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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잇빨중사홈피 ★ 잇빨기행여단 원문보기 글쓴이: 잇빨중사
Ho Chi Minh and the OSS
By Claude G. Berube
1940년대 중반, 베트민(Viet Minh)의 지도자인
호치민(Ho Chi Minh)은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서양국가들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미 육군 소령 앨리슨 토마스(Allison Thomas)는 1945년 9월 15일,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과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 성가신 질문을 받았다. 호치민은 몇 주 전에 힘을 잡았고,
토마스 소령은 이제 하노이를 다음날 떠나서 미국 본토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는 임무를 완성했다.
그는 작은 미국인 팀을 이끌고 인도차이나 전선에서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과 두 달을 같이 지냈다. 그의 임무는 태평양
전쟁 동안 베트민의 게릴라들을 훈련시키고 일본군의 정보를
취득하던 미군 전략정찰국(OSS) 소속이었다.
그러나 이제, 호치민의 독립선언이 있었고, 일본군은 한 달 전에
항복했으며, 태평양 전쟁은 끝난 것이다. 즉 인도차이나에서의
OSS의 임무도 끝이 났다.
저녁식사에 초대한 사람들은 호의적으로 그를 대했고, 토마스 소령은
진짜 하고 싶은 질문을 해보겠다고 마음 먹었다. OSS가 받은 많은 보고서
에서, 호치민은 애매한 상태의 (미국에 대한) 충성과 알 수 없는 의도를 가
지고 있었다고 표현되고 있었다. 토마스 소령은 호치민에게 직접적으로
얼굴을 맞대고 물었다.
“당신은 공산주의자였습니까?”
그러자 호치민이 대답했다.
“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친구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그것은 놀라운 자인이었다.
1940년대 중반, 베트민의 지휘자인 호치민은 2차대전 동안 자국의
독립을 위하여 서양국가들의 도움을 원했다. 그리고 얻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국과 대부분이 과거 식민국가였던 연합국은
이제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독립행동은 동방에서 전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 식민국가들은 군사력을 많이 잃은 상태였고,
미국은 그저 “bring the boys home.”란 입장이었다.
전쟁 동안, 미국은 많은 파시스트 국가들과 싸웠다. 이때 미국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들의 방관 속에서 어떤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베트남의 독립 지도자인 호치민은 몇 년 전만해도 비교적 마이너 그룹의
지도자였다. 1945년이 되자, 그는 베트남의 지도자로 부상했고 이어 이후
10년간 혁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든다.
Deer Team Meets a "Mr. Hoo"
두 달 전에 토마스는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장군과 함께 고별 저녁식사를
했다. 그와 5명의 특수작전 팀 넘버 13, 암호명 ‘사슴’팀원들과 함께였다.
그들은 하노이 부근 탄 트라오란 곳에 낙하산으로 점프해 들어가 호치민
의 본부를 지도(directions) 했고, OSS 대원들에게 그는 그냥 소박한
“Mr. Hoo.”라고 불렸다.
그들의 임무는 50-100개 정도의 게릴라팀을 만들어 하노이에서 랑손까지
의 일본군 철도를 공격하고 수송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그것을
통해서 중국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군사기지와 항구 등
을 공격했고, 그러자 모든 OSS 팀들을 무엇이든 정보를 취득한 뒤에 중국
으로 복귀하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그동안 공중투하를 위한 기상정보나
미 공군 작전에 필요한 기초를 알려주었다.
토마스 소령은 1945년 7월 16일 낙하산으로 뛰어내렸다.
3명의 팀으로 다른 두 명은 통신조작수 윌리엄 자이스키
중사와 통역관인 상병 헨리 프루너였다.
그들은 떨어진 곳의 상황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200명의 게릴라
들에게 포위가 되었고, 이후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그들의 주거지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3명을 호치민과 만나게 해주었다.
당시는 그냥 “C.M. Hoo,”라고 불렀다. 호치민의 본부는 그들에게 협조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토마스 소령은 그가 공산주의자인 줄은 몰랐고,
그저 러시아 말을 하거나 러시아를 방문했던 사람으로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토마스 소령과 매우 개방적으로 정치적인 대화를
나눴다. 호치민의 스트레스는 프랑스의 학대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프랑스와 잘 조율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했다.
토마스 소령의 첫 번째 보고서가 중국 쿤밍에 있는 OSS 지휘관 아르키
-메데스 패티에게 전달되었다. 다음날, 토마스는 이렇게 호치민을 평가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프랑스인들과 비슷하지만,
그의 병사들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호치민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연합국에 잠재적으로 우호관계를 유지
할 생각이었다. 1950년대 중반에도 그는 겉으로는 ‘사슴’팀의 지휘관을
성실하게 믿는 것으로 보였다. 토마스는 보고서에 명백하게 썼다.
“그의 공산주의 경력을 잊어도 좋을 듯 하다.
베트민 연합은 공산주의가 아니다. 그들은
프랑스의 가혹한 현실에서 자유를 얻고 싶을 뿐이다.”
7월 30일,
나머지 사슴팀의 멤버들이 낙하산으로 북베트남에 뛰어내렸다.
멤버는 부팀장인 렌 데파우닉스 중위,
화기교관인 로렌스 보그트 하사,
사진촬영가인 아론 스퀘어스 병장,
의무병인 폴 호그랜드였다.
그 중 데파우닉스 중위는 프랑스인이었다가 미국 시민이 된 사람으로,
OSS에 들어오기 전쟁 초기에 낙하산으로 뛰어내려 저항운동을 도왔던
인물이다.
데파우닉스 중위가 땅에 떨어져서 처음 만난 사람은 ‘반’과 지휘관이었던
지압 장군이었다. 호치민은 그곳에 없었고, 나중에 처음 호치민을 보았을
때, 데파우닉스 중위는 그가 질병에 고생하고 있는 노인 같은 첫인상을
받았다. 하나의 역사의 아이러니를 말하면, 호치민의 공산주의자들과 싸운
베트남전쟁은 미국인이 베트남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면 결코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호치민은 몸이 안 좋아보였고 연기 나는 오두막 구석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의무병은 그가 이질, 근육통과 간염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라고 중위는 표현했다. 그가 보기에 그는 오래 살 것 같지가 않았다.
“우리 의무병 호그랜드가 치료를 해주는 동안, 그는 부하들에게
정글로 가서 허브를 구해오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는
건강을 회복했고, 그는 정글에 관한 지식이 자신을 호전시켰
다고 생각했다.”
다른 OSS로 온 보고서에 따르면, 토마스 소령은 호치민의 충성(협력)심을
믿었고, 그로 인해서 여러 정치적인 관심사를 갖게 되었다. 인도차이나는
프랑스, 비시 정부, 일본, 중국, 영국 등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7월 27일의
보고서에 보면, 토마스는 호치민의 연합세력이 모든 정치적인 도당들이
오직 자유를 위하여 뭉쳐진 “정치적 성향이 뒤에 없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부가적으로
“호치민은 단체가 공산주의적으로 변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다.
이 농부는 국제적인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모른다. 그들은 자유와
독립만을 이해하고 있다.”라고 썼다. 그리고 프랑스와 공조할 생각이
없다고도 생각했다.
“그들은 프랑스를 일본인보다 더 나쁘게 생각한다.... 호치민은 어떤
프랑스인보다 차라리 미군 백만 명이 오는 것이 낫다고 말하기도 했다.”
(현실이 된다. 그러나 호치민이 자기 핵심을 철저하게 숨기는
심리적인 대화법으로 토마스 소령의 머리 위에서 놀았음을
모른 듯 하다. 잇빨중사)
OSS Deer Team원들과 호치민, 보구엔 지압이 탄 트라오 지역의 훈련장에서 1945년 8월 찍은 사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왼쪽 두 번째 키가 큰 서양인부터) 렌 드파우닉스 중위, 호치민, 앨리슨 토마스,
보구엔 지압, 헨리 프루너, 폴 호그랜드. (왼쪽에 무릎 꿇은 사람) 로렌스 보그트, 에이온 스쿠어스.
드파우닉스 중위의 사진.
2차대전 동안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통치
2차대전 동안 프랑스의 식민지 파워는 당연히 감소되었다. 그리고 결과적
으로 다른 힘이 떠올랐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모두 그랬다. 19
세기의 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보석을 깎아 프랑스의 왕관을 만든다,”
라고 표현했었다.
세계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2차 대전 동안 어떻게 하나 흥미롭게 지켜
봤다. 프랑스 비시 정부는 일본과 독일의 허가를 받은 정도만의 식민지
통치를 했다. 과거 프랑스 공화국의 방법대로 식민지 영토를 지배하려
했다.
미국은 일본과 싸우고 있었고, 일본은 또한 지역 패권을 유지하려 했다.
또한 중국에서는 공산주의와 국가주의가 대립하여 싸우고 있었고, 중국
영토의 남부로의 영향력 확대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베트남의 내부
에서는 식민국가와 제국들을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다양한 시도
들이 있었다.
베트남에서는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자 통치와 싸우고 있었다.
북부 통킹, 중부 안남, 남부 코친차이나.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
을 꿇자 인도차이나에 대한 식민지배가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프랑스에
두 개의 정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남부는 이름뿐인 중립이었고, 프랑스 비시 정부는 독일의 1차대전
영웅인 하인리 필리페 페타인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비시 정부는 2차대전
동안의 바다 건너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식민지 통제를 보류한 상태였다.
인도차이나의 프랑스에 대한 충성은, 독일의 꼭두각시 비시 정부의 독일에
대한 충성보다 낮았다.
일본은 2차대전 초기 태평양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본은 연합국과의 오금저림도 있었지만, 독일의 눈치도 계속
봐야했다. 비시 정부와 일본은 모두 다 오랫동안 독일에게 묶여 있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류하는 동안, 일본은 독일의 허락을 받고 베트남
내에 군사기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의 상황은 변한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파리해방으로 인한 비시 정부의 몰락은 1944년
8월에 일어났고, 식민지에 대한 언급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2차대전을 통하여, 미국은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
에게 지원을 하고 있었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도 마찬가지였다. 언제
든지 베트남의 일본군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1944년 프랑스의
해방으로 미국 정부는 먼저 동남아시아 지역 최우선의 정보들에 눈을
돌렸다. OSS는 1942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만든 것이었다.
OSS to Ho: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공조
당시 OSS는 작전기지를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지휘관인 윌리엄 도노반 준장의 지휘 아래 복잡한 군사
작전들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그는 참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든 일본군에 대항해서 같이 싸울 사람들이라면,
프랑스-인도차이나의 정치적인 것에 상관을 하지 말아라.”
베트민(Viet Minh)은 호치민의 지도 아래 1940년대 초부터 활동을 시작
했고, 베트남의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베트남 주둔 일본군과 싸우는 것이었다. 1944년 중반 OSS는 인도차이나
에서 일본군과 싸울 정보망을 돕기 위하여 호치민에게 다가갔다. 또한
추락한 미군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것도 임무에 하나였다.
쿤밍의 아르키메데스 패티 대위는
“호치민이 미국과 같이 선전활동을 하는 것에 협력했다.”라고 쓰고 있다.
그는 중국에 있다가 나중에 하노이에 들어왔었다.
미국과 호치민의 협력은 1942년 12월부터 시작되었고, 그때는 베트민의
대리인이라는 사람이 중국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찾아와서 말을 전했다.
“안남 사람인 호치민,”이라는 사람이 국민당군 감옥에 있는데, 병들어
죽어가고 있으니 풀려나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1943년 9월, 호치민이 마침내 풀려나자,
그는 베트남으로 돌아와서 독립을 위한 조직을 만들었다.
1943년 10월, OSS는 An October 1943 OSS은 미국 정부에 건의를 했다.
“안남인들을 이용해서.... 어려운 정글을 이용해, 일정숫자인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는 것.”이란 내용이었다.
효과적인 심리전도 제안되었다.
“안남인들에게 연합군이 이길 수 있다는 신뢰를 주고,
만약 연합군이 이기면 독립을 얻게 해주겠다고 한다.”
독일을 비롯한 2차대전의 ‘주축국’들은 유럽에서 후퇴하고 있었고, 비시
정부는 무너졌으며, 일본은 독일의 속박으로 인한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일본군은 재빠르게 베트남을 침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꼭두각시 정부를 세워버렸다.
5월 11일, 베트남 황제 바오 다이(Emperor Bao Dai)는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실상은 일본에 협력할 요량이었다. 호치민은 이러한 전개에
매우 놀랐고, 베트민을 통한 새로운 독립활동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같은 시간, 일본군은 베트남 내 프랑스 세력에 타격을 입혔고, 당시 OSS
로써는 인도차이나에 대한 정보의 차단이 되어버렸다. 결국 미국과 호치민
은 협력을 모색하게 된다.
OSS 장교들은 중국의 본부에 이런 보고를 했다.
“프랑스는 더 이상 힘이 없다. 베트남의 2천 4백만 명은
새로운 국가주의 정권을 지언하고 있다. 군사적인 변경이
필요하다. 우리는 현재 프랑스군과 자치군의 숫자를 파악할
수 없다.”
일본군은 베트남 전체를 방어할 병력의 크기가 되지 못했고, 베트민은
주로 일본군이 점거한 대도시를 중심으로 예비정부 조직에 필요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1945년 3월에 또한,
베트민은 베트남에 추락한 미군 조종사를 구해준 일이 있었다.
호치민이 이 조종사를 직접 대동하여 미 14공군의 기지가 있는
중국 쿤밍에 데려다주었다.
그러나 금전적인 보상은 거절당했고, 호치민은 ‘플라잉 타이거스’라고
불린 전설적인 미군 자원자 그룹의 창시자인 클레어 첸널트 소장을
만나고 싶다고 의사를 전했다. 그는 당시 14공군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3월 29일 만남에서 첸널트 장군은 호치민에게 감사를 표했고, 호치민은
다른 조종사가 떨어져도 항상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호치민은
장군의 서명이 들어간 사진을 요구했다. 호치민은 나중에 다른 국민당군
일당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신이 미국과 친하며 지원을 받고 있
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데 그 사진을 썼다.
그러나 몇 명은 알고 있었다. 호치민이 (진짜 이름은 Nguyen Ai Quoc)
오랜 동안 공산주의자였으며 소련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있는 인물이
라는 사실을. 다른 정보장교들은 그에게 매우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영어도 했고, 정보력이 우수했으며,
연합군이 전쟁에 이기는 것에 명백한 관심이 있었다.”
4월 27일, 패티 대위는 호치민을 만나서 OSS 대원의 파견을 물었다.
안남지역의 일본군 정보획득을 위해서 함께 일해보자는 의미였다.
“Welcome, my good friend,”라고 호치민은 패티 대위를 반겼다.
그는 OSS에 관한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현대식 무기도 갖고 싶다고
말했다. 호치민은 정글에 훈련캠프를 차리고 싶다고 했고, 하노이에서
약 200킬로미터 떨어진 탄 트라오를 말했다. 그리고 미군 고문관을 맞을
준비를 했다.
Deer Team Begins Training the Viet Minh
패티 대위의 OSS 그룹은 ‘사슴’팀을 5월 16일 만들었고,
그들은 미국을 떠나서 중국의 쿤밍 OSS 기지로 들어왔다.
거기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에 대한 투입을 위하여
두 달을 기다렸다. 결국 허가가 났고, 토마스 소령을 비롯한
6명의 팀원들이 탄 트라오에 7월에 점프하기로 되었다.
패티 대위는 토마스 소령과 북아프리카에서 같이 복무한
적이 있었고, 그를 “그는 매우 젊고 훌륭한 장교다. 그러나
국제적인 힘의 경쟁에서는 이해가능한 정도로 소박한 경향
이 있다,”라고 평가했다.
토마스 소령과 호치민, 지압 장군은 탄 트라오에서 빠르게 친구가
되었고, 가끔 팀원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들의 임무 중에는 미
공군의 목표를 지시하는 것도 있었는데, 토마스 소령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들과 보냈고, 폭격 지시에도 호치민의 의견을 권고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 공군은 이 OSS의 의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데파우닉스 중위는 레이먼드 더글라스로 가명을 쓰고 있었고, 자신을
프랑스-미국인 혼혈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의 호치민과의 기억은
토마스 소령과 달랐다. 토마스 소령은 계속해서 데파우닉스 중위의
실제 이력을 알려고 노력했고, 중위를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호치민은 중위에게 베트남은 필리핀처럼 미국이 다루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중위는 “우리는 동등하게 대우해줄 겁니다.”라고 응답했다.
그러자 호치민은 “당신들이 우리를 돕는 것은 독립이라는 관점
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러할 자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데파우닉스 중위는 호치민과 지압 장군을 믿지 않았고, 두 사람
모두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그는 지압 장군이나
다른 인물들을 잘 몰랐고, OSS의 친구를 자처하는 ‘숲의 친구들’
도 잘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공산주의 교의를 주입시키고
있었다.
토마스 소령과 호치민, 지압 장군의 우정은 커졌고, 오히려 그로 인해
자신의 부하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었고, 그래서 부팀장 데파우닉스
중위는 그것을 염려했다. 호치민과 특히 지압에 관에서는 ‘우리 팀장을
완전히 컨트롤 하고 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일기에 토마스 소령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난 소년들과 함께 있었고 그들의 대화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토마스 소령을 싫어했고, 개인적으로 나도 그가 매일
매일 싫어졌다.”
토마스 소령은 호치민과 지압을
그저 단순한 토지 개혁가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호치민은 삽을 쓰는 방법도 몰랐었고,
지압은 젖소가 어떻게 우유를 만드는지도 몰랐다.”
사슴팀 멤버들은 호치민의 탄 트라오 정글 캠프에서 1945년 8월
소총훈련을 감독했다. 그 훈련을 위해서 팀 멤버들은 2주일이나
공중투하를 기다렸다. 총기가 공중투하되자, OSS 대원들은 M-1
소총과 카빈소총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주었고, 두 대의 박격포
도 교육했고, 수류탄과 바주카포, 기관총도 교육 시켰다. 훈련은
미군 야전 교범에 따라서 했고, 전술은 게릴라전에 초점을 두었다.
일본의 항복과 호치민의 독립 선언
2주간의 훈련이 진행되고 있을 때, 통신수인 지엘스키 하사는,
방송을 통해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는 거도
알게 되었다.
훈련임무가 끝났음을 알게 된 사슴팀은, 총기를 그들에게 주고
다음날 떠날 준비를 했다. 일본이 항복을 발표하자 영국은 재
빠르게 남베트남을 점거했고, 내려왔던 중국군들도 남아 있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돌아가려고 했다.
미국인들은 8월 16일 훈련캠프를 떠나서, 지압 장군과 함께 걸어서
타이 느구옌을 여행했다. 그것은 프랑스 식민지령 지역 수도였다.
그러나 여전히 베트민 게릴라들은 일본군과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었다. 8월 25일이 되자, 일본군들은 본국이 항복했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다음날 받아들였다. 이 전투 동안, 지압 장군
은 사슴팀을 도시 외곽의 안전가옥에 숨어 있게 해주었다.
그 동안, 베트민은 탄 트라오에서 국민의회를 열었고, 이때 베트남,
태국, 라오스 등지에서 30명의 대리인들이 모여 관심사를 논의했다.
이후 며칠간, 정치적 불명확 속에 몇 명이 힘을 장악하려고 시도
했다.
마침내 회의는 호치민은 지도자 자리를 선언했고, 지역 정부의 대통령
선거를 하자고 주장했다. 8월 27일이었다. 그리고 국가와 붉은색 바탕
에 금색 별이 들어간 국기도 투표로 선정되었다. 10년후 미군들은 이
깃발에 매우 친숙해지게 된다.
일주일 후인, 9월 2일, 맥아더 장군은 전함 미조리에서 항복문서에 서명을
받았고, 같은 날, 호치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이 모든 식민지배자들로부터
독립되었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문은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형식과 내용을
거의 따랐다.
그리고 “연합군을 환영한다,”라는 깃발을 만들었고, 특히 미국의 깃발이
강조되었는데, 이 깃발이 바 딘 시의 광장에 걸렸다. OSS 대원은 우연히
이것을 사진기에 담았는데, 잠정적인 내무부장관의 위치에 있던 지압은
미국이 말로만 지원할 것이라고 알아차렸다.
우연의 일치로, 호치민이 독립을 선언한 바로 그날, 두 번이나 미국 대통령
선거에 나갔던 토마스 유디의 조카인 피터 듀이 중령이 사이공에 도착했다.
중령은 다른 OSS팀을 지휘하고 있었고, 그들의 암호명은 ‘제방( Embankment)’
이었다.
그들은 사이공 지역의 정보를 보려고 들어왔다. 그들은 사이공에 한 달
동안 있었는데, 일본군의 적대행위를 감시하려고 들어왔는데, 점차
정치적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고
내전의 가능성이 일고 있었다.
영국군은 듀이에게 베트남을 떠나라고 명령했고, 영국군은 듀이 중령의
제방팀이 베트민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떠나기 전에 듀이
중령은 OSS에 이런 보고를 올렸다.
“코친차이나가 불타고 있다. 프랑스와 영국이 이곳을 끝장
내려하고 있다. 우리는 동남아시아를 깨끗하게 청소해야만
할 것이다.”
9월 26일, 영국의 (베트남 내) 군사법 적용에 관한 국가적인 스트라이크가
베트민의 주도로 일어난 지 2일이 지나, 듀이는 사이공을 떠날 준비를 했다.
그는 비무장 지프차를 타고 공항으로 가려고 준비하다가, OSS 가옥 몇 미터
부근에서 매복당해 죽었다. 그는 베트남에서의 최초 미군 희생자였다.
그리고 10년 후에 미국은 베트남에 완전히 개입하게 된다. 듀이 중령을
쏜 사람들에 대한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신원 확인불가로 위장
한 연합국(영국/프랑스)들의 공모로 생각되었다.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패티 대위는 호치민에게 듀이 중령의 죽음을 전
했고, 호치민은 사이공에서의 일에 유감을 표현했다.
OSS Ends Its Mission in Indochina
태평양 전쟁은 끝났고, 인도차이나에 대한 OSS 임무도 종결되었다.
사슴팀은 타이 느구옌이란 곳에 머물고 있었다. 며칠 후 베트민의
승리도 거기에 있었다. 데파우닉스 중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살이 쪘으며, 몸이 태양에 탔고, 도시를 방문하면서 하노이로
들어갈 허가를 (패티 대위) 기다리고 있었다. 베트민은 우리를 즐겁게
해주려고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팀은 하노이에 도착하여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기 전날 밤, 토마스 소령은 호치민과 지압과 개인적인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1년이 흐르는 동안, 호치민은 지속적으로 해리 트루먼에게 외교문서
형태로 편지를 썼다. 내용은 미국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답장은 한 장도 받지 못했다. 그리고 점차 미국이 프랑스 편을 들기
전까지 미국과의 관계를 깨지 않았다.
미국은, 적어도 OSS를 통해서 본다면, 호치민의 상승에 일정한 책임감
이 필요하다. 물론, 차후 미국과 일어난 전쟁에서 이러한 책임감을 말할
필요는 없다. 호치민은 ‘사슴’팀의 경험 없는 팀장을 능숙하게 조종했고,
쿤밍의 OSS본부가 원하는 것도 외교적으로 능숙하게 해냈다.
그리고 호치민이 소련에서 훈련을 받은 공산주의 이론가인 호치민을
몰라봤다는 것은, 미국 정보의 결점이었고, 이를 통해서 호치민은 매끄
럽게 국가 지도자로 상승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미국의 적이 된다.
토마스 소령에게,
몇 년 후, 저널리스트와 역사가들이
호치민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 그는 매우 방어적이었다.
“나는 그와 우정을 맺었었다. 그게 뭐 어떤가? 결국 우리는
같은 목적이 있었을 뿐이고, 그것은 일본과 싸우는 것이
었다. 그가 공산주의자인가 어떤가 알아보는 것은 내 일이 아니었다.”
최후에, 2차대전의 혼돈에서 빠져나왔을 때, 그 이후 그 어떤 감지할
수 없는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 지를 사람들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은
이후 30년간 세계에 영향을 주게 될 지를 말이다. 그는 미국의 지원과
우정 속에서 큰 힘에 대항하는 인물이 되었다.
클라우드 G. 베루베는 미 해군사관학교의 교수이고,
존 로드가드가 쓴 ‘찰스 스튜어트의 USS 구성’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