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청도 신둔사를 찾아서
평소처럼 잠을 깼다. 거실에 나가니 집 사람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다른 날보다 점을 조금 더 오래 잤으나, 몸이 피곤하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는 일일문학회 회원들과 경주 답사를 다녀왔다. 경주는 대구와 가까운 곳이어서 대구사람들에게는 친숙한 곳이다. 대구사람이면 경주의 유명한 문화유적지는 거의 다녀왔다. 그래서 가을 소풍 격인 답사지를 경주로 정한데에 약간은 달갑잖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제 답사에서는 내가 안내를 맡았다. 나는 경주에서 학교를 다녔고, 우리나라 불교 미술사도 공부하였으므로, 안내할 곳이 많지만, 문학회 회원님들의 반응을 미리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어제 답사 여행은 무사히 마쳤고, 나의 안내에도 만족한다는 반응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몸의 피로감도 느껴지지 않아서, 오늘은 기분도 좋았다. 집사람이 피곤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절집 찾기 여행이 가능하겠느냐는 뜻이 담겨있다. 피곤하면 오늘은 집에서 쉬자는 말도 했다.
“아니 괜찮아. 오늘은 지난번에 들리려다 포기한 신둔사에나 가 볼까.”
내가 먼저 제안했다. 신둔사는 청도 읍내에서 멀지 않는 절이라니 다녀오기에 수월할 것이라는 계산도 들어있다. 집사람도 좋다면서 부엌에 들어가서 도시락을 준비하였다.
청도길은 제법 익숙하다. 동대구 역에서 노인용 무궁화호 표를 끊고 차를 타면 25분 뒤에 청도역에 내려준다. 차창에 비치는 시골 풍경도 흐뭇하다. 청도역은 나의 고향 역인 건천역의 분위기도 많이 느껴진다.
청도역에서 택시를 타고 신둔사를 찾아갔다. 신둔사는 청도의 진산이라는 남산(화악산)에 있다. 화악산은 청도와 밀양을 경계 짓는 산으로 높이가 930m나 이른다니 제법 높은 산이다. 절이 있는 골짜기는 꽤 깊었다. 좁고, 고불고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렸다, 나무들이 길을 덮고 있어 터널을 이룬 곳이 많았다. 택시 기사는 여름철에는 이 골짜기를 찾는 피서객이 많아서 길이 복잡하다고 했지만, 이제는 여름도 숙진 탓인지 길은 조용했다.
절이 있는 곳은 제법 높은 산 중턱이어서 깊은 산속의 분위기이다. 몇 채의 요사채가 있기는 하였으나, 초라했고 법당은 대웅전 현판을 달았지만 겨우 한 칸 건물이어서 암자처럼 느껴졌다. 년세가 지긋하신 스님이 차 한 잔을 하려느냐고 했지만,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했다. 아내가 법당에 들어간 사이에 나는 돌계단에 앉아서 산마루와 하늘로 눈길을 옮겨 가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노라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절 이름이 신둔(薪芚)이다. 땔나무 신이고, ‘돈’은 짚으로 엮은 둥근 망테기라는 뜻이라고 한다. 농사군이 사는 시골 집 냄새가 물신 풍긴다. 절집을 여기저기 다녀보면 깊은 산골에 있다고 하여 시골 냄새가 물씬 풍기는 것은 아니다. 세련되게 다듬어 둔 절은 산속 절이라도 도시 절보다 오히려 더 인간의 떼가 느껴진다. 그러나 이 절에서 첫 인상으로 느껴오는 것은 옛날 초갓집의 분위기이다. 촌티가 덕지덕지 묻어 있다.
절을 소개하는 안내판을 보았다.
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화악산 남쪽 중턱에 있는 절로서 대한 불교 조계종 제 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청도의 조계종 절은 모두가 동화사 말사였다.
이곳은 삼국 이전시대에 이서국이다. 이서국을 지켜주는 절이었다고 하였으나. 믿을 수 없다. 신라 지방은 불교를 받아들인 시기가 아주 늦는데. 이서국을 지키는 절이었다고 하니 어딘가 설명이 매끄럽지 못하다. 그러나 신라가 처들어 왔을 때 이서국의 왕실이 이 절로 피난왔다는 설명이다. 사실은 바로 이웃하여 있는 은왕봉에 피신하였다고 하나 이 절의 이웃이라서 그렇게 설명하였다. 이 산에 이서국을 지켜주는 산성이 있었다는 말로 믿어진다. 산성 터라는 것이 더 사실인 듯 하지만, 하여간에 그냥 믿기로 하자. 전설은 의미로 해석해야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고 있는 또 하나는 바위에 종처럼 생긴 부도를 음각해 둔 것이다. 가운데에 구멍을 뚫어, 그 안에 사리를 봉안해두었다. 휘귀한 양식이라서 소개한다고 하였으니 기억해 두자.
이 절에서 울리는 종소리는 신라가 침범할 때 나라를 지키려다 목숨을 바친 이서국의 영령을 위로한다고 하였다.
이 절도 정말 산골 절간처럼 조용하다. 요즘은 산골 절이라고 하여 조용하지만은 않아서 해 본 말이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리고, 새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여기까지 실어다 준 택시 기사 아저씨가 이 산에는 등산길이 많다고 하였는데, 절 주차장이나, 길의 여기저기에 세워 둔 차들은 등산객의 차인 듯하다.
내려오기로 했다. 택시를 타고 온 길이 얼마의 거리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차가 산길을 천천히 달리면 실제의 거리보다 더 멀리 느껴지기 때문이다.
걸어서 내려오는 길이 많이 가파르다. 가파르더라도 내리막길이니 시간이 많이 단축된다. 그러나 아내와 나는 ‘늙은이는 넘어지면 안 된다’면서 조심조심 걷느라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내려오는 길은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서 뻐근한 수가 많지만, 지금은 뻐근함도 많이 줄어 들었다.
산을 거의 내려왔으나, 큰 길을 찾아가는 길이 더 지루하다. 우리 부부는 지루한 길을 걷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 그냥 땅만 보고 뚜벅뚜벅 걷는다. 길 가에는 감나무 밭도 펼쳐있고, 복숭아 밭도 있다. 그림 같은 집도 있다. 그런 집은 거의가 음식점이거나, 숙박하는 곳이거나 카페 등이다. 집사람은 길가에 있는 호박잎을 땄다. 그럴 때마다 농촌 인심이 옛과 다르다면서 따지 말도록 말리곤 했는데, 오늘은 밭둑도 아닌 그냥 노지라서 내버려 두었다.
차들이 많이 다니는 큰길까지 내려왔다. 버스 정류소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는다. 버스 정류소가 보이는 곳까지를 무작정 걷기로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도 시내버스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안내문에 면 소재지까지 하루에 3회 정도 다닌다고 하니, 아예 버스 타기를 포기하고 걷는 것이 좋겠다. 발바닥이 화끈거리고, 다리도 저려 왔으나 택시를 부르고 싶지 않는 것은 살아온 습관 때문이다. 이럴 때는 다리가 싱싱한 젊은이들이 택시를 더 잘 부를 것이다. 이것 또한 그들 삶의 습관이니, 내가 그러지 않는다고 나무랄 일은 아니다.
길 가에 찻집이 있으면 들려서 쉬려고 하였으나 찻집도 없었다. 밭과 들녘만이 멀리까지 펼쳐진 곳인데 찻집이 있을리 없지. 걷고 또 걸었다. 길의 저 멀리서 큰 건물이 여러 채 보인다. 그곳에 닿으니 찻집이 있어서 들렸다. 손님은 한 명도 없다. 다리를 쉬면서, 창 밖의 그림같은 풍경에 취했다. 저쪽 산 자락에는 알록달록한 지붕들의 동네가 마치 서구의 마을같다. 찻집 아주머니는 바로 다름 정류장이 청도군청이라 했다. 그럼, 다 왔잖아.
그래서 또 걸었다. 정말 군청이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길 가에 건물들이 이어져 있고, 차도 많이 다닌다. 지난번에 왔을 때 여기서 청도역까지 멀지 않더라 싶어서 걷기로 했다. 사람을 만나면 청도역 가는 길을 물었다. 팔을 들어 길 저쪽을 가르켜주면서, ‘먼데요.’ 했다. 청도역 가까이 가서도 여전히 ‘먼데요.;라는 말을 들었다. 아마도 우리의 모습이 노인네라서, ’노인이 걷기로는 먼데요.‘라는 뜻 이었으리라.
청도역에 닿으니 무궁화 열차가 방금 떠났다나. 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제는 차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다. 이것도 노인네의 특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