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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기연(奇緣)과 음모(陰謀)
사흘이 지나도록 백하련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진일문은 몇 번이나 밖으로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억지로 이를 누르고 있었다.
행여라도 그런 행동으로 인해 그녀에게 누가 될까 해서였다.
그러나 역시 참을 수 없는 것은 배고픔이었다.
애초에도 굶주림 때문에 사단이 났거니와 그 때로부터 사흘간이나 그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이었다.
배고픔이란 실상 그 어떤 고통보다도 참기 힘들다.
사흘간을 꼬박 굶은 그는 더욱 수척해져 있었다.
더욱이 조금만밖으로 나가면 바로 예전에 보았던 복숭아 숲이었다.
먹음직한 복숭아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것이다.
'쯧! 비극이 따로 없군.'
진일문은 고소를 지으며 새삼 사위를 둘러보았다.
유독 그가 있는 곳의 복숭아나무들만이 모두 말라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다시 진에 휘말려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은 그를 아예 꼼짝도 못하게 묶어 놓았다.
그는 하릴없이자신이 갇혀있는 소공간은 맴돌았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 혹 백누님에게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진일문은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백하련에 대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이 도화림의 주인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보니 답답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사영화가 자신을 찾느라 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도록 발견해내지 못했으니 필경 황룡보에서도 큰 소동이 일어났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후... 그들은 아마 내가 도망을 쳤다며 이를 갈고 있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상황이나 오해쯤은 그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혹시 백하련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마음이 무거운 것을 제외하면.
아무튼 진일문은 이내 당면한 난제 쪽으로 생각을 돌렸다.
최소한 아사(餓死)는 면해야 기다림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어디 배를 채울 만한 것이 없을까?'
마침내 그는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보리라 작정하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확실히 이 곳에는 뭔가 특별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 존재했다.
우선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열되어 있었는데, 이는 웬지 말라죽은 것 자체를 더욱 더 의혹으로 부각시켰다.
'이렇게 가지런하게 심어 놓고선 신경을 쓰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말라죽은 데는 필시 곡절이 있을 것이다.'
바닥의 흙도 여느 곳과는 틀렸다.
유난히 검은 빛이 돌았으며 푹신푹신했다.
코를 가까이 대어보니 기이한 향기가 은은하게 느껴지지도 했다.
진일문은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나무의 몰골은 점점 더 형편없어졌다.
심지어는 백골처럼 하얗게 탈색된 것도 있었다.
그 상태로 얼마쯤 갔을까?
문득 나무의 군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이번에는 흰 모래로 된 바닥이 드러났다.
모래의 한가운데에는 검고 흰 두 개의 암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희한한것은 그 암석 위에 각기 또 다른 나무들이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찌 저런 현상이......? 암석 위에서도 저렇듯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인가?'
진일문은 신비감에 사로잡힌 채 중얼거렸다.
키가 겨우 두 자에 불과한 그 나무들은 역시 각각 희고 검었다.
즉 검은 암석 위의 나무는 검은 색, 흰 암석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흰색으로써 서로 마주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두 그루의 나무에는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흰 나무에는 피처럼 붉은 열매가, 검은 나무에는 푸른 색 열매가 매달려 있었다.
모두 하나씩이었는데 모양은 복숭아 같았다.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열매가 워낙 탐스럽게 생겼으므로 따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보아하니 몹시 귀중한 것인 것 같구나. 허락 없이 먹을 수 있는 류의 것이 아니리라.'
그 때였다.
과아악--!
허공으로부터 괴상한 음향이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대한 새가 빙글빙글 선회하고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진일문은 내심놀라 부르짖었다.
'아! 저것은 전설에나 나오는 붕새가 아닌가?'
그 새는 날개의 길이만 해도 근 이장이 넘어 보였으며 언젠가 그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붕조(鵬鳥)와 매우 흡사했다.
붕조란 학과 독수리의 중간 형태로써 희대의 영조이다.
만년을 자라면 전신이 금색이 되어 금붕으로 불리우게 된다.
천지간의 영물과 희귀한 약초만 먹고 자라며 부리가 강철같아 바위도 가루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해진다.
한 번 날면 천리를 눈 깜짝할 사이에 가로지를 수 있고, 영성을 지니고 있어 선계(仙界)에나 머문다는 새였다.
진일문은 가슴이 뛰지 않을 수 없었다.
허공을 선회하는 새는 털빛이 붉은 색이었다.
만년이 거의 채워져 가는지 금색의 조짐을 군데군데 보이고 있었다.
'아! 내가 붕조를 만나게 되다니.......'
그는 배고픔도잊은 채 넋을 잃고 붕조를 바라보았다.
문득 흑암과 백암을 둘러싸고 있던 모래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 때였다.
그것은 마치 갑작스럽게 소용돌이라도 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저것은!'
진일문은 깜짝놀라 뒤로 물러났다.
잔뜩 부릅떠진 그의 눈에 실로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들어왔다.
모래가 솟구치며 놀랍게도 한 마리의 대망(거대한 구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길이가근 오장 여에 달했고, 몸체가 거무튀튀한데다 윤기가 흘렀다.
머리는 가히 항아리만 했는데 쩍 벌어진 입으로 길다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더욱 괴이한 것은 머리 한가운데에 삼각형의 뿔이 돋아나 마치 관을 쓴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쓰쓰쓰쓰--
대망은 암석 위로 기어올라가더니 하늘을 향해 더 크게 입을 쩍 벌렸다.
아마도 붕조를 향해 모종의 위협을 가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이 기세에 밀렸는지 붕조도 주춤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낮게 내려왔다 싶었더니 금세 허공으로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이들 괴수를 지켜보는 진일문은 도무지 현실감을 갖기가 힘들었다.
인간 세상에 이런 괴물이 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이들의 대치에서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묘한 감흥을 느꼈다.
휘이잉--!
굉음을 일으키며 붕조가 무섭게 내리 꽂혔다.
부리를 아래로 향한 채 순간적인 기습을 단행한 것이었다.
그러자 대망은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또아리 틀며 입을 쩍 벌렸다.
그것은 정녕 눈부신 응전태세였다.
급기야 혈투(血鬪)가 벌어졌다.
붕조와 대망의 싸움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모래와 더불어 주위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회오리바람에 마구 휘날렸다.
붕조는 연신 강철 같은 부리로 대망의 머리를 쪼으려 했고, 대망은 그런 붕조를 한 입에 물려고 덤벼들었다.
하늘과 지상을 하나로 잇는 그 싸움은 그야말로 일대 장관이었다.
휙!
대망이 꼬리를무섭게 흔들자 붕조는 괴성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꼬리에 맞거나 감기면 끝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과아아악!
붕조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사위의 공기를 찢었다.
진일문은 약간떨어진 위치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곧 괴수들이 싸우는 이유를 알았다.
'저토록 맹렬히 싸우면서도 저들은 두 그루의 나무만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고 있다.
아마도 저 나무의 열매를 차지하려고 싸우는가 보구나.'
그의 추측은 맞았다.
실상 영물에는그것을 지키는 수호신이 있게 마련인즉 대망이 바로 그 역이었다.
반면에 붕조는 영물을 차지하기 위해 온 불청객으로 그들의 격렬한 싸움은 도시 끝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만사가그렇듯 그 일전에도 끝은 있었다.
붕조가 발톱으로 대망의 허리를 잡았는가 싶더니 눈을 팍 쪼아버렸다.
캬악!
눈알이 터진 대망은 괴로운 듯이 온 몸을 비틀어댔다.
이로써 선기를잡은 붕조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발작하는 틈을 타 날쌔게 대망의 목을 물어버렸다.
문제는 대망의약점이 바로 그 부분이라는 점이었다.
그 곳이 아니라면 천하의 어떤 보검으로도 대망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푹!
피가 솟구쳤다.
붕조의 부리가 여지없이 대망의 급소를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캬아악--!
비명이 숲 전체를 진동시켰다.
붕조는 집요하게 대망의 목을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 따라 대망의 몸부림은 더욱 더 거세어졌다.
"엇!"
관전하던 진일문이 짧게 비명을 발했다.
붕조가 잠깐의 실수로 대망에게 다리를 감긴 것이다.
대망도 기회를잡자 이를 놓칠세라 즉각 역공격을 펼쳤다.
순식간에 붕조의 전신을 휘감아 버렸으니, 이른바 그들의 싸움 결과는 물고 물리는 형식이었다.
결국 대망은 붕조에게 뇌수를 몽땅 파 먹히고 말았다.
살아날 가망이라고는 단 일 푼도 없었다.
하지만 대망은죽어가면서도 최후의 힘으로 붕조를 조였다.
따라서 붕조 역시도 숨이 넘어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일문은 탄식해마지 않았다.
"양패구사(兩敗具死)라니......."
급기야 붕조와대망이 함께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이 공전절후의 사투는 막을 내렸다.
그 때까지도 두 마리의 괴수는 서로 얽혀 있는 상태였다.
진일문은 한참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두 그루의 나무는 그들 싸움의 여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반쯤 뽑혀져 있었다.
열매도 곧 떨어질듯 위태롭게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열매를 땄다.
붉고 푸른 그 열매들은 약간만 힘을 주어도 터져버릴 것처럼 무르익어 있었다.
그것은 또한 향기만으로도 금세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을 가져왔다.
'대체 무슨 열매이길래 천지간에 보기 드문 두 영수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차지하려 드는 것일까?'
진일문은 기이한 느낌에 이끌려 열매를 코끝에 대어 보았다.
그러자 그윽한 향기는 곧 그의 온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실로 강렬한 유혹이었다.
주린 배를 안고 있는 그로서는 한 입에 삼켜버려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덕분에 그는 열매를 들고 갈등을 일으키다가 고개를 저었다.
과아아악......!
등뒤로부터 하는 기묘한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진일문은 흠칫 놀라 돌아섰다.
'아! 붕조가 아직 죽지 않았었구나.'
과연 붕조는 대망에게 휘감긴 채 홍옥처럼 붉게 빛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간절한 애원을 담은 채.
'이것을 달라는 뜻이 아닐지......?'
진일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붕조의 시선이 자꾸만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열매를 향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혹시 하는 심정으로 붕조에게 물어 보았다.
"이 열매를 먹겠다는 거냐?"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붕조가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진일문은 너무도 신기한 나머지 더 생각해볼 여지도 없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붕조는 커다란 부리를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열매를 집어 삼켜 버렸다.
'아차! 내가 이러는 것이 아닌데.'
후회한 아무리빨라도 늦는 법이다.
진일문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열매가 붕조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그는 뒤늦게야주인의 허락도 없이 붕조에게 영과(靈果)를 내준 자신을 깨닫고는 자못 난감해지고 말았다.
어쨌든 영과를섭취한 붕조의 몸에서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털빛이 서서히 금색으로 탈바꿈하더니 눈까지도 금빛 광채를 발하는 것이었다.
푸드득--!
붕조는 몸을 한 차례 움직여 가볍게 대망의 몸뚱이로부터 벗어났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실로 뜻밖이었다.
과아아악!
붕조는 느닷없이 진일문을 덮쳐 왔다.
"앗!"
비명과 함께 그는 맥없이 쓰러졌다.
뿐만 아니라 붕조의 날개에 어찌나 세게 얻어 맞았는지 그 즉시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런데 이후로붕조의 행동이 이상했다.
기절해 있는 진일문에게 다가가더니 긴 부리를 늘어뜨려 그의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해치려는 행위는 아니었다.
진일문은 물론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사이, 붕조의 부리에서 기이한 액체가 흘러나와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것은 농도가 진해 끈끈하게 보이는 유백색 액체였다.
그 상태에서도진일문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누워 있었다.
붕조는 계속하여 타액을 분비해냈다.
그리고는 부리로 그의 입을 벌려 그 속으로 흘려 넣어 주기도 했다.
타액은 진일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무의식 중에 그것을 받아 마신 셈이 되었다.
붕조는 대략 향 한 자루가 탈 시간에 걸쳐 내내 타액을 토해 주었다.
이윽고 부리를거둔 붕조는 날개를 펴더니 힘차게 하늘을 향해 날아 올라갔다.
눈부신 금빛 날개는 전설상의 금붕(金鵬)으로써 전혀 부족함이 없는 면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그 새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곳을 떠나 버렸다.
그 직후, 회색 그림자 하나가 전광 같은 빠르기로 장내에 나타났다.
아울러 그 회영은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발했다.
"아아! 십 년의 공이 허사로 돌아갔구나."
회영은 땅에 내려서자마자 발을 굴렀다.
심지어 금붕이 날아간 하늘을 바라보며 노화를 터뜨리기도 했다.
"우우! 멀리 서역국(西域國)으로부터 이식해 와 지난 십 년간 온갖 정성을 다해 가꾸었건만, 음양천도신과(陰陽天桃神果)를 천산금붕(天山金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회영은 한 명의 여승이었다.
안색이 싸늘해 보일 정도로 흰 데다가 눈썹이 가늘어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었다.
나이는 중년쯤, 손 안에 쥔 염주를 신경질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이어 여승은 머리가 으깨어져 죽어있는 대망을 보더니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신과를 수호하라고 묘강까지 가서 초빙해 왔거늘!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이구나."
그녀는 원독에찬 눈빛을 흘려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한 쪽에 쓰러져 있는 진일문을 발견하고 는 흠칫했다.
아마도 이 곳에 외부인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눈을 더욱 가늘게 좁혔다.
"흥! 일이 안되려니 침입자까지 있었군. 대체 이 작자는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여승은 모로 쓰러져 있는 진일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발끝으로 툭 건드려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이게 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탄성이 새어나왔다.
"오오! 금정홍(金精紅)이다. 이럴 수가! 천산금붕이 자신의 생명이나 다름 없는 금정홍을 이 자에게 토해내 주었다니......."
여승은 만면에격동의 빛을 띄었다.
즉 진일문의 얼굴에 발라져 있는 유백색의 타액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타액은 어느 덧 그의 피부 속으로 거의 스며들어 극히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여승은 곧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신비한 현상을 목도해야 했다.
사실 진일문의얼굴로 치자면 깡마르고 창백한 데다가 눈가에 검상까지 길게 나 있어 누가 보더라도 고개를 돌릴 정도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피부가 느리게 움직이며 근육의 변화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오오! 이럴 수가......."
여승의 눈이 한껏 크게 떠졌다.
누렇게 떠 있던 진일문의 피부가 광택이 흐르는 백옥 색으로 변했을 뿐더러 눈까풀 위의 검상까지도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볼품없었던 그의 얼굴은 본래 그가 가졌던 용모를 회복하고 있었다.
단지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훨씬 성숙해져 있다는 정도였다.
짙은 검미와 우뚝한 콧날, 주사를 칠한 듯 붉은 입술 등이 가히 반안이나 송옥을 연상케 했다.
여승은 이 모든 과정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켜 보았다.
그녀는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부처님께서 빈니를 위해 신과 대신 또 다른 보물을 내려 주셨도다."
그녀는 몹시도흥분한 것 같았다.
연이어 읊조리는 그녀의 음성은 어쩔 수 없이 떨려 나오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부처님이 내려주신 선물이다. 어서 빈니의 처소로 가자꾸나."
여승은 진일문을 번쩍 안아들더니 어딘가로 신형을 날렸다.
휘익--!
그녀의 신형은눈 깜짝할 사이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팔보간섬이라는 절정의 경신술이었다.
여승이 사라지고 난 후, 그 자리에 이번에는 자색옷을 입은 여인이 나타났다.
추악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여인.......
백하련이었다.
그녀는 추면에 근심을 가득 담고는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간 구해낼 기회를 얻지 못해 이 곳에 두었더니만, 진동생은 금붕의 영액을 취하게 되었구나. 이는 무림인이라면 누구나 염원하는 기연이다. 하지만 사부께서 알아차리고 나서신 이상 복이 될지 화가 될지는 예측할 수가 없구나."
백하련은 눈에어두운 그림자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쪽으로 사고가 흐르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불길한 예감을 털어버리기라도 하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몸을 돌렸다.
복숭아나무 사이로 사라져 가는 그녀로부터 한 가닥 비장한 독백이 흘러 나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막으리. 진동생에게 더 이상 불행한 일이 생겨서는 안된다."
백하련은 어느새 진일문과 자신의 운명을 한데 묶어놓고 있었다.
처절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이 그녀의 의식을 자연스럽게 뒤바꾸어 놓고 있었다.
한 달이라는 기간은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한 달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나갔다.
왜냐하면 시간을 보내는 자의 마음이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만일 고초를 겪었더라면 문제는 달랐으리라.
무언가 충일감에 이르게 하는 시간들과 벗하다 보니 한 달이라는 기간도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 버리더라는 말이다.
진일문.
그는 평생을 통해 지금처럼 이렇게 안락하고 평온해본 적이 없었다.
누구에게도 욕을 듣거나 매를 맞지 않아도 되었다.
제대로 갖추어진 식사를 때맞춰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마굿간을 돌보는 임무에서도 해방된 지 오래였다.
진일문이 현재머무르고 있는 곳은 비취암의 정실이었다.
이 곳에서 그는 매일 잘 먹고 충분한 수면을 취할 수 있는가 하면,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을 수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거북한 점이 있다면 하루에 두 번씩 약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이었는데, 그 약은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지 맛이 고약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약이므로 쓴 거야 당연한 이치였지만 일단 냄새만으로도 벌써 비위가 상하니 먹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그 동안 살기 위해 숱하게 역겨운 음식물들과 접해본 그였으나 그 약 만큼은 가능하다면 사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진일문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절정사태(絶情師太)의 성의를 거절할 입장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절정사태란 바로 비취암의 암주(庵主)였다.
- 아가야, 너는 워낙 몸이 허해져 있어 당분간은 이 약으로 체력을 다스려야만 한단다. 거르지 않고 마셔야 기간을 단축할 수 있으니 이 점을 염두에 두어라.
그가 금붕조에게 채여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는 절정사태에 의해 비취암의 정실로 옮겨진 후였다.
당시에 절정사태는 이런 말로써 그를 위로해 주었다.
- 아가,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이제 너를 해칠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빈니가 너를 보호해 주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진일문은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마치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찌 된 셈인지 절정사태는 그의 내력까지도 알고 있었다.
단지 왕중헌의 제자였다는 이유로 지난 이 년여에 걸쳐 그가 당했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면에 있어서도 그녀는 책하기는 커녕 이렇게 말했었다.
- 빈니만은 네가 아무 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단다. 오히려 그들이 너에게 행했던 짓들이 죄악이다. 이제 안심해라. 이 곳에 있으면 너를 괴롭힐 사람은 아무도 없단다.
진일문은 혹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들이 현실의 것으로 확인되자 결빙되었던 그의 마음은 실로 오랫만에 봄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가 현재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도 그 날로부터였다.
바취암은 조용한 암자였다.
여승들만 있었는데 그나마 열두어 명에 불과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불경을 외우는 소리와 도화림의 새소리밖에 없었다.
절정사태는 매일 같이 진일문을 찾아와 진맥을 했다.
처음에는 싸늘한 인상 때문에 별다른 의도가 있지 않나 의심을 하기도 했으나 차츰 그녀의 정성에 감동하여 신뢰를 가지게 된 그였다.
아울러 진일문은 몇 가지 사실을 더 알게 되었다.
비취암주인 절정사태는 사영화의 사부였다.
그녀에게는 도합 열두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속가제자가 두 명 있었다.
그들이 바로 사영화와 백하련이었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는 모두 머리를 깎은 비구니들이었다.
그 동안 진일문은 한 번도 사영화를 만나지 못했다.
대신 그의 곁에는 백하련이 있었다.
그것도 그의 시중을 들기 위해서였다.
"누님, 사태는 정말 좋은 분이오. 세상에서 그 분보다 더 자비로운 분은 없을 것이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 때마다 백하련은 웬지 얼굴에 어두운 기색을 드러냈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워낙 이지러져 있어 진일문이 알아차리지 못할 따름이었다.
반면에 백하련은 이따금 넋이 나간 듯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볼 때가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탄식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동생의 얼굴이 이처럼 아름다울 줄은 정말 몰랐어......."
그러던 그녀가오늘은 유독 눈가에 이슬을 매달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녀는 괴로운듯 채 말을 맺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진일문은 콧등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직히 대꾸했다.
"누님께선 왜 그깟 용모에 연연하시오? 모습이 달라졌다 해도 나는 변함없이 누님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그 때의 나요. 그리고 누님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이오. 번드르르한 얼굴 뒤에 사갈 같은 마음을 숨기고 있다면 그 가치는 무용하오. 사람을 어찌 얼굴로만 평가하겠소?"
진일문이 이렇게 말한 배경에는 다름 아닌 사영화의 존재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의 청춘에 깊은 상흔을 남긴 여인, 아마도 그는 사영화를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새삼 밉다거나원망스러울 것은 없었지만 한번쯤은 만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것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사랑했던 여인인 만큼 뭔가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자 해서였다.
하지만 진일문은 이내 툴툴 웃었다.
지금으로서는 그에게 있어 백하련이 그녀보다 훨씬 소중한 존재였다.
다만 가슴이 쓰린 것은 백하련이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입장으로써 한 사람을 연모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누님, 알고 계시오? 당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이 내가, 바로 전날에는 지금의 당신과 마찬가지로 자학에 버금가는 심정이었다는 것을.......'
연민과 애정은본질적으로 다른 법이다.
그는 자신이 그 이상 백하련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내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 왔다.
진일문은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요즘 사소저는 이 곳에 오지 않소?"
백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사매는 당분간 오지 못할 거야. 사부께서 하사하신 비급을 혼자 연성해 보겠노라고 했었지."
"비급? 그럼 사태께서는 사소저를 상당히 아끼고 사랑하셨던 모양이구려?"
"그래."
대답하는 백하련의 음성에는 아무런 사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본시 성정이 곧고 순후한 그녀는 사부의 편애에도 전혀 질투나 시기심을 품지 않았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은 진일문으로 하여금 또 다시 탄식을 금치 못하게 했다.
'이는 비단 인생에 대한 체념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누님의 마음이 그만치 넓기 때문일진대...... 사소저와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로구나.'
절정사태가 사영화를 감싸고도는 데에는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황룡사가와 비취암의 관계 때문이었다.
황룡사가는 검법으로 천하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들의 독문검법인 구천룡무검법(九天龍舞劍法)은 화려할 정도로 변화가 무궁하여 기쾌하면서도 악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황룡보주 사운악에게는 대를 이어갈 아들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장중보옥(掌中寶玉)인 사영화를 비취암에 입문시킴으로써 후사를 도모하려 했다.
사영화는 아무래도 여인의 몸인지라 검법에서 한계를 보였다.
이로 인해 사운악은 그녀로 하여금 비취암의 수지무공을 병합해 독창적인 절기를 완성하도록 종용해왔다.
그 정도는 되어야 장차 무림에서 힘을 과시하는데 지장이 없으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절정사태가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영화를 열두번째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사영화의 재질이 뛰어났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녀 역시 저의가 있어서였다.
실상 황룡보의영향력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한다.
비취암이 삼불에 속하면서도 소림이나 아미에 비해 세력이 떨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절정사태는 사영화를 통해 황룡사가와의 연맹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절정사태는 무척이나 오만하고 괴벽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정도 사도 아닌 중도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되,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살인도 불사하는 편이었다.
황룡보주에 대해서도 그녀는 일부러 친숙한 태도를 취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필요에 의해 가까이는 할 망정 그저 예의적인 행동 외에는 아무런 호감도, 역감도 일체 표현하지 않았다.
백하련이 진일문을 빤히 응시했다.
"그런데 막내 사매에 대해서는 왜 물었지?"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필경 소란이 일었을 것이오."
진일문의 말에백하련은 피식 웃었다.
"소란이 일어났으면 어때? 동생은 황룡보에서 마굿간지기로 고생을 했다면서 왜 그들을 걱정하지?"
진일문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도망쳤다고 오해를 받는 것은 즐거운 일이 못되는구려."
그는 자신이 말해 놓고도 고소를 금치 못했다.
"아마도 너무 편하다 보니 그런 생각도 드는 모양이오."
백하련은 대답대신 기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야무진 음성으로 덧붙였다.
"동생이 이렇게 영준해진 것을 알면 막내 사매도 놀랄 거야."
그것은 일종의대리만족이자 보상심리였다.
"누님도 참......."
진일문은 얼굴을 붉히며 씨익 웃었다.
금정홍으로 인해 그의 얼굴은 그 자신이 보아도 놀랄 정도로 준미해져 있었다.
검상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해져 있었다.
특히 어릴 적부터 큰 편이었던 그의 눈은 성숙과 더불어 이제 수려하면서도 서늘하게 변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빨려들 듯한 마력을 발산해내고 있었다.
금정홍으로 말하자면 천고의 영액(靈液)이다.
천산금붕은 본시 오랜 세월에 걸쳐 줄곧 각종의 영약이나 약초를 먹고 성장한다.
그러므로 그 타액, 즉 금정홍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효능이 깃들어 있었다.
만병통치는 물론이거니와 내외적으로 아무리 중상을 입어도 거짓말 같은 치료효과를 볼 수가 있었다.
오죽 하면 금정홍을 복용하면 불로장수한다는 속설이 나돌 정도였다.
또한 무공을 익힌 사람의 경우에는 일거에 수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도 있었으니, 천고의 기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일문에게도 물론 그러했다.
더구나 천산금붕이 그를 위해 토해낸 금정홍에는 본신의 신혈 외에도 그 직전에 취했던 신과의 과즙(果汁), 곧 절정사태가 십 년이나 공들여 가꾼 음양천도신과의 성분이 함께 섞여 있었다.
때문에 그는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고자 하는 기연 중 기연을 만나게 되었다.
비록 무공은 아직 익히지 못했으나 그의 체내에는 상상을 불허하는 공력이 잠재되어 있었다.
게다가 매일 좋은 음식물과 절정사태가 처방해주는 약물까지 제공받게 되자 금정홍은 최대한으로 그의 혈맥에 녹아들었다.
용모의 회복 말고도 그에게는 불과 한 달 사이에 거의 불가사의에 가까운 신체 변화가 있었다.
한껏 움츠러져 있었던 그의 육신이 날개를 펼치듯 급격한 발달을 이루어냈다.
키가 무려 육척에 이르렀는가 하면 비쩍 마른 체구에도 적당히 살이 붙어 이른바 헌헌장부로 화해 있었다.
정작 당사자인 진일문은 그 사실을 잘 몰랐으나 백하련이 그를 바라보며 넋을 잃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취암에 머문지도 어언 사십구일이 흘렀다.
그런데 진일문은 이즈음 새로운 고충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것은 하루에 두 번, 즉 자시(子時)와 오시(午時)만 되면 온 몸이 불덩이가 되는 기현상 때문이었다.
전신의 모든 혈관에서 피가 펄펄 끓어오를 뿐더러 심줄까지도 터져버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그는 졸지에 머리와 가슴, 단전(丹田)이 폭발할 것 같은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이런 현상은 대개 한 시진이나 계속되어 그는 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도 열기를 식힐 수가 없어 쩔쩔 매곤 했다.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뛰쳐나가 연못에 몸을 담가 보기도 했으나 별반 소용이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절정사태가 그런 그의 반응을 전해 듣더니 엄숙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아가야, 이것은 정녕 심각한 일이구나. 너는 허약한 상태에서 금정홍이라는 독물(毒物)을 복용하는 바람에 독기가 혈맥까지 침투되어 있었느니라. 내 그 동안 약으로 다스리려 부단히 노력했건만 결국 독기가 삼단전으로 스며들고 말았구나."
진일문은 그녀의 말에 언뜻 의혹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삼단전이 머리와 가슴, 아랫배를 뜻한다는 것쯤은 그도 모르지 않았다.
바로 그 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으니 절정사태의 말은 그가 듣기로도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금정홍을 두고 독물이라 지칭하는 점이었다.
진일문은 금정홍이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 금붕에게 채여 정신을 잃긴 했으나 이후로 생각해 보건대 금붕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리해낼 수 있었다.
절정사태가 그의 내심을 눈치채고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금정홍은 사람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너처럼 체질이 약한 아이는 후자에 속한다."
진일문은 얼른고개를 끄덕여 수긍의 뜻을 표했다.
사실 그는 심중을 들키자 오히려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설사 그녀의 말에 그 이상의 무리가 있다해도 잠자코 듣고 따라주는 것이 그녀에 대한 도리라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금정홍에는 각종 선약(仙藥)의 기운과 함께 독초의 기운도 포함되어 있는데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너 같은 아이는 치명적인 해를 입는다."
진일문은 공손히 물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미타불... 빈니가 이미 방도를 생각해 두었다."
진일문은 내심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 같은 선심은 그에게 있어 왕중헌 이후로는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네가 지금부터라도 내공을 익히는 것이다."
'내공......?'
진일문은 무공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었다.
고작해야 그 동안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에 비추어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 정도가 그가 내린 무공의 정의였다.
하지만 내공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음 한 구석에서 일어나는 묘한 느낌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로 무공을 익히게 된단 말인가?'
절정사태는 그의 심경 변화까지도 즉각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가슴에 스며드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빈니가 보기에 너는 최상승의 무예도 익힐 수 있는 재목이다. 다만 용이 물을 만나지 못해 이무기로 머물러 있듯 그 간에 닦여지지 않은 보석으로 머물러 있었을 따름이다."
진일문은 그녀의 칭찬까지 들으니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절정사태는 눈에 묘한 빛을 띄우며 말을 이었다.
"빈니는 알다시피 남자를 문하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너를 제자로 거두어들일 수는 없구나. 그래서 무공을 익히는 기초, 즉내공만을 너에게 전수하려고 한다."
진일문의 고개가 절로 꺾였다.
"그것만으로도 제게는 과분합니다."
절정사태는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고마와할 필요는 없다. 내공을 수련해야 체내에 침투되어 있는 독기를 몰아낼 수 있으니 너는 오늘부터 열심히 내가 가르치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된다. 지금부터 백일 안에 필히 독기를 하단전(下丹田)으로 모아야 한다."
진일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절정사태의 엄숙한 음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공을 수련하는 동안에는 일체 잡념을 버려야 한다."
"으음......."
"만일 다른 생각을 하거나 도중에 수련을 게을리하면 주화입마라는 무서운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좋다, 빈니가 너에게 가르쳐줄 무공은 만만신공(卍卍神功)이라 한다. 불가의 현오한 무학이니 전심을 다 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진일문은 가슴이 은은하게 뛰노는 것을 느꼈다. 절정사태가 전수하고자 하는 만만신공이란 대체 어떤 무공일지?
절정사태.
그녀는 본래 삼불(三佛), 삼도(三道), 사가(四家)로 불리우는 당금 강호상의 십대무학종사(十大武學宗師) 가운데 하나였다.
황룡사가(黃龍査家)가 사대세가의 하나로써 막대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듯 바취암도 삼불 중 일문으로써 중원무림 내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고유영역을 구축하고 있었다.
소림이나 아미와는 달리 명문정도라고는 할 수 없어도 나름의 불문기공을 소지하고 있었다.
소림과 아미가 정종의 불문무학으로 쟁쟁한 명성을 고수하고 있다면, 비취암은 만만신공이라는 독특한 무학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만만신공은 천축으로부터 유래된 무공이었다.
유가(瑜伽)에서 발전한 이 특이한 심법은 수지학(手指學) 방면에서 가히 으뜸의 위를 점했다.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수강(手 )이나 지공(指功) 만으로 절정사태는 천하를 분할하는 대열에 당당히 끼어 있는 것이었다.
맨 손으로 보검을 꺾고, 손가락 하나로 절단금옥(絶斷金玉)이 가능하니 왜 아니 그렇겠는가?
절정사태는 매일 한 번씩 진일문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그 때마다 만만신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알려 주었다.
"만만신공은 불문심법이기는 하지만 중원의 불문무학과는 크게 다르다."
늘 그랬듯 절정사태의 엄숙한 표정을 대하자 진일문은 긴장을 바짝 조이며 경청했다.
"불문무공은 원래 모두가 천축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원 전파는 선종의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의해서였다. 덕분에 소림사는 이후로 선종의 본산지이자 무림의 태산북두가 되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진일문으로서는 전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사실 그는 무림사에 관해서도 아는 바가 극히 적었다.
그가 알고 있었던 소림과 무당이라는 이름 정도가 흥미를 유발시켰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절정사태의 말은 그를 상당히 놀라게 했다.
"소림의 성세가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칠십이종 절예, 아니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조차도 따지고 보면 천축무학의 한 유파에 불과하다."
진일문은 입을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인들은 소림을 일컬어 무(武)의 원류라 부른다만, 솔직히 노니는 그들을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보고 있다."
이는 대담하다기 보다는 광오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소림의 천 년 역사를 뒤진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는 없으리라.
절정사태는 그자부심의 실체를 이렇게 표명했다.
"본 암의 만만신공은 소승(小乘)의 맥을 잇고 있다. 궁극적인 목적을 제세구민이 아니라 스스로 존체가 되는데 두고 있지."
"으음......."
진일문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과거 수많은 책을 읽었으므로 그도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절정사태가 중원의 불문무학을 비하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그것을 인용하는 데에는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소승과 대승이 각기 진정한 불도를 자처하며 대립해온 것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진일문은 웬지심중에 작은 상처가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그것을 지우려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절정사태에 관한 한 전폭적으로 지지해주고 싶은 것이 그의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절정사태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만만신공의 요결(要訣) 일부분을 전수했고, 진일문은 온 정신을 기울여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이를 흡수했다.
만만신공이 정종의 불문심법과 다른 점은 유독 그 성취가 속성이라는 면에 있었다.
본시 불문의 공부라는 것은 그 성취가 더뎌 오랜 세월을 두고 정진해야만 했다.
그 대신 후에 발휘하게 될 웅후한 법력에는 감히 필적할 만한 것이 없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공부였다.
호심(湖沈)처럼 담담한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고 오직 불도에 전념하는 것이 주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만만신공은 이점에서도 여타의 불문무학과는 상이했다.
우선 기초 부분의 수련 과정이 짧으며 단지 성취가 빠른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유가술(瑜伽術)과 혼합되어 있어 인위적으로 그 효과를 진작시킬 수도 있었다.
따라서 그 성취란 마음가짐과는 어쩌면 무관했다.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오히려 개인적인 자질과 집념이었다.
절정사태는 이런 요건들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만만신공의 십성 경지에 이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달리 표현하면 그녀의 한계이기도 했다.
십이성이라는 고지는 그녀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점령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바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전날에 심혈을 기울여 음양천도신과를 길렀다.
집념은 있으되 자질이 부족하니 영약의 힘을 빌고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만만신공의 십성 경지가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정종불문의 공력보다 강(剛)에 있어서는 오히려 우월하다고 할 수 있었다.
단지 유(柔)가 모자라 완전하지 않을 뿐이었다.
첫댓글 즐감요
즐감 감솨 *^^*
절정사태는 과연 ...?
즐감하고 갑니다
ㅈㄷㄱ~~~~~~~~~````````````````````````
감사합니다
굿,,즐감,,,
감사, 즐감하고 갑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요.
쟴납니다
감사 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
즐독요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