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봉감 수확 일손 돕기
시월 끝자락 목요일은 큰형님 댁의 대봉감 수확 일손을 도우러 고향으로 걸음을 했다. 이른 아침 같은 생활권에 사는 작은 형님의 차에 동승해 남해고속도로를 달려 함안 군북에서 의령으로 내려섰다. 지난 시월 초순 국립 국어사전 건립 추진위원회가 주관한 한글날 기념식이 의령 군민회관에서 열렸을 적 고향을 찾은 이후 다시 가게 되었다. 그때는 큰형님 댁을 찾을 겨를이 없었다.
고향에는 팔순을 바라보는 큰형님은 고령과 지병이 있음에도 여러 가지 작물의 농사를 짓고 있어 조카들이 자주 들리고 아우들은 가끔 다녀오곤 한다. 예전에는 잎담배와 양파 농사까지 지었으나 힘에 부쳐 짓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벼농사와 밭작물은 기본이고 여름에는 마늘을 수확하고 가을에는 대봉감을 딴다. 고추와 콩도 상당한 면적에 심어 해마다 그 수익은 제법 되지 싶다.
고향 집에 닿으니 큰형님 내외는 선별 포장한 대봉감을 실어 마을회관 앞으로 운반하는 중이었다. 어제까지 딴 감은 무게에 따라 자동으로 가려지는 선별기를 통해 종이박스에 포장해 가락동 농산물 시장에 경매로 올려보낸다고 했다. 절반 정도 수확했는데 400박스가 올라갔으니 모두 따면 800박스 넘을 예상이었다. 올해는 예년보다 대봉감 작황이 좋은 편이나 시세는 낮다고 했다.
대봉감을 실은 경운기를 따라 마을회관 앞으로 따라가 박스를 내려놓고 집으로 와 아침밥을 먹었다. 식후에는 잠시 쉴 틈도 없이 마을회관에 가까운 밭둑으로 나가서 감을 따기 시작했다. 볼이 발갛게 착색이 된 감을 따고 아직 푸른빛이 도는 감은 따지 않았다. 큰형님 내외가 감나무 키를 낮게 낮추어 키워 사다리를 올라타고 따야 할 정도로 높은 곳의 감은 적은 편이라 수월했다.
공직에 몸담은 마산의 작은 조카도 하루 연가를 내어 일손을 도와 능률이 더 올랐다. 진주에 사는 큰 조카는 주말에 들릴 예정이라고 했다. 대봉감이 풍년이 들어 이번 주말 이후 한꺼번에 경매시장으로 물량이 올라가면 시세가 떨어질 예상이라 큰형님은 하루라도 먼저 보내려는 심산이었다. 그래서 본래 주말을 넘겨 아우들의 일손을 빌리려고 했는데 며칠 당겨 감을 따는 셈이다.
마을회관 근처 밭둑에서 발갛게 착색된 대봉감을 모두 딴 이후 집 근처 밭둑에서 감을 땄다. 그 사이 큰형님 내외는 자동선별기를 거쳐 종이박스에 같은 무게의 감을 포장해서 마을회관 앞으로 실어 날랐다. 아우들과 조카는 집 근처에도 상당한 양의 대봉감을 따느라 여념이 없었다. 큰형님 내외분도 먼저 딴 대봉감을 선별 포장을 마치고 밭둑의 감을 경운기 적재함에 실어 날랐다.
때가 되어 안마당에 야외용 돗자리를 펴고 삼겹살을 구워 상추쌈과 곁들여 점심을 먹었다. 나는 즐기는 반주로 맥주를 소주에 타 몇 잔 곁들였다. 식후 내가 가꾸는 창원의 텃밭에서 필요한 멀칭 비닐과 비료를 챙겨 놓았다. 밭둑에는 단감도 있는지라 집으로 가져가 먹을 양은 별도로 따 놓았다. 내가 지인에게 보내는 대봉감 4박스는 포장해 택배회사 기사가 와 접수해 가도록 했다.
짧아진 가을 해가 중천에서 기울도록 대봉감을 따는 일로 분주하게 보낸 시간이었다. 감나무에 매달린 감을 따는 일도 힘들지만 감을 채운 박스를 경운기 적재함에 싣고 내리는 일은 더 힘들었다. 아우는 오늘 이후 한 번 더 들릴 처지가 아닌지라 일손이 모여졌을 때 한껏 돕지 않을 수 없었다. 농사일은 평소에 쓰지 않은 근육을 써서 무리가 올지라도 몸을 사리지 않고 거들었다.
귀로에는 감을 선별하면서 처지는 파지를 두 포대나 챙겨 왔다. 파지는 못 쓰는 종이를 이른다만 대봉감 농가에서는 정품에 미치지 못하는 감을 이르기도 했다. 착색되는 과정에 검은 얼룩이 생겼거나 기형 감은 포장에서 제외했다. 이들 대봉감도 먹기에는 맛의 차이나 아무 이상이 없다. 큰형님이 애써 농사지은 콩 다섯 되는 금을 쳐 드리고 가져왔는데 밥을 지을 때 섞을 참이다. 22.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