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주발림 - 문하 정영인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 갓 결혼한 부부가 생기면 꼭 불러다 저녁 한 끼를 대접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주발림’이라 불렀다. 아마 주발(周鉢)에서 유래된 말이 아닌가 한다. ‘주발(周鉢)’은 놋쇠 밥그릇이나 식기를 뜻한다. 또 주발은 주발대접이라 하였다. 그 당시 가정에 큰 의식에는 놋그릇을 썼다. 제사 때나 큰일을 치룰 때. 그 부부에게는 놋그릇 식기로 대접했다. 그러니깐 손님을 주발에다 한 끼를 대접해서 ‘주발림’이 아닌가 한다. 그들먹하게 차리지 안 했다. 어려운 시골구석에 그들먹하게 차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정성을 다해 고기 한 칼, 간고등어 한 마리, 혹은 토종닭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주발림이 있는 날이면 우리들에게도 닭고기 국물 정도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날이기도 하였다. 사실, 사람을 사귀는 방법 중에 가장 속 깊고 뜻있는 일은 밥 한 까 같이 먹는 일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느 회사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밥 한 끼 같이 먹으면서 그 사람의 사람됨됨이를 평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타자와의 친밀한 정도는 편하게 밥을 함께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로 정해진다.” 라고 말했다. 여북하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했던가. 한껏 수줍어 하는 새 색시와 싱글벙글하는 새 신랑의 신혼부부를 보는 것만으로도 눈요기가 되었다. 이제는 그런 아름답고 인정스런 풍습은 빠르게 사라진다. 그저 기억의 한편에 머무를 뿐이다. 사실, 사라지는 것은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 많다. 이즈음은 밥 한 끼 먹자는 말이 그저 마음에도 없는 지나가는 인사 말치레가 되었다. ‘우리 언제 밥 한 번 먹자.’ 라는 말은 아무 의미와 실행의사가 없는 겉치레 말이 되고 있다. 더구나 같이 밥 먹는 것이 껄끄러워서 혼밥이니 혼술이니, 혼행이니 하면서 외로이 떠도는 혼자만의 세월로 변모해 가고 있다. 어느 외국인은 한국인 친구가 ‘언제 식사 한번 하자’라는 말에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는 말은 남의 말이 아니다. 물론 문화의 다양성이라고 하기에는 우리는 자기가 한 말에 너무 성의나 책임이 없는 편이다. 마치 정치철만 되면 정치인들이 내뱉는 공약(空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금 세상은 그저 순수하게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사이는 던버의 수(5-15-150)에서 15에 해당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지 한국의 옛 걸인들이 하는 말이 ‘밥 한 술 줍쇼.’ 였다. 이거 밥 한 끼 먹고 무슨 대가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갚아야 되는데… 등의 요리재고 저리재는……. 시골 들녘에서 일밥을 먹을 때, 지나가는 사람을 불러다 밥 한 끼 같이 먹는 게 우리네 인심이었다. 눈두렁밭두렁에 퍼질러 앉아 밥 한 끼, 막걸리 한자 먹여 보내는 후한 인심이었다. 가족을 ‘식구(食口)’라 한다. 식구란 바로 같이 먹는 입을 가진 사람들의 관계다. 옹백이에 계란찜 찌고, 멀건 고깃국일망정 정성을 다해 신혼부부에게 밥 한 끼 대접하던 어머니의 푸근한 마음이 물결친다. 세상이 하도 각박하게 돌아가니 밥 한 끼 마음 놓고 먹을 수 있는 사회로 변모해 가고 있다.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상한선 금액도 정해져 있으니, 더치페이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이 지방으로 감사를 나갔다. 당연히 점심은 자기 돈으로 사 먹는 것이다. 그곳 책임자가 점심밥 한 끼 소박하게 대접한다고 하도 졸라서 같이 먹었다. 감사를 끝내고 올라오니, 그 이튿날 민원이 올라왔다. 감사원이 점심 사달라고 했다고. 먹은 게 잘못이겠지만 이렇게 뒤통수치는 세상이다. 뜨신 밥 한 그릇, 고봉으로 담아 먹이던 어머니 마음, 더 먹으라고 억지로 물에 밥 말아주던 어머니 손길, 뜨신 인정과 숭늉 같은 구수한 세월이 그리워진다. 타지에 나간 남편과 아들 밥을 놋쇠 주 발에 담아 밥보자기에 정성껏 싸서 뜨거운 아랫목에 묻어주던 어머니 뜨신 마음! 주발림! 아주 사라져버린 우리 어머니의 옛말로만 남아 있다. 음악 : A Better Day - Multicyd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