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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주 보성고 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바위섬
일제 학병, 미군 포로 굴곡의 현대사 체험
‘자기 이익 추구하는 외세 늘 경계’ 유지 남겨
현대사인물 발굴|《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의 실존인물 박순동 소설 《태백산맥》의 주인공 김범우란 인물을 통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선 박순동. 그는 학병에서 탈주, OSS에서 군사훈련 그리고 다시 포로가 된 파란만장한 삶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체험한 현실은 비단 그 한 사람만의 역사가 아닌 우리 민족 역사 자체일 것이다.
600만 명이 열독할 만큼 소설 《태백산맥》이 인기를 끈 것은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이 그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염상진, 염상구 형제며, 하대치와 정하섭, 심재모와 외서댁 등 등장하는 인물 면면이 모두 흥미를 끌만한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그 수많은 인물 중에서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작가 조정래 선생은 학병 출신으로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정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s)에서 훈련받은 적이 있는 중도적 민족주의자로 나오는 김범우가 가장 애정이 간다고 밝힌 바 있다.
김범우가 더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소설 속의 가공인물이 아닌 실제 인물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90년대 초반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TV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장하림 또한 실존 인물에 기초하고 있다. 바로 그 실존 인물이 박순동이다.
일제 학병으로 끌려간 박순동
실제보다 소설 속의 인물로 더 잘 알려진 박순동은 1920년 3월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101 재동 111번지에서 아버지 박재화 씨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순천 남소학교를 거쳐 1934년에는 손위누이 박성순의 손에 이끌려 당시 선암사 부주지로 있던 매형인 철운 조종현 선생의 밑에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던 그를 인재로 여긴 선암사에서는 박순동을 서울로 유학 보냈다.
1936년 서울 중동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한 그는 한달 만에 주간으로 옮기고 또 한 달만에 전교 수석을 차지하는 등 영민한 머리를 자랑했다. 중동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일본의 도쿄대학이나 와세다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그를 후원하던 불교계의 권유로 불교대학인 동경구택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대학에 입학한 1943년은 일제가 대동아전쟁에서 차츰 패색을 보이기 시작하던 때다. 전선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고자 일제는 파쇼적 총동원체제를 구축하며 한반도에 대한 인적, 물적 수탈을 강화했다. 임시자금조정법(1937), 국가총동원법(1938)이 제정하고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1938) 등을 내세워 황국신민화 내선일체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적 수탈도 이 시기 징용·징병·위안부 등의 명목으로 실시되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소위 ‘특별지원병’으로 일제가 전선으로 내몬 조선인 청년의 수는 1938∼1943년까지 최소 2만 5000명에 이르고 1944년 4월부터 실시된 징병제에 의해 1944∼1945년 사이 육해군 합계 2만 9000여 명의 조선청년들이 강제 징집당했다.
박순동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명목상 학도지원병이란 이름은 붙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 징병되었다. 일제는 1943년 6월 25일 학도전시동원체제 확립요강을 제정한 후 1943년 10월 20일 육군특별지채병 임시채용규칙을 공포했다. 이 결과 김수환 추기경, 작가 이병주 씨, 장준하 전 《사상계》 발행인, 현승종 전 고려대 교수, 황용주 전 MBC 사장 등을 위시한 조선인 학병 4385명은 1944년 1월 20일 일제히 입대했다.
독립 활동 위해 일제 학병에서 탈주
박순동 역시 이 시기에 용산 62부대에 입대해 6개월간 훈련을 마치고 6월 18일 부산에서 버마행 수송선에 올랐다. 일본 버마 원정군 오오가미 사단 소속 아야노 산포중대의 단열 일등병이었던 박순동은 학병으로 전쟁에 끌려온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1945년 3월 20일 그는 일본군 장교들이 주고받은 전황 소식을 우연히 엿듣게 된다. 일본은 연합군에 밀려 연전연패하고 있으며 자신이 속한 부대도 밀려드는 연합군의 탱크부대가 퇴로를 막기 전에 남하해야한다는 것이었다.
절치부심 탈영을 고심하던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학병으로 끌려와 함께 탈영을 고민하던 같은 부대의 이종실도 이 소식에 고무되었다. 이 당시 일제의 학병에서 탈출하려고 했던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사상계의 발행인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다 살해당한 장준하 선생, 김준연 고려대 총장등도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다 중국대륙에서 탈출해 광복군을 찾아갔고 또 다른 일부 학병들은 중국 연안의 조선의용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갔던 학병 중에 개별적인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탈출한 사건도 있다. 평양사단 소속 조선 사병들의 1944년 집단탈출 시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거사는 그해 12월 발각되어 징역 2∼12년형을 받았다.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 중에 후일 국군의 장성이 된 김완용과 최홍희 등이 끼어 있었다. 정병준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들은 평양사단을 탈출한 후 한만 국경지대로 진출해 게릴라전을 펼쳐보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라며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함경북도 혜산의 보천보였다”고 밝힌 바 있다.
미 전략정보국의 계획과 박순동의 항일 의지
일본군에서 탈영하기로 결심한 박순동은 자신의 부대가 주둔하던 버마 구메부락의 마운테인틴이라는 인도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원래 인도 봄베이에서 대학을 마치고 랑군에서 커다란 철공소를 경영하다가 일본군의 랑군 침공을 피해 구메마을까지 흘러온 마운테인틴 씨는 박순동과 이종실이 강제로 끌려온 학병이란 것을 알게 되자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사막과 정글을 통과한 그는 마운테인틴 씨의 장인이 영국군에게 써준 소개장을 가지고 영국군에 투항했다. 당시 마운테인틴 씨의 장인이 타자기로 써준 소개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들은 조선의 학생이고, 일본군에 의해서 강제로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연합군에 대한 적의가 없으며 본인을 통하여 귀관에게 투항하는 바입니다. 귀관의 관대한 처치를 바랍니다.”
소개장 덕분에 투항한 박순동은 현지 영국군 사단사령부에서 간단한 조사를 거쳐 뉴델리로 옮겨졌다. 당시 뉴델리에는 CBI (China, Burma, India) 총사령부가 있었고 그들은 포로로 이곳에서 심문을 받아야 했다.
박순동은 일본군 포로들과 함께 있던 이 포로수용소에서 궁성요배를 거부하는 등 반일사상을 드러낸다. 이 과정에서 뉴델리 주재 미 첩보기관인 OSS의 주목을 받게 된다. 박순동은 자신들이 탈영한 것은 조국 해방을 위해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한 것이라며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하겠으며 연합군을 위해서도 노력하겠으니 그런 터전을 마련해달라는 뜻을 포로 심문 과정에서 밝혔다.
당시 OSS가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이들이 영국군에 투항하던 시점에서 OSS가 한반도 침투에 관한 작전을 구상 중이었기 때문이었다. OSS는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에 COI(정보조정국)로 출발했으며 종전 이후에는 CIA로 발전한 미국 정보 공작조직의 모체였다.
OSS의 한반도침투계획은 1944년 중반 이후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의 작전계획은 1945년 1월 OSS 워싱턴본부의 기획단이 작성한 〈비밀정보 수집을 위한 일본 적진에 대한 요원침투 특수계획〉에 잘 드러난다. OSS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확실한 전과를 세우기 위해 중국전구 OSS활동을 강화했고, 특히 조선사람들을 이용한 한반도·만주·일본 본토 침투계획을 추진했다. 중국전구 OSS는 독수리작전, 화북작전, 불사조작전, 칠리미션 등을 추진했고 워싱턴본부는 냅코작전을 추진했다. 바로 이 냅코작전이 박순동 일행이 참가하게 되는 작전이다. 그 후에도 냅코작전은 1945년 3월 7일과 3월 30일 ‘NAPKO project’라는 작전명으로 두 차례 보강되었다가 1945년 4월 2일 정식기획물인 ‘P.G107’로 확정되었다.
OSS의 책임자 도노반은 중국전구에서 독수리작전 준비가 완료되자 1945년 8월 7일 김구·이청전과 면담했다. 도노반을 만난 김구는 한미간의 공동협력을 강조하는 한편 임정 주석 명의의 편지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이 편지를 받은 트루먼은 “미국 정부가 승인하지 않은 자칭 정부 대표들의 메시지를 OSS가 전달했다”며 격노했다고 한다. 이 대목은 후일 미국이 한반도침투작전을 폐기했을 때 이들 참가자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점과 해방 후 임시정부를 미국 정부가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예측하게 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국제협약에 위배되는 정치적 모험
이러한 정황을 모른 채 박순동은 항일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OSS 인도지부의 월킨슨은 1945년 4월 26일 OSS워싱턴의 공작전문가 아이플러에게 전문을 보내 최근 영국군에 투항한 조선병사 2명(박순동, 이종실)이 적극적인 반일 의지를 표명하며 연합군 측 작전에 동참하길 원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특히 윌킨슨은 이들이 동경을 떠난 지 불과 18개월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박순동, 이종실의 미국행이 논의되던 중간에 제3의 학병탈주자 박형무가 일본군 제 49사단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했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일행은 OSS의 계획에 따라 미국으로 가기 전 포로수용소에서 연합군들에게 20일 동안 본격적인 심문을 받았다. 박순동에게는 그의 고향인 순천 일원의 도로, 철도, 농산물, 광산, 행정구역 등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다. 심문 겸 조사가 끝난 자리에서 한 연합군 장교는 이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그대가 연합군에서 어떤 임무를 맡았을 때, 그것을 일본군이 탐지하고 그대의 가족에게 보복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내가 조국을 위하여 연합군에서 일하는 결과로 받는 박해라면 내 가족은 나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고 임무를 수행할 뿐이다.”
▶연합군에서 일하는 경우에 무슨 계급을 바라는가?
“계급은 필요치 않다.”
심문이 끝난 다음날 미군 병사가 몸 치수를 재더니 계급장 없는 카키색 미군복을 입히고는 행선지를 가르쳐주지 않고 박순동 일행을 데려갔다.
하지만 인도-버마지구 사령관의 정치고문인 막스 비숍은 이들이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 국무부와 접촉이 이뤄줘야 하며 이들에 대한 무여권, 무비자 입국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당시 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협약에 따르면 포로를 전쟁수행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영국군에 투항한 포로였던 박순동 일행을 미군이 특수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데려가는 것 자체가 국제협약에 위배되는 정치적 모험이었다. 하지만 OSS는 미 국무부의 완강한 반대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을 강행했다. 이미 OSS 워싱턴은 냅코작전을 위해 1944∼45년 사이 위스콘신주 맥토이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한인노무자들을 불법적으로 선발한 바 있었다.
역시 이 상황을 몰랐던 박순동 일행은 1945년 4월 25일 오후 8시 몇 차례 비행기를 옮겨 탄 뒤 워싱턴 비행장에 닿았다. 이들은 며칠 후인 4월 28일 오후 8시 워싱턴을 출발해 다음날 로스엔젤레스로 옮겨졌다. 비행장에는 아이풀러 육군대령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박순동 일행은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로스앤제젤리스 연안에 위치한 산타 카타리나섬에 내려 OSS의 한반도침투작전인 냅코프로젝트를 위한 특수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국적, 성명, 지금까지의 경력을 누구에게도 밝히지 말 것을 요구 받은 뒤 전명운 의사의 사위인 이태모 씨와 함께 사격 훈련과 지도해독법, 공중폭격과 함포사격 및 적진상륙작전을 위한 목표지형보고, 선전과 인심교란조작법, 암살, 정보모집 및 평가법 등을 광범위하게 교육받았다. 이름도 이태모는 딕, 이종실은 조, 박형무는 쵤라, 박순동은 톰으로 바꾸고 맹렬한 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에 하루 바삐 투입되기를 학수고대했다.
다시 포로가 되어
그러던 1945년 8월 18일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박순동 일행은 훈련을 단념하고 해안의 모래 위에 벌떡 누워버렸다. 박순동은 자전적 논픽션인 〈모멸의 시대〉에서 이 때를 “시원섭섭하다는 말은 이때에 쓰기 위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며 “우리의 땀어린 훈련은 그로써 무위의 종언을 고했다”라고 아쉬워했다.
박순동 일행이 훈련을 중단하고 본부에 집결했을 때 산타 카타리나 섬의 다른 협곡에서 함경도와 황해도로 침입하기 위해 훈련 받은 다른 두 개의 그룹이 더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미사학자 방선주 박사가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냅코작전에 직접 참가한 한인요원은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 유일한, 김강 등 19명이었다.
냅코작전에는 후일 유한양업의 창업자가 되는 보수적 민족주의자 유일한 씨로부터 좌파계열의 민족혁명당 미주지부에서 활동한 바 있는 김강, 변준호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었다.
작전 계획이 취소된 이들은 고국으로 즉시 송환되기를 바랬으나 그것은 되지 않고 오히려 신분이 포로로 환원되었다.
그때를 박순동은 〈모멸의 시대〉에서 “우리에게는 민족이 있고 산야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주변의 자연현상일 뿐, 법적으로 남의 인정을 받는 정부가 없는 우리는 국민이 아니며 우리의 산야는 영토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버마로 미국으로 떠돌면서도 변변한 용병의 구실도 못한 것이다. 필요하면 걷어가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 부평초처럼 뿌리가 떠돌아다니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라고 통탄했다.
몇 일 후 박순동 일행은 P.W (Prison of War:전쟁포로) 마크가 선명하게 찍힌 포로복을 입고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한국인 2700명과 함께 수용되었다. 그러던 중 12월 12일로 귀국일자가 발표되었고 이들 일행은 1월 11일 인천항에 닿았다.
박순동은 인천항에 닿자마자 발가벗겨져 광장에 쌓아둔 일본군 누더기를 입어야만 했다. 그것은 겨울 인천항의 추위보다 모욕적인 처사였으나 불평에 대답하는 것은 헌병의 곤봉뿐이었다. 미국을 떠날 때 아이플러 대령이 한 말처럼 그들을 인계 받을 기관도, 그들을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었다. 인간적 모멸을 넘어 일본군에서 탈영했던 그는 결국 나라 없는 백성으로서의 모멸을 또 한번 겪게 된 셈이었다.
그는 일제 학병에서 탈출해 다시 귀환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모멸의 시대〉를 1965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전에 내 최우수상을 받았다. 박순동의 삶이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계기도 공모전에 당선되면서부터다.
그는 당선 소감에서 “나의 기록은 8·15해방 직전의 민족의 시련기에 한 한국청년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의 한 토막에 불과합니다.… 만리이성의 원혼이 된 전우들을 생각할 때 나의 가슴이 착잡해집니다. 그 누가 그들의 초혼의 예정을 베풀어줄 것인가! 이 기록은 마땅히 저 고혼들에게 봉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당했던 지난날의 모멸(侮蔑)의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다.
그후 박순동의 삶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서다. 1999년 8월 15일 박순동에게는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논픽션 작가로 맹활약했으나 49세로 요절
하지만 고국에 돌아온 뒤 박순동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46년 1월부터 1947년 3월까지 순천 주둔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박순동은 제지공장에서도 일했지만 1947년 순천공업중학교 영어과 교사를 시작으로 광주의 전남중고등학교에서 영어과 교원을 맡는 등 대부분의 시간을 교단에서 보냈다. 그에게 정치적 유혹도 많았으나 그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교사로의 삶을 살았다.
또 하나 박순동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면 글을 쓰는 것이었다. 1965년 〈모멸의 시대〉로 신동아에 제1회 논픽션 부문이 최우수상을 수상한데 이어 1968년 〈전명운전〉으로 같은 상을 탔고, 다음해인 1969년에도 〈암태도 소작쟁의〉로 역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그의 삶처럼 우리 역사의 잊혀진 한 조각을 발굴해낸 것으로 문학적 가치와 더불어 역사적 가치도 탁월했다. 〈모멸의 시대〉에서는 정신대 문제를 최초로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조정래 선생은 “〈모멸의 시대〉와 〈암태도 소작쟁의〉는 우리 민족의 역사 기록의 일부분들로 인정되며 민족사 기록의 전집으로 묶이기도 했고 여러 역사·사회과학 서적들에 인용되면서 그 소중한 값어치를 입증해왔다”고 높이 평가했다.
젊은 시절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냅코작전에 참여했던 박순동은 1969년 1월 20일 49세의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했다. 폭음과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 때문에 앓고 있던 간질환이 화근이었다.
그의 생에 대해 아들 박영진 씨는 “어떤 특정한 이념을 가진 분이 아니었고 인간을 사랑한 분이었다”라며 “아버지는 불교에 심취했지만 불경을 읽었으면 성경도 읽어야 한다고 늘상 말씀하시곤 했다”고 추억했다.
실제 박순동은 여순사건의 과정에서 이념에 관계치 않고 사람들을 숨겨줘 고초를 겪을 뻔하기도 했다. 식민지 백성으로 태어나 학병에 끌려가고 또 탈출해 OSS에서 한반도 침투작전을 위해 훈련을 받았지만 다시금 나라 없는 백성이 되어 포로로 전락해야했던 박순동의 삶은 박순동 자신이 이야기한 것처럼 비단 그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순동이 입버릇처럼 했던 “일본이나 미국 같은 외세들은 늘 자기들 이익을 위해 추구한다는 것을 잊지 말고 늘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 다시금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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