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가장 먼저 제기한 사람은 금산군(錦山君) 이성 윤(李誠胤·1570∼1620년)이다. 그는 노량 충렬사에 써붙인 시(題露梁忠烈祠) 에서 “공로가 커도 상 못탈 것 미리 알고서 제 몸을 던져 충성 뵈러 결심 했던가. 만고에 그영혼어디계신고.”(“충무공전서”권2)
이런 의문을 더 절실하게 주장한 사람은 숙종 때 판부사(判府事) 이이명 (1658∼1722년)이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방비해서 왜 자기의 몸을 아끼지 않고 마침내 몸을 버리기까지 했던가. 세상 사람들은 공(이순신)이 성한 뒤 에는 몸이 위태로울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 화살과 탄환을 맞으면서도 피하 지 않은 것이라 한다.”
오래 전부터 충무공의 전사(戰死)에 관한 의문은 제기돼 왔다.
첫째 충무공이 과연 전사했는가 하는 점.
둘째는 해전을 하는 사람이 갑옷을 벗고(免胄) 싸울 수 있느냐는 문제. 셋째 는 전사한지 16년(장사 지낸지 15년)만에 묘를 이유없이 이장했다는 점이다.
세번째 의문은 이순신이 은둔해 있다가 실제 죽었을 때 묘를 다시 썼다는 것으로 풀이됨
늦게써서 죄송해요. 아이디를 늦게만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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