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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사악이 맏아들인 에사우에게 내리려던 축복을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시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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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악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졌을 때, 큰아들 에사우에게 축복을 내리려고 하자, 레베카는 작은아들 야곱을 들여보내 축복을 받게 한다(제1독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고 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들과 벌어진 논쟁이나 갈등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제자들과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던 사람들로 보입니다. 특별히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제자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1,35 참조).
또한 루카 복음서는 주님의 기도를 전하면서 제자들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11,1)라고 청하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사람들에게 더 유명한 인물이었고, 제자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예수님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단식과 혼인 잔치는 상반된 이미지입니다. 단식이 절제와 보속의 의미라면 혼인 잔치는 기쁨입니다.
유다인들은 단식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실천하고, 율법을 더욱 열심히 지키고자 규정보다 자주 단식하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에도 혼인 잔치는 큰 축제였고, 친척과 지인들이 여러 날을 함께 머물며 신랑 신부를 축하하여 주는 기쁨의 자리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때는 기쁨의 시간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단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짧은 비유는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시는 시간이 끝남을 암시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려 줍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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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에서 레베카와 야곱은 이사악을 속이고 장자권, 곧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레베카와 야곱이 마치 속임수로 에사우에게 갈 장자권을 가로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25장 23절에서 주님께서는 이미 레베카에게 형이 동생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해 주신 바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레베카는 주님의 뜻에 반하여 에사우에게 축복을 내리려던 이사악을 막고, 주님의 뜻대로 야곱에게 축복이 돌아가도록 만듭니다. 어떻게 보면 이사악을 속였다기보다는, 잘못된 이사악의 행위를 바로잡아 준 셈입니다. 실제로 에사우는 장자권, 곧 하느님의 축복을 빵과 불콩죽에 팔아넘길 정도로 업신여기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둘째였던 야곱이 축복을 받는데,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스라엘의 올바른 이라면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단식을 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이 그들과 함께 있기에 ‘슬퍼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되었음을 슬퍼하며 행하는 참회의 표지였는데, 예수님 당신을 통하여 이미 혼인 잔치, 곧 메시아 시대가 열렸고, 혼인 잔치의 신랑인 메시아가 그들과 함께 있으니 굳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곧 신랑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길 것이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구약의 백성이 슬퍼하듯이 그렇게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약의 백성은 비록 신랑을 빼앗겼지만, 그 신랑을 곧 되돌려 받을 것입니다. 아니 그 신랑과 영원히 함께 살 것입니다. 그렇게 다시는 단식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빵을 배불리 먹고 마시는 그런 시대를 살아갈 것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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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유다인들은 원래 참회와 애도의 표시, 하느님의 뜻을 승복하고 겸손한 태도를 드러내는 뜻으로 단식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단식을 하는 본래의 정신보다는 단식 규정 자체를 지키는 데 더 큰 의의를 두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단식을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지요. 예를 들어 단식한다는 것을 보이려고, 일부러 얼굴에 흰 칠을 하고 다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선적인 행위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단식이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닙니까? 단식의 정신과 목적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예를 드시면서 계명의 정신과 목적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단식과 금육을 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그만큼 내가 절약한 것을 이웃과 나누기 위함이지요. 그러기에 만일 잔칫집에 초대받아 간다면, 그 잔치의 목적에 어울리게 초대한 사람과 기쁨을 함께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기계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잔칫집에 온 신랑의 손님들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뜻대로 살려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찾아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이 회개가 아니겠습니까?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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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가는데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신론을 주장하였습니다. 만일 하느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고, 그러니 하느님은 계시지 않으며, 결국 그 하느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역설하였습니다. 긴 논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만들었다면 좀 더 우리 마음에 들도록 만들었겠지요. 보십시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마음에 안 들잖아요.”라고만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는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카인과 아벨 가운데 아벨을 선택하시고 야곱과 에사우 가운데 야곱을 선택하시는 하느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선택받지 않은 편에서 보면 억울하고 부당합니다. 더욱이 카인은 아벨의 형이었고 에사우는 야곱의 형이었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맏아들이 특별한 축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정한 기준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선택이어야 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결과일 뿐, 하느님의 선택은 아니지요. 컴퓨터로 채점하는 객관식 시험에서 시험 결과가 순전히 답안지를 작성한 사람에게 달려 있듯이, 인간 스스로 어떤 조건을 채우기만 하면 하느님께서 자동적으로 그렇게 결정하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겠지요. 카인의 입장이 되어야 하고 에사우처럼 난감한 처지로 몰리게 되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손으로 만들어낸 우상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음미하면서 그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기를 간청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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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여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의 제자들도 단식을 할 것이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 말씀은 당신께서 제자들을 떠나고 나면 제자들이 슬퍼서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 삶을 통해 보여 주실 진정한 단식을 제자들이 실현하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단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며, 굶주린 이들, 헐벗은 이들을 따뜻이 돌보고 보살피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삶이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참된 단식’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떠나신 다음, 제자들은 이런 참된 의미의 단식을 그들의 스승처럼 삶을 통해 실현했습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이라는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 고통 받는 이들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따라서 신앙인에게 단식은 ‘고행’이 목적이 아닙니다. 고통 받는 이들,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들을 깊이 기억하고, 그들을 돕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들’ 안에서 ‘신랑이신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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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좌 신부 때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한 청년과 다툰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가 제게 심한 모욕감을 안겨다 주었고, 저 또한 그에게 그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두고 기도하면서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 자존심을 꺾고 먼저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화해를 청했습니다.
“지난번 일 뒤로 내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단다. 너도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고, 나도 너에게 분명 잘못한 것이 있어. 그런데 네가 나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릴지 걱정된단다. 네가 나를 미워해도 좋아. 그렇지만 이번 일로 예수님을 포기하지는 말아 줘. 나 때문에 너와 예수님이 갈라지는 일이 없길 바란다.”
그 본당을 떠난 몇 년 뒤 우연히 그 청년을 만났고, 다행스럽게도 그가 여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청년이 또 다른 예수님이었고, 저는 한때 그 신랑을 잃을 뻔했습니다. 제 자존심 때문에 그 신랑을 빼앗길 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존심을 버리면서 또 다른 저의 예수님인 그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여러 분은 어떻습니까?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자존심이나 교만 때문에 그들을 악의 세력에 빼앗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자존심과 교만을 과감히 ‘굶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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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스승님의 제자라면 더욱 단식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군요?’ 하고 물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답변을 주십니다. 꼭 ‘선문답’ 같습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신랑은 혼인의 주인공입니다. 그가 있기에 혼인식은 잔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분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정을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 있으니, 그때 가서 단식해도 늦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단식을 예수님과 연관시켜 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왜 단식하는지에 대한 답변이십니다. 복음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알려 줍니다. 그분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단식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보기에 단식해야 합니다. 주님의 억울함에서 우리의 억울함을 위로받기에 단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의 단식이 아니라면 그저 ‘고통스러운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단식은 종교적 의식이었고, 일상사였습니다. 속죄와 보속을 위한 강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식을 당신 수난에 참여하는 길이 되게 하셨습니다. 평범한 단식을 은총을 얻는 방법으로 승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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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통은 동일하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은 똑같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느님을 비방하고 모독하지만, 선한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찾으며 그분을 찬양합니다. 사람에게는 무슨 고통을 당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당하는지가 문제입니다. 똑같은 미풍에도 오물은 더러운 냄새를 풍기고, 거룩한 기름은 향기로운 냄새를 풍깁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통을 묵상하며 단식과 금육을 지키는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가슴 깊이 묵상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지고 갈 수 있는 지혜를 청합시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도들처럼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음을 기뻐하며 이 사순 시기를 무겁게만 지내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에 음악을 조금씩 듣고 있습니다. 사실 한동안 음악을 잘 듣지 않고 살았습니다. 음악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요즘 음악을 듣다보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렇게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제 삶이 너무 삭막해진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우연히 차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에 알 수 없는 위로를 받으면서 요즘에는 종종 음악을 듣게 되었니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을 많이 들을까요? 제가 10대, 20대 때에 들었던 요즘 소위 7080이라고 불리는 노래들을 주로 듣게 되더군요. 그때의 노래들이 훨씬 더 좋은 것 같고, 노래 가사도 제 귀에 쏙쏙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 노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노래의 리듬과 가사 전달 방식은 제게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는 저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더군요. 10~20대 때가 정서적으로 가장 예민하기 때문에 이때 들었던 노래, 영상 등이 편하게 다가오고 또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대 차이가 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요즘 노래를 모른다고 해서 옛날 사람 취급을 하면서 함께 할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또한 노래 같지 않은 노래를 좋아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다면서 반대할 것도 아닙니다.
세대 간의 갈등이란 상대방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만이 맞고 상대방은 틀렸다는 생각에서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만을 찾게 됩니다. 차이를 인정하게 될 때 함께 할 수 있는 이유 역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단식 논쟁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에 열심한 종교지도자들은 모두 단식을 했었지요.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당연히 단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식의 본래 이유를 모르고서 하는 말이었습니다. 단식은 주님을 기다리기 위한 회개와 속죄의 표시로 하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지금 주님이 함께 하고 있으니 어떻습니까? 오히려 기뻐하며 즐겨야 하는 혼인잔치와 같은 때라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가서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단식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혼인잔치의 주인공에게 큰 무례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틀렸다고 규정짓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사람을 이해하는데 집중해보면 어떨까요? 보다 더 옳은 판단으로 함께 기쁨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 문제되는 세대 간의 갈등도 충분히 해결되지 않을까요?
칭찬은 평범한 사람을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마법의 문장이다(막심 고리키).
좋은 점을 바라봅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모든 것을 잘해야 우수한 인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잘 따져보면 결국 모두가 더 나은 사람과 단순히 비슷해지려고만 하는 교육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여러분의 자녀가 국어 100점, 영어 90점, 수학 70점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과목에 집중하라고 아이에게 말하겠습니까? 대부분이 수학 점수가 제일 낮으니 수학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못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잘 하는 것은 조금의 노력만 더 기울이면 더 잘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못하는 것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 점이 분명히 맞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낮은 점수를 높여서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맞추려고만 한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은 내 이웃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들의 좋은 점들은 보지 못하고 나쁜 점만 바라보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나쁜 점을 고치지 않으면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좋은 점을 바라보는 우리, 그래서 잘 하는 것이 더욱 더 부각될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요?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 교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언젠가 깊은 속병이 들어, 본의 아니게 한 일주일 강제로 단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이틀은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사흘이 지나가니 정말이지 돌아버리겠더군요.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식사 시간보다는 야식(夜食) 시간이었습니다.
밤 9시 반만 되면, 이 병실 저 병실 분산되어 있던, 약간은 ‘날리리성’ 분위기가 풍기는 환자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뭔가 대단한 비밀 작전이라도 수행하는 듯, 의료진 몰래 둘러앉은 그들은 미리 준비해온 통닭이며 족발을 꺼내놓고 낄낄대며 뜯어대곤 했는데, 그 냄새하며, 소리하며, 정말이지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제가 느꼈던 철저한 소외감과 고독함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발적 단식이라는 것, 정말이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식욕을 본인 스스로 억제시킨다는 것, 보통 의지로 해내기 힘든 일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 위대한 인물들은 대체로 단식을 했습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예수님께서도 장장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라든지 대 예언자 엘리야도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단식과 관련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밥먹는 것 이상으로 단식을 자주 실시했습니다. 철저한 신앙인들이었던 바리사이들 역시 일주일에 두번 꼬박꼬박 단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식과 성덕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을 많이 하는 사람은 그만큼 하느님 가까이 서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통제하고 지배함을 뜻합니다. 단식은 위로부터 오는 은총을 준비하는 작업입니다. 단식하는 동안 한 인간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은총에 민감해집니다. 단식을 통해 한 인간은 악과 유혹을 억누르고 영혼을 드높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대축일 전에 신자들을 단식에로 초대했습니다. 영성가들은 단식을 통해 자신의 육체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장시키고자 노력했습니다.
이토록 단식이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과는 별로 상관없이 살아가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오 복음 9장 14절)
예수님의 대답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대답, 너무나 뜻밖인 대답이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럼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복음 9장 15절)
예수님께서는 부차적인 측면, 비본질적인 내용들은 생략하시고, 곧바로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문제에 촛점을 맞추십니다. 서론을 생략하시고 곧바로 결론으로 들어가십니다.
예수님 당신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가 혼인을 맺고 잔치를 벌이는 시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 잔치 기간에 어울리는 것은 음주나 가무, 노래와 축제이지, 단식이나 고행, 슬픔이나 곡소리는 해당되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십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랑이신데, 그 신랑이 지금 신부를 선정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이름은 ‘부름받고 선정된 이’라는 의미를 지닌 에끌레시아(Eclesia, 교회)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지상 교회를 신부로 맞이하시고, 이제 신부와 함께 혼인잔치를 시작하시는데, 제자들와 신자들은 이 장엄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은 너무나도 당연히 즐겁고 유쾌해야 합니다. 갖은 인상을 다 쓰면서 단식할 것이 아니라,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먹고 마시고 즐겨야 할 것입니다.
다만 혼인잔치가 끝난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가셔서 신부의 집을 마련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배로 선정된 교회는 아직 결정적으로 신랑의 집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교회는 강생과 종말 사이, 첫번째 오심과 재림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는 기쁨과 슬픔, 획득과 미획득, 축제와 단식이 거듭 교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이시고 새 부대는 예수님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광해 8년, 왕위를 둘러싸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하루하루 목숨을 위협받는 현실에 왕의 히스테리와 분노는 날로 늘어갑니다. 그리고 반대자들이 탄 독으로 인해 광해는 의식불명이 됩니다. 허균은 정세가 어지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질 것을 각오하고 왕과 똑같이 생긴 사람을 임시 왕으로 앉힙니다.
임시 왕은 궁녀로 팔려온 아이의 사정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내도록 하며, 쓸데없는 군사 파병을 막습니다. 그는 껍데기는 왕이지만 속은 백성이었습니다. 백성의 입장에서 백성을 보니 백성을 섬기는 정치를 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사신이 온다고 최고 극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열이 받은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이 말하는 사대의 예, 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 곱절 천 곱절 더 중요하단 말이오!”
신하들도, 백성들도 모두 이 가짜 왕이 진짜이기를 바라게 됩니다. 꾸민 이야기라 하더라도 만약 이런 식으로 광해가 계속 집정을 하였다면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것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두려워하며 다른 이들을 적으로 여기며 백성을 바라보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으로 백성을 바라보느냐는 큰 차이입니다. 백성의 자리에서 바라보아야 백성의 마음을 알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입니다. 참 왕은 자리만 지키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의 옷을 가장 보잘 것 없는 백성에게 넘길 수 있는 왕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자리에 맞는 그릇일 것입니다.
사제도 신자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 여기며 신자들을 바라본다면 참으로 겸손한 사제가 될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해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언제나 사제 옷을 입고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고 또 그 모습에 속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으로 자처하시고 당신의 자리를 가장 작은 우리가 앉도록 높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참 왕의 그릇일 것입니다.
오늘 독서엔 야곱과 에사우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성경해석을 잘못하는 바람에 애꿎은 에사우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에사우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입니다. 참 왕으로써 자신의 장자권을 우리 하찮은 예물인 빵과 포도주를 받고 넘겨주시는 분이십니다.
에사우는 붉다는 뜻인데 그 이유는 당신의 가죽을 벗겨서 우리에게 넘겨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원죄를 덮어줄 수 있는 유일한 의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주심으로써 그분의 의로움이 우리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옷을 우리에게 넘겨주어 우리가 왕이 되게 하신 분,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써의 그릇입니다.
하늘나라의 상속은 바로 성령을 받음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악은 하느님을 대표하는 심판관으로써 눈을 감고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은 야곱에게 성령을 부어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레베카는 교회로써 야곱에게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하면서 에사우의 옷을 입혀줍니다. 에사우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 위해 저주받기로 예정된 분이십니다. 레베카는 에사우가 우리에게 장자권을 주더라도 자신의 장자권을 영원히 잃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에사우만이 껍질이 벗겨지더라도 하느님께 사랑받을 유일한 아드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이야기의 맨 끝에 야곱이 아무리 축복을 많이 받아도 결국 에사우에게 얼굴을 들 수 없는 처지로 에사우를 만나게 됩니다. 어쨌건 야곱이 에사우라고 끝까지 우겨야하는 이유는 에사우만이 이사악이 주려는 상속을 감당할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이 믿음만이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만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당연히 성령을 가리킵니다. 성령을 헌 가죽 부대에 담으면 감당이 되지 않아 성령도 쏟아지고 가죽 부대도 못쓰게 됩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라는 믿음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성령을 받아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와의 혼인을 통해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5)라고 하시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삼고 교회가 신부가 되면 그분과 한 몸이 됨으로써 우리가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혼인이 완성되는 시간이 성체성혈을 영하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심으로써 신랑의 도리를 완성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란 믿음도 없으면서 단식과 같은 계명을 지켜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법을 지키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처럼 가장 작은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에게 하늘나라의 왕의 자리를 주기위해 나의 옷을 벗어 넘겨주는 삶을 살고 있을 것입니다.
새 부대란 성령을 담을 합당한 그릇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성령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나의 위치로 끌어올리고 내가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고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수학시간에 점, 선, 면, 공간, 사차원을 배웠습니다. 점은 선이 가지는 특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점은 혼자 있지만, 선은 점들이 모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은 면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선은 오직 한 길만 알지만 면은 여러 길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면은 공간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면은 길은 알지만 그 위에 존재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공간은 존재하지만 역사가 없습니다. 시간이 있어야 공간은 역사가 되고, 시간이 있어야 공간은 신화가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공영방송인 BBC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만남이 가지는 특별한 이유를 보도하였습니다.
첫째는 형식의 파괴입니다. 국가 간 정상의 만남은 의전, 경호, 의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외교적인 형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만남은 트위터로 제안했고, 북한이 응답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둘째는 쌍안경입니다. 역대 미국의 대통령은 군사분계선에서 쌍안경을 통해 북한을 보았습니다. 쌍안경은 편견과 적대감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있는 그대로 북한을 보았습니다. 편견과 적대감 없이 북한을 보았습니다.
셋째는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북한 땅으로 건너갔습니다. 10미터 정도 걸어갔지만 이는 평화와 화해를 위한 첫걸음입니다. 앞으로 이 길을 따라서 미국의 물건이 건너 갈 수 있습니다. 이 길을 따라서 평화가 건너가고, 화해가 건너올 수 있습니다.
넷째는 남, 북, 미국의 정상이 함께 만난 것입니다. 남과 북의 분단이 우리의 의지로 이루어지 않았듯이, 한반도의 평화와 한반도의 통일도 우리의 힘과 노력이 있어야 하지만, 강대국의 협조가 필요합니다.
성서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한 일들이 있곤 합니다. 이사악은 큰 아들 에사오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미리 알아챈 어머니 레베카는 둘째 아들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작전을 꾸몄습니다. 이사악으로서는 몇 가지 확인 절차를 거쳤습니다. 손을 만져 보았고, 냄새도 맡아 보았고, 에사오가 맞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으니 야곱에게 축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절차에 따라서 축복을 준 이사악, 형의 축복을 가로챈 레베카와 야곱, 자신에게 올 축복을 빼앗긴 에사오가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성서에서도 그렇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약은 청지기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약은 청지기는 잘못을 했지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어려움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마치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영리하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하느님께 청하면 결코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닙니다. 4차원은 결국 점이 있어야 됩니다. 우리가 점이되고, 우리가 선이 되고, 우리가 면이 되고, 우리가 공간이 되고, 우리가 역사와 신화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복을 가로챈 희대의 사기꾼에게서 배우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댓글에 제 상태를 말씀드렸듯이 요즘 저의 말씀 묵상이 깊이 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 애만 쓰고 내용이 신통치 않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기에 그래서 가볍게 마음먹고 묵상을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곱은 형 에사우에게 갈 복을 가로챕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아버지가 될 야곱이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도 좋은 겁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곱의 이 행위를 어떻게 보는 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당연히 신앙적으로 이해해야 하겠지요.
하느님의 복을 너무도 원하고 청하는 인간으로 말입니다.
옛날의 저는 기복신앙祈福信仰을 비판하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저도 복이나 비는 그런 기도와 신앙은 차원이 낮은 신앙이거나 잘못 된 신앙이라고까지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제는 좋게 봅니다.
복을 다른 데서 찾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찾는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불교신자들처럼 그 행복을 자기 스스로 얻으려 하고, 어떤 사람은 복을 받아서 행복하려고 하며, 또 복을 받아서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복을 하느님 아닌 다른 데서 받아 행복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에게서 받아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제 생각에 이런 사람이 바로 신앙인인 겁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제가 얼굴도 모르는데 아주 열심한 신앙인이었다고 저의 누나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사제가 없던 공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리고 농사일이 바쁜데도 매일 조만과를 빼먹지 않고 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가족이 모두 같이 하였으며 매일 기도 후에는 저의 누나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셔서 판공 때 신부님이 오시어 찰고를 하면 항상 저의 누나들이 1등을 했답니다.
그런 저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돌아가시면서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당신이 죽거든 미사 백 대를 드려 달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제가 사제가 되고 난 뒤에 하신 얘긴데 그때 저의 어머니는 자식을 여섯이나 젊은 아내에게 남겨두고 가는 양반이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 자식들을 잘 키우라는 부탁의 말은 하지 않고 자기를 위한 미사 부탁만 유언으로 하는지 참 이해하기 어려웠답니다.
미사 백 대를 드려줄 사제도 없었고, 미사 백 대를 드릴 돈도 없었기에 그 소원을 드려드릴 수 없었는데 이렇게 아들이 신부가 되어 아버지를 위해 미사를 드려주게 되었으니 그 소원과 부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제 아버지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지금 나이도 먹고 신앙적으로 이해를 하게 되니 왜 아내와 자식 걱정이 없었겠습니까? 있었지만 그런 걱정은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께 당신도 맡기신 것인데 이렇게 하느님께 복을 청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것입니다.
요즘 행복을 다른 것에서 찾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고 신앙인이라고 하는 사람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많으니 이렇게 복을 하느님에게서 찾는 신앙이 귀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위대한 스승 중의 한 분일뿐 현세와 후세의 나의 행복을 주실 분으로 생각지 않는 나는 아닌지 축복을 가로챈 희대의 사기꾼 야곱을 통해서 성찰하는 오늘입니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작은형제회 오 바오로 신부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복음에서는 단식 논쟁이 등장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라면 기존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부류보다는 새로운 메시아의 도래에 대해 비교적 열려 있을 것 같았는데, 율법이 요구하는 전통 중 하나인 단식 여부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바리사이들과 동류로 묶어 이야기하니 좀 의아스럽고 실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만큼 전통을 넘어서 새 질서가 자리잡히기까지는 수많은 층위의 미세한 도전과 수용, 변화들이 쌓이고 또 쌓여야 하는가 봅니다.
이에 예수님은 지금 당신과 함께 있는 제자들을 "혼인 잔치 손님들"(마태 9,15)로 비유하시며 하느님 현존의 기쁨을 누리는 그 자체가 더욱 하느님께 영광과 위로를 드리는 것이라고 이르십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과 "스승님의 제자들"처럼, 오늘 복음 대목에는 서로 병립이 불가능한 개념들이 나오는데, "새 천 조각"과 "헌 옷" 그리고 "새 포도주"와 "헌 가죽 부대" 등이 그러한 표현입니다. 이들은 각기 따로 있을 때는 제법 각자의 목적에 따라 소용이 있지만 섞일 경우 둘 다 못 쓰게 되어 버리는 조합입니다. 그러니 무엇이 가장 적합할지 알아 제 짝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모두 온전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7)
예수님은 모두가 제 가치를 충만히 하기를, 그리하여 모두가 충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메시아의 도래와 함께 열리는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질서를 포용하여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우주 사이에 관계성을 정립합니다. 옛 질서는 새로운 가치를 담기에 낡았고 고착되어 버렸으며 유연성을 잃었으니까요. 예수님께는 모두 소중합니다. 모두 살리기를 원하십니다.
제1독서는 야곱이 에사우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입니다. 오늘 내용은 앞의 부분 중, "에사우는 솜씨 좋은 사냥꾼 곧 들사람이 되고 야곱은 온순한 사람으로 천막에서 살았다. 이사악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 에사우를 사랑하였고 레베카는 야곱을 사랑하였다."(창세 25,27-28)는 정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두 아들에게 나누어 쏟아진 부모의 편애가 이런 사기극(?)을 가능하게 한 것이지요.
얼핏 모든 복을 가로챈 야곱이 승자로 보이지만, 형 에사우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은 야곱의 마음이 어땠을까 머물러 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이 결핍된 것은 작지 않은 상처로 각인됩니다. 에사우를 부르는 "내 아들"이라는 단어가 이사악의 입에서 무려 일곱 차례나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 "내 아들"이 아니면서 내 것 아닌 그 다정한 호명을 듣고 있는 야곱에게 짠한 마음이 들기까지 합니다.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창세 27,29)
요즘 상속법에는 자녀들에게 동등한 상속 자격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뀐지 불과 얼마 되지 않았지요. 특히 고대에는 장자들에게 유산과 더불어 힘과 권리, 축복까지 대부분이 상속되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을 거슬러 약육강식의 원리가 지배하면 형제간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형성되고 한 어머니의 자식들 사이에서조차도 굴복과 종속의 사슬이 형성됩니다. 축복의 유무가 이를 가릅니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창세 27,29)
사랑하는 아들을 향한 축복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얼핏 들으면 하나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곧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 그분이 오기 전까지만 통용되는 축복입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예수님은 모두를 살리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모두에게 각자에게 맞는 풍요를 충만히 채워주고 싶어하십니다. 불균형한 애정과 편향된 축복으로 기울어진 형제간의 지위와 신뢰를 당연시했던 시대의 손상되고 훼손된 온전성을 사랑으로 회복시키려 하십니다.
잠시 사족을 덧붙이자면, 분명 말씀은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 25,23)고 했고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창세 27,29)리라 하였는데요. 먼 훗날 야곱의 귀환 장면에서 줄곧 자신을 "종"이라 일컫는 이는 에사우가 아니라 야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한 사람이 아니라 가로챈 사람이 죄책감과 두려움으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양심의 법이니까요.
게다가 더욱 반가운 것은 "들이닥쳐서 모두를 치지나 않을까 두려워"(창세 32,12) 선물 공세를 퍼붓는 야곱에게 "내 아우야 나에게도 많다. 네 것은 네가 가져라."(창세 33,9) 하는 호인 에사우의 반응입니다. 육신의 아비가 줄 수 있는 축복은 한 사람에게 쏟아내고 나서 바닥을 드러낼지 몰라도, 아버지 하느님은 에사우에게서 당신 축복을 거두시지 않으셨다는 반증이 되어 기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어쩌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 율법 내용을 완전히 부정하고 판을 뒤엎는 그런 새로움이 아닐 겁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움이란 하느님의 율법에 앞서 하느님의 마음을 읽어드리는 새로움입니다. 승자독식의 논리 아래 하나를 죽임으로써 하나를 살리려다 둘 다 죽이고 못쓰게 만드는 오늘날의 새태에 둘 다 살리는 묘수를 가르쳐주시고, 두루두루 당신의 창조물 모두를 사랑하고 돌보시고 축복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는 오늘입니다. 모두들 살리시는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만남>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과의 만남은
언제나 첫 만남입니다
어제가 아닌
오늘의 당신과
어제가 아닌
오늘의 내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언제나 새로운 만남입니다
아직까지 내가 만날 수 없었던
지금의 당신과
아직까지 당신이 만날 수 없었던
지금의 내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언제나 생생한 만남입니다
나의 뿌연 상상 속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당신과
당신의 뿌연 상상 속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내가
만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레는 만남입니다
당신과의 만남은
언제나 첫 만남이요
언제나 새로운 만남이요
언제나 생생한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만남
언제나 첫 만남이기를
언제나 새로운 만남이기를
언제나 생생한 만남이기를
그리하여
언제나 설레는 만남이기를
바래 봅니다.
“단식”
곽승룡 비오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과 사람들과 함께 관련을 맺으며 살아간다. 인간은 이렇듯 기도하는 존재(homo orans) 곧 하느님과 인간과 대화하는 존재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정신을 들어 올리는 것으로 정의된다. 하느님께 내 영혼을 들어 올리는 내적인 행동이 기도다. 영성가들은 몸도 기도에 긍정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 묻는다.
몸은 나의 내면, 마음과 영혼에 집중하여 일치한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이 몸으로 표현되는데, 그 때 몸짓이 움직이는 상징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기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느님께 마음과 정신 곧 영혼을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이 기도의 목적인 듯싶다. 그래서인지 하느님께 내 영혼을 자유롭게 봉헌할 수 있는 것이 단식인 듯싶다. 그 때 단식이 기도가 된다. 이처럼, 몸을 비우는 단식을 통해 나의 내면 마음과 정신의 자유가 몸 안으로 들어가 나타난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음식, 술, 담배,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는 것이 몸이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을 위해 최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기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은 자연법과 필요에 기초를 두고 있어서 자유와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식하는 몸은 영성화 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럴 때 자유는 자연본성과 연관되면서도, 몸은 사랑을 드러내기 위한 마음의 기관이 된다. 기도의 기관 마음이 몸과 만나서 단식이라는 기도가 된다.
험담을 그만두는 단식
김현 신부님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9장 14-17)
신자들은 기쁨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커다란 표지가 바로 기쁨입니다. 환하게 웃는 얼굴입니다. 그러니 ‘신랑과 함께 있는’ 잔칫상 앞에서 단식하는 사람의 표정이 되는 것은 곤란하지요. 그런데 주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드러내는 단식이 있으니, 그것은 남을 나쁘게 말하기를 그치는 단식입니다.
남을 험담하는 말을 그만두는 단식입니다. 남에 대한 험담을 잔뜩 늘어놓는 것은 절제를 모른 채 폭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귀에게 진수성찬을 차려 대접하는 꼴이지요. 마귀에게는 먹을 것을 내주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에 대해 험담을 하기보다는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더 낫다.” 대 레오 교황님은 사순시기 단식에 대한 강론에서 이렇게 강조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여러 기회에 “형제를 험담하는 것은 그 형제를 차지하고 계신 예수님을 헐값에 팔아넘기는 것과 같다.” 하시며 조심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것은 평생 수련해야 하는, 주님과 사귀고 있는 사람의 표지인 단식입니다. 신랑과 함께 있는 사람의 신분증입니다. “주님, 제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제 입술의 문을 지켜 주소서.”(시편 141,3)
* 오늘은 남을 험담하지 맙시다.
'놔 주고 놔 주어야'(마태오 9장 14~17)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행복해하지, 짜증내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 들리고 그 눈빛이 나를 설레게 하여 한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아 축복의 시간을 묶어두고 싶습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좋아도 시간을 묶어둘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은 흘러흘러 저만치 가는데 놓치 못해 잡으려 하고 묶어놓는다면 마음만 힘들어지니 탁 놓습니다.
함께하는 동안 마음껏 행복하십시오.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웃으십시오.
시간을 사랑에 묶고 사랑을 시간에 묶어두려 하면 찟어지고 어느것도 온전치 않습니다.
진정 사랑 한다면 시간은 사랑을 놔 주고 사랑은 시간을 놔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마음으로 새 정신으로 시간의 사랑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질 내일을 새 마음으로 두 팔 벌려 안으면 슬픔이 사라집니다.'
단식의 의미 변화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통증이 극에 달했다. 몸을 대굴대굴, 담석이 빠져 나오다 췌장을 막았다. 처음엔 급체로 알았는데 췌장염이다. 담석은 췌장을 3일간 막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몸 밖으로 빠져나갔고 통증은 사라졌다. 입원해서 보름을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고 항생제 투여를 하며 링거액으로 영양을 보충했다. 체중은 거구 98에서 82로 곤두박질치고 퇴원을 했다. 퇴원 후 사람들은 나를 보고 수근거렸다. 간암진단을 받고 있을 때이니 사람들은 나에 관하여 “곧 죽게 될거야!” 라고 말했나 보다. 벌써 1년전 이야기이다. 여전히 나는 건강하게 살아 있다. 지난번 진료에서 췌장도 건강하다고 들었다. 천만다행이다.
단식을 이야기 하다보니 지난 해 있었던 일을 꺼냈다. 몸의 기관은 작은데 몸체는 비만으로 대형이라 걸어다니는 것조차 많이 불편했는데, 췌장염 때문에 체중이 확 줄었고 날아갈 듯 몸이 가벼워졌다.
세상이 다시 보였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날씬하고 건강해졌는지 감사가 절로 나왔다. 원하지 않은 단식이었지만 정화의 의미, 새로운 삶으로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이제 건강문제로 단식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이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으며 행복하게 살면 되니까.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도래했다. 이제 건강을 잘 관리만 하면 됩니다.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 예수님의 제자들의 즐거운 식사는 완전 비교가 된다. 예수님의 일상에서 제자들은 함께 하기에 단식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것이다. 날마다 기분 좋은 식사가 기다릴 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면 된다. 이는 매우 기분좋은 일이다”(마태9,14-17참조).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제가 가끔 봉사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봉사를 하는데 열심히 하지 마십시오. 열심히 하지 마시고 기도하면서 하십시오.” 사실 우리나라 국민들은 근면하고 성실한 모습을 최고의 덕목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에게 더 우선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마치 따지듯이 이렇게 여쭤봅니다.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당시 정말 열심히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율법을 잘 지키며 열심히 사는 것이 자신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가 되면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단죄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곧 내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지 못한 사람들이 단죄의 대상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이 말씀은 곧 당신과 함께하는 것의 우선적인 가치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며, 이웃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구원의 때에 회개하십시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1,2-3. 5-6: PG 33,371. 375-378)
여기 참석하신 분 중에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재생하도록 신앙을 통하여 준비하십시오. 죄의 비참한 노예 상태를 벗어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복된 신분을 취하여 하늘 나라의 상속을 받을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회개를 통하여 헛된 욕망으로 썩어 가고 있는 여러분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앎으로 새로워지는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집에 영접 받도록 신앙을 통하여 성령의 보증을 얻으십시오. 영적 날인을 받아 주님께서 여러분을 쉽게 알아보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마련된 생명을 유산으로 받을 때가 올 때 그분의 오른편에 앉게 되도록 거룩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의 양 떼에 들어가십시오.
실상 지금까지 죄의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왼편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생의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하느님의 은총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재생은 육신적인 재생이 아니라 영혼의 영신적인 재생입니다. 우리 육신은 우리 혈육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 영혼은 신앙을 통하여 재생했습니다. “영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여러분이 합당한 자가 되고 양심이 온갖 불결과 거짓에서 벗어날 때 다음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여기에 참석하신 분 중에 누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고 은총의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분을 생각하여 충실하고 위선 없는 영혼을 마련하십시오.
지금 이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밤이건 낮이건 말과 행동으로 범한 죄를 다 고백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기뻐 들어주실 때 회개하고 구원해 주시는 날에 천상 보화를 받으십시오. 받을 은총을 더 풍성히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깨끗이 하십시오. 죄 사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지만 성령의 친교는 각자의 신앙에 비례하여 받습니다. 조금 일하면 조금 받고, 많은 일을 하면 보상도 클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참으로 이익 되는 것을 찾으십시오.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여기에 죄 사함을 받으러 왔으니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새로운 평화의 시대에 경제 보복이 왠말인가.
최민석 신부님
6월 30일. 북미 정상의 판문점 만남은 남북의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확인하는 역사적인 날을 세웠다. 사실상 종전선언이라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연 것이다. 세계 평화는 물론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는 북미 정상의 만남은 평화를 바라는 국민들의 촛불 평화 혁명의 결과이기에 참으로 자랑스럽다.
이에 반해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거꾸로 돌리려는 시도가 가까운 나라 일본 극우아베정부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일본은 이번 달 7월에 참의원 선거가 있다. 이 선거에서 일본의 야당이 의석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면 평화헌법을 유지해 아베 총리가 퇴진 하지만, 3분의 1 이상 얻지 못하면 평화헌법을 유지하기 힘들어진다.
일본이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게 막는 일본 평화헌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나쁜 정권 극우아베정권이 평화헌법을 위협하고 있다. 아베는 대한민국을 적대적 관계로 삼아 참의원 선거 승리로 이끌기 위해 일본보수를 결집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을 핑계 삼아 대한민국과 일본의 외교적·경제적 마찰을 조장하고 있다.
2019년 7월 1일 자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은 '한국에 대한 보복이 아닌, 기존의 수출 구조 재정비에 따른 조정일뿐'이며, '국제 평화와 안전 유지를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이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제조 핵심 소재의 수출을 제한하기로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대(對) 한국 경제제재에 돌입한 것이다.
이에 대해 2019 G20 오사카 정상회의에서 "자유롭고 공평한 무역"을 강조했던 선언이 무색하게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경제제재를 걸었다는 점에서 일본은 자유무역에 위선적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경제와 무관한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수출 규제를 하는 것은 세계무역기구 규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 상처가 있는 곳을 치유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 사명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공생활 시작하시면서 자기 자신의 사명을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기도 하다. 세계 평화 동아시아의 평화는 새로운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뜻이다.
새로운 평화를 향한 하느님의 뜻에 반대로 가는 것은 천명을 거역하는 것이다. 전쟁은 안 된다. 오직 평화로 가야 한다. 경제 무역 보복에 대한 한·일 양국의 반응은 너무도 대조적이다. 한국에서는 분노와 비판이 나라 전체를 뒤덮는 가운데 정부도 경제 보복에 대한 강경 대응을 들고 나왔다. 한-일 관계의 어려움과 경제 보복에서 우려 되는 반일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다.
일본 강점기 일본은 아시아의 전쟁 가해자였다. 그 전쟁의 가시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계속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주고 있다. 이 상처의 고리는 끊어야 한다. 절대 더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남과 북이 그리고 동아시아 전 세계가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 평화롭게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답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16-17)
지금은 새로운 평화의 시대이다. 우리는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다. 일본 정부가 아무리 나빠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하느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한 몸이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는다. 또한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한다.
우리 대한민국과 일본이 함께 노력해서 하느님의 정의, 새로운 평화를 이루도록 새로운 포도주의 새로운 부대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유다인들에게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그들의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의 영향을 받아 자주 단식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별로 단식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4절)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결혼식을 예로 들어 설명하신다.
그들의 결혼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과 달라서, 그들은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집에 있으면서 일주일 동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기쁨의 축제를 지냈다. 이때에는 모든 율법의 의무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즐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 때에는 단식의 의무에서도 해방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신랑에, 제자들은 신랑의 친한 친구들로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한 잔치에서 슬퍼하며 단식할 수 없다. 그 때는 단식할 때가 아니고 즐기는 때이다.
지금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을 빼앗기고 슬퍼하는 것처럼, 예수의 제자들도 신랑을 빼앗기고 난 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죽으시고 영광을 입으시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들어가시고 나서 제자들은 단식하기 시작하였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잔치”라는 것이다.주님과 함께 있는데 슬픔과 어두움이 있을 수 없겠지만, 만일에 그렇다면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을 모시고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중요하며, 내 잘못으로 주님을 모시지 못했을 때는 우리는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풂으로써,주님을 다시 모셔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은 율법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 가르침을 들을 때,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 말씀 때문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16-17절).
수축이 강한 새 천을 찢어서 헌 옷을 깁는 사람도 없지만, 새 포도주도 발효가 심하기 때문에 수축작용이 거의 없는 가죽부대는 새 포도주를 담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의 고정화된 나 자신의 틀이라고 하는 헌 옷이나, 낡은 가죽부대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마음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새롭게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새로운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노력하자.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가끔 드라마나 영화에서 왕위 찬탈 사건을 주요 소재로 삼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러저러한 방법과 노력을 다 기울이는 모습이 어떤 때는 스릴이 넘치고 멋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윤리와 인격은 사라지고 맙니다. 권력과 재물을 둘러싼 탐욕 그 자체가 윤리나 정도를 넘어서고 제외시키는가 봅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작은 아들 야곱과 그 어미 레베카가 아버지 이사악을 속이고 큰 아들 에사우가 받을 상속을 가로채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사악이 죽을 때가 되자 가문의 상속을 의미하는 축복을 할 시기가 됩니다. 그래서 큰 아들을 불러 아비가 좋아하는 동물을 잡아다가 음식을 만들어 오라고 명합니다. 에사우는 기쁜 마음으로 자신이 잘하는 사냥을 하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에사우가 나가자 마자 그 어미는 쌍둥이 아들 형제 중에 자신이 편애하는 둘째 아들 야곱에게 에사우처럼 꾸며 에사우의 냄새가 나게 하고, 미리 만들어 놓은 남편 이사악이 좋아하는 음식을 들고 들어가게 합니다. 이를 모르는 이사악은 축복과 상속을 받을 에사우를 제쳐놓고 야곱에게 축복과 상속을 넘겨주게 됩니다(창세 27,1-29 참조).
이 기사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일을 허락하실까?
심지어는 나쁜 일을 저지르는 죄인을 선택하신 것처럼 보일까?
그리고 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그냥 내버려 두실까?
하느님은 사람의 자유를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했을 때, 주 하느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몹시 아파하시면서도 그 일 자체로 벌을 내리지는 않으십니다. 그 대신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스스로 자신이 차지했다고 여기는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그 권력이나 재물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갇혀 버립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나 재물의 굴레에 갇혀 답답하고 고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실제로 야곱은 에사우를 속여먹은 죗값으로 도망을 쳐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무려 십사여년 동안 종처럼 살다가 거기서도 결국 범죄자처럼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쫓겨납니다. 결국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형 에사우가 무서워 제대로 들어오지도 못하고 비굴하고 비참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주 하느님은 야곱도 에사우도 편애하시거나 특별히 따로 무슨 힘을 실어주지 않으십니다. 단지 야곱이 도망자로 살아가면서 힘겨운 나날에 매달리고 울부짖을 때 그 가련한 처지를 가여이 보시고 그 생애를 보호해주실 뿐입니다. 또한, 얼핏 보기에 선택을 받지 못했다고 여길 수 있는 에사우에게도 조금 반항기 섞인 비뚤어진 생을 살고자 했던 것으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그를 막지 않으시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있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고 보면, 이 경우에 주 하느님께서는 야곱이나 에사우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 각자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정하고 결행하여 그 선택의 결과를 스스로 맞아들이고 살도록 허락하실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자기 죗값을 갚으면서 살아가는 길이라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 12장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한 12,48)
구원의 때에 회개하십시오.
예루살렘의 성 치릴로 주교의 ‘예비자 교리’에서(Cat. 1,2-3. 5-6: PG 33,371. 375-378)
여기 참석하신 분 중에 죄의 노예가 된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의 참된 자녀로서 재생하도록 신앙을 통하여 준비하십시오. 죄의 비참한 노예 상태를 벗어버리고 주님을 섬기는 복된 신분을 취하여 하늘 나라의 상속을 받을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십시오. 회개를 통하여 헛된 욕망으로 썩어 가고 있는 여러분의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앎으로 새로워지는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그리고 영원한 집에 영접 받도록 신앙을 통하여 성령의 보증을 얻으십시오. 영적 날인을 받아 주님께서 여러분을 쉽게 알아보시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마련된 생명을 유산으로 받을 때가 올 때 그분의 오른편에 앉게 되도록 거룩하고 신령한 그리스도의 양 떼에 들어가십시오.
실상 지금까지 죄의 거친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왼편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재생의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하느님의 은총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재생은 육신적인 재생이 아니라 영혼의 영신적인 재생입니다. 우리 육신은 우리 혈육의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우리 영혼은 신앙을 통하여 재생했습니다. “영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여러분이 합당한 자가 되고 양심이 온갖 불결과 거짓에서 벗어날 때 다음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이다.” 여기에 참석하신 분 중에 누가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있고 은총의 가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꿰뚫어 보시는 분을 생각하여 충실하고 위선 없는 영혼을 마련하십시오.
지금 이때는 회개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밤이건 낮이건 말과 행동으로 범한 죄를 다 고백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소원을 기뻐 들어주실 때 회개하고 구원해 주시는 날에 천상 보화를 받으십시오. 받을 은총을 더 풍성히 받을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깨끗이 하십시오. 죄 사함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지만 성령의 친교는 각자의 신앙에 비례하여 받습니다. 조금 일하면 조금 받고, 많은 일을 하면 보상도 클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참으로 이익 되는 것을 찾으십시오. 어떤 사람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그를 기꺼이 용서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여기에 죄 사함을 받으러 왔으니 여러분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
때를 바로 아는 사람 <마태 9, 14-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이 먹어야 할 때가 있고 먹지 말아야 할 때가 있어서 때를 잘 알지 못하면 분별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울고 싶다고 아무 때나 우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함께할 때는 울고, 기쁨을 함께할 때는 울지 말아야 합니다. 단식이나 절제가 필요할 때 단식하고, 절제해야 합니다. 단식하지 않아야 할 때 단식하면 건강을 해치고 영성에도 잘못하는 일이 됩니다. 오늘 주님은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단식하지 않는다고 하시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때와 행위의 현실적 적응을 정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번 아산 병원에서 검사와 시술을 위해 60시간 금식해야 할 때 상당히 고통스러웠습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고 있을 때 갈증은 저를 어렵게 했지만 끝나고 마시는 물의 고마움을 희망하며 기다렸습니다. 모든 음식은 때를 따라 먹고 마셔야 합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아십니까? 잘 때와 잠에서 깰 때가 있습니다. 함께 기도할 때와 혼자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요사이 스마트폰으로 공동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병석에 누워서도 해설자와 함께 기도를 따라 할 때 성당에서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것보다 기도가 더 잘될 때도 있습니다.
어제 금요 강론을 들으며 약간의 가책이 생겼는데 어떤 목포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처럼 하느님을 향해 자기 자리로 걸어가는 행렬에 참여하지 않고 저는 미리 들어와 앉아 있다가 입장할 때 저도 일어나 함께 합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하게 되는 저의 행위에 ‘나는 환자다.’ 변명하며 아침에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제 옆자리에 한 형제가 앉아 있기에 “어제 강론 못 들었어요? 걸어야 한대요.” 그러나 그 형제 어제 넘어져 다리가 아파 병자 석에 앉아 있다고 말하기에 성체 배령까지 배려해주면서 걸어서 움직이는 때와 걷지 못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때가 있듯이 시간 속의 변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며 지팡이 짚고 다니는 저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관습이나 관례는 시간, 장소, 환경에 따라 다르게 적용됩니다. 더구나 사람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을 피상적으로 보고 판단하지 말고 긍정적 사고로 알아보고 함께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사는 사람은 아이의 웃고 우는 이유를 깊이 관찰하여 해결해주고 권장해야 합니다. 무엇을 싫어하고 좋아하는가를 알아보고 대처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원칙에 거스르는 일이 있을 때 비판만 하지 말고 그 깊은 의미를 알아보고 이해하는 너그러움이 우리 삶 안에 있기를 기도합니다.
파스카의 삶, 늘 새로운 시작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말마디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파스카의 삶, 늘 새로운 시작-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바로 강론 제목입니다. 파스카 영성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과거는 이미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고 우리가 확실히 살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오늘입니다. 오늘의 현재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해 사는 것 바로 여기에 행복도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전사'입니다.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입니다. 그러니 늘 하루하루의 영적 전투에 죽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학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생입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열린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마음'에 있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정신이, 마음이 늘 새로우면 영원한 젊음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했고 성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제 좋아하는 ‘산과 강’이란 자작시도 이런 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산/안으로는 강
천년만년/임 기다리는 산/천년만년/임 향해 흐르는 강”-
산과 강의 영성으로 살 때 늘 새로운 시작일 수 있습니다. 밖으로는 한결같은 산같은 정주의 삶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내적 여정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좌우명 시 셋째 연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緩慢)하게 또 격류(激流)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하느님 사랑의 강(江)'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뜻합니다. 늘 내 뜻이 아닌 하느님 뜻을 생각하며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뜻합니다. 삶은 끊임없이 새롭게 배워가야 하는 배움의 여정이요, 하느님을 찾는 여정입니다. 그러니 ‘배움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갈망(love of learning and desire for God)’은 구도자의 기본적 자질이요 이래야 열정과 순수의 수행자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우리와 바라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는가 묻습니다. 참 구태의연한 태도요 물음입니다. 단식 자체가 그 무슨 큰 수행이나 되는 것처럼 트집을 잡습니다. 정말 진짜 수행은 사랑의 수행뿐인데 말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사랑뿐이고 단식을 비롯한 모든 수행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하여 분별의 잣대는 사랑이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고가 참 유연하고 개방적입니다. 단식을 상대화 시킵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함께 있는 동안은 슬퍼할 수 없기에 단식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 주님과 함께 축제인생을 맘껏 즐기고 주님이신 신랑에 빼앗길 날 그때 가서 단식해도 된다는, 즉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을 하더라도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이웃에 숨겨진 감쪽같은 단식을 권하셨습니다. 우리의 수행들 역시 겸손히 숨겨질 때 빛이 나는 법입니다.
예전 장상의 유머도 잊지 못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 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자기만족의 교만한 단식보다는 아예 먹고 겸손한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복음 말씀도 핵심을 잡고 있습니다. 새롭고 깊습니다.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낡고 빛바랜 구태의연한 사고를 늘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늘 깨어 배울 수 있는 새 부대의 정신, 마음, 사고를 지니라는 것입니다. 이래야 늘 새 포도주의 진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나 자주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바리사이들이나 율사들은 구태의연하기가 흡사 복음의 헌 옷과 같고 헌 가죽부대와 같습니다.
바로 우리의 정신, 마음, 사고 상태를 묻는 것입니다. 늘 새로운 진리를,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의 정신을, 마음을, 사고를 지니고 있는가 묻습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 들어도 늘 맑게 흐르는 정신으로, 마음으로 살아 갈 때 늘 새 부대의 정신이요 마음일 것입니다. 하여 복음의 결론은 그대로 예수님의 지혜로운 삶을 반영하며 우리의 각성을 촉구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의 이사악과 그의 아내 레베카가 참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사악의 사고는 구태의연합니다. 장자인 에사우가 당연히 자기 뒤를 이을 것이라 확신하고 축복을 주려 합니다. 그러나 레베카의 사고는 하느님 중심적이라 열려있고 유연합니다. 이미 에사우와 야곱 쌍둥이가 태중에 있을 때 주님의 예언을 기억한 레베카임이 분명합니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세25,23).
이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에사우는 야곱이 준 빵과 불콩죽을 먹고 경솔하게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 넘겼습니다. 이런 내막을 안 레베카의 마음은 하느님처럼 야곱에게 기울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중심의 삶과 사고를 지닐 때 늘 열린 새 부대의 마음에 올바른 분별의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물론 야곱과 레베카가 공모하여 에사우를 속인 행위가 참으로 비열합니다만 그 안에도 하느님의 깊은 섭리가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하여 다음과 같은 속담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굽은 줄들 위에다도 똑바로 쓸 수 있다(God can write straight with crooked lines)”-
우리 믿는 이들은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영원히 배워야 하는 주님의 학인입니다. 참으로 늘 깨어 배움에 대한 지칠줄 모른 사랑을, 하느님을 찾는 지칠줄 모르는 갈망을 지닐 때 늘 새 부대의 정신이요 마음일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새 부대의 마음안에 당신 새 포도주의 생명과 사랑을 가득 담아 주시어 오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로운 삶이 이제
시작 되었습니다.
새 부대를
가득 채우는 것은
언제나
새 포도주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끊임없이 우리를
새롭게하십니다.
새 포도주로부터
새로운 삶을 만나고
새로운 삶을
맛보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오늘을 가리키듯
새 부대를 원합니다.
새로운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맛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맛보게 하십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가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관계이듯
새로운 관계가
새로운 삶을
만듭니다.
우리의 삶안에
담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삶을 맛들입시다.
어떤 신자로부터 사순시기 내내 단식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사순시기 내내 단식을 할 수 있냐면서 깜짝 놀라 물었지요. 그리고 건강에 문제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분께서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마침 사순시기도 되었고 해서 ‘효소단식’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건강이 아주 좋아졌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더 깊이 묵상하기 위해서 단식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식하는 것이 익숙한 사순시기에 맞춰서 자신의 건강을 위한 단식을 하신 것이지요. 이 말을 듣고 나서는 처음에 가졌던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이러한 경우를 종종 보게 되지요.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겉으로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이 조차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행동에 대해 진정으로 존경의 마음은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는 않지만 조용한 가운데서 선한 일을 행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희 성지에는 그러한 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바쁜 자신의 일상 가운데에서도 성지의 구석구석에서 봉사해주시는 분들을 보면서 ‘정말로 대단하다.’라는 생각을 저절로 갖게 됩니다. 진정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 분들은 이러한 분이 아닐까요?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는 지금처럼 먹는 것이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먹는 것이 부족해서 힘든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단식한다는 것은 엄청난 신심이 있는 사람들이나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단식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는데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서 이러한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식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보다는 어떤 상황에서 또 어떤 마음으로 단식을 하는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단식할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이 단식으로 인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제는 남에게 나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는 위선적인 모습은 버리고, 대신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할 것을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성공하려는 본인의 의지가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에이브러햄 링컨).
프레임으로부터의 자유 -사랑의 프레임-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의 불가능한 것이 프레임의 변화, 패라다임의 변화입니다. 나이들어 갈수록 입력되어 고착된 프레임은, 패러다임은 철벽과 같습니다. 일종의 고정관념이나 편견같습니다. 사고의 개방성, 유연성, 신축성을 말하지만 한 번 형성되어 굳어진 프레임은, 패러다임은 참 바뀌기 힘듭니다. 이런면에서 우리는 대부분 프레임의, 패러다임의 노예일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인식의 틀, 사고의 틀인 프레임이나 패러다임없이는 살 수도 없습니다. 예로들면 공동생활하는데 일과표라는 프레임의 틀없이 질서와 균형잡힌 삶은 불가능합니다. 제멋대로의 삶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요 마음의 안정과 평화도 없습니다. 하여 프레임에 익숙해질 때 편안해 하며 프레임을 벗어날 때는 본능적으로 심한 거부반응을 하게 됩니다.
제가 요즘 새삼스럽게 깨달은 진리입니다. 제가 얼마나 경직되고 자유롭지 않은가 하는 겁니다. 예전 혜화동에서 가톨릭 대학교에서 화요일 강의가 끝나면 정확히 오후 4:15분, 5:30분 수도원 저녁기도에 맞춰 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혜화역까지 뛰다시피하여 4호선을 타고 동대문역에서 1호선을 갈아타고 석계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불야불야 오면 저녁기도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숨차게 뛰어다녀 저녁기도에 참석하기 무려 6년 동안입니다. 1주 한번 저녁기도 참석못하더라도 좀 더 여유있게 왔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당시는 일과표의 절대적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한 번 익숙해지면 이렇게 바꿔지기 힘듭니다.
또 격월간으로 서울 수녀원에 한 번 고해성사주러 가는데 3시경후 형제들의 도움으로 화랑대까지 우리차로 가곤 했는데 참 번거로웠습니다. 3시경후라는 프레임이 견고히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10여년 동안 이렇게 하다가 요즘 3시경을 안하고 아침식사후 적당한 시간에 가니 쫓기지 않아 참 넉넉하고 편안해 좋습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뿐 아니라 우리는 무수한 프레임에 갇혀 보수적이 되어 살아갑니다. 나이들어 갈수록 이런 프레임도 더욱 견고해집니다. 이런면에서 젊은이들이 훨씬 프레임에서 자유롭습니다.
이념도 사상도 지역감정도 그렇습니다. 이런 부정적 프레임의 피해자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프레임이 우상이 될 때 참으로 벗어나기 힘듭니다. 그러니 언론의 정확한 팩트facts에 입각한 편견없는 보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을 보면 잘 이해됩니다.
우리가 대부분 프레임의 수인囚人인 반면, 복음의 예수님은 프레임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로운 분입니다. 프레임이 있다면 단 하나 ‘사랑의 프레임’입니다. 오늘 복음의 요한의 제자들은 단식의 프레임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단식은 꼭 해야한다는 프레임을 염두에 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단식 수행을 상대화하여 단식의 때가 되면 단식을 할 것이고 지금은 축제의 때니 축제의 때를 즐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어 프레임의 전환,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십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다 보존된다.”(마태9,17ㄴ).
새 부대의 새 패러다임만이 새포도주의 참신한 내용의 생각들을 담을 수 있습니다. 결국 끊임없는 회개도 끊임없는 새부대를, 사랑의 패러다임을 마련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이야말로 새 패러다임의 원조입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서 부모의 우선적 축복은 장자인 에사우에게 가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패러다임입니다. 아무도 여기에 이의를 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레베카는 야곱과 모의하여 참 야비하고 비열하게도 이사악을 속여 기존의 패러다임을 깨고 장자 에사우에게 갈 축복을 가로챕니다. 깊이보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사랑의 패러다임이 작동된 것임을 깨닫습니다. 장남이기에 당연히 부모의 축복을 계승한다는 패러다임은 하느님의 뜻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야곱은 에사우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고, 마침내 야곱은 이런 죄과로 무수한 시련을 통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니 하느님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요즘 주요 20개국 정상회의에 참석차 독일을 방문중인 문대통령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특히 중국, 미국, 일본은 물론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온갖 패러다임을 활용하는 모습입니다. 북한도 문대통령의 진정성있는 대화제의에 화답했으면 좋겠습니다. 남북의 살길은 대화를 통한 공존공영共存共榮의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 사위가 중국의 저명한 인사인데 세 딸의 이름이 특별하여 다시 소개합니다. 큰딸은 한국에서 낳았다 하여 한국의 지혜를 배우라 한지韓智, 둘째딸은 중국에서 낳았다 하여 중국의 지혜를 배우라 중지中智, 셋째는 미국에서 낳았다 하여 미국의 지혜를 배우라 미지美智로 작명했다 합니다.
정말 사면초가의 국제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혜로운 패러다임의 활용이 절실하고 이런 지혜롭고 용기있는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고착된 갖가지 프레임을 사랑의 새 프레임으로 바꿔주십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부단한 새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회개요 진정한 살길活路입니다. 아멘,
미래를 지향하는 오늘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를 미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분별없이 외적인 형식에 매여 단식을 논하였습니다. 형식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내용이 중요하고 지향하고 있는 바는 더 소중 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역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야곱이 어머니 레베카의 협조 하에 형 에사오로부터 ‘장자권(長子權)’을 강탈하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오늘날은 훨씬 덜하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맏아들은 다른 아들들보다 훨씬 더 많은 특권을 누렸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를 이어 가장의 자리를 차지했고, 아버지가 부재중일 때는 그를 대신해 가족들을 통솔했으며, 유산 상속을 받을 때는 다른 아들들보다 두 배를 받았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맏아들의 특권은 아버지로부터의 특별한 축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조(聖祖)이자 신앙인 가족의 모델인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가문에서 희대의 사기극이 발생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성가정에서 권모술수가 은밀하게 전개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불법적인 장자 강탈 사건이 이루어졌다는 것,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눈도 멀고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이사악이 맏아들 에사오에게 정식으로 장자권을 양도하고, 그를 축복해주기 위해 절차를 진행합니다. 에사우를 불러 당시 통용되던 관습에 따라 한가지 부탁을 합니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겠다.”(창세기 27장 2~4절)
이사악은 남성미 넘치는 에사우를 사랑하였지만, 레베카는 온순하고 다정다감한 야곱을 총애했습니다. 에사우가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사냥을 하러 들로 나가자, 레베카는 미리 세워둔 치밀한 전략을 즉시 실행에 옮깁니다.
이사악을 속이기 위해 아직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야곱에게 에사우의 옷을 입힙니다.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목둘레에 입힌 다음,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야곱의 손에 들려 이사악의 방으로 들여보냅니다. 이미 정신이 흐릿해진 이사악은 계략에 속아 넘어갔고, 장남이 아니라 차남에게 장자권을 물려주었으며, 그를 축복하는 실수를 범합니다.
인간의 시각과 사고방식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종종 하느님께서는 악으로부터 선을, 불의로부터 정의를 이끌어내시기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억울한 피해자도 발생합니다. 그저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순명했을 뿐인데도, 따라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뿐인 경우도 잦습니다.
우리네 인생사, 많은 경우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은 종종 이해하지 못할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결국 체념할 수밖에,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인이신 그분께서 하시는 일에 종들인 우리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로드맵과 우리들의 로드맵은 철저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의지와 우리들의 생각을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이신 그분께서는 종종 수많은 축복과 은총의 선물을 종인 우리들에게 넘치도록 주시기도 합니다만, 때로 빼앗아 가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는 우리를 나 몰라라 하지 않으십니다. 어느새 다가오셔서 빼앗아 가셨던 것을 다시 되돌려주십니다.
주님께서 진두지휘하시는 인간의 역사는 자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합니다. 때로 단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 인간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이리저리 쉼 없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와중에 우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시고, 결국은 우리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고통 속에서도 늘 희망하는 것입니다. 비관적인 현실 속에서도 항상 낙관하는 것입니다. 죽음과도 같은 실패 앞에서도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끝까지 믿는 것입니다.
영적인 악착같음. 그거 내게 있는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버지,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를 축복해주십시오.”
오늘 창세기는 야곱이 이제 전면에 등장하는 얘기입니다.
이 야곱에게서 열두 아들이 태어나고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생겨났으니 아브라함이 이민족(하갈과 이스마엘의 자식들)까지 포함한 조상이라면 야곱은 그야말로 이스라엘만의 조상이고 그래서 어쩌면 야곱을 아브라함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얘기의 처음 등장에서부터 세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어머니 레베카와 함께 비열함과 욕심을 부리고 있는데 우리 같으면 지워버리고픈 이스라엘의 역사와 모습을 창세기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창세기는 왜 이렇게 기술하는가?
이스라엘은 왜 자기들의 조상을 이렇게 기술하는가?
그것은 창세기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죄짓는 것부터 얘기하여 인간이란 무릇 다 죄인이라는 것을 얘기하듯 자기 민족도 조상인 야곱서부터 다 죄인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거겠지요.
창세기란 이렇듯이 솔직하고 겸손하여 인간이란 너나없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임을 얘기하는데 오늘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 얘기는 야곱도 죄인이고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만을 얘기하고자 함일까요?
제 생각에 다른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야곱은 인간에게 죄인이고, 심지어 자기 쌍둥이 형에게도 죄인이지만 축복을 갈망하고 욕심내는 존재, 특히 하느님의 축복을 형 에사우보다 더 갈망하고 욕심을 내어 장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존잽니다.
야곱은 악착같은 존재입니다.
야곱에게는 악착같음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야뽁 강 나루에서 하느님과 악착같이 겨루었고, 축복을 얻기 위해서도도 형 에사우보다 악착같이 굴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 27장의 얘기인데 앞선 25장에서 형 에사우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동생 야곱에게 팔아넘기며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지금 죽을 지경인데, 맏아들 권리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느냐?”
에사우는 이처럼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길 정도로 장자와 장자의 축복을 우습게 여기고 팔아넘기는 자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축복보다 먹을 것을 더 중요시 여길 수 있는데 에사우는 하느님의 축복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 인간의 대표입니다.
이에 비해 야곱은 먹을 것은 잃더라도 아버지의 축복,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싶어 하고 그래서 욕심까지 내는 존재입니다.
이런 영적인 악착같음이 야곱이 보이는 그 많은 죄와 세속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매우 세속적이면서도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욕심내는 인간이고, 세상에 살고 세속적이면서도 하늘을 오르려고 하는 존재입니다. 28장에서 보게 되는 <야곱의 사다리> 얘기는 이를 상징하는 겁니다.
28장에서 야곱은 베델에서 꿈을 꾸는데 자기가 누워있는 땅에서 하늘까지 사다리가 놓여 있고 이 사다리를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꿈을 꾸지요.
야곱은 이처럼 세상과 하늘을 오가는 존재, 세속에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하늘로 오르려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 살고, 대단히 세속적인 우리에게 모범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되기도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야곱과 같은 영적인 악착같음이 있습니까?
잔칫상의 새 부대가 되어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9,14)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9,15)
구약시대는 하느님의 구원을 고대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구원을 위해 율법을 엄격히 지키려 하였습니다. 단식도 그런 맥락에서 실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단식의 본뜻을 망각한 채 의무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영원한 기쁨, 새로운 창조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으로 기쁨의 축제가 열린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구원의 기쁨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생명의 축제에 초대받았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 기쁨에 참여하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쁨이신 분과 더불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단식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거처하시도록 자신을 비우는 것이 단식이지요. 주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되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단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없을 때, 하느님을 망각해버릴 때, 하느님이 보이지 않고 의미 없다고 여겨질 때 필요한 것이 단식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기쁨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 계시는 동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 기쁘게 구원의 축제에 참여할 때입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의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주님을 잊고, 무시하며 나만의 길을 걸을 때가 있지요. 그때부터 기쁨도 행복도 사라져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주시기 위해 늘 내 곁에 현존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네 삶은 생각처럼, 마음처럼 쉽지 않지요. 이미 오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자주 잊어버립니다. 내 안에 오시어 선으로 이끄시고자 하는 성령의 작용에 무딥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9,17) 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새 시대에는 새로운 마음과 생각과 삶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바리사이와 같은 형식적인 율법준수에서 벗어나야겠습니다. 율법의 정신인 자비의 문을 열어야겠지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기쁨이 실현되었으니, 그 기쁨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새로운 마음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고, 애착을 두고 있는 세상 것들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세상과 동료 인간을 바라보는 기준과 관점을 예수님과 복음의 관점으로 바꿔야 합니다.
마음을 바꾸고 생각을 바꾸며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면, 새 포도주인 예수님을 죽이고 부대인 우리 자신도 쓸모없어질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은 변화와 자기 버림 없이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나와 공동체, 사회에서 구원의 기쁨을 보존하고 꽃피우기 위해, 부서지고 깨어지는 전인적인 단식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담아낼 수 있는 잔칫상의 새 부대가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고 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바오로가 베드로를 나무란 적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초석이었고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다가 회개한 사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감히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께 그분의 태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논문지도 신부님은 가난한 성자처럼 사십니다. 본당신부님이시지만 직접 시장을 보셔서 음식을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과 사제관을 나누어 사용하시며 옷도 남이 버린 것들을 주워 입으시는 성인신부님이십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논문지도 신부님은 당신이 논문을 지도하시는 학생들과 함께 다른 신부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미사를 함께 드렸는데 성작과 성합이 매우 아름답고 값어치 있게 보였습니다. 저와 함께 간 그 신부님은 미사 도중에도 그 아름다운 성작의 문양을 손으로 만져보는 등 그 화려함에 경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 그 신부님은 저에게 “오늘 좋았지? 근데 내가 오늘 그 신부에게 사는 게 너무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충고를 해 주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난하게 사시는 그 신부님을 존경하면서도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신부님, 각자 삶의 방식이 있으니 당신이 가난하게 사신다고 남에게 뭐라고 하시면 안 돼요. 성인들이 다 가난했던 것은 아니잖아요.”
그랬더니 그 신부님이 “그럼 부자가 성인이 되냐?”라고 되묻기에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교황님들을 생각해 보세요. 많은 성인 교황님들이 계십니다. 그 분들은 가난하게 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분들이셨잖아요.”
그 신부님은 더 이상 저에게 말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납니다.
“가난한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부자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가난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이 좋다고 하여 가난하지 않은 것이 죄인 양 모든 사람에게 가난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중학교 때 청소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굴을 붉혀가면서까지 열심히 하지만 동시에 게으름 피우는 친구들을 나무랐습니다.
저는 그 때 자신이 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재정적으로 도와주었던 여인들도 나오고 베타니아에는 부자 친구들도 있으셨고, 그 중 어떤 여인은 수백만 원이 되는 향수를 예수님께 발라드리기 위해 깨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 여인을 나무라는 제자들보다는 그 여인을 오히려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덕을 실천하시되 남에게 강요하시지 않으시고 그 실천하는 것에서 만족하셨고 그런 삶을 강요하기보다는 ‘초대’하셨습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단식은 참 좋은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을 제어함으로써 영적인 능력을 극대화하게 만듭니다. 성경에 보더라도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함께 사용함으로써 단식이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자신들만 단식하면 되지 예수님과 제자들에게까지 그것을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심리 근저에는 자신들이 단식하기 때문에 더 올바르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행동양식이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어야 함에도 자신이 하니까 남들도 해야 한다는 식은 스스로 그렇게 행동하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떤 분을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간수치가 너무 높아서 수술을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도 수치는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약을 먹으면 몸에 좋을 것 같아서 병원에서 몰래 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약이라고 다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도 전에 마치 성인이 된 것처럼 저의 신앙생활을 강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고도 많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강요하지 맙시다.
내가 강요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그것으로 충분한 행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강요하지 않습니다. 초대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논쟁을 통해서, ‘새로운 때’가 도래했음을 선포하십니다. 곧 ‘신랑이 와 있는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태 9,)
이는 단식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새 시대가 왔기 때문입니다. 곧 새로운 시대의 단식은 달라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구약의 단식과 신약의 단식은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레위기> 16장 29-31절에 따라,구약의 속죄일을 지키기 위해 단식을 했습니다. 곧 잘못을 벗고 정결해지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심한 바리사이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1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은 그 “때”가 아님을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미 보았듯이 아무도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아무도 헌옷을 생배조각으로 깁지 않는다는 것이며, <셋째>는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이라고 부르십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을 신랑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부를 얻는 이는 신랑입니다.
신랑의 벗이 곁에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게 기뻐합니다.”(요한 3,29)
오늘,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6-17)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낡은 옷에다가 깁을 수 없는 새 천이며, 낡은 가죽 부대에 담을 수 없는 새 포도주에 비유하십니다.
이는 당신과 함께 새 시대가 도래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제는 단식의 의미도 달라진 것입니다. 새로운 단식, 곧 구약의 속죄와 정결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신랑이 떠나간 후에 있게 될 단식입니다.
이 말은 단식이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연결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이제부터 단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기억하며, 그 사랑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는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새 부대는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곧 새 포도주를 담을 변화된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새로운 삶 안에 우리의 새로운 생명과 사랑을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가 되게 하소서!
제 삶이 포도주 잔이 되게 하소서
술잔 가득 당신의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젖고 당신 향기 품게 하소서.
사랑의 웃음소리, 지저귀는 새소리로 번지게 하소서!
주님! 제 마음이 당신의 새 부대이오니, 사랑의 술을 부으소서!
제 삶이 당신 사랑의 잔이오니, 술잔 가득 사랑을 채우소서.
취해 기뻐 흥겨오리이다. 온통 젖어 당신 향기 품으오리이다.
축복과 기쁨, 생명과 진리를 담아 건네오리이다.
오늘, 저의 삶이 변화의 삶으로 화들짝 달구어지게 하소서!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를 읽으면서 인간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취하는 악과 그 악의 결과로 스스로 죄악과 벌로 헤매게 되는 모습 그리고 죄인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엿보게 됩니다.
아버지 이사악은 이 세상을 하직할 때가 되자 첫째 아들 에사우에게 장자상속권을 넘겨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에게 자신이 죽기 전에 들에 나가 평소에 좋아하던 고기를 잡아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를 예상한 어머니는 아버지가 원하는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다가, 첫째 아들이 짐승을 잡으러 간 사이에 둘째 아들 야곱을 에사우처럼 꾸며서 대신 음식을 들고 들어가게 합니다. 이를 모르는 아버지 이사악은 아내와 둘째 아들의 음모에 빠져 둘째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받을 상속과 축복을 해줌으로써, 야곱은 에사우가 받아야 할 장자상속권을 가로챕니다(창세 27,1-29 참조).
그러나 그로인하여 야곱은 형 에사우의 위협을 피해 외삼촌 집으로 피난을 가서 노예처럼 칠년을 두 번씩 살아야했고, 돌아오면서도 형 에사우에게 화해의 선물을 보내며 비위를 맞추다 간신히 돌아와 자리를 잡게 됩니다.
야곱과 에사오의 왕위 찬탈 사건과도 같은 이 사건을 바라보며,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좋은 길을 걸어가도록 안내해주시고 인도해 주시지만, 그 길을 온전히 걷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 길을 벗어나 죄악의 길을 걷는다 해도, 그 자체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인간 죄의 결과는 스스로 범죄함으로써 소속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과 시련이 벌로 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죄를 지었다고 떨쳐 버리거나 제외해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자신의 죄를 인해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겪게 되는 가운데에서도 함께해 주시며 지켜주시는 사랑 깊은 분이심을 깨닫게 해줍니다.
인간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시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시면서 함께해 주시며 지켜주시는 희망의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새롭게 거룩한 삶의 여정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최원석
술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술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소주 맥주 양주 청하 등의 술을 보면 무서움이 있습니다. 먹으면 다음에 무슨일이 있는지 모르고 그리고 먹고 난 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기가 무척어려운 술이지요 그래서 이런 종류의 술은 입에 대지도 않습니다. 그냥 지나처 버리고 말지요 ..그럼 어떤 종류의 술을 좋아하냐? 그것은 우리전통술인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막걸리에 김치 혹은 물김치 ..노가리 .. 멸치 ..두부 등과 함께 먹으면 속도 편하고 배도 좀 부르고 다음날 일어나도 별 불편함이 없어서 좋아요 .. 나이가 50가까이 되어서 그런지 소주같은 것은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술에 대한 말씀이 나와서 더욱 술생각이 나네요 아침인데도 불구하고요 ..술을 생각하면 취한다 이것이 먼저 떠오릅니다. 왜 취할까 ? 잊어버리고 싶은 것이 현실인가 봅니다. 그곳에서 잠시 벗어 났으면 혹은 술을 먹으로 기분이 좋아지고 그리고 잠시 생각을 않해도 되고 그리고 잠시 딴 세상에 가있는 기분이 들고 해서 술을 먹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소주 등과 같이 독한 술을 먹고 나면 나의 몸이 나를 주체할수 없을 정도로 되고 그래서 파생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술로서 끝나는 것이 아닌 더욱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술을 먹고 나서 잠시 잊는다고 잊어지는 것이 아닌것이 현실이지요 그래서 술은 술데로 먹고 사고는 사고 데로 행해야되는 것이 술이지요 그런데 왜 술을 먹고 사고를 치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이것일것 같아요.. 내가 다 해결할수 있어 그런 마음이 있다는것이지요 .. 어떤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요 ..내가 ..접근 방법도 묵상안에서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아닌 나는 손해 않보게 ..자기 합리화 ...그리고 나는 손해보는 것이 싫어서 거짓말도 하게 되고 끝이 없는 수렁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원인은 내가 해결할수 있다는 마음이지요 그러니 문제는 않풀리고 해결해보려하지만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피할수 있는 방법을 찾는것이 술이지요 .. 한도 끝도 없는 수렁 속에서 술은 술데로 또다른 일을 만들고 .. 진퇴양난입니다.. 그러면 어찌 ?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새로운 나? 주님과 함께 하는 나입니다.. 주님 말씀안에 머무르는 나 입니다. 고요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나 입니다.. 벌거 벗은 몸으로 나의 모든 허물을 보이고 그분의 자비 만이 나의 완전체를 이룰수 있다고 고백하는 나가 바로 새로운 나입니다 ..진정한 나이지요 ..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술? 그것은 주님과 함께하는 나 입니다.. 묵은 술은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과거의 술은 새로운 술과 같이 Mix되지 못하지요 왜 세상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주님에게 순종하고 주님에게 자신의 모든것을 보이겠어요 못보이지요 챙피하고 쪽팔려서 .. 그러나 빛의 자녀는 나의 허물을 기꺼이 보입니다 그리고 내어 맞기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님에게요 .. 인생의 트랙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 보았으면 합니다 ..나를 중시하여서 괴롭다고 밤에 술먹고 속 끌이고 죄는 죄데로 짓는지 한번 자신을 바라보아야 겠습니다.. 그길에서 빠져나올수 있는 길은 주님 주님입니다..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새술이지요 이 술은 먹어도 취해지지 않는 술이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새로운 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 보심이 좋을것 같습니다. 아멘
“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박미라 도미틸라
어제는 바리사이들이 제자들에게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하더니, 오늘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네요.
여기저기서 난리가 났습니다.
그야말로 6.25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네요.
스승도 치고, 제자도 치고...
자기들과는 하등 무슨 상관이 있다고들 여기저기서 몰려와서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들 할 일들이 없어서 그러는 건지 아님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겨서 신이 나서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무 일도 없는 듯 잔잔한 호수에 그분께서 아주 커다란 돌을 던지셨으니 어떻게 그 물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잘 섬기고 있다고 여기며, 으스대며 살고 있던 바리사이들을 제치고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
광야에서 낙타털 옷을 입고 들 꿀만 먹고 살던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융숭한 대접을 받는 그 제자들!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아니꼬웠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라고요.
신랑을 빼앗길 그 날이 어떤 날이겠습니까?
그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는 그 날이겠지요.
제가 갓 스물이 되었을 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니 정치인도, 부자도, 학자도, 예술가도, 이 세상 그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이 아닌 바로 하늘나라를 차지한 “성인들”이었습니다.
‘성인들이 누구일까?’ 생각해보니 “하느님을 알아 공경하며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살다간 사람”들이었지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생각해 보니 그것은 다름 아닌 트리텐티노 공의회에서 나온 옛 교리서 서문 첫 문항에 있는 대로
“문 :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낳느뇨?
답 :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낳느니라.“라는 말씀대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나를 만드신 목적”은 “당신께서 누리고 계신 온 행복을 내게도 나누어 주시기 위한 것”이었고요.
그래서 그분을 바라보려니 그분은 너무나도 높고,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밝아서 감히 바라볼 수조차 없었지요.
그런 그분께서 밝은 빛이신 당신께로 감히 나서지도 못하는 나를 위해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나더러 “내 제자가 되려면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그분의 제자"가 되고자 나서려고 하였지만 자신이 너무나도 더럽고 부족하기만 하여 감히 그분 앞에 나설 수조차 없는 처지이기에 제가 죄인임을 느끼는 그 때부터 제가 할 수 있는 아주 쉬운 일에서부터 "극기"와 "단식"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기 싫어서 미루고 또 미루며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을 때 할 수 없이 하던 설거지나 청소를 열심히 하고, 부모님께서 하시던 밭일도 틈틈이 도와드리고, 매일 매일 먹던 사탕이나 빵 등. 좋아하던 군것질을 줄이고 일부러 쓴 오이 꼭지를 먹으며 제 딴에는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너무나도 갑자기 무리를 하여 "극기"와 "단식"을 한 결과 계속 편하게 쉬기만 하던 육신이 놀랐는지, 그 해 5월에는 심한 급성 신장염에 걸려 단백뇨와 혈뇨로 인해 소변이 완전히 새까맣게 되고 몸이 뚱뚱 붓고 황달까지 와서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병은 9개월 동안 치료를 해서야 소변이 정상이 되었지만 4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만 피곤하면 몸이 붓게 하며 늘 제 몸 안에서 그 때의 일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전에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만을 바라보고 살 때에는 아무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남들이 얻으려고 애를 쓰는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기에 아주 좋다고 하는 사람들의 2배도 더 되는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학교 다닐 때에 한 번도 "1 등"을 해본 적도 없고, 중학교 입학시험에도 떨어지고, 심지어는 고등학교 입학시험 날짜를 잊어버려 시험도 안보고 실업계인 상업학교에 들어갔으며, 대학 입학시험은커녕 예비고사에서도 떨어지고, 상업학교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취직을 해보려는 마음조차도 갖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참 행복", "나의 목적", "완전한 사람", "성인"이라는 새로운 흥밋거리 앞에서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 이 되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사고와는 반대되는 '새로운 사고' 를 갖게 되었으며, 이전의 행동과는 반대되는 '새로운 행동' 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분과 맞지 않는 그분과 함께 할 수 없는 더러움을 없애기 위해 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 가 12처에서 완전히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단식”을 하였습니다.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서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울님들 모두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서 영원히 먹고 마시며 즐기는 그런 사람 되시기를 바라며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인사를 올립니다.
오늘도 우리와 늘 함께 하시고자 하시는 주님 안에서 참으로 행복한 날 되세요~~^^*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마태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누군지를 다시
묻게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향하고
새 부대는 또한
새 포도주를
갈망합니다.
새 부대는
새 포도주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됩니다.
새로운
정체성이란
복음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부대인 우리들은
더 나은 삶을
살게됩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합니다.
새 부대에겐
새 포도주가
모든 것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됩니다.
새 부대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투신과 희생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를 결코
소외시키지
않으십니다.
삶의 축제
참된 행복은
우리가 기꺼이
새 부대가 될 때
더욱 충만해질
것입니다.
나와 너라는
관계안에
필요한 분은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방향이
예수님을 향하는
새로운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저희 집에는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린 저였고, 그래서 피아노를 장난감처럼 생각하면서 무턱대고 건반을 누르면서 아무 노래나 신나게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분께서 제 손가락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너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손은 아니구나.”
이 말씀이 당시 제 머릿속에 확실하게 각인이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피아노를 배우고는 싶었지만 이 말이 떠올리면서 ‘나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수가 없어.’라는 생각으로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저는 지금 피아노를 전혀 다루지 못합니다.
몇년 전 텔레비전 방송을 보다가 한 피아니스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의 첫 모습에 ‘피아니스트일까?’라는 의구심이 저절로 들었지요. 왜냐하면 그에게는 피아노 건반을 누를 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손이 아닌 발가락으로 대신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아름다운 연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손가락이 짧아서 피아노를 잘 칠 수 없다고 포기했는데, 누구는 손이 없음에도 발이 있다면서 피아노로 아름다운 연주를 전해 줍니다.
이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할 수 없다는 고정관념으로 일찌감치 포기했던 제 모습을 많이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안에서 이런 고정관념을 내세워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깨닫게 됩니다. 사실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이유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 할 수 없는 이유들을 내세워서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갔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시대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받아들임으로 인해 자신들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율법 체제 전부를 부정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헌 옷과 헌 가죽부대로 상징되는 과거의 율법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당신의 말씀을 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새로운 삶,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향해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지 못합니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지요. 율법을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이유들을 내세워서 반대로 주님을 버리고 부정하는 이유들을 찾게 된 것입니다.
새 천 조각과 새 포도주로 비유될 수 있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열려있는 새로운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실천도 어떤 상황에서도 가능하게 됩니다.
남을 돕는다고 하면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남을 도울 때 가장 덕을 보는 것은 자기 자신이고, 최고의 행복을 얻는 것도 자신이다(달라이 라마).
올바른 판단을 위해...
달팽이가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참 빠르지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아니, 달팽이가 뭐가 빨라요? 너무나도 느리죠.”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지상에 사는 연체동물 중에서 가장 빠른 동물이 바로 달팽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비록 시속 0.03마일에 불과하지만, 연체동물 중에서는 제일 빠른 속도를 자랑한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달팽이를 느리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바로 빠른 속도를 내는 다른 동물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판단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스스로 내린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판단을 그 대상의 입장에 맞춰서 해 보십시오. 훨씬 더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정관념은 나의 기준에서 나온 판단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준에서 나온 판단이라면 어떨까요? 그것은 사랑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형이 둘 있고, 여 동생이 한명 있습니다. 어릴 때는 형들이 부러웠습니다. 큰 형은 장남이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글쓰기, 미술,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넉넉했다면 예술분야에서 공부를 했을 것 같았습니다. 둘째 형은 키가 크고, 운동 신경이 좋았습니다. 달리기도 잘 했고, 옷을 입으면 잘 어울렸습니다. 아무래도 옷걸이가 좋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여동생은 당연히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막내이면서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들은 딸들을 예뻐하시기 마련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들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큰 형이 신학교에 갈 수도 있었고, 운동 신경이 좋고, 키가 컸던 작은 형이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예술적 능력도 별로 없고, 신체적인 조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저를 택하셨습니다. 이것 또한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 내세울 것이 없는 저를 여러 곳에서 일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목 국에서는 교육담당 업무를 했었습니다. 해외 연수도 다녀 올 수 있도록 배려를 해 주셨습니다. 본당 신부로 사목을 할 수 있게도 해 주셨습니다. 청소년 국에서는 수련장 관리를 했었습니다. 지금은 교구의 성소 국에서 사제성소를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봐도 참 놀라운 일입니다. 단 한 번도 제가 원한 일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자동차의 스페어타이어처럼 어딘가 상황이 벌어지면 제가 가는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어타이어는 언제나 차 트렁크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못하고 지내는데, 밖으로 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릇이 그릇을 만드는 사람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처럼, 내 영혼을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도 단식을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니 여러분들에게 더욱 큰 시련과 아픔, 박해의 상황이 올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따르십시오.’
제가 좋아하는 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
저에게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함을 주십시오.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주말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믿음이 답答이다. -믿음의 여정-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이 답입니다. 오늘 말씀 묵상 중 떠오른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지금까지 창세기에 나온 아브라함의 인생을 봐도 믿음이 답임을 깨닫지만 오늘 창세기 1독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사랑만 답이 아니라 믿음도 답입니다. 믿음은 빛입니다. 믿음은 앎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둠이요 믿음이 없으면 알 수 없습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지만 반대로 믿어야 알 수 있습니다.
조훈현 국수의 고백입니다.
'바둑이 내게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집중하여 생각하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
이런 집중된 생각은 거의 믿음에 견줄만합니다. 우리 식으로 바꾸면, '하느님이 내게 가르쳐 준 바에 따르면 세상에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는 것이다. 간절한 믿음만 있으면 반드시 답이 보인다.‘
믿음은 빛입니다. 믿음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발광체와, 형광체와도 같습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 같지만 하느님의 빛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믿음은 하느님의 빛입니다. 내면의 어둠을, 우리 인생사의 어둠을 환히 밝혀 주어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하느님의 빛, 믿음입니다. 이런 진리를 평범한 사실에서도 순간 깨달았습니다.
우리 요셉수도원의 숙소 내부는 밤에 불을 꺼면 칠흑같은 어둠이라 화장실이나 샤우어 장에 갈 때 등 조심조심 걷지 않으면 모서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벽에 부딛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빠코미오 원장수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로 중요한 부위나 모서리의 선따라 긴 형광테이프 스티카를 붙혀 놨기에 캄캄한 어둠 중에도 뚜렷이 빛나는 윤곽의 선으로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아, 바로 믿음은 이와 같습니다. 어둠을 밝히어 삶의 윤곽을, 삶의 의미를 계시해 주는 하느님의 빛,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빛이 사라지면 삶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의미無意味의 어둔 심연深淵이 되어 버립니다.
믿음은 장구한 인내의 기다림입니다. 하느님의 깊고 넓고 긴 시야를 닮아감입니다. 오늘 창세기 27장만을 읽으며 묵상하다보면 이사악을 속여 에사우의 복을 가로챈 레베카와 야곱 모자의 공모共謀에, 너무 교활하고 야비한 처사에 분개하게 됩니다. 어찌 자기가 낳은 장자 에사우를 그렇게 따돌릴 수 있는가 레베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게 되고 반면 에사우의 단순한 성격을 동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이전 창세기 25장에 장자의 상속권을 아우 야곱에게 팔아 넘긴 에사우의 어리석고 경솔한 일화가 나옵니다. 야곱이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얼마나 집요하고 적극적인 성격인가를 알게 됩니다.
믿음의 눈만이, 믿음의 빛만이 이런 하느님 활동의 신비를 깨닫게 합니다. 전체를 보는 시야를 지니게 합니다. 값싼 축복은 없습니다. 야곱은 이사악을 속여 복을 가로챘지만 하느님은 그대로 놔두지 않습니다. 혹독한 시련과 고난의 수련과정을 통해 그가 이사악을 속인 대가를 치르게 함과 동시에 야곱을 정화시킵니다. 창세기 27장 38절의 묘사를 들어 보십시오.
'그러자 에사우는 거듭 애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빌어 주실 복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아버지! 저에게도 복을 빌어 주십시오." 입을 다문채 말이 없는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는 목놓아 울었다.‘
이런 상황 앞에서는 이사악은 물론, 전지전능한 하느님도 속수무책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운명의 짐을 지고 가야 할 에사우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이런 상황을 좌시하지 않습니다. 하여 다시 창세기 33장에서 에사우 형과의 재회가 이루어지기까지 이후 28-32장까지 5장에 걸쳐 펼쳐지는 야곱의 파란만장한 고난의 여정, 수련기입니다. 그대로 야곱의 믿음이 정화되어 가는 믿음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이 수련장이라면 수련자 야곱입니다.
믿음의 빛으로 봐야 오늘 복음의 진리도 밝게 해명됩니다. 예수님께 와서 단식의 문제로 시비를 거는 요한의 제자들은 스스로 믿음 부족을 보여 줍니다. 관행의 고정된 틀에 사로잡힌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도대체 하느님 눈으로 전체를 보는 믿음의 시야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적하는바는 단식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려야 하늘나라의 기쁨입니다. 단식 자체의 부정이 아니라 단식의 때를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하여 이들에게 결론 같은 말씀으로 복음을 매듭짓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늘 새 포도주의 상황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살아있는 믿음의 새 부대를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늘 쇄신되어 새로워져야 할 믿음임을, 끊임없이 공부해야 하는 믿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시어 믿음의 새 부대에 새 날의 새 포도주를 담게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찬양과 찬미보다 믿음에 좋은 식食과 약藥은 없습니다.
"주님을 찬양하여라, 좋으신 주님. 찬미 노래 불러라."(시편135,3).
미래지향적인 삶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과거, 현재, 미래가 다 중요하지만 과거의 허물이 또는 옛 생각이 오늘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더 나은 내일을 향하기 위해서는 오늘에 충직해야 하고, 오늘에 충실 한다는 것은 희망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만큼 오늘의 기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옛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오늘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마음 써야 하는 것입니다. 껍데기에 치중한 삶이었다면 알맹이를 찾으라는 권고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왜 스승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사실 단식은 그저 맹목적으로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것은 밥을 굶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식할 합당할 이유가 있어서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을 한다고 자랑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면 그분과 함께 기쁨을 나누면 되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잔칫집에서는 함께 웃고 축하하는 것이요, 상가에서는 함께 울고 슬픔을 나누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기고, 새 삶의 시작을 위해서, 회개와 보속의 삶을 살기 위해서, 이웃과의 나눔을 위해서라면 단식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식을 통해 새 생활의 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에페4,22-23).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흔히 말하는 다이어트와는 분명 다릅니다. 단식의 정신은 주님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합니다. 미래를 지향하는 풍요로운 마음으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살다보면 우리는 위아래를 따지고 사람된 도리를 따집니다.
그리고 그에 벗어나는 일에 대해선 분노와 열불을 터트리기도 합니다.
어찌 그럴 수 있냐고요!
하느님께서는 이사악의 진짜 장자 에사오가 아니라 속임수의 달인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아니 어찌 그러실 수가 있지요?
때론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인정받고 나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지금 더 부자가 되어누리고 살고 있습니다.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약은 사람이 더 성공하고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선택과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분의 심오한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다른 사람이 축복을 받게 되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여기고 축하해 줍시다.
나에게는 사실 그보다 더 큰 축복, 성령의 축복,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축복 등을 이미 베풀어주셨음에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시다.
오늘
다른 사람이 받는 축복을 축하해주고 내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는 날 되시길 빕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모든 사랑의 관계는
저마다의 생명에서
시작됩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이 모두가
둘 다 보존되기
위해서는
사랑의 관계로
이어져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는
온전히 서로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이렇듯
새 포도주를 담는 것에서
더욱 확실해집니다.
새 포도주는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랑의 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는
더더욱 신앙인의
정체성을 깊게 하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담을 때
새 부대인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새 부대는
결박이 아니라
우리의 고유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생생히 현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안에
새롭게 적용시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거듭하여 반복되는
심리적인 왜곡을
멈추게 하는 건
새 포도주를
알고 받아들이는
결단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신
새 포도주이신
그리스도를 잊지 않는
사랑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새 포도주를 닮는
기쁨안에서
진정한 사랑은
이루어 집니다.
사랑의 본질은
새 포도주를 신뢰하는
사랑의 참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가
있는 곳에
새 부대도 있습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새 포도주를 담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십시오.
새 포도주는
새 부대를
간절히 원합니다.
새 부대의
오늘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단식의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생명의 진정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또한
주님이십니다.
모든 가치는
주님과 함께 합니다.
익숙해져가는 삶이 아니라
비우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신랑이신 주님을
바라보기에도
턱없이 짧은 시간입니다.
단식과 피정은
예수님을 바라보기위해
우리의 아집과 욕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빼앗긴 것이
신랑이신 예수님임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단식은 판단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입니다.
깨어나야 새로워질 수 있으며
새로워져야 기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으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새 것이 됩니다.
마음의 단식은
참된 신앙인의 길입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소유와 집착의 시간이
단순해지는 기쁨의
시간이기를 기도드립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모두
충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담고 보존하는
하루 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 답은 ‘나’랍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두 글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또 나’랍니다.
그러면 세 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역시 나’랍니다.
이번에는 네 자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그래도 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다섯 자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다시 봐도 나’라고 하네요.
맞습니까?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가장 이쁜 사람이 맞나요? 글쎄요. 거울을 비춰진 저를 보면 그렇게 이쁜 것 같지 않던데, 그래도 가장 귀하게 생각되는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바로 ‘나’겠지요. 이렇게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자신의 판단을 기준 삼아, 그 기준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단죄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하고 이쁜 ‘나’이지만 꼭 옳게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진리 그 자체를 따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박박 우겨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길을 쫓는 지혜로운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진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들을 쫓고 있으며, 자기라는 틀 속에 갇혀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한 것인 듯 착각 속에 빠집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요.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단식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식 자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습관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기라는 틀에 갇혀서 나는 옳고 남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떤 목적 없이 행동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넓은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스피노자).
행복의 항아리(‘좋은 글’ 중에서)
뚜껑이 없습니다.
울타리도 없으며 주인도 없습니다.
부족한 사람은 가지고 가고
넉넉한 사람은 채워 주기에
한 번도 비워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대 행복이 넘친다면
살짝이 채워주고 가십시오.
당신의 배려에...
희망을 얻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대의 행복이 부족하다면
빈 가슴을 담아 가십시오
당신의 웃음을 보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오늘 나에게 조금 남은 것은
삶과 사랑의 희망입니다.
나는 아주 조금만 채워두고 갑니다.
오늘 삶과 사랑에 힘겨웠던 것은
한 사람이 내일, 아니면 그 훗날에
다시 행복의 항아리를 채워줄 것입니다.
성령께 주도권을
성시자 수녀님
2001 년 4월,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중년기 평생 양성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하느님 사랑의 태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던 은혜로운 순간이 떠오른다. 늘 사도직 소임에 분주했던 나한테 한 달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은총이 주어졌다. 때는 춘 사월! 명상의 집에 도착했을 때 벚꽃이 몽우리를 맺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야무지게 계획을 세웠다. ‘성경을 다 읽고 나가리라.’ 그리하여 틈만 나면 방에 박혀 성경 읽기에 바빴다. 사흘이 지난 뒤 밖에 나갔을 때 벚꽃은 만개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벚꽃 속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난 화들짝 놀라 둘러보았다. 하지만 만개한 벚꽃만이 있을 뿐 ….
그랬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난 아직 새 부대가 아닌 헌 부대에 묵은 자신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15개의 남녀 수도회에서 20여 명의 수도자들이 참여했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난 나의 계획 속에 갇혀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벚꽃을 통해 나를 찾아와 주신 주님의 은총 덕분에 나 자신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하느님 사랑의 태 안에서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난 새 부대가 되었고, 새 포도주로 채우며, 주님의 성령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 가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성령께서 내적 영혼을 이끄시도록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 날마다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음을 다시금 깊이 새기며, 새 포도주를 담고 내적 영혼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은혜로 축복해 주시길 청한다.
새로운 복음 정신
홍금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과 새것과 헌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절어(토막 말씀)입니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했고,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는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혼인잔치를 예로 듭니다.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시대야말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 하십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는 새것과 헌것의 단절어가 나옵니다.
새것은 강하고 헌것은 약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복음 정신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상징어의 뜻은 예수님의 복음은 새로운 것이므로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이스라엘의 협소한 종교적 관념과 형식에다 맞추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은 기존의 개념에 맞는 것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정보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가 훨씬 힘든 과정인데, 힘들지만 새로운 진리 앞에서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인격 성숙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강석진 신부님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 단식이라 ! 그래요 , 구약에서 비롯하여 예수님 시대에서까지 단식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종교적인 중요한 의식의 하나였고 , 교회 역사 안에서도 많은 수덕자가 단식으로 정신을 가다듬었으며 ,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는 단식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식을 그다지 강요하거나 강조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걱정하며 찾아왔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결국은 제자들에게 단식 교육을 시키지 않는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겁니다.
아무튼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이든 다른 그 어떤 주제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신랑’과 함께 있는 기쁨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식의 주체로서 ‘신랑’이신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현존 체험을 과연 일상 안에서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를 계산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그 기쁨이 가장 우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의 기쁨을 맛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나한테서 그 기쁨의 원천인 ‘신랑’을 빼앗아 가는 실체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의 원천인 ‘신랑’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그분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에 분명한 경계를 할 수 있고 또 만일 그분을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빼앗길 때, 그때는 단식,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며, 진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랑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늘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삶의 기쁨이신 ‘신랑’ 예수님을 당신은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본질과 비본질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최윤영의 'W'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필리핀 여성들의 낙태 실태에 대해 자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피임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피임과 낙태를 반대하고 법적으로도 낙태는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한 해에 약 5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불법 시술소에서 낙태 수술을 하고 약 4,500명이 불건전한 시술로 사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닐라의 키아포 시장에선 우리나라 돈 7,000원이면 사는 검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낙태약이 유통되고 있었고 학생이나 가난한 여성들은 이 약을 목숨을 걸고 복용하여 낙태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 때문에 국회는 국가 차원에서 피임약을 보급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종교 차원에서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어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입장에선 부부관계란 자녀출산의 의도가 있어야하는데 피임을 하면 부부관계가 그저 자신들의 육욕을 채우는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에게 이런 상황에서 신부님은 어떤 답을 주실 건지 묻는다면, 저는 신부로서는 피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겠지만,한 인간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수많은 태아들과 여성들이 죽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임약을 공급하는 편이 죄를 덜 짓게 하는 것일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박해가 끝난 지금은 다시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런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지금처럼 절제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시적으로 교회가 한 발 물러서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작은 구멍 때문에 온 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피임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악이란 것이 있듯이 현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십니다. 아마 당시에 단식이란 것이 신앙생활의 커다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것으로 예수님을 공박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라고 하시며 당신이 영원한 신랑이심을 천명하는 동시에 모든 법이 모든 상황 속에서 똑 같이 적용될 수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시며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혼인잔치에서 함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단식을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듯이 모든 법이 모든 상황에서 유익하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사람은 4년이면 모든 세포들이 다 바뀐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4년 전의 내 모습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내가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비록 몸은 새롭게 태어나지만 바뀌지 않는 나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시대에 맞게, 물론 그것도 너무 늦은 것이긴 하였지만, 미사의 언어를 각 나라말로 할 수 있게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라틴어 미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뀌어도 되는 것을 그것이 바뀌지 말아야 되는 무엇인양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뀌어도 되는 것과 절대 바뀌지 말아야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 율법주의자가 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여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같이, 하느님과 관련된 것, 즉 사랑, 진리, 선 등은 변하지 말아야하는 것이고 그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 속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헌 옷은 헌 천 조각으로 깁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새 부대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개혁은 여간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성공을 하려면 혁명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개혁, 쇄신은 기존의 인물을 가지고 제도를 바꾸려고 한다면 혁명은 새로운 제도에 반대되는 기존의 인물은 다 제거한 다음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므로 개혁과 쇄신이 어렵다 함은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고 사람을 그대로 두고 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실 길들여진 작은 것 하나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맺어온 인간관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편견과 선입관 하나 깨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습관 하나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념은 더욱 깨기 어렵습니다.
과거 때문에 미래를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큽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머리의 저항도 크지만 머리로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도 의지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의지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해도 몸이 거부하거나 습관이 거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새 부대가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담으려면 기존의 것을 적당히 보수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완전히 새 부대가 되라고 하십니다.
"낡은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책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마 전까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왕건"에 "책사"란 직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주로 하는 일은 왕의 최측근에 머무르면서 왕의 정책을 보좌하는 일이었습니다. 군사 기밀이나 적국의 동향, 정보들을 입수해서 나름대로 종합한 다음 왕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왕이 곤란한 입장에 놓여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아주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자마자 왕건의 책사는 이런 조언을 왕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폐하! 새로운 정권에 도움이 되고 협력할만한 사람들은 최대한 끌어안는 융화정책을 펴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제국 건설에 걸림돌이 될만한 인물들은 본인은 물론이고 그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멸하십시오."
한 마디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큰 새로움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도 엄청난 진리, 색다른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은 구약의 가르침을 몇 천 배나 능가하는 새로운 진리였기에 크게 비우지 않으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그분을 보다 적극적이고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님과 세상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아쉽고 아까운 나머지 과감하게 내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우리가 지녀왔었던 빛 바랜 가치관들, 내 주관에 따른 행동양식, 내 위주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우리를 계속 지배하는 한 너무도 크나큰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수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삶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벽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제의를 입으면서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대 위에서 믿음의 벗들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벗들도 인사를 합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
참으로 고마운 시간들입니다. 새로운 하루가 그렇고, 이 하루를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믿음의 벗들과 함께 시작하는 미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소중한 이 시간들을 자주 아무 느낌없이 맞아들였습니다. 아쉽게도 말입니다.
오늘 아침,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이 느낌을 다시 가져봅니다. 그래서 더욱 기분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새벽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하늘을 봅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마치도 가을 하늘과 같습니다. 며칠 동안 무더위에 지친 심신에 맑고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어줍니다.
방으로 돌아와 복음을 다시 읽어봅니다. 미사를 준비하면서 어제밤에 읽고 묵상할 때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아침 새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 동안 잊어왔던 느낌을 되찾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음을 알게됩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말이지요.
어찌보면 하느님은 선물은 바로 '오늘' 뿐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뿐입니다.
어찌보면 제가 살고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 뿐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뿐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새 하루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멋지게 다듬고 가꾸는 것은 저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이 선물은 아직 하얀 종이입니다. 이 하얀 종이 위에 오늘 하루 저의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멋지게 수를 놓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실 그림으로, 사랑하는 이웃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그림으로 오늘 하루를 채우고 싶습니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의 기쁨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의 어두움이 오늘의 밝음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의 밝음이 오늘의 어두움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이런 사람들... 얄밉지 않을까요?
1. 피골이 상접해 있는 환자 곁에서 육체미 운동을 해서 불어난 알통 자랑하는 문병자.
2. 열등감에 사로잡힌 삼수생 앞에서, 사진이 잘 나왔다면서 학생증을 보여주는 대학생.
3. 대머리에게 고성능 광택제를 선물하면서, 적합한 물건 고르느라 몇 시간을 고생했다면서 너스레 떠는 친구.
4. 상사가 이혼한 줄 뻔히 알면서 비아그라를 선물하며 효능을 설명하는 부하직원.
5. 초상집에서 들려오는 문상객의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라는 휴대전화 호출음.
6. 소극장에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데 외치는 꼬마의 목소리 “아빠, 쉬마려.”
생각해보면 얄미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얄미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주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습니까?
이렇게 얄미운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얄미운 모습이 일반적인 내 모습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이렇게 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얄미운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다가선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천 조각은 새 옷에’ 그리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바로 자신의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고정관념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얄미운 모습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충고’라는 글인데, 우리의 삶을 다시금 반성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 한번 만난 상대방이라도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라.
2. 상대방이 부담을 갖지 아나하도록 배려하라.
3.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
4.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포근함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라.
5. 당신을 만나면 늘 무언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 되라.
6. 오해를 하지 말도록 또 풀지 않도록 하라.
7. 사람들을 좋아해라.
8. 축하의 말과 위로의 말을 놓치지 말라.
9. 친구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되라.
10. 늘 섬기는 마음을 가지라.
다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충고를 기억합시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났다(레프 톨스토이)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우듯
사랑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두려울 것도 더 바랄 것도 없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된다.
열매가 자라기 시작하면 꽃잎이 떨어진다.
영혼이 자라기 시작하면
우리의 약한 모습도
그 꽃잎처럼 모두 사라진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 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진정한 스승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사랑' 이라고 가르친다.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인천교구 신부님들께 전체 메일을 보낸 적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는 아니고, 건물 매입을 위해서 책을 만들어서 팔고 있으니까 신부님들의 많은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글이었지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이러한 제목의 메일이 한통 제게 날아왔습니다.
“[회신] 우리 본당에 10,000권 신청합니다..”
아니 이렇게 기쁠 때가……. 그런데 어느 본당이길래 10,000권씩이나 청할까 싶었지요. 그래서 발신자 이름을 보는 순간, 실망이 밀려들더군요. 발신자 이름은…….
“단도리 신부”
맞습니다. 지금 교구청에 있는 제 동창 신부로 장난 메일을 보낸 것이지요. 내용을 보니 이렇게 적혀 있네요.
“하하하... 이런 메일 받으면 얼마나 좋겠냐^^; 수고해라.. <중략> 하여간에 여러 본당으로부터 수만 권의 신청으로 받기를 바라며..”
좋다 말았습니다. 그런데 실망했기보다는 이 장난 메일을 통해서 잠깐 동안이라도 긴장과 함께 조그마한 기쁨을 간직하게 되네요.
사실 우리들은 크고 화려한 곳에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내가 미소를 지을 수 있고, 흐뭇한 즐거움을 간직했던 적은 오히려 작고 소박한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크고 화려한 곳만을 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욕심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과 계속해서 비교했으며,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그리고 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욕심만 가득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어쩌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방송을 통해서 소개되는 사람 중에서 존경의 대상이 과연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돈 많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단순히 부러움의 대상일 뿐, 결코 존경과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낮추면서 작은 것에 의미를 두면서 봉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존경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크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욕심에서 벗어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새 천 조각을 새 옷에 꿰매듯이 그리고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담듯이, 우리들도 주님으로 인해서 새로운 마음을 갖고 주님 뜻에 맞는 새로운 행동의 실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자기가 느낀 행복을 서로서로에게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가 되겠죠?
작은 곳에 숨겨 있는 의미를 발견해보세요.
함께하는 자리('좋은 글'중에서)
마음이 따뜻한 자리, 행복 가득한 자리,
기분 좋은 자리, 유쾌한 자리, 행복한 자리,
가슴 아픈 자리, 이별의 자리, 고독의 자리,
눈물의 자리, 통곡의 자리, 무의미한 자리
많은 자리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많은 자리 중에
맛있는 자리를 생각해 봅니다.
좋은 사람들의 만남이 늘 기다려집니다
커피 한잔으로도 충분합니다.
서로 나눔이 가득하면 더욱 좋은 자리이며
그저 바라만 보아도 좋은 자리면 만족합니다.
좋은 자리란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도
나의 니즈를 충족할 동기나 이유도 없습니다.
그냥 만나서 좋고 바라만 보아도
좋은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으로도
그냥 좋은 자리입니다.
가장 기분 좋은 자리는
내가 상대에게 작은 손을
먼저 내밀고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오늘을 사는 자세
장경선 수사님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늘을 사는 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두어라.
오늘 하루의 수고는 오늘로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낡아버린 상태로 전락하고 고통스럽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오늘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긴다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이 온갖 과거로 얽혀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옛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순간에 끊임없이 은총의 선물을 부어주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냥 흘려보냅니다. 이제,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지금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의 선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깨어 있는 영혼이 되어보세요.
그러할 때 분명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일을 손수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인간의 선입견, 신앙의 편견
송동림 신부님
지난 겨울 방학 때 고향인 제주도에 갔다가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밤늦게 약 한 시간 거리를 가야 했는데, 기사의 첫인상이 매우 험하게 느껴졌습니다. 문을 열고 탈 때부터 친절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표정도 굳어 있고,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말투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괜히 긴장되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의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대에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서 40일 가까이 입원했으며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얼굴 근육이 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재활치료를 하면서 지금은 큰 불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고, 언어장애도 조금 있어 보였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나마 선입견을 가졌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라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단식을 하는 날 단식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종교 안에서 지켜야 할 여러 규범이 있는데, 전통적인 관습을 어기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적인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과 같이 믿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지 않기에 틀렸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형식에 관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식은 전통을 만들고 전통은 종종 신앙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형식적인 전통에 매여 신앙의 본질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은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획일적인 형식을 갖추고 당신에게 예배하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전통이나 형식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본질적인 전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이시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 멸시받는 사람과 존경받는 사람 등 모두가 외형적 삶의 모습에 구애됨 없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전통이나 관습적인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하는데, 편견 중에 가장 무서운 편견은 신앙적 편견이라고 봅니다.
2주 동안 계속되었던 갑곶성지 경당 공사가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천장 칠을 새롭게 했고, 경당 마루에는 보일러를 설치해서 겨울에도 따뜻하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닥에는 타일을 깔아서 전보다 훨씬 깨끗한 경당으로 변신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밖으로 빼놓았던 짐들이 모두 다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일들이 모두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새롭게 단장한 경당에서 미사하기가 한동안은 힘들 것 같습니다. 즉, 일주일 이상은 요즘 계속해서 미사하는 장소인 야외 갑곶 쉼터를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눈으로 보이는 커다란 공사가 다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경당을 이용하지 못하고 밖에서 미사를 해야 할까요?
바로 냄새 때문입니다. 지금 경당에 들어가면 페인트 냄새로 인해서 오랫동안 안에 있기가 힘들답니다. 물론 계속해서 냄새를 빼고 있지만, 이 냄새가 곧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안에서 미사하기가 힘들 것 같더군요.
냄새라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냄새를 맡기만 해도, 미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견디기 힘든 냄새, 그리고 눈까지 심하게 매우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몸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눈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요?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또한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는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모두가 아닙니다. 벌건 대낮에 떠있는 태양도 보지 못하고, 내 뒷모습도 보지 못하며,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족한 ‘본다’라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의지하고 있었는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의 벽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의도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복음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십니다.
만약 헌 부대 자루가 아깝다고,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었다가 터져 버릴 수도 있다고 하시지요. 이처럼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의 구태의연한 마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으로 내 이웃과 주님을 판단했던 잘못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새롭게 다가오는 새 포도주 같은 주님을, 새 부대와 같은 내 마음 안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권규학)
세상의 풀들이 아무리 곱다 한들
세상의 꽃들이 아무리 아름답다 한들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를 수는 없습니다.
도화 매화 두견화가 아름답다 하지만
옹알옹알 방글방글, 해맑게 웃는
아이의 배냇웃음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산기슭 철쭉, 아카시아 꽃이 아름답다 뽐내어도
깔깔깔 똘망똘망, 청순한 표정짓는
소년소녀의 맑은 미소에는 비길 바가 못 됩니다
세상의 숱한 풀꽃이 저마다 아름답다 자랑해도
아이가 청년 되고 어른 되어 가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따라잡진 못합니다
산과 들과 강과 바다
풀과 꽃과 나무와 물고기를 사랑하며
마음에 세상을 담아 포용할 줄 아는
진정 꽃보다 아름다운 건 사람입니다.
이제 일주일간의 피정을 마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도 피정 기간 동안 계속 비가 내려서 순례객도 별로 없었고, 또 특별한 일도 발생하지 않았더군요. 비로 인해서 곳곳에 흙이 쓸려 내려간 것을 빼고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없어서 그런지 키우고 있는 강아지들이 힘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활달하던 강아지들이 저를 보고도 반가워하지도 않고 그냥 자기 집에 있는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보니까 강아지도 우울증이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힘이 없어 보이는 이 강아지들을 데리고 성지를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풀어 주니 확실히 다시 예전의 명랑함으로 돌아가더군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글쎄……. 아무데나 일을 보는 것입니다. 길에다가 또 잔디밭에다가 일을 보느라 저는 그것을 치우는데 또 정신없이 돌아다녀야만 했습니다. 사실 조금 짜증은 나더군요. 제가 굳이 치우지 않아도 되는 장소인 풀밭 같은 곳에다가 응아를 하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하지만 ‘동물이니까’라는 생각을 가지고서 치워주었지요.
만약 제가 아무데나 응아를 봤다고 마구 혼내면 어떨까요? 훈련을 시키면 가능 하다고도 하지만, 굳이 이 강아지들을 훈련시키면서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는 않더군요. 더군다나 하루에 3-4차례 정도만 풀어서 산책을 시키니까요. 그런데 문득 엉뚱한 상상을 해봅니다.
이 강아지들이 ‘주인에게 이렇게 고생시키면 안돼. 이제 오늘부터 화장실에서 일을 보자.’라면서 화장실 변기에 올라가서 응아를 본 뒤에 물까지 내리는 영리함을 보인다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사람처럼 뒤처리를 위해 화장지까지 쓴다면? 제가 키우는 강아지들이 그렇게 한다면 더 이상 키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은 강아지의 본 모습이 아니니까요.
본모습을 보여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갓 태어난 아기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문제일까요? 아니지요. 오히려 가리는 것이 더 큰 문제지요.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일을 보는 것이 아기들에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인데, 우리들은 특별한 모습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늘 특별한 모습, 즉 남보다 더 위에 올라가는 모습을 지향하지요. 그러다보니 이 세상에서 모든 이가 나의 경쟁자로 보이면서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복음에는 단식의 선수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회개와 속죄의 표시인 단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은 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남들이 열심한 자신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봐주기를 원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존경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면서 꾸짖지요. 왜 그러셨을까요?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이웃을 위한 희생, 그리고 나눔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지 않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희생과 나눔이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낡아버린 가죽 부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낡아빠진 가죽 부대에 새롭게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새 가죽 부대를 장만해서 매 순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혼내지 맙시다.
'내 영혼의 비타민' 중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참으로 공평해서,
당신이 한 사람을 도와주면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한 사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당신이 세 사람을 도와주었다면
당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세 사람 나타납니다.
따라서 당신이 한 사람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당신을 도와줄 사람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줄 사람을
만나는 방법은 참으로 간단해요.
당신이 누군가를 도와주기만 하면 되니까요.
다른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을 도와주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정희 수녀님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14-15절)과 두 가지 비유 말씀(16-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중심에 두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는 분이심을 알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새 천 조각’, ‘새 포도주’, ‘헌 옷, 헌 가죽부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이에 맞갖은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생활 습성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 하겠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무마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도전장을 한겨레신문(2006년 5월 6일)에서 읽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는데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할까 생각해 보니 이란 대통령의 앞뒤 안 가리는 ‘모험심’이 부러웠던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도 이런 모험심과 단순함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삶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주님의 초대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가?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정호 신부님
이천년 전,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래서 수없는 제사와 단식을 반복하며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바라보며 하느님을 믿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도 달라보였습니다.
같은 하느님이시나 예수님의 하느님은 말에만 머물던 사랑이 눈 앞에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넓게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던 부족해보이기만 하는 제자들에게도 자유로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쁜 삶에서 삶을 멈추고 단식으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릴 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삶을 계속하며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쉬지 않는 이들, 특히 자격없는 듯 보이는 단식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과연 저 사람들이 하느님께 마음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과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으로 화살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새술은 새부대에로 통하는 유명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 제자들은 그 때가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십니다.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깊은 표현이고 그 단식을 통해 생긴 정성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제자들과 함께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들 속에 단식에 깃들여 있는 의미를 보여주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결론은 둘 다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한결같이 부족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이웃 모두에 대한 한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도 손상됨 없이 지켜져야 하고 그래야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자들로 이어져 내려온 교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정성을 다하는 묵은 술의 전통도 지켜왔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사랑의 실천이라는 새 술의 전통 또한 지켜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둘 다 훌륭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보다는 우리의 믿음에 부족했던 부분을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채워주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묵은 술과 새 술 모두를 잘 보존하십시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보물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하느님께서 주신 휴가>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얼마 전 혼배성사를 집전하면서 정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간소하고 소박했습니다. 양가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증인들, 모두 합해봐야 스무 명도 채 안 되었습니다. 멋들어진 결혼식을 준비할 형편이 안 되서 그렇게 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차분한 가운데, 보다 결혼식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적어도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알려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더군요. 결혼식 끝난 후에 사진과 함께 결혼했노라고, 기도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내장을 보낼 것이라고.
또 다른 결혼식에 갔었는데, 축의금을 받지 않더군요. 한 편에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죽어도 내야겠다고 떼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죽어도 받지 않더군요. 대신 결혼식이 끝난 후 인도된 곳은 뷔페식당이 아니라 국물 맛이 ‘죽이는’ 잔치국수 한 그릇만 차려진 교실이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 한 목소리로 맛있다고, 정말 좋았다고, 말들을 했습니다.
결혼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두 당사자의 마음, 결국 그들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결혼식 너무 복잡해졌더군요. 결혼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부담(과중한 혼수 준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허리가 휘청할 정도의, 격에 맞지 않는 지나친 결혼식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사자나 가족, 하객들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결혼 문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인데, 뭔가 진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결혼식에 이어지는 혼인잔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잘 차려진 5만 원 짜리 뷔페일까요? 수많은 하객들일까요? 좋은 주례사일까요?
보다 중요한 것이 분위기이겠지요. 새롭게 출발하는 두 사람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축하해주는 ‘축제 분위기’일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그 가시적인 표현으로 술잔도 기울이고 음식도 함께 나누는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일 것입니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축하연에서 큰 소리를 지른다면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있다고 화를 낸다든지 갖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마치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차려진 음식이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고 잔뜩 인상 구기고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면 그것도 할 짓이 아닐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왔다면 다른 것 없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입니다. 경사에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차려진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길 일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또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흔적 하나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혼인관계로 자주 묘사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인간 세상 도래는 하느님과 인간이 혼인한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연인이자 신부(新婦)인 우리 각자와 혼인한 것이 메시아의 강생인 것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부족하고 덜 떨어진 인간과 한 몸 한 마음이 되셨다는 것, 생각만 해도 과분하고 송구스럽고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꿈같이 행복해서 펄쩍 펄쩍 뛸 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은총을 베푸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소풍을 나온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꿀맛 같은 첫 휴가를 나온 주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우울하게 지낸다거나, 시무룩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너무나 과분한 선물로 주어진 지상이 축복의 시간, 좋아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이토록 과분한 은총과 축복을 주님과 함께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 하느님의 연인이 됨, 하느님의 신부(新婦)가 됨을 일생일대의 큰 기쁨으로 여기고, 평생토록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
강영구 신부님
+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그대에게
창밖에 장대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기껏 사나흘 장맛비가 내렸는데도 벌써 지겹습니다.
눅눅한 습기가 몸과 마음까지도 눅눅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로마12,15-16)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면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는 계명은 ‘너’와 ‘나’의 구별을 없애고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나’라고 생각하면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므로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므로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너의 기쁨을 시기(猜忌)하고 너의 고통을 고소해하며 즐긴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세계가 지옥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낡은 옷을 더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로 다가가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대를 터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옷에 낡은 천 조각이 어울리고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가 어울립니다.
그러나 같아져서 동체일신(同體一身)이 되려면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나를 고집하고 나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영돈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단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차례 월요일 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디다케 8.1).
식사를 멀리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도 자주 단식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평소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단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신심행위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단식은 초기부터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40일 동안 단식했고(출애 34,28), 예언자 엘 리야도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였습니다(1열왕 19,8).
예수님도 세례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마스커스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할 때 사흘 동안을 단식했습니다(사도 9,9).
단식은 유대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자주 ‘단식’중에 하느님 께 ‘기도’하였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나옵니다(참조: 출애굽기 34,28;
이사야 58,3-7; 다니엘 9,3; 에스델 4,1-3; 토비트 12,8; 바룩 1,5 등등).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보면, 자선, 기도, 단식이 가장 중요한 유대인의 신심행위로 요약됩니다.
예수님 은 그 신심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 는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은 다 음"(6,6),
단식할 때는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6,18) 하라는 말씀입니 다.
신심행위가 자기 과시용으로 전락하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남보 다 조금 나은 일을 하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과시합니다.
신심행위도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아가 정치적 독립을 잃은 다음부터 유대 민족을 실제 로 통치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그 사회의 실세가 되면서, 그들이 사람들에 게 강요한 것은 종교 계명이었습니다.
종교 계명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 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계명을 잘 지킨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수단으로 행해졌던 기도와 단식이, 이제는 자기 과 시와 형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이 형식에 젖어버린 유대인들을 향해 오 늘 새로운 의미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 야 한다(17절).”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늘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었던 처음을 생각하고, 형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서 살아가야 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처음 내가 간직했던 하느님과 나와의 만 남을 생각하고, 단식과 기도로 더 깊은 만남의 경지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형식과 위선에 빠져 버렸다면, 지금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버린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건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 들에게, 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용기, 처음 내가 시작했던 원천으로 돌아가는 일은 사형 선고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혹시 지금 우리 자신에게서 유대인들처럼 위선과 자기 과시, 형식에 치우진 것이 있다면, 벗어버려야 합니다.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 님께서 주시는 참된 정의와 평화,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부대만이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 단식이란 회개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
박상대 신부님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병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입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옷,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우리의 가치관 변화를 요구 †
우리는 지난번 묵상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주제를 크게 3갸로 구분하여 학습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의 복음에서 죄인에게 자선을 베푸시는 주님의 묵상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의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낫을 정도의 가벼운 환자가 아니고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중한 병자를 죄사함으로 치료하시는 주님, 그리고 평생 죄인의 올가미를 써야 하는 세리 등와 같은 중한 죄인 취급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자선....을 통해서 주님은 당시 율법사회의 자선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의 행위는 폐기하는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창조적 파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렇듯이 기존의 수구세력, 즉 보수집단들은 그런 창조적 개혁에 대해 반기를 들고 거친 투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 수구세력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럽학자들이 계속 주님 곁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한판의 격론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시하며 지키는 단식문제입니다.
바라시아파 사람들은 단식의 프로선수들입니다. 그들은 회개와 속죄의 표시로서 단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은 했습니다. 그것도 '나 이렇게 단식하오'...라는 외관적 모습을 처참하고 슬프게 보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속 마음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그런 단식자를 매우 성스러운 사람으로 특별히 봐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존경을 보이기도 했답니다. 외식주의자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모른체.........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신데도 예수님만은 역시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외석적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면서 꾸짖습니다. 왜요?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이웃을 위한 희생, 그리고 나눔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지 않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희생과 나눔이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낡아버린 가죽 부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낡아빠진 가죽 부대에 새롭게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새 가죽 부대를 장만해서 매 순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빨리 새옷으로 갈아 입읍시다. 주님께서 미워하기 전에....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형식적인 단식으로 하느님 앞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면 안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엄격한 종교 전통에만 매달린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참된 회개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오늘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잔치집에서 단식이라는 행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아파 사람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엄격한 종교젙옹에 매달려 단식을 하지 않는다고 닥달을 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프루쿠스테스 침대의 논리와 같이 똑같은 붕어빵 사회를 만들려는 형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형식보다는 마음을 중시하는 아메바성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메바는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유연하게 변형시켜 이물질들을 전부 흡수합니다. 그러나 그 아메바가 모든 것을 다 수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베바가 가지는 고유한 세포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선(경계지대, 또는 안전지대)라고 말합니다. 그 안전지대를 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치 단식 자체를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주님도, 초대 교회도 금식을 선하게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금하신 것은 메마른 형식주의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신자들의 삶을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새 포도주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며, 새 부대란 주님을 믿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낡은 부대란,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과거 전통에 얽매인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메마른 형식주의적인 삶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담을만한 '새 부대'입니까? 믿음이 있으면서도 메마른 율법주의에 매여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새부대의 새삶을 위한 방법을 묵상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첫째로, 낡은 부대를 버리라
예수님께서는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9:16-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천년기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들에게 '새 천조각의 비유'를 통해서 잘못된 과거의 것을 청산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새 천조각은 한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말리면 줄어듭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져다가 올이 낡은 옷에다 대고 함께 기을 경우, 새로운 천은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트더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깁밤 옆구리 터지듯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옷, 즉 낡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습관, 관습, 생활 등을 다 청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신사고'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후에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 액체를 담아 놓는데 사용된 용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가죽부대가 낡아 튼튼 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는 생겨나는 발효력을 생성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지고 맙니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 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부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잘못된 옛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3,39)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일삼았던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적인 행동들이 공동체의 심리적 공황을 야기시겼습니다. 또한 우리는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것인가만을 기대했으며,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또 많은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복지부동의 자세로 자기의 편익만을 추구했으며, 소수의 부유층과 권력가들이 대부분의 국가 외화를 제멋대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기업인들과 결탁하여 엄청난 액수의 정치 자금을 만드는 일에 관여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소수를 제외한 많은 신자들이 아무런 봉사도 없이 그저 교회의 마당만 밝고 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과감히 청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잘못된 습관과 사고가 담긴 낡은 부대를 멀리 던져 버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새부대를 준비하라.
낡은 부대를 과감하게 단져 버렸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 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 부대는 우리 마음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라는 자아로 채워넣을 때, 우리는 많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요즈음 군사정부시절의 비사를 드라마화한 것을 보니, '나 중심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지 잘 그려져 있더군요...마태 15,19에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드라마의 주역들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사랑하게 되고, 내 것만 주장하는 사람이 남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인본주의의 사람이 신본주의의 사람으로, 내 사업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력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소비자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어 예배 중심의 삶, 말씀 중심의 삶,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습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의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새로운 결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나누어주는 습관 등을 점차 길러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습관을 길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잠언 3,3).
셋째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라 우리가 새 부대를 준비했다면 이제 그것을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 명예, 향락 등 마음 속의 거짓된 우상을 과감히 제거하여 버리고, 성령의 총만함과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마음의 그릇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에제 36,25~27). 성령 안에서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를 나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우리 모두가 잘 살게 되는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동족의 세금을 강탈하여 로마에 바쳤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마태오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낡은 것을 과감하게 청산하여 새로은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와 개혁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잘못된 삶의 습성, 민족의 잘못된 근성,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잘못된 관행, 기업인들의 부정직한 행동, 신자들의 소극적인 신앙자세, 나만 아는 이기심 등... 이 모든 것을 개혁하고 청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만들어서 거기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면,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촉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두올묵상팀]
한 형제님께서 회사 직원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동료 여직원이 너무 많이 취한 것입니다. 마침 술을 전혀 하지 않았기에 과음한 여직원을 자기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다주었지요. 물론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혹시 이 사실을 아내가 알면 오해를 하지 않을까 싶어 아내에게 다른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고 회식 후 곧바로 온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밤,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하는데 아내가 앉아있는 조수석 밑에 하이힐 한 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차 싶었지요. 이 하이힐을 보게 되면 아내가 얼마나 바가지를 긁을지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주위를 다른 데로 돌린 뒤, 그 신발을 운전석 창밖으로 얼른 집어던졌습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순발력에 감탄을 하는 순간, 극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던 아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여보, 내 구두 한 짝 못 봤어요?”
창밖으로 집어던진 구두는 누구의 것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과음했던 회사 여직원 것이 아닌, 바로 아내의 구두였던 것이지요.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또한 솔직했더라면 이런 실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너무 앞서 생각하는 과민반응으로 인해 실수를 했던 것이지요.
평소 신중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신중하지도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모습들은 또 다른 잘못들을 일으킵니다.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는 실수, 그리고 거짓을 통해서라도 윗자리에 오르려는 욕심을 간직하게 만듭니다. 이런 모습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지요. 주님께서는 늘 기도하시면서 가장 하느님 뜻에 맞는 것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언제나 진실한 모습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 당연히 우리도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겠지만,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잘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의 단식은 좀 야단스러웠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은 국가적인 재앙을 당했을 때, 또는 어떤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한 행동이어야만 합니다.
즉, 이들은 보이기 위한 행동으로서 단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예수님을 알려하지 않았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욕심으로 인해 솔직함도 잃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의미로 단식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뜻을 세우기 위한 단식만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신중하게 살았는지를, 그리고 내가 아닌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단식할 때만이 진정한 단식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창조하는 것이다(조지 버나드쇼).
사랑의 크기
권태문 신부
‘선생님과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즉,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누고 즐겨야 한다는 것과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 모두 단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말씀을 통해, 단식의 행위는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어야만 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손님들이 단식을 할 때, 그 안에는 신랑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세상에서 경험하는 여러 유혹들과 갈등을 이겨내려는 우리의 극기와 절제 안에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극기와 절제는 성경 안에 나타난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교만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사랑이 담긴 극기와 절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더욱 순결하고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 이유로 극기와 절제의 행위는 그 안에 담긴 사랑이 척도이지, 그 행위의 강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현실에서 경험하는 고통과 어려움들은 큰 장애가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완전한 사랑이신 그분과 일치시켜 줄 것입니다. 이 점을 굳게 믿고, 우리 마음 안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도록 그분께 간절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오늘도 실패 !
노성호 신부
발목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은 작년 6월 이후 내 몸은 점차 D라인을 그리며 변하더니 이제는 더 무거워져서 행동이 굼뜨고,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지 않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다이어트. 그런데 식욕은 여전하고, 한 끼를 굶으면 그 다음에는 한 번에 세 끼 정도를 몰아서 먹는다.
아주 근사한 변명이 되겠지만, 사실 세상과 단절하고 벽을 쌓지 않는 이상 지금 내 상황에서 다이어트나 단식을 실천하기란 그리 녹록지 않다. 교우들과 친교를 나누는 자리나 친한 벗들과 함께하는 자리, 오랜만에 손을 내밀며 다가오는 정겨운 이웃의 손길을 모두 마다해야 하는데, 그것은 너무 인정 없어 보인다. 못 간다는 핑계를 대는 것도 한두 번이고, 모임에 계속 빠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리고 내가 그들과 앞으로 언제까지 함께하게 될지는 하느님만 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지 않았을까 ? 지금 자신들 앞에 이 세상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분이 계신데, 그분과 함께 있음에 마냥 즐겁고 복될 텐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나 또한 그렇다.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시는 매일의 예수님을 만나는 날이 지속되는 한 나의 다이어트, 나의 단식은 계속 연기될 것이다. 나도 제자들처럼 지금은 신랑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다 언젠가 때가 되면 나도 단식을 해보련다.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이사 58, 8– 9)
단식, 무욕의 사랑을 위하여
김찬선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왜 단식을 하는가?
단식의 여러 이유가 있겠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에서부터 Hunger strike까지 현실적인 이유로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보다 좀 더 고상한 단식도 있겠습니다.
개돼지처럼 먹는 것에 환장이 들린 사람이 되지 않고 본능적인 욕구(欲求)를 초월한 사람이 되고자 단식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욕구를 초월한 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자신에 만족하기 위해서 단식할 수도 있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지요.
단식이란 欲이 생기지 않도록 欲求를 들어주지 않는 것인데 욕구를 초월한 자신에 대한 고차원적인 만족을 위해서 식욕을 채우는 저차원의 만족을 희생하는 것일 뿐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식욕을 채우는 만족이나 자기만족인 것은 마찬가지고, 어쩌면 고상한 탐욕을 채우는 만족이 식욕을 채우는 만족보다 하느님께서 더 역겨워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질책하듯 고상한 척 하지만 속은 온갖 탐욕으로 가득 차 있고 그 탐욕을 채움으로써 만족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만복감, 포만감으로 참된 만족이 대리 만족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참된 만족은 아무리 고상할지라도 그런 것들로 대리 만족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만족은 어떤 욕이든, 욕을 구하지 않을 때 참되고 욕을 버릴 때 완전하며 사랑 때문에 욕을 구하지 않을 때 더 참되고 사랑 때문에 욕을 버릴 때 더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그럴 수만 있다면 이웃을 진정 사랑할 때 그래서 이웃을 참으로 만족케 할 때 욕은 올라오지 않고 하느님을 진정 사랑하면 욕이란 저 속에서부터 아무런 낌새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도 완벽하게 만족시키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우리 사랑이 욕을 너무도 완벽하게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이란 무욕한 사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기 위해서,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우리 집에 맞아들이기 위해서,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기 위해서 우리는 이번 사순절에도 단식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식탁 옆에 굶주리는 이웃을 위한 돼지 저금통, 특히 북한의 굶주리는 이들을 위한 돼지 저금통이 놓여있어야겠습니다.
단식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비움
김미자 수녀님
사순절 동안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실천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율법에 따른 의무 단식일은 속죄의 날, 단 하루뿐이었지만(레위기 16장), 바리사이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단식을 권장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완벽하게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는 하느님을 위해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하면서 은근히 드러내려 했습니다.
단식은 하느님과 만남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육신의 극기와 비움을 통해 마음의 가난을 얻게 됩니다. 육체의 욕구를 극기함으로써 우리 내면은 하느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유혹을 극복하게 됩니다. 또한 굶주림을 느껴 봄으로써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고, 단식으로 절약한 것을 나눔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식과 자선과 기도는 전통적인 신앙 표현으로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한 것이며, 사람들한테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드러내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 라고 물을 팔요는 없습니다. 단식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심행위이며,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거나 강요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만남을 잘 준비하기 위해 선행을 한 가지씩 실천해 봅시다. 부활의 기쁨은 차고 넘칠 것입니다.
미국의 한 신문사가 현대 사회를 통렬하게 비판 한 후에 현대인 중에는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기사를 썼답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신문사로 연락해 달라고 보도했지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는 자그마치 5만여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는 것입니다. 즉,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스스로 행복하다는 사람 중에 특별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지요. 하루 일을 잘 끝낸 행복, 예쁜 꽃을 보는 행복, 아침에 새소리를 듣는 행복, 아이들의 웃음소리에서 느끼는 행복, 시원한 바람에서 느끼는 행복 등의 행복 사례가 전화로 걸려왔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복의 사례는 대부분 평범한 일상에서 느끼는 작고 소박한 것이었지요.
우리들은 특별한 경우에만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지극히 평범하기 때문에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 깊게 관찰하면 너무나 많은 행복이 내 곁에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심지어 고통과 시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을 통해서도 행복은 내 곁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기를 원하시지 않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는 마음의 눈이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 곁에 어렵고 힘든 일이 닥칠 때, 그 상황 역시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시려는 주님의 또 다른 배려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고통과 시련의 차원으로만 바라보고 생각한다면 주님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려는 행복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겠지요.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종교적 예식으로서 단식을 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단식이라는 중요한 종교적 예식을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종교적 예식의 실천이라는 차원보다는 단식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함이 더 중요함을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고자 해야 함을 말씀하시지요. 즉, 사랑의 실천에 뿌리를 두는 단식일 때 진정으로 이 안에 담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단식 한 번 했다는 식의 종교적 예식 행위로서는 아무런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모습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단식이라는 외적 모습만을 보고 실천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이라는 외적인 모습만을 보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 그 의미와 함께 살아갈 때 진정으로 주님의 길을 함께 걸을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것이 불만스럽게 생각된다면 세계를 소유하더라도 당신은 불행할 것이다.(세네카)
마음의 포화 지방
김성웅 신부님
대개 우리는 혈관 속의 콜레스테롤이 혈관을 막아 고혈압을 유발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해로운 콜레스테롤뿐만 아니라 건강에 유익한 콜레스테롤도 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제시되는 바와 같이, 단식에도 유익한 단식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해를 끼치는 단식이 있습니다. 마음과 생활양식에 쌓인 포화 지방을 빼는 단식은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돕지만, 반면 이타적인 마음과 행동 등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이로운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 단식은 영적인 건강에 해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단식의 예는 한 끼의 식사를 거르면서 모을 수 있는 식비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그들과 더욱 긴밀한 연대의 끈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단식은 자비와 애덕의 실천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화해의 성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곧 단식이라는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쌓인 죄스런 포화 지방을 걸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단식을 통한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을 더욱 맑은 눈으로 돌아보고, 내 안에 포화 지방처럼 쌓인 교만이나 탐욕이나 질투심이나 매정함이 없는지 성찰하고 그에 대한 쇄신의 은총을 청하는 시간이 진정 필요합니다.
욕망을 갈망으로
김찬선 신부님
수녀원 연 피정 지도를 위해 광주에 내려와 있습니다.
오는 길에 장성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게 들렸는데 그곳 교육관에서 단식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우리 형제들 몇도 그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교육은 저도 옛날에 받은 적이 있습니다.
죽은 제 친구 최 요한이 간 경화 치료를 받을 때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단식 치료 교육을 제가 같이 받은 것입니다.
단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처럼 단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바보스러운 것이고 오늘 예수님께서 그러하신 것처럼 질책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면 단식의 목적은 무엇이어야겠습니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건강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단식이 건강을 위해 좋습니다.
물론 적절하고 올바른 단식이어야겠지만 단식을 하면 육신적으로나 영신적으로 건강해집니다.
영적인 면에서 단식은 우선 영적 잡초를 제거해줍니다.
잡초란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는 영양분을 가로채고 빼앗아가는 풀을 말하는 것이니 영적인 잡초란 우리의 잡스런 욕망들이 되겠습니다.
잡스런 욕망이란 하느님으로만 만족해야 할 우리의 만족들을 이 세상 것들로 대리만족하려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 것들이 우리에게 대리만족을 주는 것은 그것들도 선하신 하느님이 만드신 선들이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런 아랫선이 지상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고 불완전한 선이 완전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며 일부선이 전체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하고 불충분한 선이 충만한 선이신 하느님의 선을 대신합니다.
단식은 대리만족하게 하는 이런 것들에 대한 욕망을 없애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단식은 이렇게 잡스런 욕망을 제거함으로써 영혼을 맑게 하고 갈망을 자라게 합니다.
배가 부르면 인간은 다른 만족을 구하고 그래서 잡스런 여러 욕망들이 자라지만 단식을 하게 되면 다른 욕망들은 사라지고 오직 먹고 싶은 욕구만 남게 되듯 단식은 욕망을 정화시켜 하느님께 대한 갈망만 남게 합니다.
색시가 오롯이 낭군을 기다리듯 신랑의 친구들이 오직 신랑에 집중하듯 단식으로 욕망이 정화된 영적인 갈망은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애타게 찾고 그 사랑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시기 우리는 프란치스코의 다음 권고를 마음에 새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최고 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홀로 선하시고 홀로 자비로우시고 홀로 양순하시고 홀로 부드러우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홀로 인자하시고 홀로 무죄하시고 홀로 순수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 것도 마음에 들어 하거나 만족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기를!
아무 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놓지 못하기를!
아무 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 기원합시다!”
그리스도인의 단식
전삼용 신부님
학생 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연습장에 까맣게 써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냥 눈으로 보고 암기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할 때 선생님이 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몸도 기억을 한단다. 그래서 속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써보면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몸이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저의 한 친구에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많은 과일 속에 복숭아 향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알레르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마치 살아오면서 배탈이 났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여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알레르기도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기를 배울 때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머리를 써가면서 연습합니다. 그러나 나중엔 머리를 쓰면 더 안 되고 그냥 몸에 배인 실력으로 할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일일이 생각하며 걷고 눈을 깜빡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뇌를 빼 내도 계속 헤엄쳐서 갑니다. 닭은 머리가 잘려도 얼마 동안은 뛰어다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끼며 감사해하는 것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이라도 그 수난을 체험할 때 그 감사가 몸에까지 새겨집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파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식을 꺼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단식을 며칠 한 적이 있는데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밥과 물을 먹지 않으니 온 뼈마디가 쑤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 분께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식은 그저 육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목적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을 새겨놓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영적으로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주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저 단식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나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 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몸을 절제하면 영이 맑아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육과 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이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극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자들도 단식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고 제자들까지 단식 같은 것은 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준비한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빼앗긴 후, 즉 신랑을 빼앗긴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해 단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사실 그리스도교보다도 다른 종교들에서 훨씬 많이 합니다. 그런 단식들은 육체를 이기고 영을 충만하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필수불가결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육체적 영적인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을 잃게 되면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단식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단식이기에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막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쇠파이프에 얼굴이 긁혀서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생겼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 이렇게 돈 벌기가 어려운데,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키우셨나하는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얼굴에 난 상처와 함께 조금 더 부모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성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식도 작은 고통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단식의 핵심이자 목적은 다른 무엇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임을 명확히 밝히고 계십니다.
진정한 단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행하는 단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우리를 향한 수난과 희생, 죽음을 묵상하기 위한 단식이 참된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야하며 그분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관심이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단식은 단식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의 결과가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어야 그 단식은 참된 단식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상 안으로 더욱 투신하고 그 세상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된 단식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기쁨과 희망"이란 아름다운 소식지 3월 1일자에 실린 한 수녀님의 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사제가 곁에 있어도 우리는 사제가 그립다"는 제목의 수녀님 글은 얼마나 저를 부끄럽게 했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의 글은 사제로서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주고 계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구조와 한국인의 의식구조 안에서의 사제상은 우리가 익히 듣고 그려온 착한 목자상과는 거리가 먼듯하다. 어느 틈엔가 굳어진 목에선 겸손함이 그립고, 강론 준비도 제대로 안되는 건 고사하고 주일미사에 어렵사리 나와 주님 안에 평화를 얻고자 하는 신자들을 야단쳐서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신자들의 바람을 추려보면 성체 앞에 기도하며 머무는 사제의 모습이 그립고, 만나면 먼저 인사해주는 겸손하고 따뜻한 모습이 그립고, 자신과 신자들의 영성의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그립고, 자기 관리가 되는 사제가 그립고, 말이 통하는 사제, 들을 귀가 큰 사제가 그립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제들과 함께 살면서도 진정한 사제가 그립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공한 사제가 진짜 그립다."
"성서와 함께" 3월호에 보니 또 다른 수녀님께서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계십니다.
어느 모임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가 자신의 소중한 체험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제가 술에는 정말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만, 사제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하나는 술을 끊는 것과 또 하나는 저녁 10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제관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본당 소임이 이동되어 신자들과 송별회를 하던 중, 술을 안마시고 말짱하게 앉아 있다가 10시가 가까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우성치는 교우들을 뒤로 한 채 사제관으로 돌아와 잠을 자던 저는 병자성사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면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송별회라는 명분으로 술을 마시고 더 앉아 있었더라면 본당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큰 오점을 남길 뻔 했으니 말입니다. 병자 성사를 받은 그 교우는 그 날 새벽에 운명을 했습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불쌍한 성인(聖人)>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란 말씀을 바꿔 말하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가 아닐까요?
그토록 오랜 세월 목이 빠져라 기다려왔던 ‘주인공’, ‘VIP 손님’, ‘그분’, ‘신랑’, ‘메시아’이신 주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우리 사이에 함께 자리 잡고 계시는데, 더 이상 무슨 단식이며, 준비며, 여타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냐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이란 좀 더 그분 가까이 다가가서 앉는 일입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일입니다. 일생일대의 행운의 순간이 찾아왔음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필립비 4장 4절 참조) “항상 기뻐하는 일입니다. 늘 기도하는 일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감사하는 일입니다.(1데살 5장 16-18절 참조)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의 말씀입니다.
“성인(聖人)이 슬퍼한다면, 그는 불쌍한 성인입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말씀입니다.
“악은 기뻐하는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기쁨은 기도입니다. 기쁨은 굳셈입니다. 기쁨은 사랑입니다. 기쁨으로 우리는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기쁘게 베푸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기쁘게 베푸는 분은 더 많이 베푸십시오. 하느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감사 표시는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기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말초적, 육체적, 순간적 기쁨을 넘어섭니다.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는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한 영혼이 자신을 극복하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것을 보고 느끼는 보람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나의 작은 봉사로 세상이 조금이나마 밝아지고 자그마한 평화라도 깃드는데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고통과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면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인식하는데서 찾아오는 기쁨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뿌리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김찬선 신부님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이든 신자들은 사순 시기가 되면 단식에 대한 강박감 같은 것이 있을 겁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때 어른들은 사순시기가 되면 단식과 금육은 물론 술 담배를 하던 분은 술과 담배를 끊고 부부생활도 하지 않고 자녀들 결혼도 사순시기는 피하여 시켰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커서 그런지 저도 잘 실천은 못해도 사순시기에는 어떤 단식을 할까 매번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에도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재의 수요일 미사를 주례한 형제가 한 말이 썩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음은 넓게 위는 작게!”
이 짧은 명구는 오늘 독서와 복음이 얘기하는 사순절 단식의 의미를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남이 한다고 따라하는 단식은 소용없고 마음에 없는데 하라니까 억지로 하는 단식도 소용없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는 단식은 더더욱 소용없다 합니다.
이런 단식은 살을 빼기 위해 하는 단식보다도 더 나를 위해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기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살을 빼기 위한 단식은 육신을 건강하게 하기라도 하니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단식이 유익한 단식이고 바람직한 단식입니까?
그것은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단식이고, 그러니까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먼저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증진시키는 단식입니다.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이 있을 때는 즐거워하며 먹고 신랑을 빼앗기면 단식하듯이 우리도 하느님이 부재중일 때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을 키우기 위해 단식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단식은 이 세상에 안주하던 Mode에서 하느님 갈망의 Mode로 바뀌도록 총동원령을 내리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마른 땅이 비를 기다리듯이 우리 영혼이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게 하는 것입니다.
단식은 두 번째로 이웃 사랑을 증진케 합니다.
위를 작게 하고 마음을 넓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배를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의 입에 음식을 넣어주려는 넓은 마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쌀 한 줌 나누기가 바로 이 단식의 의미지요.
우리는 이런 쌀을 聖米, 거룩한 쌀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쌀이지만 내 배를 채우지 않고 더 굶주린 다른 사람의 배를 채우는 사랑의 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서의 하느님은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도무지 의미 없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판단
최의영 신부님
신학생 때의 일입니다. 매년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이번에는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까 하며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고백하기 부끄러운 경험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그해는 매일 십자가의 길 기도를 두세 번씩 봉헌하고 성당에서 또는 학교 뒷산에서도 장소를 번갈아가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쳤는데, 어느 날인가 저는 ‘판단’이라는 아주 몹쓸 악에 빠졌습니다.
아주 추운 날 홀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던 중 문득 웃고 떠들고 있는 다른 동료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은 왜 나처럼 수난에 동참하지 않는 걸까?
왜 저들은 나처럼 기도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걸까?’ 등등의 근거 없는 판단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나 스스로를 힘들게 하면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동료 신학생들 역시 각자 나름대로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면서 일과 학업에 충실하며 기쁜 부활을 맞이하였을 것입니다.
판단이라는 악은 결국 자신만 힘들게 하여 부활의 기쁜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입니다. 판단은 주님께 맡겨드리고, 우리는 그저 매일의 삶을 주님과 함께 살아가야겠습니다
한 식구(食口)가 되라.
이인옥
어떤 종교단체든지 단식뿐 아니라 여러 가지 수행방식을 두고 누구의 방법이 더 옳은지, 누가 더 잘 수행하는지, 누구는 왜 하지 않는지 따지며 경쟁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단식보다 먼저 익혀야 할 것은 맛있게, 즐겁게, 감사하게 먹는 것이다. 좋아하지 않고 입에 맞지도 않는 음식,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는 양식이라면 일정 기간 끊는다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음식을 먹으며 사람들과 오순도순 나누는 친교를 즐겨보지 않았다면 단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음식을 맛나게 먹는 것이 먼저고 일용할 양식에 감사하는 마음이 먼저고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구(食口)’가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늘 즐겁게 먹고 마셨다. 그러면서 그때가 바로 혼인잔치 날이라고 하셨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식들이 모여 맛있게 음식을 먹을 때면 늘 그날이 당신 생일이라고 하셨다. 전쟁을 겪어본 어른이기에 매일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이 큰 축복임을 아셨다. 2대 독자로 외롭게 자란 아버지한테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 화목하게 먹고 마시면, 그날이 바로 잔칫날이었던 것이다.
요즘 밥을 굶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다. 그런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단식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행하는 것은 너무 사치스럽다. 우리의 양을 덜어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실제적 도움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우리가 모두 한 식구로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단식의 진정한 이유여야 하지 않을까?
박철현 신부님
하느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과 피조물이 살아가는데 가장 귀중하고 가장 필수적인 것일수록 나누기 쉽고 또 쉽게 나눠 쓰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공기, 물, 햇볕, 흙, 그리고 불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것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들은 누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 개개인도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개개인이 하느님께 가장 귀중하고 가장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우리 존재의 목적은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에 하느님의 사랑을 채우는 일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 앞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독서의 말씀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대속죄일에만 의무적으로 단식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과 경견한 유다인들은 자주 단식을 했습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장이 서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했는데 그 본래의 뜻을 저버린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단식을 하는 본래의 뜻, 그것은 바로 보잘 것 없고 굶주리며 떠돌면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을 외면한 단식은 겉으로는 가장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장 필요 없는 행위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마음에 모시고 행하는 이웃사랑의 실천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가장 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이번 사순시기에 스스로 결심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그런 결심을 하자마자 그 결심을 지키지 못할 유혹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하긴 지난 재의 수요일에도 그랬지요. 단식과 금육을 해야 하는 날인데, 그날따라 왜 이렇게 배가 고프고 또한 고기 먹을 일이 생기던 지요. 생각해보니 유혹은 우리들 곁에서 결심을 잘 지킬 수 없도록 항상 우리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도 생긴 것이 아닐까요?
사실 유혹을 이기는 것만큼 기분 좋은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유혹을 이기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는 요즘 새벽에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수영장 가기가 정말로 싫습니다. 우선 추운 새벽에 차가운 물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싫습니다. 또한 새벽부터 힘들게 수영하는 것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이미 돈을 지불했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냥 가야지요. 수영장으로 가면서 이러한 다짐을 합니다.
‘다음 달에는 절대로 안 한다. 이렇게 힘든 운동을 왜 하는 거야? 그냥 자전거나 열심히 타자.’
그런데 그 유혹을 이기고 수영장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나면, 기분이 너무나 좋아집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마음이 생기지요.
‘이렇게 상쾌한데, 한 달만 더 해볼까?’
화장실도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저에게는 수영장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기분이 이렇게 다르더군요. 그런데 유혹을 이기기 전과 이긴 후의 기분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질문을 던집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죄의 회개를 위해서, 그리고 이로써 메시아이신 구세주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올바른 행동이었습니다. 희생과 극기를 통해서 오실 분을 준비하는 것. 그러나 그들은 유혹에 빠졌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음식을 먹지 않아서 쇠약하게 되면서까지 회개와 기다림의 표시로 단식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흥을 깨는 분이고, 힘든 일만 부과하는 분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어떠하셨습니까? 가난한 사람들과 먹을 것을 함께 나누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잔치를 벌이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사랑의 실천을 더욱 더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당신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만일 단식과 금육을 하면서도 굶주리는 이웃을 모른 체 하고 가진 것을 움켜쥐고 나누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들 역시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는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그 유혹을 극복하고, 사랑의 실천을 제대로 했을 때의 마음은 과연 어떠할까요? 하늘을 날듯이 기쁠 것입니다.
침 운동을 해보세요. 기분이 끝내줘요~~~
정성어린 예물
이정호 신부님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 신자들의 증가율보다 천주교 신자들의 증가율이 훨씬 앞섰다고 합니다.개신교 신자들이 제자리걸음을 걸을 때 천주교 신자들은 두 배 가까운 수가 증가하였다고 하네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십일조를 비롯한 지나친 헌금에 대한 강조가 개신교에 대한 호감을 감소시킨다고 합니다.
사실 천주교에서는 헌금에 대해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형편대로 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봉헌함에 넣는 경우도 있고 봉헌시간에 옆사람에게 빌려서 봉헌을 하기도 합니다. 얼마를 내건 형편에 달린 일이겠지만 그 정성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빼앗길 때 애통한 마음으로 단식하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저 교회에 돈을 내는 것이 봉헌이 아니고 단지 밥을 굶는 것이 단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겠습니다. 사랑을 품고 정성을 다해 예수님을 바라보고 닮고자 하는 자세에서 봉헌이나 기도, 자선, 단식하고자 하는 정성이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순시기에 드리는 우리의 준비는 정성을 다한 것이 되어야겠습니다.
사랑의 단식
정순옥 수녀
신랑과 함께 기뻐하는 모습은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수녀회에 입회하여 얼마 안 되었을 때 부총장 수녀님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그때 한국 공동체에 프랑스 수녀님 세 분이 계셨는데 그 중에 종신서원을 하고 한국에 오신 지 1년여 지난 가장 젊은 수녀님에게 부총장님의 방문과 만남은 아주 특별한 것 같았습니다. 부총장님의 방문을 받은 수녀님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행복해 보였습니다.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순간에 체험하는 충만함은 잠시라 해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은 종종 시간을 다툴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망 사건이나 급한 일이 생기면 식사할 겨를도 없습니다. 함께 일하는 수녀님들, 특히 안 신부님이 끼니를 거르고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닮았다는 생각과 함께 헌신에 감동을 받습니다. 식사할 겨를도 없으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지친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물을 청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고을에도 가야 한다며 제자들을 재촉합니다. 이것은 음식을 먹는 일보다 하느님의 일(선행)을 우선으로 삼는 사랑의 단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순시기에 교회는 예수님의 단식을 따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온 세상 교회가 사순절 동안 금욕과 단식을 한 결과 고통 받는 사람들과 나눔의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옛말에 ‘서러움 중에 가장 큰 서러움이 배고픈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북한과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음식을 낭비하지는 않는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애덕이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것이 기적입니다.
“단식의 궁극 목적은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교이다.”
서정웅 신부님
2006년 9월 (공지영 소설) 송해성 감독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불우한 성장기를 보내며 밑바닥 인생을 살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운의 청년 사형수와 부유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상처로 인해 세 번의 자살을 시도하며 세상과 사람에 대해 냉소적이 되어버린 ‘골칫덩이’ 대학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는 참 감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제가 알고 있는 (2000년 8월 부산교도소 성령세미나 안수식을 겸한 강의에서 알게 된),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는 한 수인이 생각나서 그 친구의 빠른 석방을 바라며 ‘편지 한 통’을 먼저 소개할까 합니다.
신부님 보십시오!
지면으로 첫 인사를 올림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신부님께 글을 올리게 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성령세미나 안수기도를 위해 오셔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 중에서 신부님의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 환경을 말씀해 주신 것이 저의 마음에 너무 와 닿고 이해할 수 있어 신부님께라면 저의 고통받는 죄인의 심정들을 다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이렇게 용기 내어 조심스레 펜을 들어 봅니다. 저의 무례함을 용서해 주세요.
저는 지금 부산교도소에 수감 된 죄인 ○○○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아주 큰 죄 존속살인이라는 폐륜적 범죄를 저질러 15년형을 선고받고 수용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었던 고통과 실연들을 가슴에 묻어둔 체 지금은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위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누구에게 저의 속사정 하나 털어놓을 수 없어 혼자가 되어 버린 저 자신을 원망도 많이 했었습니다. 파탄이 나버린 가정에서 무엇을 바라며 또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까 하며 생각하니 너무나 눈앞이 캄캄했었습니다. 요즘은 하느님께 의지하며 저의 잘못을 반성하며 용서해 주시길 바라며 기도를 생활화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가정 폭력으로 하루가 멀다 않고 술 취하신 아버지의 그때의 화나신 얼굴이 아직도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지병으로 고생하시고 계신 어머니와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 아버지의 심한 구타로 인해 정상적이지 못한 모습으로 태어난 동생이 저에게 있습니다. 제 나이 그때 21살이었을 때 아버지의 심한 폭력과 외도를 참지 못하고 어머니께서는 가출을 하셨고 남겨진 동생들은 성하지 못한 몸으로 밥 많이 먹는다는 이유로 추운 날씨에 밖으로 내몰려야 했었습니다. 생계유지로 군대 입대도 연기한 체 일자리를 알아보고 들어오면 집안은 언제나 초상집이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내연의 여자를 집으로 들이시기도 하고 동생들에게 인사도 시켜 정말 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아버지가 맞는가 의심도 들기도 했었습니다. 어머니를 가출하게 만든 아버지와 내연의 여자는 동거를 하셨고 저의 가정은 처참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매번 술 취하신 아버지의 매질은 계속 이어졌었고 그런 환경 속에 태어난 저 자신이 너무 싫었습니다. 아버지의 그런 행동들은 어린 시절부터 보며 자라서 저도 술만 취했다면 그동안 받은 울분을 다스리지 못해 자해도 하고 싸움도 많이 했었고 어머니가 가출하기 전에 한 번은 울고 불며 모두 죽자며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는데 자식의 고통을 아시는지 울며 매달리시는 어머니 때문에 무마 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모질게 살면서의 소원은 가식 없는 웃음이 있는 TV 드라마 속의 가족이 되어보는 것이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소원은 그냥 무시 된 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것이 되어 지금 제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아무래도 하느님께서도 저의 죄는 용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폐륜아로 낙인찍힌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까요?
저의 잘못으로 아직도 고통받는 저의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에게 너무나 미안해 접견을 할 때에는 고개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가출하신 어머니는 돌아오셔서 다행이지만 동생들을 데리고 험한 길을 걸어가셔야 되는 힘든 모습을 저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체 지켜봐야 되는 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옵니다....... 신부님 ! 저의 답답한 마음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 주실 것이라 믿고 무작정 편지를 올리오니 많은 이해 바라오며 바쁘신 와중 저의 편지를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자매님, 수녀님, 동료들에게도 상의하지 못하고 고통받는 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저 대신 돌아가신 저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 한 번 해주십시오. 제가 기도는 계속하고 있지만 폐륜아의 기도는 들어주시질 않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 ! 종이 몇 장에 제 마음을 다 담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아쉬운 마음은 여기서 접어두고 두서 없는 못난 글 여기서 줄일까 합니다. 겨울 날씨 감기 조심 하시구요 건강 유의하십시오. 그럼 다음 서신까지 안녕히 계십시요. 2000년 12월9일 예비자 ○○○올림.
인도 켈커타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고통이 있습니다. 굶주림에서 오는 고통, 짐 없음에서 오는 고통, 온갖 질병에서 오는 물질적인 고통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외로운 것, 사랑 받지 못하는 것, 바로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고통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라고요
애청자 여러분, 조금 전 읽어드린 편지 내용의 친구는 지금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예수님 사랑 받는 제자, 친구가 되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단식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구약에서는 ‘종말론적 구원’을 ‘혼인 잔치’라는 상징(비유)으로 서술했는데(이사야 61.10, 62.5)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인해 구약이 실현되어 종말론적인 구원이 이룩되는 시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함께 하는 기쁨의 시기에는 단식이 적합하지 않다고 대답하십니다.
이사야 58. 6-8에서는 ‘하느님(야훼)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들을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애청자 여러분, 한편에서는 물질적인 풍요 속에 낭비를 일삼고 있고 다른 한편에서는 기아와 빈곤 속에 허덕이고 있는 현대 사회 속에서, 자신의 배고픔을 통한 이웃 사랑과 나눔의 실천으로 우리도 작은 예수, 또 다른 예수가 되어 봅시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슬픔을 기쁨으로, 울음을 춤으로 바꾸시는 주님>
양승국 신부님
부끄럽게도 새로 나온 성경, 오늘 처음으로 펼쳐보았습니다. 새로운 번역을 위해 그간 애쓰셨던 많은 신부님들, 평신도신학자들, 봉사자들의 땀과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더군요. 번역이 훨씬 부드러워졌고, 본문에 대한 이해나 의미 파악도 한결 쉬워졌습니다. 경제도 안 좋은데 만만치 않은 가격에 부담스러워하실 분들에게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새 성경을 읽으면서 한 신부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새 성경의 번역 전담자이셨던 신부님, 그 골치 아프고 고된 성서번역 작업에 한 평생을 거셨던 신부님, 아마도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로 인해 작고하신 것이 분명한 존경하는 임승필 신부님의 얼굴. 오늘 성서를 봉독하는 내내 신부님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전에는 ‘전도서’라고 칭했는데, 새 성경에서는 ‘코헬’이라고 부르는 성서 3장 1절 이하에 이런 표현이 있더군요.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오늘 복음에서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 없지 않으냐?”
‘코헬’ 작가의 표현처럼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슬퍼할 때가 있으면 기뻐 뛸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구간 탄생을 기점으로 슬픔의 시기는 지나가고 기쁨의 때가 왔습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절망과 비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눈물 흘릴 때가 아닌 것입니다.
코헬의 저자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기쁨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상기시킵니다. 따라서 삶을 기뻐하고, 현재 이 순간 존재의 기쁨을 만끽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너는 기뻐하며 빵을 먹고
기분 좋게 술을 마셔라.
하느님께서는 이미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신다.
네 옷은 항상 깨끗하고
네 머리에는 향유가 모자라지 않게 하라.”
그러나 항상 기뻐만 할 수가 있나요. 좀 살만하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하면 어느새 다가오는 것이 고통입니다. 십자가입니다. 불행입니다.
그러나 성서가 우리에게 강조하는 기쁨은 고통 속에서도 미소 짓는 기쁨입니다. 언제 사형에 처해 질 지 모르는 절박한 감금상태에서도 행복해했던 사도 바오로의 기쁨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참혹한 옥살이 가운데서도 그리스도 신자들을 위해 편지를 쓰셨는데, 그 고통 속에서도 되풀이해서 강조하신 단어가 ‘기쁨’이었습니다.
극심한 고통,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바오로 사도의 기쁨의 비결이 무엇이었겠는지 묵상해봅니다.
바오로 사도의 기쁨은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맡김을 통한 기쁨이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이미 형성되어 있기에, 내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이기에, 더 이상 그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았던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모두 찰나적인 기쁨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기쁨입니다. 뜬구름과도 같은 기쁨입니다.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의 기쁨이야말로 참 기쁨이며, 영속적인 기쁨입니다.
시편 작가의 표현처럼 우리가 고통 속에서도 꾸준히 기도하며 기쁨을 간직할 때, 언젠가 주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의 울음을 춤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우리의 좌절을 희망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저의 비탄을 춤으로 바꾸시고
저의 자루옷 푸시어 저를 기쁨으로 띠 두르셨습니다.
이에 제 영혼이 당신을 노래하며 잠잠하지 않으오리다.
주 저의 하느님, 제가 당신을 영원히 찬송하오리다.”
(시편 29장 12-13절)
참된 단식
강영구 신부님
예수님, 당신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물러나 40일간 단식하셨습니다. 당신은 40일간의 재계齋戒와 斷食을 통해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자 하셨습니다.
斷食과 재계齋戒는 비움과 낮춤이며 자기 포기입니다. 당신은 그 빈자리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인간 본래의 모습을 꿰뚫어 견성見性하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天命)을 깨닫고 시정市井으로 내려오신 이후로 당신이 단식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린다.”(루가7,34)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자주 단식하며 기도하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시아파 사람들은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어울려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당신의 모습이 대단히 불경스럽고 못 마땅했습니다.(루가5,33-36)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를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내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른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의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이사야52,6-8)”
예수님, 당신은 먹고 마시기를 즐긴 불한당不汗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으로 세리와 창녀, 죄인들과 변두리 인생들에게 천국을 선물하셨습니다.
사순절을 지내면서 단식하는 저희들도 단식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고 이웃과 형제들에게는 사랑을 나눠줄 수 있도록 축복하소서.(一明)
지금은 단식할 때... 그러나 기쁜 굶주림
정욱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우리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단식’이란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바리사이파들은 단식을 생활화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하느님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말씀을 하시면서도 왜 하느님께 드리는 정성의 대표적인 모습인 단식은 하지 않는가에 대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직접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단식하신 모습은 복음 속에서 찾아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복음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단식’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잔칫집에 온 사람들과 같이 어느 집에서건 식사하시는 모습은 찾아보기가 쉽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단식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요한의 제자들이 먹고 마시기만 하는 예수님께 언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스승은 먹지도 않고 극기와 인내의 힘겨운 삶을 살고 있었으니 더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모습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사람들의 허기짐에 대해 걱정을 하시고, 오히려 그들을 먹이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될 정도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을 여러 날을 허기진 채 따라다닌 사람들을 걱정하셔서 생겨난 사건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오히려 먹이려 하셨고, 그렇게 그 자리에 늘 함께 하시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주님은 단식하지 않으셨다는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예식이 있는 날 주님이 하신 단식에 대한 가르침 하나를 기억하게 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이 말이 예수님께서 숨은 곳에서 단식하셨다는 이야기의 근거 또한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단식은 한 사람이 자신의 곡기를 끊고 하느님께 그 생명의 소중함을 하느님 앞에서 느끼고, 그 정성을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개인적인 신심의 노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식은 남들에게 드러나는 정성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일행이 단식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알려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 듯싶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분명 예수님의 일행들은 단식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이란 숨은 것도 보시는 하느님께 자신이 받은 소중한 생명의 깨우침에 감사와 그 소중한 생명의 정성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시기는 하느님과 함께 있기에 곡기를 끊고 정성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께 정성을 드리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다가오시어 사랑을 주셨고, 우리가 기도드리기 전에 그분이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고 계시기에 우리가 드리는 정성은 그 순간 하느님의 더 큰 사랑에 묻혀 필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며 삶을 함께 하시는데 단식이 필요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신랑을 빼앗길 날이 되면 단식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생명을 이기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세상은 하느님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래서 사랑이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제자들은 단식해야 할 시기에 접어듭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남겨진 지금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해졌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이 세상은 주님의 사랑의 생명을 허락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순절, 특별히 세상이 버린 주님의 생명을 안타까워하는 이 시기에 정성어린 단식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가르침, 단식은 보이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내 생명의 교류와 일치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기쁘게, 사랑하며 단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셨던 그 한 끼의 정성에 담긴 생명에 감사하며 웃으며 하느님께 우리 한 끼의 생명을 나누는 사랑의 단식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단식은 고통스런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듯, 자선을 하듯, 기도를 하듯 기쁘고 행복한 것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과 생명을 나누는 것, 그리고 그 몫을 주님처럼 다른 배고픈 이들과 나누는 것이 단식이니 말입니다.
† 단식은 절제를 절제는 겸손을 준다. †
박상대 신부님
사순절에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단식(斷食, fasting)은 본래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6; 마태 11,19; 루가 18,12)
따라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금욕생활과 단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것이며, 도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슬퍼하거나 아무 것도 먹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예수께도 단식은 있으며,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며, 신랑을 잃게되는 그때는 더욱 더 큰 슬픔과 단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에 벌써 성금요일 십자가상 한 장면이 번득 눈앞을 스치는 듯하다. 단식이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사순시기의 중요한 수행덕목이긴 하나 '단식'이라는 수행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분명히 '음식섭취'를 중단하거나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물자가 풍요로와 먹는 일을 낙(樂)으로 삼고, 단식을 몸매관리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단식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단식의 정신의 절제이다. 절제(節制)는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는 일이 아닌가? 절제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중의 하나로서 어쩌면 단식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방치하는 무절제함의 피해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부분에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인간세상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따라서 창조질서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과 현대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절제로서 관리하는 일은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일상(日常)의 덕목으로 제고(提高)되어야 할 일이다. 이는 곧 신앙인 모두가 부여받은 사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다.
1991년에 개최된《창조질서 보존 및 완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늘날 만연된 자연파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만과 탐욕의 감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데는 겸손함이 약이다. 겸손은 절제의 정신으로 닦이고, 절제는 식탐을 조절하는 수행으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니 단식 또한 겸손의 시작이요 생명사랑의 첫걸음이다
새로운 정신으로 행하는 진정한 단식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세상에 참 기쁨이 주어졌고 그분의 복음선포로 근원적인 새로움이 다가왔습니다.
구약시대에 단식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고 기다리던 인간이 행하는 덕행의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기다리던 바로 그 구원이 예수님의 오심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구원의 기쁨이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영원한 기쁨이며 유한한 인간이 찾아가야 할 길이자 삶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모두가 초대받은 기쁨의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 기쁨 안에 머물지 못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때로는 슬픔과 고통 중에 살아가는 것일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 참 기쁨이며 어디서 기쁨을 찾아야 하고, 어떻게 슬픔과 고통을 기쁨으로 바꿔가야 하는지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영원한 기쁨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참 기쁨을 주셨음에도 더 많은 물질의 소유와 육신의 안락, 세상이 주는 힘을 얻으려 하고 거기서 기쁨을 찾으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세상과 물질이 주는 즐거움은 헛되고 덧없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도 유한합니다.
수없이 그런 체험을 하면서도 계속 물질과 세상과 육적인 것에서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변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들이 주는 기쁨은 스쳐지나가는 환상일 뿐이요, 변하지 않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바로 참 기쁨이며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것임을 다시 상기해야겠습니다.
우리네 삶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수없이 엇갈립니다. 우리는 그런 가운데서도 십자가와 죽음으로 부활의 참 기쁨을 마련해주신 예수님과 더불어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합니다. 참 기쁨은 고통의 과정을 사랑으로 참아냄으로써 주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교회의 신랑인 예수님의 친구들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인간적인 결점이나 나에 대한 태도 때문에 그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겠지요. 그러나 내 안의 감정이나 편견, 선입견과 같은 낡은 부대를 버리고 예수님의 새로운 부대로 모두를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나날의 삶이 힘겨울 때 그래도 기쁘게 살아가려면 예수님을 잊지도 포기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 함께 있음이 참 기쁨이요 그분만이 영원한 기쁨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구원의 새 시대에 우리도 잠시 지나갈 세상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그분과 함께 있지 못하고 그분을 잊어버림을 슬퍼하는 참 단식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오늘도 내 영혼에 새로운 부대를 지니고 예수님만이 고통과 죽음마저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과 기쁨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용서를 거저 베푸는 우리이길 기도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에 구연동화 대회가 있었습니다. 동화를 입으로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대회였습니다. 저의 발표가 끝나고 친구들은 제가 말하는 구연동화가 제일 재미있다면서 분명히 입상할 것이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저 역시 대회에 참석한 다른 참가자들보다 훨씬 더 잘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만족스러웠고, 입상할 것이라는 기대에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말도 더듬고 목소리도 작아서 무슨 말을 했는지 잘 알아듣기 힘들었던 참가자가 입상을 했고, 저는 아무런 상도 받지 못했지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한 친구가 심사위원 중의 한 선생님을 가리키면서 진짜로 재미없게 말하는 선생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렇게 말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평가를 할 수 있냐면서 큰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말까지 들으니 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처해졌다면 어떠실 것 같습니까?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고 이러한 불의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지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심사위원이 꼭 말을 잘 해야만 할까? 말을 잘 듣고 평가하는 능력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니?”
내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엉터리 심사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것이지, 만약 제가 입선했다면 그러한 판단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자신에게 떨어진 이유를 찾기보다, 외부에서 그 핑계거리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외부에서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 자신에게서 문제를 찾았을 때 바꾸기가 훨씬 더 쉽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당시에 열심한 사람들의 기준은 단식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열심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지요.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를 예로 들면서, 율법 때문에 하는 단식과 스스로 원해서 하는 단식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율법이라는 외적인 이유들 때문에 하는 단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해서는 하는 회개의 단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외적 이유들을 바라보는 삶이 아닌, 자기 자신의 내적 모습을 바라보고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화가 날 때는 화를 내야 할 대상을 바꿔라. 화내야 할 대상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의 자제력이다.(B.칼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두 명의 학생에게 똑같은 모양의 통나무와 칼을 나누어 주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한 학생의 앞에는 멋진 배를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의 앞에는 나뭇조각만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나뭇조각만 쌓여 있는 학생에게 무엇을 만들려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옆 친구처럼 배를 만들려고 했어요. 그런데 똑같은 것을 만들면 안 될 것 같아서 저는 비행기를 만들려고 했지요. 그런데 비행기 만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만들기 편할 것 같은 버스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바꾸다보니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깎은 나뭇조각만 쌓이고 말았습니다.”
한 학생은 배를 만들겠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지만, 다른 학생은 계속해서 목표가 바뀐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삶도 이렇지 않을까요? 분명한 목표가 있는 사람과 목표가 자주 변하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됩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삽니다. 하지만 목표가 아예 없거나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은 그 반대의 삶을 살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찬미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축제이지 고해가 아닙니다.
순례 제3일 6.30일(목) 어제 날의 주제는 ‘찬미의 날’이었습니다.
날씨도 우리 순례자들도 찬미의 기쁨으로 가득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여 강론 주제도 ‘찬미의 삶’으로 정했습니다.
지금 강론 쓰는 시간과 장소는 뭰헨을 지나 알프스 산맥을 배경한 산촌山村 호텔에서 7.1일 새벽에 6.30일 어제 하루를 회상하며 내일 7.2일 강론을 씁니다.
여기는 인터넷 사정이 매우 불편하여 8유로를 지불하고 간신히 Wi-Fi를 사용하여 7.1일 강론을 인터넷에 올렸습니다.
1.어제 저를 포함한 우리 순례자들의 일부는 2회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아침 슈바이클 수도원에서 수도원 10명 안팎의 수사님과 두분의 신부님과 함께 봉헌했습니다.
참 경건하고 아름다운 분위기였습니다.
저 역시 용기를 내어 아주 서툰 독일어에도 불구하고 함께 제대에서 봉헌했습니다.
새삼 미사의 고마움을, 미사는 ‘성령의 언어’요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언어임을 깨닫습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 분위기에 맞게 순수한 찬미의 마음으로 기쁘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노수사님들 역시 그대로 자기를 비운 겸손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 무아無我의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수도원을 떠나기전 나현승 스테파노 신부님은 순례자들에게 귀한 ‘약술(술이지만 주로 비상약품으로 쓰임)’을 선물했습니다.
독일 수사신부님이지만 33년을 한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셨기에 한국적 인정이 완전히 몸에 밴 분입니다.
2.뭰헨의 두 큰 성당을 순례했습니다.
광장에는 순례객들로 가득했습니다.
모두가 찬미의 기쁨으로 가득한 환한 얼굴들이었습니다.
먼저 방문한 상트 페터 성당은 뭰헨에서 가장 오랜된 성당으로 문헌상으로 1181년 오토 1세가 기존 교회를 증축했다 하니 이미 그전부터 성당은 있었을 것이니 거의 1000년 역사는 될 것입니다.
이어 방문한 성당은 프라우 뭰헨-프라이징 대교구의 주교좌 성당입니다.
1240년 경에 세워졌다하니 역시 800년 역사의 성당입니다.
성당이 증축되던 15세기 뭰헨의 인구가 1만3천명이었고, 성당 수용인원은 2만명이었다 하니 얼마나 거대한 성당인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여기 독일의 뭰헨만 아니라 독일은 물론 유럽전체 곳곳이 이런 유서 깊은 거대한 성당들로 가득하니 여러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긍정적 측면으로 이 모두를 ‘믿음의 표지’로 해석하여 옛 신앙인들의 믿음에 경탄할 수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측면으로 ‘가난한 민초民草들’이 얼마나 큰 어려움을 겪었겠나 하는 점도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부정적인 측면을 생각하면 마냥 보고 즐길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3.마지막으로 미사를 봉헌한 옛 베네딕도 보이에른 수도원 아나스타시아 소성당을 잊지 못합니다.
725년에 세워진 보이에른 수도원이니 무려 1300년 역사의 수도원입니다.
수도원 건물의 위용이 번성기에는 얼마나 큰 수도원이었겠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1803년 세속화로 인해 수도원은 해체되고 1930년부터는 살레시오회에서 인수하여 사용하고 있다 합니다.
모두가 사라져 갑니다.
수도원은 사라져도 하느님만은 영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살아계셔서 친히 우리 순례자들을 인솔하여 옛 신앙인들의 믿음의 발자취를 찾아 나서게 하셨습니다.
아나스타시아 소성당은 베네딕도 성인의 오른쪽 팔목 성유해가 모셔진 곳입니다.
수도원 설립후 몇 년 후 칼 대제가 옮겨왔다 합니다.
그리고 아나스타시아 성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바로 이 성당에서의 미사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함께 한 순례자들의 입당성가는 그대로 천상의 찬미처럼 들렸고, 미사 후 성 베네딕도와 성 아나스타시아의 성 유해에 침구하고 경의를 표할 때 순례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순수하고 경건했던지요.
그대로 한분한분의 아름다운 믿음을 보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순례자들은 성인들의 성유해를 통해 성인들을 우리에게 선물하신 하느님을 찬미했습니다.
삶은 고해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축제의 삶에 걸맞는 찬미의 삶입니다.
누가 저에게 무슨 기쁨으로 사느냐 묻는다면 저는 지체없이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산다고 말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분도수도자들이, 믿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하여 찬미의 사람들은 참으로 미사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미사의 아름다움입니다.
찬미의 사람들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를 삽니다.
보이메론 수도원 방문 때도 안내하신 분이 강조한 것도 ‘카르페 디엠!’ 오늘 지금 여기를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만나야 할 자리인 지금 여기가 하늘로 열린 문입니다.
바로 찬미의 삶이 온갖 환상을 거둬 버리고 우리 모두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살게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본말전도의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됩니다.
분별의 지혜에 따라 단식할 때 단식하고, 오늘 지금은 기쁨과 감사로 주님과 함께 축제의 삶, 찬미의 삶을 누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부대에 새포도주를 담는 삶입니다.
매일 새날의 새부대에 찬미의 새포도주를 담고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가 선포하는 그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온통 주님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아모스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산에서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모든 언덕에서 새 포주가 흘러내리리라. 내가 그들을 저희 땅에 심어 주리니, 그들은 내가 준 이 땅에서 다시는 뽑히지 않으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 새포도주의 은총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시고 오늘 지금 여기 당신 안에 깊이 심어 주십니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시편13,6참조). 아멘.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단식 대신 더 많은 사랑을>
양승국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의롭고 거룩하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을 위해 자신을 철저하게도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 즉 금욕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즐겨 실천하던 자기 통제 방식은 단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도자였던 모세는 대단한 단식가였습니다. 그는 틈만 나면 단식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위대한 대예언자 엘리야 역시 단식을 통해 깨어 기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구약 시대의 마지막 대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거의 음식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의 주식은 메뚜기요 들 꿀이었습니다. 거의 먹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표시입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철저하게 단식을 했습니다.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빼먹지 않고 단식을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성덕과 단식은 늘 함께 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하는 수단이었고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준비하는 도구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이나 단식을 하시며 스스로를 단련시키고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단식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십니다. 광야에서 단식하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가시는 곳 마다 잔치를 벌이십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쁜 마음으로 잔치자리에 앉으십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시며 포도주잔을 기울이시고 마음껏 축제를 만끽하십니다.
종래 대예언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상반된 예수님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묻습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그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판을 완전히 뒤집는 놀라운 대답, 바로 문제의 본질이자 핵심부로 우리를 인도하는 기가 막힌 대답을 펼쳐놓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즉 당신이 이 지상에 머무시는 기간은 인류 전체가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대축제의 기간임을 선포하십니다. 혼인잔치 때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산해진미 앞에서 우울한 얼굴로 단식한다는 것은 혼주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로서 혼주를 가장 기쁘게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준비한 음식 맛있게 먹어주는 것입니다. 벌어진 축제 마당에서 흥겹게 놀아주는 것입니다.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 공동체를 맞아들이시어 혼인잔치가 벌어졌는데 이 기간 동안 단식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색한 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이 장엄하고 축복된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 대축제 기간 동안 우리가 취할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참된 단식은 기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쁘게 지낸다는 것이 그냥 희희낙락하며 기쁘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꼭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오로 사도께서 그러셨듯이 고통 속에서도, 거듭되는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기뻐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늘 내 삶이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어도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니, 하느님께서 내 안에 현존하시니 기뻐하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참된 단식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것이 사랑스러운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 내 편에 선 사람들, 나를 챙겨주고 인정해주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헐뜯고 공격하고 깎아내리는 사람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수용하고 사랑하고자 노력하는 그 사랑이 참된 단식입니다.
예전에 덕적도로 바다낚시를 간 적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선을 타고 나갔는데, 너무나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배 엔진의 시끄러운 소음과 매연은 뱃멀미를 저절로 나게 했으며, 더불어서 좌우로 흔들리는 배의 움직임에 낚시는 뒷전이고 얼른 육지로 나갔으면 하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저 때문에 낚시를 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결국 선장실에 누워서 혼자 끙끙 대고 있었지요.
이제까지 뱃멀미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멀미약을 먹지도 또 붙이지 않고, 씩씩하게 배에 올라탔지요. 그러나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이제까지 흔들림이 거의 없는 큰 배만 탔으니 뱃멀미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무튼 힘들게 누워 있는데, 낚시를 즐기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들은 뱃멀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지, 신나게 낚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우럭을 낚았다고 기뻐하시고, 어떤 분은 자그마한 놀래미 한 마리 겨우 잡았다며 아쉬워합니다. 그런데 저는 피라미라도 한 마리 잡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군요.
멀미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저의 모습입니다. 분명히 이 멀미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바로 멀미약입니다. 그러나 멀미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에 멀미약을 쓰지 않았고, 그래서 그 고생을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삶. 쉽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어렵고 힘든 삶의 연속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분명히 주님께서 주십니다. 그리고 매순간 우리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당신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 분명히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고 기쁨과 행복의 삶을 지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는 내 뜻을 강조하고 있지요. 예전의 모습에만 안주하면서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후회와 아쉬움만을 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묻지요. 즉, 과거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 제자들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이 새 포도주이고, 이 새 포도주인 당신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새 부대와 같은 새로운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새 포도주의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만 연연하면서 헌 부대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항상 열려있는 마음으로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시련이 주님을 통해 해결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은 ‘나’를 없애지 않으면서 ‘우리’를 만들어 낸다(무라카미 하루키).
감사합니다.
어제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인천교구에 훌륭한 새 사제 한 명이 탄생하셨습니다. 밤늦게 성당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참 많은 분들이 기억나더군요. 특히 봉사자들에게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일주일동안 열심히 성가와 전례 연습을 하고 또 어제 서품식에도 너무나도 수고한 우리 신학생들, 예쁘지만 너무나도 불편한 한복을 입고 봉사해주신 성소후원회 임원과 지구장님들, 제대 꽃꽂이를 아름답게 해주신 전례꽃꽂이 회원들, 주차 봉사를 통해 복잡한 차량 통제를 해주신 운전기사 사도회 회원들, 그 외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일을 해서 서품식을 잘 마칠 수 있도록 해 주신 성소국 수녀님과 직원.
그밖에 많은 분들이 열심히 봉사해주시고 기도해주셨기에 서품식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는데 정작 저는 한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말로만 일한 것 같기도 하고, 또 기도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도 수고했다는 말을 제일 많이 들었지요.
어떠한 일이든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스스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질 때가 얼마나 많던 지요.
함께 그리고 서로 일치하면서 일할 때, 하느님의 일을 더욱 더 이 세상에 펼칠 수 있음을 늘 잊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주님을 따라가야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새로워 질 수 있습니다.
부대가 새 것이 되기위해서는 새 포도주이신 하느님 말씀을 매일매일 우리들에게 들려주어야 합니다.
말씀이 품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말씀이 변화시키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를 갈고 닦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말씀이 더이상 낯선 언어로 전락하였어는 안됩니다.
생명의 말씀과 함께 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립니다.
이와같이 단식의 정신또한 생명의 축복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빠져버린 단식은 스스로를 메마르게 할 뿐입니다.
날마다 말씀으로 새로워지는 것이 단식입니다.
서로를 모두 다 살게하는 것이 단식입니다.
바로 이 단식의 순간이 새 포도주와 새 부대가 만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만나고 있는지요?”
우리 자신을 잊은 채
하느님 말씀을 담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바라시는 단식의 기쁨입니다.
모든 순간, 주님과 함께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