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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산(黃龍山).
이는 섬서성(陝西省)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방대한 산역을 일컫는 이름이다.
대황하(大黃河)로 이어지는 낙수가 도도히 흐르는 곳이기도 하다.
산이 높고 고봉절곡이 많은 데다가 골골이 계류를 이루고 있어 풍광이 우선 으뜸이다.
그 유명한 황제릉(黃帝陵)도 바로 이 곳에 있다.
이 황룡산의 동쪽 기슭에는 하나의 석보(石堡)가 있다.
황룡보(黃龍寶).
아마도 무림인들 치고 이 곳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만치 강호 상에서 황룡보가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황룡보는 섬서성의 포정사(布政司)가 민정(民政)을 다스리는 것 못지 않게 그 일대에서 음양으로 많은 시운을 베풀고 있었다.
섬서 제일의 부(富)를 축적하고 있는 곳으로써 황룡산 일대의 금, 동의 채광권이 모두 황룡보의 소유였다.
그로 인해 황룡보는 누대에 걸쳐 백성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뿌려 왔다.
때문에 관(官)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에게서 얻은 신망은 요지부동의 것이었다.
즉 든든한 세력기반을 갖추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황룡보가 정작 세인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데에는 또 다른 연유가 있었다.
소위 사대세가(四大世家), 즉 당금 무림의 정도세력 가운데 칠대문파(七大門派)와 더불어 세력을 분할하고 있는 사대가문의 하나가 이 황룡보였던 것이다.
사월 초이레.
황룡산에도 신록이 점차 짙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갖가지 춘화들도 곳곳에서 앞다투어 피어나고 있었다.
황룡보는 그 중 동쪽 기슭의 동평릉(東坪陵)이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보이는 이 석보의 담장에는 백목련이 특유의 화사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오 무렵.
황룡보로 이어지는 청석로(靑石路)를 한 대의 마차가 올라오고 있었다.
마차에는 검은 휘장이 쳐져 있어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마부 또한 깊숙이 눌러 쓴 밀짚모자로 인해 용모를 전혀 알 길이 없었다.
마차는 두 마리의 흑마에 의해 언덕을 넘고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듯 지붕 위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흑마들도 지쳤는지 나타날 때부터 벌써 입에 거품을 물고 있었다.
마차는 육중한황룡보의 대문 앞에서 멈추었다.
그러자 대문이 열리며 안에서 수염이 짧은 한 명의 중년인이 나왔다.
그 자는 눈이 가늘고 콧날이 높은 사람이었는데 일견하기에 보의 관사(官使) 쯤으로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중년인은 마상의 마부를 바라보더니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마부가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았을 뿐더러 모자를 벗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도리를 잊지는 않았는지라 일단 정중히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친구는 어디서 오시는 길이오? 본 보에 무슨 볼 일이 있어 왕림을 하신 것인지?"
밀짚모자의 마부가 답했다.
"문을 열어 주시오.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겠소."
무뚝뚝하고 차가운 말투였다.
중년인은 다시눈살을 찌푸렸다.
건방지게 마부인 주제에 마차를 몰고 안으로 들어가겠다니, 황룡보의 대문 앞에 와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그는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친구는......."
따지려다 말고그는 갑자기 입을 딱 벌렸다.
마부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에게 불쑥 내밀었던 것이다.
마부가 보인 물건은 길이가 채 반 자도 되지 않는 하나의 소검(小劍)이었다.
하지만 그 전체가 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며 손잡이나 장식이 정교해 천하에 드문 진품보검이라는 것을 한 눈에도 알아볼 수가 있었다.
특히 손잡이 부분에 매달린 푸른색의 수실은 너무도 느낌이 강하고 선명하여 흡사 청룡의 수염과 같아 보였다.
"그것은......."
"문을 여시오."
중년인의 말을마부의 묵직한 음성이 막았다.
그 음성에는 웬지 거역할 수 없는 중압감이 깃들어 있었다.
중년인은 잠시망설이는 듯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그럼......."
그는 손뼉을 연달아 여섯 번 쳤다.
육중한 대문이 좌우로 활짝 열린 것은 바로 그 직후의 일이었다.
마부는 미동도않다가 문이 열리자 즉각 고삐를 잡아챘다.
애초에 원하던 대로 마차를 황룡보 안으로 몰고 들어간 것이다.
중년인의 이름은 황보인(皇甫仁), 그의 신분은 황룡보의 일을 처리하는 총관(總官)이었다.
그는 재빨리 마차의 뒤를 따르더니 마부에게 말했다.
"보주께 전하겠소이다. 귀하는 잠시 기다리실 수 있겠소이까?"
마부는 대문이도로 닫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보인.
그가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불과 이각도 되지 않아서였다.
아울러 그는 이십여 세 가량의, 기도가 헌출하고 영준하게 생긴 금의미청년과 함께 나타났다.
미청년은 분을바른 듯 하얀 얼굴에 눈썹이 여인의 그것인양 고왔다.
주사를 칠한 것처럼 붉은 입술이나 빛나는 눈 등도 여인들로 하여금 연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한 가지 흠이라면 입술 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오만해 보인다는 점이었는데, 이런 인물이라면 대개 매사에 의기양양하여 타인들에게 끝까지 호감을 얻지는 못한다.
아무튼 그는 늘씬한 키에다가 허리에는 금검(金劍)까지 차고 있어 더욱 멋지고 화려해 보였다.
"소생은 독고준(獨孤駿)이라 하오. 귀하께서 사부님의 청룡금검령(靑龍金劍令)을 가지고 오셨다는데......."
독고준의 말이끝나기도 전에 마부가 담담히 대꾸했다.
"자네가 바로 옥수미랑(玉樹美郞)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는 자이겠군. 사보주(査堡主)의 두 명 고제(高弟)중 둘째, 맞는가?"
독고준은 흠칫하여 그 말을 받았다.
"그렇소. 당신은 누구길래......?"
마부의 음성이갑자기 냉랭해졌다.
"사보주는 그 새 망녕이라도 들었단 말인가? 어찌 이런 중대한 일에 바람둥이에다 풋내기인 제자를 보낸단 말인가?"
독고준은 물론황보인까지도 안색이 싹 변했다.
감히 황룡보주에게 그런 언사를 사용하는 자가 있으리라는 것은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사실 황보인은이 느닷없는 방문객에 대해 보주에게 고하러 가다가 도중에 독고준을 만났다.
하지만 독고준이라면 적어도 보주의 직전제자로써 객을 맞이함에 있어 보주를 대행할 자격 정도는 갖추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고준은 불쾌감과더불어 모욕감으로 인해 얼굴이 붉어졌다.
자연히 그는 언성을 높이게 되었다.
"여보시오! 이 곳에서 나를 상대로 그 따위 무례한 언사를 쓰다니 귀하께서는 상당히 믿는 데가 있는 모양이구려?"
마부는 껄껄 웃었다.
"헛헛! 황룡사가(黃龍査家)가 대(代)를 잇지 못해 두 명의 제자를 두었는데, 그 중 하나가 주인을 믿고 함부로 설치는 망나니라더니 과연 소문이 맞는군."
독고준의 미려한 눈썹이 일순 파르르 떨렸다.
그는 대뜸 허리에 찬 금검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데 바로 이 때였다.
"사제, 잠깐만."
어딘가에서 착가라앉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 독고준은 입술을 악물더니 슬며시 손을 내렸다.
한 건물 안으로부터 이십오륙 세 가량의 청년이 걸어나오고 있었다.
일신에 백의단삼을 입은 그 청년은 용모는 독고준만 못했으나 침착하고 심지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는 두 손을 소매에 넣고 있었으며 담담한 표정에 눈은 겸손하게 아래로 내려뜨고 있었다.
"사형께서 나오셨습니까?"
독고준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못한 듯한 음성으로 어딘가 모르게 백의청년에 대한 적개심이 느껴졌다.
백의청년은 간단한 목례로 답하고는 마부를 향해 말했다.
"사부님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냉숙부님께서는 어서 조카를 따라 오십시오."
이번에는 마부가 흠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알았나?"
"황룡보는 용담호혈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림 사대신가(四大神家)의 하나로써 누구도 이 곳에 와 큰 소리를 치지는 못합니다. 설사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있다해도 겨우 손가락을 꼽을 정도일 것입니다. 게다가 사부님의 청룡금검령을 지니고 계신 분이라면 사부님의 적이 아닌 벗일 것이요, 직언(直言)을 가리지 않는 성품까지 겸비하신 분이라면 능히 추측이 가능하지요. 천하에서 이런 분이라면 생사무심(生死無心), 또는 냉면판관(冷面判官)이라는 별호를 얻고 있는 냉종진(冷鍾進), 냉숙부님을 제외하고 또 누구를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차분하고 조리있는 설명에 마부, 즉 냉면판관 냉종진은 느닷없이 대소를 터뜨렸다.
"허허허허... 과연! 황룡사가가 달콤한 혓바닥에 교활하고 비위를 잘 맞추는 자를 후계자로 내정하였다는 말을 이제야 실감하겠구나. 내가 지금 임기응변에 뛰어나고 웃음 속에 칼을 품고 다닌다는 삼촌살인설(三寸殺人舌)의 주인을 만나고 있군."
그 말은 칭찬이라고 하기엔 너무 매섭고 날카로왔다.
실상 냉종진은 항간에 나도는 비아냥을 그대로 옮기고 있었다.
백의단삼 청년의 별호는 백의유검(白衣儒劍), 이름은 성낙수(成洛水)였다.
냉종진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굳이 이런 식으로 수인사를 매듭 지어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의유검 성낙수는 미소를 지었다.
"제게 만일 살인을 가능케 하는 삼촌설이 있었다면 애당초 검을 익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냉숙부님께서 과찬을 하신 것입니다."
과연 그답게 능수능란한 응대였다.
휘익--!
냉종진은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땅에 내릴 때 먼지 한 점 일지 않은 것은 곧 그의 운신법(運身法)이 상승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었다.
그가 덧붙인 것은 냉소였다.
"나는 너희들과 말장난이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어서 사보주께 안내해라."
도통 정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그러나 성낙수의 얼굴에서는 여전히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제가 실수했군요.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일행이 있다."
냉종진은 다시차갑게 말한 뒤, 마차의 휘장을 열어 젖히고 그 안에서 누군가를 끌어내렸다.
중인들은 호기심에 찬 시선으로 끌려 나오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드러나자 모두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냉면판관이 데리고 온 위인이라면 필시 대단한 신분의 사람이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으나 기대가 뒤집어졌기 때문이었다.
냉면판관이 천리를 마다 않고 먼지를 뒤집어 쓰면서까지 직접 호송해 온 인물은 뜻밖에도 나이 어린 한 소년이었다.
그것도 빛이 바랜 흑삼을 입었으며 볼품없이 깡말라 있었다.
나이는 대략 십오륙 세 쯤 되었을까?
얼굴이 워낙 수척하여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리게 보이기도 했다.
아니, 비정상적일 만큼 큰 눈으로 인해 일면 가련스럽기까지 했다.
머리는 아무렇게나 등뒤로 묶어 내렸는데 손질이 안간 채 길게 자라 허리까지 이르고 있었다.
초라한 것은 둘째치고 소년에게서는 언뜻 병색마저도 엿보였다.
더욱이 냉종진이 거칠게 손목을 잡아끌어 내리자 소년은 이내 중심을 잃고 쓰러질듯 비틀거렸다.
그 순간 알 수 있는 것은 소년이 한 쪽 다리를 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소년은 갑자기밖으로 나오게 되자 눈이 부신 듯 눈썹을 찌푸렸다.
먹으로 그린 듯한 그 눈썹만은 꽤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듯 노리끼리한 피부는 그가 입은 흑삼과 이상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놈! 따라 와라."
냉종진은 매몰차게 내뱉더니 비로소 소년의 손을 놓았다.
그러자 소년은 다시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 광경에 성낙수나 독고준은 다 함께 의혹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들은 소년이무공이라고는 무 자도 익히지 못했다는 것을 재빨리 간파하고는 똑같은 생각을 했다.
'무공도 채 익히지 못한 병약한 불구소년을 무엇 때문에 본 보로 데려 왔을까?'
황룡보의 보주는 사해신검(四海神劍)이라는 별호로 불리웠으며 천하제일의 대협의지검(大俠義之劍)으로 일컬어지는 당대의 명숙이었다.
이름은 사운악(査雲嶽)이라 했다.
냉면판관 냉종진.
그는 대청에서사운악과 만나 긴 시간 동안 밀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 그들은제자들까지도 물리치고 단 둘이서만 대화를 가졌다.
냉종진은 그 날 밤으로 황룡보를 떠났다.
정체불명의 흑삼소년만을 그 곳에 남겨둔 채로.
소년을 맞이한것은 단지 구석진 방의 딱딱한 침대였다.
그는 긴 여행에 몹시 지친 듯 그 위에서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네가 왕중헌(王中軒)의 제자라고?"
사운악의 첫 질문은 그것이었다.
사각형의 위엄 있는 얼굴에 반백의 긴 수염을 기른 청수한 노인이 바로 그였다.
나이는 육십사오 세 가량 되어 보였으며 금포를 입고 있었다.
소년은 큰 눈에 아무런 표정도 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노부가 듣기로 너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데 그건 왜였지?"
소년은 애초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이 워낙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데다가 음성에 별다른 악의를 담고 있지 않자 비로소 대답했다.
"왕사부는 저에게 학문만을 가르쳤으니까요."
사운악은 호안(虎眼)에 은은한 신광을 담은 채 한 동안 소년을 응시했다.
얼굴은 대추빛이었으되 소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한 가닥 연민이 어려 있었다.
"왕중헌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몰랐단 말이냐?"
이어지는 소년은 말은 참으로 천진한 것이었다.
"다들 내게 무림이니 강호니 하던데 나는 그런 말이 무엇인지도 몰라요."
"왕중헌은 무림의 대마왕(大魔王)이다. 그런 그가 너에게 학문을 가르쳤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그와 같이 악랄하고 극악무도한 위인이 어찌......."
소년은 금세 태도가 돌변하여 고함을 쳤다.
"듣기 싫어요! 당신들은 말끝마다 왕사부를 욕하지만 내게는 하늘같은 분이셨어요. 인자하신 그 분을 욕하는 한 나는 당신들과 같은 부류가 될 수 없어요, 영원히!"
그는 흥분을 한 가운데서도 영원히 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
하지만 기세에 반해 그는 숨이 찬 듯 헉헉댔으며 금방이라도 기절을 핥듯 눈을 반쯤 까뒤집고 있었다.
사운악이 놀라서 급히 손을 뻗었다.
그의 두터운 손이 가냘프기 그지없는 소년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 순간, 사운악의 얼굴에는 다시금 스르르 연민이 번졌다.
그것은 소년의 손목이 너무도 가늘고 연약하여 마치 풀잎을 잡은 듯 했기 때문이었다.
와중에서도 소년은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당신들이 아무리 고문을 하고 괴롭혀도 나는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내 눈을 뽑고 팔다리를 자른다 해도 마찬가지예요. 왕사부가 어디 있는지 모른단 말이에요. 또 설사 안다고 해도 내 어찌 사부를 해치려는 당신들에게 말할 수 있지요?"
그는 발악을 하듯 부르짖고는 그만 의식을 잃어버렸다.
사운악은 소년의 손목을 통해 대하 같이 도도하고 뜨거운 진기(眞氣)를 흘려 보냈다. 그러는 사이, 그는 내심 적지 아니 충격을 입고 있었다.
'이 아이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구나. 한 방울의 내공도 없다. 그런데.......'
그는 눈살을 찌푸리는 한편 탄식해마지 않았다.
'정녕 기막힌 노릇이로다! 한낱 어린아이에게 이렇게 잔혹한 수법을 썼다니, 이 아이의 신경중추와 혈맥은 가늘어지다 못해 바람만 불어도 끊어질 것 같구나. 이는 일년이 넘도록 매일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으로 고문을 하지 않는 한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현상이다. 즉 혈맥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제멋대로 역류되어 있다. 게다가 임독이맥에까지 악독한 수법으로 진상(震傷)을 일으켜 향후로도 전혀 무공을 익힐 수 없게 했다.'
사운악은 이어외관상으로도 약간 어긋나 보이는 소년의 왼쪽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무릎 관절마저도 고의로 으스러뜨려 불구로 만들어 놓았다. 쯧! 어린아이를 지나치게 혹독하게 다루었군.'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뇌리에는 냉종진이 남기고 간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그 놈은 천하에 다시없는 독종(毒種)이오. 그 왕중헌의 제자이니 오죽하겠소? 겉으로는 순진한 아이 같으나 온통 복수심과 살심으로 속이 채워져 있는 소악마요. 그렇지 않다면 지난 일년동안 구천마옥(九泉魔獄)에서 매일 심문을 했는데도 어떻게 왕가의 행방을 불지 않을 수가 있겠소? 아무튼 손속이 잔혹하기로 이름난 염라수(閻羅手)도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으니 이 점을 참작해야 할 것이오.
사운악은 계속 소년의 손목을 통해 진기를 흘려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십삼 년 전, 왕중헌은 무림을 발칵 뒤집고 나서 홀연히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했다가 우연히 금릉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무림고수 이백 인에게 포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상을 입은 채 다시 어딘가로 도주했다. 그것은 불과 일년 전의 일, 결국 그 사건은 아직도 미결이다. 그의 제자라는 이 소년이 도시 입을 열지 않으니 왕중헌의 행방을 찾으려는 노력은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어쨌건 냉제(冷弟)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야말로 불가사의에 가까운 일이다. 이 소년이 어떻게 구천마옥의 형벌을 일년 간이나 견뎌냈단 말인가?'
그러다 문득 그는 소년이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흠칫하여 들여다보니 소년의 눈까풀이 가벼운 경련을 보이고 있었다.
과연 냉종진의전언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그의 심중에서는 어느 덧 연민이 싹 걷히는 대신 섬뜩한 기분이 자리잡아갔다.
'정신을 차렸으면서도 이 놈은 기절을 한 척 하는구나. 어린 나이에 이렇게 음흉하니 소악마다운 면모가 있기는 한 것 같다.'
사운악은 생각이 방향을 틀자 즉각 소양신공(小陽神功)을 일으켰다.
그러자 곧 불같이 뜨거운 기류가 소년의 완맥을 통해 마구 흘러 들어갔다.
그것은 무공을익힌 사람도 그렇거니와 특히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는 가운데 절로 펄쩍 뛰지 않을 수 없는 무서운 수법이었다.
그러나 소년은눈썹을 슬쩍 찌푸릴 뿐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는 눈을 뜨며 이렇게 말할 따름이었다.
"당신도 역시 좋은 사람은 아니군요. 처음 보자마자 고문을 하다니. 하지만 소용이 없을 거예요. 나는 이런 일에는 이미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소년은 말을 마치자 도로 눈을 내려 감았다.
사운악은 내심경악을 금치 못했다.
소양신공으로 말하자면 강호에서 손가락 꼽히는 양강신공으로 소양불혈수(小陽拂穴手)로 흘려보낸 건천뇌화기(乾天雷火氣)를 이런 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내장이 타고 혈맥이 오그라지는 듯한 고통에 대개는 비명을 지르며 펄펄 뛰기 마련이었다.
지옥의 유황불로 온 몸을 태우는 듯한 극렬한 고통에 누가 있어 이토록 초연할 수 있단 말인가?
소년은 눈을 감은 채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만면에 세상을 향한 원망과 조소, 그리고 한(恨)을 담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으음!'
사운악은 불현듯 자신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이 나이 어린 소년을 상대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그가 강호에 행도한 수십년 이래 처음 겪는 현상이었다.
"과연 네 놈은 듣던 대로구나!"
사운악은 소년의 손목을 홱 뿌리쳤다.
휙--!
소년은 맥없이날아가 벽에 부딪쳐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 바람에 이마가 깨져 피가 튀었으나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 뿐더러 비틀거리고 일어나더니 오히려 자조적인 웃음마저 흘리는 것이었다.
"후후후... 진작 이런 대접을 받아야 했어요. 나는 또 당신이 선인(善人)인 줄 알았거든요."
"뭣이?"
사운악의 안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한낱 소년에 의해 이렇게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제는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비로소 냉종진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 아무리 둘러보아도 놈을 맡길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단 말이오. 비록 무공이 백지인 불구에 지나지 않지만 녀석을 붙들어 둘 수 있는 곳은 황룡보 밖에 없을 것이라 판단하게 되었소. 그래서 이 곳까지 데려온 것이니 모쪼록 잘 부탁하오.
냉면판관이 신신당부하던 말을 의아하게 받아들였던 사운악이었으나 작금에 이르자 납득이 가고도 남았다.
"네 놈의 이름이 양일문이 맞느냐?"
금릉을 떠나왔던 비운의 소년 양일문, 바로 그가 이처럼 더욱 비참하게 변해 이 곳에 끌려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고개를 번쩍 쳐들며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이름은 양일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이냐?"
사운악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모았다.
"진일문."
그것은 매우 당당한 음성이었다.
한 자 한 자 똑똑히 뱉아내는 그의 발음에는 일편 자부심마저 엿보였다.
사운악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을 받았다.
"네 성이 양이던 진이던 그것은 나와 무관한 일이다. 다만 내가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제부터 본 보에 머물러 있으면서 바깥으로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뿐이다. 설사 이 곳을 몰래 빠져나간다 해도 네 체력으로는 십리도 못 가서 쓰러진다. 이 정도는 아마 네 자신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양일문은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랗게 냉소가 매달리는 것을 보며 사운악은 다시금 미간을 구겼다.
"너는 하인들의 일을 도와라. 물론 언제든지 왕중헌의 행방만 말한다면 건강을 되찾을 뿐만 아니라 자유의 몸이 될 수도 있다. 또한 너는 여기 있는 동안 필히 이 곳의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사운악의 안면이 약간의 꿈틀거림을 보였다.
"노부는 사실상 너같은 어린아이에게 고통을 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그러나 너를 다루는 것인즉 무림의 대의와 깊이 관련된 일이기에 만일 네가 딴 마음을 먹는다면 그 때에는 노부의 손이 맵다고 원망하게 될 것이다."
진일문은 작은주먹을 치켜올려 입가의 피를 쓱 문질러 닦았다.
그러더니 사운악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씨익 웃었다.
"언제고 나는 기회만 있으면 도망칠 것이에요.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니 이것이 바른 말이지요. 그런데 바른 말을 하기만 하면 사람들은 모두 화를 내고 나를 때리기까지 하니 아마 그들은 거짓말이 더 듣기 좋은 모양이지요? 나는 그렇다고 해도 당신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은 할 수가 없어요."
사운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다.
'대체 이 아이가 이런 한을 품고 세상에 나가거나 무공을 익힌다면 어찌 될 것인가? 아마도 장차 왕중헌 못지 않은 대마왕이 될 것이다.'
이 때, 진일문이 다시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어요. 당신도 나를 소악마라고 치부하며 이런 놈이 세상에 나가면 해만 끼칠 것이니 제거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뭣이!"
"그러나 내 입을 열게 해야 하니 죽일 수는 없을 테고, 내심으로는 꺼려하면서도 그런 기색을 감추고 있겠지요?"
"사라져라!"
참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사운악은 자신이 어린아이에게 심중을 간파 당한 나머지 쟁쟁한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동요를 보이게 되자 마침내는 울화가 치밀었다.
그가 소매를 휘두름에 따라 소년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창문을 부수고 밖으로 날아갔다.
쿵!
이것은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이 소년의 육신이 지면에 처박히는 소리였다.
그는 곧 잠잠해졌다.
"악연(惡緣)이다. 파종을 제대로 했어야 훌륭한 나무가 되는 법이거늘, 왕중헌의 손에서 어찌 그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분노와 탄식이어우러진 사운악의 음성만이 멀리까지 들리고 있었다.
진일문은 그 날로부터 황룡보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가 살게 된 곳은 소위 하인들의 거처로써 그는 하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일을 도와야 했다.
황룡보는 보주부부와 그들의 딸인 사영화(査瑛華), 사운악의 제자인 성낙수와 독고준, 그 밖에도 호위무사들이 이십여 명에 달했으며, 하인들만 해도 사오십여 명이나 되는 대식구였다.
백여 명에 달하는 그 사람들이 살아가자니 항시 많은 일들이 쌓여 있게 마련이었다.
우선 매끼 식사를 하는 데만도 엄청난 양의 식료품과 분주한 부엌일이 따른다.
하인들은 하루종일 부엌은 물론이려니와 특히 보주가 신경을 쓰는 마굿간의 일에까지 쉬지 않고 매달려야 했다.
황룡보의 마굿간은 백필이 넘는 말이 있었는데 말들에게 일일이 먹이를 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일반 마필들은상상도 할 수 없는 고급 사료를 먹이는만치 매일 목욕을 시켜주고 관리해야 하는 수준이 가히 귀인의 시중을 드는 것이나 진배 없었다.
진일문은 처음에는 부엌일을 맡게 되었으나 곧 자리를 옮겼다.
그 이유는 체력이 딸렸기 때문이었다.
걸핏하면 코피를 쏟고 혼절을 하여 제대로 일을 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보게 된 것이 마굿간의 일이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쫓겨난 신세나 다름이 없었다.
마굿간에서 그는 말들에게 먹이를 주는 한편 잠자리도 그 안에서 해결을 해야 했다.
진일문은 그 점에 대해 한 마디도 불평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는 자신이 하는 일 이외에는 도시 무엇에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런 그에게 하인들은 걸핏하면 손찌검을 하곤 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자식! 이것도 일이라고 했느냐?"
유난히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진일문을 괴롭히는 자는 장보보(張步步)라는 하인으로 그는 마굿간의 책임자였다.
약간의 권장법을 익히고 있어 그가 매질을 하면 진일문은 의례 뼈가 어긋나고 뺨이 퉁퉁 부어 올랐다.
"이 밥통 같은 자식아! 이 말이 얼마짜리인 줄 아느냐? 너 같은 놈은 평생을 벌어도 살 수 없는 귀한 명마란 말이다. 네 놈이 오고부터 말갈기에 윤기가 없어졌다. 네 놈이 제대로 먹이를 주지 않는 것이 틀림없다."
퍽! 퍽!
발길질은 그야말로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왔다.
진일문은 채일 때마다 매번 한 자나 허공으로 퉁겨져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비명을 지른 적이 없었다.
이따금씩 피로 범벅된 얼굴을 들고 그 큰 눈에 불꽃같은 증오를 담은 채 상대를 노려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 자식이? 그래, 노려보면 어쩔 테냐?"
장보보는 달려와 진일문의 뺨을 후려쳤다.
짝! 짝짝--!
고개가 좌우로마구 돌아가는 동안 입과 코로 연신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다시 발까지 동원해 걷어차도 진일문의 입에서는 끝내 잘못했다는 소리는커녕 신음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장보보는 대개 소름이 쭉 끼치곤 했다.
'지독한 놈! 천하에서 이런 독종은 처음 봤다.'
실상 그에게는진일문을 미워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이렇게 나오다 보니 뭔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접했고, 그 두려움이 증오로 변해 자신도 모르게 포악해지는 것이었다.
밤이 되었다.
마굿간도 말들의 콧김이 뿜어지는 소리만 들리고 있을 뿐 조용했다.
진일문은 마굿간의 짚단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운 채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밤이면 춥다.
그는 웅크린 채 잠에서 깨어나 유난히 밝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별이 하도 총총하여 그 별을 보노라니 그 수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자신에게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여러 개의 얼굴이 별 위로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장병, 희강, 상문, 유봉...... 차라리 너희들이 부럽다. 너희들은 지금쯤 극락에서 편안히 쉬고 있겠지."
여섯 개의 얼굴들은 바로 진일문과 더불어 서원에서 수학하던 아이들이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죽었다.
그것도 참혹하게 죽은 모습을 그는 직접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부럽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진일문이 현재처해있는 상황은 은천서원으로 돌아갔을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당시에 여덟 명의 괴인들에게 잡혀 어디론가로 끌려갔다.
그 곳은 인간세상이 못되었다.
적어도 진일문에게는 그랬다.
일명 구천마옥이라 불리우는 곳이었는데, 거기에는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는 중죄인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 곳에서 일년에 걸쳐 끊임없이 겪어야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진일문은 작금에 이르러서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지경이었다.
그의 나이는 이제 십오 세가 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는 그보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그것은 제대로 발육을 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일문은 와중에서도 부모의 이름만은 한시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를 버텨올 수 있게 한 것은 자신의 뿌리에 대한 집념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반면에 그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코 황룡보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설사 탈출이 성공했다 해도 절대 이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희망은 없었다.
황룡보의 세력이 섬서성 일대에 거미줄처럼 널려 있으니 어쩌겠는가?
이 또한 진일문도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진일문은 주먹을 불끈 쥐며 혼잣말처럼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언젠가는 필히 자유를 되찾고 말리라. 기필코 이 곳을 벗어나 내 의지대로 살아가리라."
문득 졸음이 쏟아졌고 그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꿈속에서 새가 되어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르고 있었다.
"꼬마야! 빨리 일어나란 말이야."
등줄기로부터 화끈한 통증이 느껴지는 바람에 진일문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허둥지둥 몸을 움직였다.
그 순간, 다시 등줄기로 무엇인가 세차게 떨어졌다.
"호호호... 굼벵이 같으니라구! 빨리빨리 움직이란 말야."
마치 은쟁반에구슬을 굴리는 듯 맑고 청아한 음성이었다.
진일문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이렇게 아름다운 음성을 들은 적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그는 무엇엔가 홀린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피처럼 붉은 장미송이라고나 할까?
새빨간 홍의를 입은 소녀가 오만한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를 질끈 졸라 매어 잘록한 허리가 더욱 강조가 되어 있다.
그래서일까?
몹시도 육감적인 몸매를 과시하는 소녀였다.
머리는 노란색끈으로 묶었는데 머리채가 허리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와 가히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설사 백옥으로빚었다 한들 이리도 흴 수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상아로 조각한 듯한 그 피부 위에 뚜렷하게 자리잡은 오관은 그야말로 보석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한 쌍의 흑진주 같은 눈은 봉황목(鳳凰目)이었다.
가늘고 기다란 목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피어 오르는 듯 했다.
작고 도톰한 입술은 방금 사과를 깨어 물은 것처럼 생기가 돌고 있었다.
간편한 복장을한 이 홍의미소녀는 한 손에 푸른 색의 채찍을 감아쥔 채 입가에 보조개를 드리우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선녀일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없어. 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내심 읊조리는찰나, 푸른 빛이 눈 앞에서 번뜩 했다.
짝!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뺨이 화끈거렸다.
동시에 날카로운 소리가 그의 고막을 울렸다.
"뭘 그렇게 멍청히 보고 있는 거야? 빨리 홍아(紅兒)를 꺼내 달라고 했잖아, 이 바보야."
홍아라면 붉은털을 가진 적토마를 뜻하는 것이었다.
장보보의 말에 의하면 이 곳 보주의 딸이 아끼는 명마라고 했다.
진일문은 그것을 떠올리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아가씨는......?"
짝!
다시 한 쪽 뺨에서 불이 일었다.
"건방지게 누구를 마주 보는 거야? 장보보가 더럽고 볼썽 사나운 개가 한 마리 들어왔다고 하더니 그게 너였구나?"
'흐음?'
진일문은 일순아픔도 잊은 채 아연해지고 말았다.
천상의 여인처럼 아름다운 소녀의 입에서 이렇듯 거칠고 험악한 말이 튀어 나왔다는 사실이 그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양뺨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채찍에 맞아 생긴 상처였다.
이 홍의미소녀의 이름이 바로 사영화였다.
황룡보 보주인 사운악의 무남독녀로써 어려서부터 귀여움을 한 몸에 받고 자라온 탓인지 평소에도 교만하고 안하무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하고자 하는 일을 달성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부모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세상이 온통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철부지 소녀였다.
그녀의 나이는십육 세, 한창 피어오르는 꽃봉오리였다.
잔혹한 가시를 머금은 채...........
낙수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는 짙다.
어둠의 한 귀퉁이를 찢고 여명이 밀려오는 시각이면 의례 황룡산은 짙은 안개로 휩싸인다.
때로 안개가 뭉개구름처럼 덩어리를 이루며 산허리를 휘감는 광경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 안개 속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진일문에게는 고역이 따로 없었다.
황룡산의 새벽 공기는 매우 써늘했다.
워낙 체력이 약한 데다가 얇은 옷을 입고 있는 그는 습기를 품은 새벽바람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으스스 떨어야 했다.
사영화는 저만치 앞서가고 있었다.
적토마 위에서 허리를 꼿꼿하게 곧추세우고 앉아있는 그녀의 자태는 새벽 안개 속에서 차라리 신비로운 분위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흡사 선녀의 춤과 같이 느껴졌다.
그가 타고 있는 말도 역시 꽤나 훌륭한 준마(駿馬)에 속했다.
꼭 한달 만이었다.
진일문이 황룡보에 들어온 후 외출을 해 본 것은............
반면에 사영화가 이른 새벽부터 설친 것은 단지 사냥을 위해서였다.
그녀는 홍곤히 잠들어 있는 진일문을 깨워 막무가내로 황룡보를 빠져나온 것이었다.
사영화가 하고자 하는 일은 황룡보의 사람들 중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심지어 진일문의 외출을 엄금한다는 보주의 명까지도 그녀에게만은 무사통과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일문은 몸이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비참한 심정이기보다는 되려 매우 기뻤다.
이렇게나마 바깥 세상에 나오게 된 것에 대해 그는 더없이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했다.
비록 한기로 인해 턱이 덜덜 떨려 왔으나 그것은 즐거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문득 앞서가던사영화가 고함을 빽 질렀다.
"빨리 따라오란 말이야! 이 바보야."
진일문은 그 소리를 듣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영화가 자신을 벌레처럼 대하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웬지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녀의 음성에서만은 달콤한 느낌을 받게 되곤 했다.
이는 그녀가 자신을 때리고 할퀸다 해도 별반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학대에 익숙해져 있어서일까?
진일문은 그녀에게서 받는 수모나 고통은 여타의 사람들에게 받는 것에 비한다면 오히려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고 있었다.
진일문은 생각의 흐름을 스스로 인식하게 되자 얼굴을 붉혔다.
'내가 무슨 생각을.......'
그의 나이 십오 세, 겉으로는 아직 어린 소년처럼 보였으나 모진 시련을 통해 정신적인 면은 더 발달이 되어 있는 편이었다.
이성(異性)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으나 사영화를 보자 마음의 문이 자연스럽게 열린 것이었다.
최초로 닥쳐온이 청춘의 봄은 진일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결코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게 되고 말았으니.......
사영화.
그녀가 가고 있는 곳은 황룡산 북쪽의 한 산봉우리였다.
숲이 유독 울창하게 우거지고 지세가 험해 웬만한 사냥꾼도 잘 오르지 않는 곳이었다.
"여기에 노루가 많다는 소문이 있어. 너는 지금부터 서쪽으로 올라갔다가 내려오며 노루를 모으는 거야. 알겠지? 나는 이만큼쯤 있다가 활을 쏠테니."
사영화가 자못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상에서 진일문을 굽어보는 그녀의 자태는 정녕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등에는 상아로만든 궁(弓=활)을 메고 허리에는 반월형의 검을 차고 있었다.
한 마디로 그 모습은 발랄하고도 산뜻했다.
진일문은 좀 더 그녀를 바라보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그녀가 화를 낼까봐 그만 두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인 후, 서쪽을 향해 어설픈 자세로 말을 몰아갔다.
그는 원래 말을 탈 줄 몰랐다.
배울 기회가 없었으니 그저 남이 하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는 정도에 불과했다.
진일문의 실력(?)에 비해 사영화가 가리킨 서쪽 기슭은 유난히 험했다.
덕분에 그는 몇 번씩이나 말에서 굴러 떨어질 뻔 하다가 간신히 고삐를 잡으며 균형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울울창창한 숲이 점차 앞을 가로막자 진일문은 일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회다! 이 때를 틈타 깊은 산 속으로 달아나 버리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이 아닌가?'
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룡보에 머무는 동안 그는 인근의 어떤 마을도 모두 황룡보와 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을 통해 달아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산중으로 도주하는 것은 별문제였다.
아무리 황룡보라 해도 추적이 용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진일문이 발견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사영화가 시키는 대로 따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이었다.
그는 미리 준비된 징을 치면서 원을 그리듯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숲은 아직도 새벽 안개에 덮혀 있었다.
정적을 깨뜨리는 요란한 징소리에 여기저기서 미처 잠도 깨지 못한 짐승들이 후다닥거리며 움직이는 기척이 들려왔다.
진일문의 눈에도 토끼와 다람쥐, 오소리 등이 놀라 뛰어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그는 제 풀에 신명이 오른 듯 계속하여 열심히 짐승몰이를 했다.
그것은 짓눌렸던 그의 청춘이 처음으로 박동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는 사이, 등줄기에서는 기분 좋은 땀이 솟았다.
이윽고 진일문은 어느 정도 범위를 축소했다고 생각하자 사영화가 있는 곳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나갔을까?
"호호호......."
교소가 들리더니 무엇인가 그에게로 날아왔다.
쉬익--!
진일문은 깜짝놀라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말에서 굴러 떨어지는 무참한 동작에 그치고 말았다.
팍!
그가 있던 곳의 나무에 화살 한 대가 깊숙이 박혔다.
알고 보니 사영화가 그를 향해 활을 쏜 것이었다.
물론 장난이었으나 그것은 지극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일뿐더러 진일문을 짐승과 동일시하는 행위였다.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것은 공포감 때문이 아니라 모욕감으로 인해서였다.
그 위로 요악하게 느껴지는 사영화의 조소가 부어졌다.
"호호호......! 겁장이 같으니라구."
진일문은 흙에처박혀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이를 악물고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런 연후, 그는 말에 다시 오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크르르--!
괴이한 음향이들렸다.
동시에 진일문은 무엇인가 자신의 머리 위를 날쌔게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휘익--!
어찌나 빠른지그저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 기분이었다.
그의 코로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졌다.
사영화의 뾰족한 비명이 그 뒤를 이었다.
"아악!"
히히힝!
말의 울음소리도 역시 심상치 않았다.
'맹수다!'
진일문은 직감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면에는 의아한 점도 없지 않았다.
사영화는 실상 소녀라 해도 고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은가?
그가 숲에서 몰아온 짐승들이 화살에 맞아 도처에 쓰러져 있는 것만 보아도 그녀의 솜씨는 알만한 노릇이었다.
짐승들은 한결같이 정확하게 목에 화살을 맞고 죽어 있었다.
그러므로 설사 맹수가 덮친들 그녀의 활솜씨라면 능히 감당해 냈어야 옳았다.
어쨌거나 진일문은 예정대로 말 등에 올랐다.
그러나 사영화가 있는 곳을 본 순간, 그는 안색이 급변하고 말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마리의 거대한 백호(白虎)였다.
털빛이 흰 황소 만한 호랑이가 막 사영화의 말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말은 이미 호랑이의 앞발에 맞아 골통이 으깨어져 있었다.
사영화는 저만큼 나가 떨어져 있었는데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아무리 대담무쌍하다 해도 소녀는 역시 소녀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백호가 사, 오장이나 날아 덮치는 순간 벌써 혼절해버린 것이었다.
진일문은 절로심금이 떨려왔다.
그로서도 백호는 난생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백수의 제왕이로구나!'
덩치는 그만 두고라도 압도적인 그 위용에는 감히 항거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차라리 감탄스럽다고나 할까?
백호는 발톱으로 말의 배를 쓰윽 그었다.
그러자 단번에 말의 뱃가죽이 갈라지며 내장이 주르륵 뽑혀져 나왔다.
호랑이의 발톱이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마주하고 보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백호는 딸려나온 내장을 입에 넣고 씹었다.
그러다 힐끗 한 쪽에 쓰러져 있는 사영화를 보더니 어슬렁거리며 그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안돼--!'
그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내면의 부르짖음이었다.
동시에 진일문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말의 박차를 걷어차며 튕겨져 나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백호의 등이었다.
말이 갑작스런통증에 놀라 펄쩍 뛰어 올랐다.
백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입을 쩍 벌리고 포효하려 했다.
그 순간, 진일문은 어느 덧 백호의 등에 얹혀 두 팔로 목덜미를 휘어감고 있었다.
캬우우--!
천둥과도 같은포효가 온 산천을 뒤흔들었다.
진일문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직 광기에 가까운 집념과 열정으로 혼신을 다해 백호의 목을 조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크르르릉--!
백호가 그를 떨치기 위해 고개를 마구 휘저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자 백호는 냅다 달려 한 그루의 나무에 부딪쳐갔다.
퍽!
진일문은 결국나무에 부딪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백호의 등에서 이탈되고 말았다.
그는 혼절을 하지는 않았다.
믿을 수 없는 초인적인 기력이 이 순간 그로 하여금 말짱한 정신을 유지하게 한 것이었다.
그의 눈에 비틀거리는 백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백호는 잠시 그를 노려보더니 몸을 돌려 다시금 사영화에게로 갔다.
아마도 제 이의 공격 목표를 아직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일문은 일순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안돼! 그녀는.......'
그는 허우적거리며 일어나려고 했으나 몸이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백호는 그 사이에 벌써 사영화를 덮치고 있었다.
찌익! 찌이익--!
옷자락 찢겨나가는 소리가 진일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문득 그의 손에 무엇인가 잡힌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영화가 쓰던 상아궁이었다.
전통(화살통)도 때마침 옆에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더 이상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었다.
진일문은 살을 먹인 후,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내어 백호에게 시위를 당겼다.
그의 움직임을눈치챘는지 백호가 다시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덕분에 쏘아진 화살은 백호의 오른쪽 눈에 꽂혔다.
캬우우--!
백호는 그대로펄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천지를 진동하는 포효를 남긴 채 곧장 어딘가로 튀어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진일문은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조차 없는 자신이 어떻게 백호를 도망가게 했는지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위대한 사랑의 힘을 실천하고도 그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진일문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긴장이 풀리자 오히려 탈진해 버린 그는 기다시피 하여 사영화가 있는 곳으로 갔다.
사영화를 보니그의 마음 속에 인 것은 먼저 측은지심이었다.
그녀는 반듯이 누워 있었는데 입고 있던 홍의가 무참하게 찢겨져 있었다.
백호의 발톱에 의해 그리 된 것이다.
진일문은 잠시기이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앞섶이찢겨져 나가 눈부신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햇살이 그녀의 속살을 신비롭게 투영했다.
뽀오얀 젖가슴이 노출된 채 부끄러움도 없이 방싯 연홍빛의 유실을 내보이고 있었다.
쥐면 손안에 들어올 듯한 그 가슴은 녹아날 것처럼 부드러워 보였다.
백호의 발톱에긁혔는지 가느다란 혈선이 뽀얀 가슴에 나 있었다.
선명한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는 그 광경은 오히려 슬프도록 아름다왔다.
사영화는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단지 숨을 쉴 때마다 가볍게 솟았다 꺼졌다 하는 가슴의 융기, 그 때마다 조금씩 떨림을 보이는 유실까지를 모두 공개(?)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시적인 아름다움에 반해 진일문이 걱정하는 것은 좀체로 깨어날 줄을 모르는 그녀의 안위였다.
여인에 대한 남자 특유의 보호 본능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조차 잊게 했다.
진일문은 마침내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근처에서 하나의 웅덩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곳으로 가 두 손에 물을 가득 담아왔다.
그는 물을 사영화의 입에 천천히 부었다.
물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입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계속 옆으로 흘러 내렸다.
진일문은 잠시고심한 끝에 물을 자신의 입 속에 머금었다.
그는 한 동안 주춤거리던 끝에 그녀와 입술을 맞대었다.
입술과 입술이닿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전류와도 같은 충격이 그의 전신을 관통했다.
아찔할 정도의 향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애써 침착을 회복하며 사영화의 보드라운 입술을 혀끝으로 연 다음, 정성껏 물을 흘려 넣었다.
꼬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구멍으로 물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몇 차례를 거듭하는 동안 사영화의 찢어진 옷은 그나마 물에 젖어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버렸다.
순수한 미가 아니라 이제 육감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었다.
진일문은 거기까지는 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본시 성품이 순후한 그이기도 했지만 목적이 확실한 만큼 그로서는 다른 생각이란 품을 겨를도 없었다.
사영화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런 식으로 일곱 번이나 물을 먹였을 때였다.
그리고 진일문이 여덟번째로 입술을 갖다 대려는 찰나, 그녀의 눈이 반짝 떠졌다.
진일문은 당황하기도 했지만 입 속에 물이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저는 다만.......'
그의 눈만이 안타깝게 이런 변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악!"
사영화가 기겁을 하여 벌떡 일어났다.
하얀 손바닥이 허공에서 마구 춤을 춘 것은 그 다음 순간부터였다.
찰싹! 찰싹--!
따귀가 몇 대나 올려 붙여졌는지는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그 바람에 사영화에게 먹이려던 물은 진일문의 입가로 무참하게 주르르 흘러 내렸다.
사영화는 먼저자신의 행색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너... 방금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진일문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더듬거렸다.
노화가 치밀었는지 그녀의 음성은 몹시도 떨리고 있었다.
한 손으로 대충 앞자락을 여미고 있었으나 옷이 걸레가 되어 있는지라 비어져 나오는 젖가슴을 다 가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서 그녀가 성을 내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진일문의 심정을 더욱 처참하게 만든 것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씩씩거리는 그녀의 모습이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답다는 사실이었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한층 더 사영화의 분노를 부채질했다.
그녀는 근처에 떨어져 있는 채찍을 집어들더니 마구 휘둘렀다.
"음탕한 잡종! 네가 대체 무엇이 억울하다는 거야?"
짝! 짝! 짝--!
채찍은 인정사정없이 진일문의 몸에 떨어졌다.
질긴 삼과 가죽을 가늘게 꼬아 만든 그것은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여지없이 그의 몸에서 피가 튀게 했다.
세상이 온통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진일문은 땅바닥을 뒹굴며 그야말로 참담함의 극점을 맛보고 있었다.
사영화는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번쩍 반월검을 뽑아 들었다.
"죽일 테다!"
쉬익--!
은빛이 허공을가르는 순간, 진일문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반월검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래야 피할 재간도 없었다.
그는 다만 커다란 눈에 한 가닥 절망의 빛을 담은 채 사영화의 얼굴을 똑똑히 마주보았을 따름이었다.
그 순간, 진저리를 친 것은 오히려 사영화 쪽이었다.
진일문의 슬퍼보이는 눈을 대하자 살심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불쑥 두려움이 치민 것이었다.
그녀도 바보가아닌 이상 대강이나마 정황을 모를 리 없었다.
따지고 보면 상대는 자신의 구명지은이었다.
하지만 좋은 배경에서 자라나 자존심이 가히 맹렬한 그녀는 한낱 보잘 것 없는 하인배에게 입술을 도난당하면서까지 구함을 받자 그 사실을 도무지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결국 반월검은진일문의 정수리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그 사이, 사영화의 손목에서 약간 힘이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최소한의 가책 정도라면 맞으리라.
싹!
섬뜩한 음향과함께 피가 뿌려졌다.
진일문은 그대로 얼굴을 감싸쥐며 나뒹굴었다.
그것은 운명의 일검(一劍)이 그의 인생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을 남기는 순간이었다.
첫댓글 즐감요
늘 감사합니다.
에궁 정말 넘 비참하게 ..
ㅈㄷㄱ~~~~~~~~~~~`````````````````````
굿,,즐감,,,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요.
진일문과 사영화
잘 보았습니다
잘보고갑니다
즐독
ㅈㄷㄳ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헐 ~~~~~
주인공을 넘 몹시하는 구나
즐감하고 감니다
시련후에 기회가 오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