한 노력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보시니 좋았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도 정성을 들여서 만든 도자기를 보면 그런 마음이 들것입니다.
‘아 좋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성당 앞에 작은 동산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불어서 토사가 밀렸고, 아파트와 마주한 옹벽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서울시와 구청에서 관계자가 성당을 찾아왔고,
앞으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동산을 6미터 정도 낮추기로 했습니다.
트럭으로 1200대 가량의 흙을 파냈습니다. 성당 앞에는 1000여 평의 마당이 생겼습니다.
철쭉, 장미, 과일 나무를 심었고, 잔디를 심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름다운 정원이 생겼습니다.
그곳에서 ‘성모의 밤’도 하였고, 정월 보름에 ‘윷놀이’도 하였습니다. ‘정말 보니 좋았습니다.’
선한 마음과 정성이 함께하면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들은 ‘보기에 좋은 것’들이 될 것입니다.
욕심과 교만이 가득하면 우리가 하는 일들이 겉으로는 보기 좋을지 몰라도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자칫 대형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있었습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성수대교의 붕괴’입니다.
자신은 먹을 수 없는 음식을 유통시키기도 하고, 남의 노력과 혼이 깃든 명품을 짝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것들은 보기에 추하고, 버려야 할 것입니다.
지난 3일에는 사제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새 사제를 보는 것은 언제나 기쁨입니다.
사제서품식이 끝나고, 추기경님께서 새 사제들에게 첫 부임지에 대한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새 사제들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임명장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26년 동안 11번 자리를 옮겼습니다.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에서는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적성과 시흥5동에서는 본당신부로 지냈습니다.
사목국에서는 교육담당 업무를 담당했고, 캐나다에서는 연수를 했습니다.
중견사제 연수를 마치고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 있었고, 성소국에서는 5년째 일을 하고 있습니다.
26년 동안 본당에서만 사목을 했던 동창 신부가 제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참 여러 곳을 다양하게 옮겨 다녔다!’ 제가 지나온 그 길들이 보기에 좋기 보다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통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은 낯선 곳의 긴장도 쉽게 풀어주고, 새로운 만남을 곧 친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것만 잘 지키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즐겁고 보람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남에게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먼저 말하기 전에 먼저 듣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충실하게 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둘을 식별하는 지혜를 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열심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식견을 받아들이고, 그분들의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분들에게는 물질적인 보상보다는 그분들을 인정하는 겸손한 마음이 더 소중합니다.
사실 그분들 대 부분은 저 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사시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필요해서 만나는 사람보다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분들을 더 자주 찾아뵙고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시는 신부님들, 사제서품을 받고 처음으로 사목현장으로 가시는
신부님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분들이 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일들이면 좋겠습니다.
그분들 모두가 주님의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기도 중에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연중 5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 <제1독서>에서 우리가 들어오던 <히브리서>는 이제 끝나고,
오늘부터 <창세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의 첫 부분인 오늘 <독서>는 ‘창조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행이 호수를 건너 온 곳,
겐네사렛 땅에서 생긴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누가 새롭게 창조된 사람일까?
오늘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사람’이 새롭게 창조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열 두 해 동안 하혈증을 앓고 있던 여인’(마르 5,5,25)처럼,
믿음으로 예수님께 접근해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이들입니다.
곧 믿음을 행위로 드러낸 이들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새로 태어난 이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새로 창조된 이 인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이인가?
지금 나의 손이 무엇에 가 있는가? 내 손이 지금 무엇을 만지작거리고 있는가?
예수님인가? 아니면 그 무엇인가?
사실, 마음이 있는 곳에 손과 발이 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너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요한 20,27)
손을 댄 것은 우리지만, 사실 만진 분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우리를 매만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더듬은 것입니다.
당신 손으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고, 우리의 영혼을 쪼물딱 거리시고,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낫게 하십니다.
우리는 손을 댔을 뿐, 사실 우리를 붙잡으시는 분은 그분이십니다.
우리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려오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고,
무릎마저 꿇고 우리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이들’은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이 계신 곳마다 데려왔습니다.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분의 옷자락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르 6,54-56 참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들어 주셨고, 과연 그분의 옷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한편에는 예수님께 간청하는 이들이 있고,
또 한편에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이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믿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중재하는 이가 되어야 하고,
또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오고 그들을 위해 간청하고,
또한 직접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그분 사랑의 손길을 반겨 맞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의 옷을 만지듯, 오늘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말씀 속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만져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지고, 예수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흘러들게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그렇습니다. 말씀이 구원이 흘러나오는 예수님의 옷자락입니다.
마더 데레사의 표현처럼, 우리는 전선줄이고 하느님께서는 전류이십니다.
전선줄에 전류가 통해야만 전등을 밝힐 수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 접속되어 있어야 할 일입니다.
접속되지 않으면 한갓 끄나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오늘 우리는 옷자락뿐만이 아니라, 당신 몸을 통째로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 앞에 있습니다.
사랑의 접속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 항상 당신과 접속되어 있게 하소서.
또한, 형제와 이웃을 위하여 기도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창세기 저자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심연(深淵) 덮고 있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 한마디로 빛이 생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 한마디로 푸른 싹을 돋게 하시고 씨를 맺는 풀과 과일나무를 제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 한 마디로 궁창에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을 만들어 놓으십니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보시니 좋았다.’(1,4.10.12)라고 하십니다.
고대 근동 문헌 중에 바빌론, 앗수르파니팔(Ashurbanipal B.C. 668-630)왕의
궁중 도서관에 보존되었던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라는 서사시 토판(대략 B.C. 1700)에서
구약성경의 천지창조의 이야기와 흡사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서사시는 모두 일곱 개의 토판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창조되기 전에 원시 대양인 압수(Apsu; 단물)와 그이 아내 티아맛(Tiamat; 짠물)
그리고 그들의 아들 뭄무(Mummu)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압수와 티아맛은 이어서 안사르(Ansar), 키샤르(Kishar), 아누(Anu), 엔키-에아(Enki-Ea)를 낳습니다.
그러나 압수와 티아맛은 자식들이 성장하며 소음을 일으키는데 분노하여 자식들을 멸망시키려 하지요.
그러나 이를 알아차림 엔키-에아가 먼저 주술을 외워 압수를 잠들게 하고 그를 죽입니다.
남편 압수를 잃은 티아맛은 그녀의 측근인 킹구(Kingu)와 짜고 에아를 죽이려 합니다.
에아는 담키나(Damkina)와 결합하여 마르둑(Marduk)을 낳습니다.
에아는 자신을 죽이려는 티아맛을 대항하여 마르둑을 앞세워 격렬한 싸움을 벌입니다.
결국 에아가 승리하지요. 신들의 우두머리가 된 마르둑은 창조의 신이 되어 우주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마르둑은 티아맛의 죽은 몸을 둘로 나누어 한쪽은 하늘을 만들고 다른 쪽은 땅을 만들지요.
그리고 이어서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듭니다.
마르둑은 다시 티아맛의 추종자였던 킹구를 죽여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를 흙과 결합하여 인간을 만듭니다.
학자들의 일치된 의견은 성경의 창조의 이야기와 에누마 엘리쉬의 창조 순서와 표현이
비슷하여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가 궁창의 창조, 광명체 창조, 인간의 창조의 순으로 이어지고
창조 이전에 어둠과 흑암이 있었다는 점과 궁창 위의 물과 아랫물의 구분하는 것 등입니다.
학자들 일부에서는 창세기 저자가 시대적으로 앞서는 에누마 엘리쉬의 신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바빌론 유배를 통해 창세기 저자는 그곳 신화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인간의 모습을 투사한
신들의 가족 투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와 초월자이신 하느님의 창조 이야기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따라 전개되는 창조의 이야기와
유일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담은 말씀으로 창조하신 창조이야기와는 그 목적이 다른 것입니다.
고대 근동의 창조 이야기를 덧붙여서 설명하는 것은
학계에서 문제 되고 있는 점을 알려드리고 하느님 창조 이야기를 좀 더 이해시키시 위한 것입니다.
마르코는 주님의 구원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창조 때에는 인간은 조화롭고 선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와 죽음의 그늘에서 그들은 병들고 욕심의 끝 길인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죄이든 죽음이든 인간의 조화롭고 선한 모습을 파괴시키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 들에게 구원을 펴십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조화를 깨트리고 생명을 잃은 사람을 본래의 온전한 ‘하느님의 모상’으로 회복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든 이들을 데리고 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옷자락의 술에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합니다.
놀라운 것은 옷에 손을 댄 사람은 다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때론 욕심에 눈이 어두워 하느님 가르침에 반대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주님께로 돌아 설 수 있고 그분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질 수 있으면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희망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분과 함께 하는 기도의 시간을 마련해야 하지요.
그래야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시들지 않는 희망을 간직하면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도 팔을 걷어 부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은 다 ‘보시기에 좋듯’
우리 주님 옷자락에 닿는 모든 것은 다 선으로 바뀌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