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 武器를 바꾸면서
공공기관 정보보안강화조치로 책상위에 컴퓨터가 3대로 늘었다. 1대는 회사 내부전산망에 접속하는데 사용하는 컴퓨터이고 1대는 외부와 통신하는 역할을 한다. 나머지 한 대는 끄적거리는 것이 취미이니 글쓰기 전용 개인용 노트북이다. 숙소에도 노트북이 한 대 있는데 이처럼 컴퓨터가 많다는 것은 내가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휴대폰이나 Pad의 성능이 파워풀하여 요즈음 젊은 친구들은 노트북도 한물갔다 하지만 나는 커다란 자판이 있는 노트북이 손에 익어 편하다.
사무실에서 사용하는 노트북은 글쓰기용으로만 사용하니 구식이라도 아직까지는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숙소에서 사용하는 노트북은 충청도에서 만들었는지 속도가 느린 것이 달팽이 급이다. 게다가 컴퓨터가 수명을 다했는지 꼴깍거리기 시작했다. 인터넷 접속도 원활치 않고 고참이 되었다고 명령을 거부하기 까지 하니 가관이다. 노트북을 바꾸기로 하고 검색을 해보니 두말할 것도 없이 값이 비쌀수록 가볍고 성능이 좋았지만 내가 하는 작업이야 인터넷검색과 글쓰기이니 게이머들이 선호하는 고사양일 필요도 없고 그래픽작업용 고해상도 모니터도 사치이다. 화려한 소프트웨어도 필요 없고 사용목적에 맞춰 수수한 수준으로 구입했다.
내친김에 만년필도 바꿨다. 노트북으로 글을 쓰니 굳이 만년필이 필요치 않으나 가끔씩은 종이 위에 글을 쓰고 싶은 때가 있는데 볼펜보다는 만년필이 운치도 있고 제격이다. 아버님 유품으로 남아있는 은제 파커만년필을 사용하기로 했다. 돌아가신지 15년이 흘러서 은으로 되어있는 외장은 검게 변했지만 굳이 반짝거리게 닦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버님께서 사용하시던 체취가 남아있는 듯해서 검은색으로 변한 만년필이 오히려 정겹기 까지 하다.
아버님께서 쓰신 육필원고를 보관하고 있다. 수십 년이 흘러 원고지가 누렇게 변했고 조금 지나면 바스러질 것 같아 비닐 코팅을 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필시 내가 사용하려 하는 파커만년필로 쓰셨을 것이다. 지렁이 기어가듯 꼬불거리는 특유의 필체는 만년필이 아니면 나오기 힘들다. 나도 만년필을 끄적거리면 아버님필체와 비슷한 글씨체가 되는 것을 보면 만년필만의 고유의 특성도 있는듯하다.
하드웨어적인 무기는 바꿨는데 소프트웨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공부를 해도 늘지 않는 실력에는 한숨이 나올 정도다. 10년간 공부를 하고 무엇인가 해보겠다 했는데 10년이란 세월이 거의 흘러가고 있으니 공부기간을 10년 더 연장해야할 시점이다. 하긴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이 공부라 했으니 시간이 흐른 뒤에는 또 다른 10년을 위해 무기를 바꿔야 할지 모른다.
업무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의 내 상황과 유사하다. 기획이라는 놈은 참으로 신기하다. 연수원에 정규 교육과정이 없으니 독학을 하거나 선배로부터 OJT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죽어라하고 열심히 해도 실력이 늘지 않고 가다보면 절벽을 만난 느낌이지만 어느 순간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전기적인 용어로는 쓰레시홀드(Threshold)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하여 앞으로 달려가다 보면 또 다른 절벽을 만나게 되는 것이 기획업무다. 또다시 절벽을 넘어가면 開眼이 되어 더욱 많은 것이 보이게 되며 몇 차례 쓰레시 홀드를 넘어 달인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 정년을 맞게 된다. “기획론”이라는 전문서적도 있지만 책에 나온 대로 되지 않는 것이 기획이다.
직장생활 30년을 넘겨 터득한 노하우이자 지론인데 내 자신의 글쓰기공부에도 적용될듯하다. 10년도 되지 않은 애송이가 당면한 절벽을 넘어 노련해 지려면 20년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무기를 바꾼 것이 그닥 도움 되지 않겠지만 10년 공부계획을 20년으로 연장하는 첫걸음은 될 성싶다.
2016.07.10 전력사업처 임순형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