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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봄여름가을 합병호 계간평]
꽃처럼 공기처럼 해맑은 작품들
유 준 호(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Ⅰ.
새 생명이 움트고 꽃이 피는 봄도, 만산에 녹음이 우거진 성장의 계절 여름도 다 지내며 몸살을 앓던 현대시조가 만산이 홍엽(紅葉)으로 물들은 가을도 늦가을에 생기를 얻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 동안 현대시조 문학지의 기둥 역할을 하시던 사봉(史峰) 장순하(張諄河) 선생님이 병마(病魔)에 맞서 지내시느라 돌봐주실 기회가 없었고, 편집진도 몸이 편찮아 이리 늦어졌다고 그 소회를 밝히고 있다. 모두가 그렇게 사봉 선생님 쾌유(快癒)를 기원했지만 끝내 지난 5월 1일 하늘의 부름을 받으시고 선생님께서는 이승을 떠나 천국으로 떠나시어 저 하늘에 큰 별이 되시었다. 삼가 다시 명복의 기원을 드린다. 선생님의 별빛 이제 우리의 머리 위에서 비추어 주시고 계시겠지만 시조단의 큰 별이 가신 자리 허허롭기만 하다. 이번 현대시조는 벼르고 별러 나와서 그런지 그 부피가 꽤나 되고 있다. 물론 사봉 선생님 추모특집이 60페이지를 넘기기는 하였지만 편집진의 각별한 배려와 노고가 빚어낸 결정체(結晶體)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쉼 없는 전진이 이루어지를 기원한다. 이번호에 실린 시조작품들은 원래 봄 호를 겨냥하여 투고된 작품들이라 그런지 봄을 노래한 것들이 특히나 많았다. 그 중에도 봄꽃을 시적 제재로 삼아 쓴 작품이 적잖이 많았다. 시조시인들이 현대시조는 언제 나오느냐고 서로 안부를 물었는데 드디어 나오고 보니 많은 이들의 좋은 작품이 지면을 장식하고 있어 고맙고 반가웠다. 실린 작품 가운데 소시집을 낸 김 종기 시인의 작품 두 편과 나머지 현대시조란에 실린 작품을 나름대로 선별하여 함께 살펴보기로 하였다. 작품에 특별히 우열을 가를 수는 없지만 이미 평을 드린 분들의 작품으로 눈에 띄는 좋은 작품들도 많이 있었지만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린 바와 같이 이번호에도 계간평을 못 드린 새로운 얼굴들을 찾아 그분들의 작품을 감상해보기로 하였다. 시조 작품은 꽃 같은 향기가 있고, 공기처럼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런 작품을 찾아 살펴보려한다.
Ⅱ.
우선 봄꽃들을 제재로 한 것들이 많이 실려 있는 것 같아 이들을 찾아 먼저 간단히 그 꽃들에 얽힌 설화와 함께 감상평을 올리고 다음에 일반 작품을 다루기로 한다.
찬찬히 마음 열고
민낯을 짝짝 편다.
햇발이 다가와서
있는 말 없는 말로
꼬드김 호시탐탐하게
여기저기 하암빡〜.
만발한 함박꽃밭
열어젖힌 웃음보따리
가슴엔 진정으로
누구나 행복으로
바람이 저렇게 흔드는
바리바리 함박함박.
-김 종기, 함박꽃, 전편
이팔의
꽃띠 중에
화왕(花王)의 보탑(寶塔)에 앉을
끝없이
염려(艶麗)하게
깔깔깔 웃어젖힐
순민(順民)의
순박(淳朴) 앞에서
저리 방자할 줄이야.
-김 종기, 작약, 전편
함박꽃과 작약(芍藥)은 ‘기다림’ ‘그리움’‘수줍음’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는 같은 꽃인데 이를 따로 두 편의 시제로 정하고 썼다. 이 꽃은“이웃나라 왕자와 공주가 서로 사랑을 하는데, 왕자는 공주를 그리다 모란이 되고, 공주는 왕자를 못 잊어 찾아갔다가 모란 옆에서 함박꽃이 되었다는 전설을 품고 있다. 위 두 편의 시조 모두 이미지가 환하게 밝다. 시는 시인의 화신(化身)이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면 김 종기 시인의 시적 감흥은 한껏 기분 좋게 들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두 편 다 의인적 수법을 사용해 꽃을 사람처럼 보고 사람의 감정을 꽃에 이입(移入)시켜 표현하고 있다. 우선 앞의 시조 “함박꽃”은 활짝 핀 꽃의 모습에서 느끼는 느낌을 첫수와 둘째 수에서 선보이고 있는데 첫수는 햇발의 달콤한 말에 꽃이 마음을 열고 볼이 터져라 기쁨에 차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둘째 수는 함박웃음을 흐드러지게 펼쳐 보는 이들로 하여금 행복을 느끼게 함은 표현하고 있다. ‘하암빡’‘바리바리 함박함박’하는 의태어가 시상을 더욱 흐뭇하게 하고 있다. 뒤의 시조 “작약”도 앞의 작품과 이미지의 전개는 유사하다. 모든 ‘이팔청춘’‘꽃띠들’가운데 꽃의 왕으로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꽃이라고 시상(詩想)을 열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모란’을 화중지왕(花中之王)이라고 하는데 김 시인은 작약을 모란과 같은 꽃 중의 왕으로 환치(換置)하여 표현하고 있다. 작약은 그 모습이 모란과 유사하나 풀이고, 모란은 나무이다. 그리고 모란이 핀 뒤에 이어피기에 모란 밑에 있는 재상(宰相)이라 하여 옛날부터 화상(花相)이라고 하는데 김 시인은 이 작약의 위상을 한층 높여 왕(王)으로 놓고, 그 모습을 ‘염려(艶麗)’라고 하여 아름답고 곱게 표현하였다. 그런데‘깔깔깔 웃어젖힐’이라고 하고 있다. ‘염려(艶麗)’란 시어가 풍기는 정서는 고즈넉하고 단정한 정적(靜的)인 모습이 어울리는데 이를 파격적인 대조(對照) 의미인 부산스런 모습으로 표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종장에서 ‘저리 방자’하다고 한 것 같다. 어떻든 이 작품은 정중동(靜中動)이 함께 어우러져 시상의 조화를 도모하고 있는 작품으로 꽃을 인간화하여 시조 속에서 인간의 삶의 모습을 견주어 표현하고 있다. 시상의 전개가 매우 감각적이다.
아득히 먼 옛날에 한 요정의 저주로
병에 걸린 미소년이 물에 빠져 죽던 날
남몰래 사모한 여인들
가슴속에 피어난 꽃.
소년은 별이 되어 봄 동산에 내려앉아
애절한 사연들을 타임캡슐 안에 묻고
사랑의 열매도 없이
전설 속에 피어난 꽃.
수천 년 지나서도 화사한 모습으로
머리 숙여 반기는데 고고함도 죄인가요.
가혹한 신의 오판에
멍든 가슴 뉘 알랴.
-강 민진, 수선화, 전편
이 작품은 수선화 설화를 바탕에 깔고 이를 소재로 시상을 펼치고 있다. 수선화 설화를 간단히 소개하면“그리스 신화에 숲 속의 모든 요정들이 목동 나르시스를 연모했다. 그 중에도 에코 요정이 미소년 목동 나르시스의 미모에 반해 가장 애타게 짝사랑하다가 사랑의 마음 못 이겨 나르시스의 목을 껴안았는데 나르시스로부터 거절당하자 실연의 부끄러움으로 숲속에 숨어서 애를 태우다 죽어 목소리만 남은 메아리가 되어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를 찾아가 나르시스가 이 세상에서 처음 마주 본 이에게 사랑에 빠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복수의 여신이 이를 들어주었다. 마침 나르시스가 목이 말라 샘으로 가 물을 마시려 하다가 샘물에 비친 자기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마음을 빼앗겨 샘 속의 자기모습을 들여다보다가 샘에 빠져 죽었는데 거기에 꽃이 한 송이 피어났다. 이 꽃이 수선화”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요정은 에코를 뜻하고, 미소년은 에코 요정의 사랑을 거절했던 목동 나르시스이다. 또‘남몰래 사랑한 여인들’은 숲속의 요정들이고, ‘가슴속에 피어난 꽃’은 자아도취, 자애, 고결의 꽃말을 가지고 있는 수선화이다. 그리움과 사랑의 결정체가 꽃이 되어 피어난 것이다. 나르시스가 자기애(自己愛)에 빠져 죽어서 별이 되어 ‘봄 동산에 내려앉아’설화 속의 애절한 사연을 영원의 시간 속에 묻어놓은 채 맺지 못할 사랑을 안고 피어났다고 첫째, 둘째 수까지에서 표현하고 있으며, 셋째 수에서는 수선화의 피어난 모습이 수천 년이 지나도 화사(華奢)하고 고고하다고 하고 있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가 잘못 판단하여 나르시스의 운명을 가엷게 만들어 가슴에 멍을 품고 사는 꽃이 되었다고 시상을 마무리하고 있다. 설화를 바탕으로 거기 얽힌 사연을 꽃에 접목하여 애련(哀憐)한 심상으로 엮어나가 이 작품에 애절(哀絶)함을 보태고 있다.
감아올린 줄마다
반짝이는 달빛조각
빈 배인 적 없었지만
오늘만은 만선이길
바다의
능선에 걸린
불빛들이 춤을 춘다.
-구 금자, 아버지의 바다-금낭화, 전편
금낭화는 ‘홀어머니를 모시던 아들이 결혼을 했는데 어머니가 질투가 심해 아들이 돈 벌러 나 간 사이 며느리가 솥에 밥이 다 되었는지 보려고 밥알 두어 개를 먹어 보았는데 이걸 시어머니가 보고 며느리가 밥을 혼자 먹는다고 두드려 패서 죽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며느리 무덤가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그 꽃이 금낭화’란 설화가 있다. 꽃 모양이 밥풀을 물은 입술 모양이라고 하여 며느리밥풀 꽃이라는 별칭이 있기도 하다. 금낭화는 휘어진 줄기 곳곳에 하트 모양의 붉은 꽃이 줄달아 피어나는 꽃이다. 그 모습이 밤바다 배에 집어등(集魚燈)을 달아놓은 듯하여 아마도 시인은 이 꽃에서 아버지가 바다에서 배를 부리며 고기를 잡는 모습을 연상하여 위 설화와는 아무 관련 없이 시제를 ‘아버지의 바다-금낭화’로 하여 시상을 펼치고 있다. 이 작품은 밤바다에 고기잡이 그물을 던져놓고 이를 끌어올려 해산물인 고기들을 잡는 광경이 떠오른다. 추측하건대 아버지는 어부였던 모양이다. 이 작품을 읽다보니 문득 월산대군의 시조에 나오는‘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 매라.’하는 풍류 섞인 표현이 생각난다. 초장 ‘감아올린 줄마다/ 반짝이는 달빛조각’이란 표현이 이와 유사한 이미지이다. 중장은 늘 아버지 배는 어획량이 조금이라도 있어 빈 배인 적은 없었지만 오늘만은 만선이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금낭화 꽃이 안 핀 적은 없지만 올해만은 만개한 꽃이 드레드레 피어나 꽃밭을 가득 메꾸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에서 바다는 꽃밭이다. 꽃밭 가득히 붉은 금낭화가 피어 그 꽃송이들이 불빛처럼 아름답게 빛나며 바람에 한들거리는 모습을 의인화하여 보여주고 있는 작품으로 아버지가 잡아 올린 고기들이 만선을 이루듯 꽃밭에 금낭화가 흘러넘치게 피어 춤추듯 흔들거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다 서로 등진
애증의 한 세월이
면앙정 뜨락 가에
무더기로 피어나서
새하얀
저 낮달마저
붉게 붉게 물들겠다.
-김 옥중, 꽃무릇, 전편
이 꽃의 꽃말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 꽃엔 몇 개의 설화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옛날 아주 먼 옛날 불심이 매우 높은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죄를 짓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세속의 여인을 사랑하는 죄였다. 스님은 자신의 이러한 잘못을 알고 있으면서도 스님 역시 한 인간인지라 날마다 여인을 그리워했다. 그리움에 사무칠 정도였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여인을 만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님은 자신의 안타까운 사랑을 달리 표현하거나 풀을 길이 없어 꽃씨에다 자기의 심정을 담아 절 앞마당에 심었는데 시간이 흘러 씨는 싹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이 죽은 후 꽃이 피었다. 그리고 꽃이 지면 다시 잎이 피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꽃과 잎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상사화. 스님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이 꽃을 상사화라고 부른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그리다 서로 등진’이란 말은 잎줄기와 꽃이 서로 못 만남을 표현한 말이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세월을 ‘애증의 세월’이라고 하였다. 또 ‘면앙정 뜨락 가에/ 무더기로 피어나서’피보다 붉은 모습을 보이는 그 꽃으로 인하여 맑은 하늘에 ‘새하얀 저 낮달마저’붉게 물들일 것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랑의 단심이 서린 모습이 강렬함을 은연중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올곧은 조선 선비
초야에 묻혔어도
먹물이 마를까봐
이슬에 붓 적시고
하늘에
맹서하는 글월
진종일 쓰고 있다.
-김 정희, 등심 붓꽃, 전편
붓꽃에 어린 설화는‘옛날 아이리스란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많은 이의 유혹이 있었지만 정절을 지키고 살았다. 어느 날 그 여인을 본 화가가 사랑에 빠져 구혼하자 아이리스는 나비가 날아와 앉을 정도 살아 움직이는 꽃을 그리면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젊은 화가는 많은 노력 끝에 실물과 같은 그림을 완성하여 아이리스에게 주며 청혼했다. 그러자 아이리스는 꽃에 향기가 없다고 하였다. 그 때 나비가 그림에 앉았다고 한다. 그것을 보고 아이리스는 화가 품에 안겼다’는 이야기이다. 붓꽃은 blood iris라 하는데 아이리스(iris)는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무지개의 연인이다. 이 아이리스의 화신으로 피어난 꽃이 붓꽃이다. 그 생김새가 붓처럼 생겼다 하여 붓꽃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등심 붓꽃’은 북아메리카에서 귀화한 꽃으로 붓꽃의 한 종류이다. 꽃말은 번영, 풍요 등인데 이런 꽃말과는 상관없이 그 모습이나 피는 곳이 들판이나 산기슭이기에 은둔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보고 시인은 이 작품을 쓴 듯하다. 굽힘없이 뾰쪽 솟은 풀잎 줄기로 풀숲 틈에서 자라기에 ‘올곧은 조선 선비/ 초야에 묻혔어도’라 하고, 그 모습이 붓을 닮아 있기에 글씨 쓰는 용도의 붓으로 보고 ‘먹물이 마를까봐/ 이슬에 붓 적시고’라고 표현하였다. 진종일 올곧게 삶을 살겠다고 맹서하고 그 맹서의 글월을 하늘에 대고 쓰고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다. 한 송이 꽃에서 바른 생활, 곧은 삶을 사는 선비의 모습을 유추하여 이를 시화한 작품이다. 단정한 시인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그리도
오지 않던
해갈의 빗방울이
하얗게
피어올라
시 되고 그림 되어
아, 당신
벙긋이 웃는
푸른 밤의 해오름.
-심 옥배, 해국, 전편
지금까지는 봄꽃들을 살펴보았는데 이 작품 “해국”은 봄꽃이 아니고 가을꽃이다. 이 해국에는‘옛날 바닷가에 금슬 좋은 젊은 부부가 사는데 어느 날 부부는 사소한 일로 다툰 다음 남편이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떠나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아내는 딸을 데리고 갯바위 위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높은 파도에 휩쓸렸다. 얼마 뒤 남편이 돌아왔을 땐 아내와 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듬해 가을 남편은 높은 바위에 앉아 바다를 쳐다보다 바위틈에서 웃고 있는 꽃을 보고 자세히 보니 아내와 딸의 얼굴이 보였다. 아내와 딸이 꽃으로 환생한 것이다. 이 꽃이 해국이다.’라는 설화가 있다. 해국은 바닷가 바위틈이나 언덕배기에 기대어 피는 국화이다. 늦가을 서릿발이 섞어 쳐도 꽃잎은 시들지 않고 묵묵히 피어난다. 그래서 꽃말도 ‘침묵’인가 보다. 이 작품은 시적 변용(變容)이 이루어져 전개되고 있다. 가뭄의 해갈(解渴)로 내린‘빗방울’이 바닷가에서 하얗게 모래벌판과 겨루며 꽃을 피우는데 그 꽃은 시처럼 그림처럼 곱고도 아름답게 피어나 ‘벙긋이 웃’으며 희망의 밤에 해처럼 떠오르는 ‘해오름’이 되고 있다. 빗방울이 시가 되고 그림이 되었다가 해오름이 되고 있다. 여기서 해오름은 해처럼 떠오른 해국으로 설화 속의 아내와 딸의 화신인 듯도 하다. 은유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빗방울, 시, 그림, 해오름’이 다 은유로 해국으로 변용되기 이전의 모습들이라고 여겨진다.
한 방울 물방울이
풀잎에서 자고 있다.
햇살이 서둘러 와
풀빛 구슬 낚아챈다.
평생을 방울로 살아도
꽃이 못된 물방울.
-김 사균, 물방울, 전편
풀잎에 맺힌 이슬을 소재로 하여 쓴 작품이다. 아침 일찍 들길을 걷다보면 이슬이 발끝에 차여 옷자락을 적시곤 한다. 밤에 몰래 내려 풀잎에 맺힌 물방울이다. 밤에 맺히는 물방울이기에 ‘물방울’이 졸음에 겨워 풀잎에 내려와 자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초장이 풀잎에 내린 이슬을 표현한 것이라면 중장은 해가 떠서 햇살이 그 이슬방울에 비춰 물기를 증발시키는 모양이다. 그 모습을 ‘햇살이 서둘러 와 풀빛 구슬 낚아챈다.’고 표현하였다. 종장은 이슬이 모여 만들어진 물방울은 맑고 깨끗하고 투명하여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정화해 주지만 자연물의 절정인 ‘꽃’이 되지 못하는 불운의 신세라고 시인은 느끼고 있음을 표현해 보이고 있다. 이슬의 결정체인 물방울을 애상적 심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물방울은 세상 만상 생명의 원천이다. 생명체는 물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데 그 물은 늘 주연(主演)이 못 되고 보조역할을 하는 조연(助演)이 되고 있다. 그런 모습을 이 작품 속에서 볼 수 있다.
한 세월 얼떨결에
빠르게도 달려온 길
가다듬고 앞을 보니
아름다운 황혼이네
이제야
삶의 노정이
있는 대로 보이다니.
-김 석철, 삶의 길, 전편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는 최초의 울음으로 환희의 고고성(呱呱聲)을 지르지만 그 울음 그치고 나면 고단한 삶의 여정이 열린다고 한다. 어리고 젊은 청소년기에는 나는 언제 자라 어른이 되어 내 마음 내 생각대로 삶을 펼치며 살까 하고 세월의 흐름을 기다리지만 세월은 모르는 사이 휙휙 지나가고 그 세월의 길에 동승한 우리들의 삶의 길도 함께 휙휙 하며 빠르게 지나간다. 사실 정신 차릴 틈도 없이 지나가는 것이 삶의 길이다. 주변을 돌이켜볼 사이도 없이 삶의 길을 달려와 보니 어느새 나이가 들어 황혼이 기다리고 있다. 인생에도 사계가 있다더니 어리고 젊은 시절은 인생의 봄이고, 어른이 되어 삶을 책임져 나갈 나이가 되면 인생의 여름이고, 인생을 정리할 나이가 되면 인생의 가을이라고 한다. 이 작품은 인생 가을 중에도 머리에 서릿발이 내리는 늦가을쯤 된 것 같다. 인생길을 돌아보고, 살아갈 앞으로의 인생길을 생각해 보니 생애가 저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떻게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다 늙어서야 쓸쓸히 저무는 삶의 노정(路程)이 보이니 이런 후회스런 일이 또 어디 있으랴. 회한(悔恨)과 허무감(虛無感)이 마음을 누른다. 그런 인생의 단면을 잘 보여준 작품이다.
실버들 봄바람에 바이올린 연주하고
물 가운데 원앙 한 쌍 사랑놀이 한창이다.
낚싯대 저 홀로 앉아 텅 빈 호수 파수꾼.
흰 구름 내려앉아 한가로이 쉬어가고
헤엄치던 천둥오리 양지쪽에 졸고 있다.
모두 다 나른한 오후 묵상하는 빈 쪽배.
-김 영기, 호수의 수채화, 전편
고요한 봄날 한적한 호수에서 펼쳐지는 일들을 묘사하여 보여주고 있다. 화선지에 스미는 물감 냄새가 솔솔 풍기는 듯한 작품이다. 봄바람에 파란 잎 방금 솟은 실버들 줄기들이 한들거리며 부딪치는 소리가 바이올린 연주 소리 같다. 그 소리를 배경음으로 호수 한가운데에서 원앙 한 쌍이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데 누가 걸쳐놓고 갔는지 낚싯대 홀로 호수의 파수꾼 노릇을 하고 있다. 때마침 호수 속을 들여다보니 흰 구름이 내려앉아 쉬고 있는 듯 비치고 헤엄치던 천둥오리도 볕바른 양지쪽에서 한가로이 졸고 있다. 봄날의 나른함이 퍼지는 오후, 빈 쪽배는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지 소리 없이 묵상(默想)에 빠져 있다. 자연이 잔잔한 감동을 주며 그려놓은 무상(無上)의 명화(名畫)를 보는 듯하다. 읽는 이의 마음속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키는 묵시적 심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사람들 갖가지 마음
싸락싸락 쏟아져서
온 들녘 구석구석
풀꽃들을 피워냈다.
아직도
우리가 사는 세상
살 만한 곳이잖아.
앙증스레 발돋움하는
보랏빛 오랑캐꽃
소담스런 민들레
배밀이하는 꽃잔디
땅에도
별이 떴구나
샛노란 아기별꽃.
어머, 어머〜 누구를 위해
이리 곱게 단장들 했니
진종일 바라봐도
외면 안 한다. 웃어줄 뿐
까짓 것
꽃샘추위야
덤빌 테면 덤벼봐.
-나 순옥, 이 봄 들녘에는, 전편
이 작품은 첫수에서 인간의 고운 마음들이 들녘에 쏟아져 꽃이 되어 피어난다고 하고 있다. 인간들의 마음이 모질고 흉악함이 심심찮게 나타나 이 세상이 고달프고 모진 곳으로만 여겼는데 이렇게 고운 인간미로 꽃을 피워내고 있음을 보니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살만한 곳’이라고 하고 있다. 꽃을 보고 악의(惡意)를 품고 해코지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이는 없다. 곱고 아름다움에 마음이 열리고 한껏 기분이 고조되는 것이 인간들의 일반적인 심성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이 다 이렇다면 얼마나 따사롭고 살고 싶은 세상이 되겠는가. 둘째 수에서는 인간의 고운 마음이 스며들어 피어난 꽃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첫수에 제시된 풀꽃들로 앙증스런 오랑캐꽃, 소담스런 민들레, 배밀이하는 꽃잔디, 하늘의 별이 땅에 내려온 듯한 샛노란 아기별꽃 등을 그 모양의 특성에서 느끼는 느낌을 곁들여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 셋째 수에서는 이리 곱게 피어난 꽃들이 자기 모습을 누군가에 보여주기 위하여 곱게 단장(丹粧)을 하고 있다고 표현하였다. 아마도 우리를 위하여 그리한 듯 진종일 바라보고 있어도 꽃은 우리의 눈총을 외면하지 않고 웃음을 선사하고 있을 뿐이란다. 아직은 이른 봄인지 꽃샘추위가 남아 꽃들을 괴롭히지만 꽃들은‘덤빌 테면 덤벼봐’하며 이를 이기고 피어나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첫수에서는 우리 사람의 마음이 꽃을 피워낸다고 하여 고운 세상인심의 산물이 꽃임을 말하고, 둘째 수에서는 그들 봄 들꽃들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여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셋째 수에서는 그들 꽃이 역경을 이겨내고 의지 있게 피고 있음을 표현하였다. 각수에 배열된 시적 표현의도가 명료(明瞭)하게 전개되어 있다.
곁 두던 친구들은
하나둘 떠나가고
둘러보니 만권의 책
돈 안 되는 책뿐이네.
그러나
날이 선 언어
사리(舍利) 아닌 게 없구나.
-남 진원, 서책, 전편
언제부턴가 시집이나 소설, 수필집 등을 상재하면 주변의 문인이나 지인에게 보내어 그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하는 시류(時流)가 생겨났다. 특히 동일 장르의 문인끼리는 무슨 품앗이라도 하듯 책을 서로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하루에 두세 권의 책이 배달되어 우체통을 채워주기도 한다. 모두 지인이나 문인들이 보내주는 그들 혼의 알맹이이기에 함부로 할 수 없어 곁에 두고 때론 들춰보고 때론 그냥 쌓아두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이 흐르고 난 다음 살펴보니 곁에 있던 그런 책들을 보내준 친구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 저 하늘나라로 가 안 보이게 되고, 그들이 보내준 책만이 곁에 쌓여 지키고 있다. 허전한 마음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적적하고 쓸쓸하다. 남 시인은 이런 심경으로 이 작품을 열고 있다. 친구들, 문인들은 하나 둘 가고 그들이 보내준 책들만 덩그러니 책상 곁에 쌓였는데, 딱히 그것들이 어디 팔아 돈이 되어 삶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마음 가다듬어 새로이 살펴보면 심곡(心曲)을 울리는 언어들이 자리 잡고 있어 이들 언어가 마치 곧은 불심수행을 하여 얻어진 진리와 도리의 결정체인 사리(舍利)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옛말에 서책(書冊) 속엔 삶에 필요한 지식이 들어 있고, 삶의 도리나 방향, 인생지침이 들어 있다고 하는데, 이 시조 속에 쌓인 ‘만 권의 책’에는 그런 ‘날이 선 언어(예리하게 깨우침을 주는 말)’들이 사리(舍利)처럼 들어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살얼음 꽃 얼깃설핏
개울가 빨래터에
뽀송송 버들가지
손짓하는 설레임
살며시
엿보던 산수유
활짝 터진 웃음보.
-박 금자, 왔구나, 봄!, 전편
소동파는 왕유(王維)의 시를 두고 평하기를 ‘시중유화(詩中有畵)’라고 하여 시속에 그림이 들어 있다고 칭송했다는데 이 작품은 농촌 우물가 버들가지가 휘어지고 노오란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나타난 작품이다. 봄이 왔지만 봄 같지가 않다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이 있지만 이 작품은 봄 같지 않은데 봄이 온 모습 ‘불사춘(不似春)’에 춘래(春來)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아직은 살얼음이 안 낀 듯 끼어 있는 개울가 빨래터에 버들가지가 ‘뽀송송’ 싹을 틔워 올리고 산수유 꽃이 웃음꽃을 터뜨린다. 봄은 분명 온듯하나 살얼음 꽃이 다문다문 엉기어 있으니 아직은 추위가 덜 가신 모양새이다. 시인은 계절에 대한 감탄스런 모습을 제목 “왔구나, 봄!”이란 말로 축약하여 보여주고 있다. 봄의 설렘이 전편을 지배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비표준어가 쓰인 점이 흠이다. ‘얼깃설핏’은 ‘얼핏 설핏’이 표준어이고, ‘설레임’은 ‘설렘’이 표준어이니 특별히 시적 허용어로 시상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하였다면 모르되 될 수 있으면 표준어를 살려 쓰 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특히 ‘설레임’이란 시어는 시조의 자수율격을 맞추기 위하여 억지로 쓴 듯한 인상이 짙다.
이끼 하나 품지 못한 불임의 기억 속에
눈부신 햇살은 열꽃으로 받아놓고
전생은 자폐의 육신 사랑만을 전하고자.
오뉴월 푸른 장마에 빗금 친 몸뚱아리
별이 떨어지는 밤은 기도를 배우고
목숨이 뜨거운 날은 돌아앉아 앓는다.
-양 점숙, 바위, 전편
바위의 속성과 형상을 시적 제재로 하여 쓴 시조작품이다. 바위는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가끔 바위에 이끼가 붙어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바위가 이끼를 품은 게 아니라 이끼가 바위에 붙어 기생(寄生)하는 것이다. 그렇게 바위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다. 불임(不姙)의 존재이다. 첫수는 그런 존재이기에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여 이를 ‘열꽃’으로 받아놓고 열병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전생부터 운명적으로 자기 세계에 고립되어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사는‘자폐의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원초적으로 지닌 사랑의 정리만은 전하고 싶은 것이 바위라고 하고 있다. 둘째 수에서는 ‘오뉴월 푸른 장마’에 몸뚱어리에 ‘빗금’이 쳐지고, 만상이 잠에 빠지는 밤엔 홀로 떨어지는 별들을 보며 기도를 배운다. 그리고 ‘목숨이 뜨거운 날’엔 햇살을 등지고 돌아앉아 앓는다고 맺음을 하고 있다. 무생물을 의인화하여 삶의 고뇌를 의탁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비록 태어날 때 무감각의 자폐의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원초적인 감정은 가지고 있어 사랑도 있고 뜨거운 감정도 품고 있다고 시인은 보고 있다. 무감각의 바위를 감각을 가진 바위로 환치하여 표현한 작품이다.
누렇게 변해버린 앨범을 들춰보니
그 때의 시간들은 사진 속에 일시정지
꽃처럼 활짝 핀 채로 깊은 잠을 잤나 보다.
함께한 일상들을 저장한 디카 사진
빠르게 지나가는 순간을 찍어본들
한 장도 인화 못한 채 용량 초과 삭제되네.
내 나이 어렸을 적 상큼한 사과처럼
아이를 기를 적엔 달달한 딸기향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아날로그 그 시절
-윤 미정, 사진첩, 전편
사진 속에 담긴 모습을 통하여 꽃다운 시절의 모습을 회억(回憶)하며 이를 현재의 모습과 대비시켜 그 감회를 표현하고 있다. 사진은 기억의 저장고라고 한다. 그런데 인화(印畫)된 지가 오래 되면 대부분 인화물질이 날아가 변색되어 누렇게 된다. 이 작품은 그런 사진을 소재로 하여 자신의 옛날 모습을 되돌려보며 회상에 잠겨 있다. 첫수는 앨범 속에 꽂혀 있는 빛바랜 사진을 보며 젊은 날의 모습을 되새겨 보고 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사진 속의 모습과는 딴판인데 사진 속에선 젊은 날 그대로 있으니, ‘그 때의 시간들은 사진 속에 일시정지’한 모습이라고 하고 있다. 이를 보니 아마도 ‘꽃처럼 활짝 핀’방년(芳年)의 시절이 사진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하여 젊은 날의 아름답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둘째 수는 흐르는 세월, 빠르게 변하는 세태와 함께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순간순간 스케치하듯 담아둔 디카 사진이 인화되지 않은 채 사라졌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셋째 수는 젊은 날의 풋풋하고 향긋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그런 시간이 무심히 지나가고 돌아오지 않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이라 하니 이 또한 아름다운 인생의 자취가 아니겠나. 아쉬움이 짙은 추억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과 같이 발표한 ‘장승포 포차에서”시어 ‘반가운 번개 요청’이란 구절이 나오는데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인 것인지 궁금하여 시인에게 묻고 싶다. 이 구절 다음에 연결 되는 시상과 연관성이 자연스럽지 않지 않나 해서이다.
뉘신가, 무례하게
카톡에 불쑥 들어
<고객님 주문 상품 비대면 배송되었습니다.>
현관 앞 오도카니 앉은
상자가 무색하다.
빼꼼히 마주치는 풋낯도 죄가 되니
세상에 맞서려면 사람을 멀리 하라
문하나 사이에 두고 꼰지발로 간 사람
-이 남순, 우렁꾼, 전편
시제 “우렁꾼”은 아무도 모르게 좋은 일을 하는 우렁이각시 같은 사람의 뜻으로 쓰인 말로 택배기사를 두고 하는 말인 성싶다. 요즘 택배기사들의 모습이 이와 매우 흡사하다. 택배가 배송되려면 카카오 톡으로 문자를 보내 받을 곳이나 변경사항을 묻고, 이어서 택배 물품을 ‘주문 상품 비대면 배달’이라는 문자를 보내고 물건을 집 앞에 가져다 놓고 초인종 꾹 누르고 가버린다. 택배물품만 ‘현관 앞에 오도카니’쭈그려 앉아 있다. 코로나 이후 생겨난 진풍경이다. 물론 분주하게 배달해야 하는 택배기사의 쫓기는 일상이 만들어낸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첫수에 보인 모습이라면 둘째 수는‘빼꼼히 마주치는 풋낯(처음 보는 낯선 얼굴)도 죄가 되니’는 얼굴을 마주치면 혹여 코로나를 전염시키는 죄가 될세라 얼굴 마주치는 것을 꺼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택배가 온 것 같아 그 물건을 받으려고 막상 나가보면 택배기사는 벌써 어디로 갔는지 자취도 없다. 고양이 걸음처럼 소리도 안 나게 발가락을 세워 ‘꼰지발’로 가고 없다. 이렇게 택배를 주고받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이 부분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서로 마주 보기를 꺼려하는 사회현실이 그렇고 현실적으로 그것이 일상화되어 있으니 어찌할 도리는 없지만 매몰찬 인간미가 사회를 지배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 든다. 택배기사도 남몰래 바쁜 일상을 살며 인연의 끈을 전달해 주는 좋은 일을 하는 이들이니 수고 했다고 음료수 한잔 줄 기회가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게 된 현실이다. 뒤통수에 대고 수고했다 고맙다고 허공에 헛말이나 해야 할까.
지금 당장 내 몸의 실핏줄이 다 끊어져
몸 가벼운 혼으로나 땅바닥을 구른대도
너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부서져도 좋으리.
새들의 날갯짓 소리 저문 하늘 다 적셔도
바스락 귀엣말을 전할 수만 있다면
저 길 끝 소실점 같은
그대 향해 나는 가리.
-이 행숙, 낙엽, 전편
이 작품에서 ‘낙엽’은 시적 자아인‘나’이고, ‘너’나 ‘그대’는 낙엽이 가서 만나고자 하는 지향점으로 희망의 존재이다. 이 작품은 그대’인 희망의 존재를 만날 수만 있다면‘낙엽’인 나는 모든 육신과 정신을 바쳐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첫수 초, 중장은 생명이 끊어진 ‘낙엽’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목숨이 다하여‘혼’만 남더라도 그‘혼’으로라도 너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희원(希願)을 표현하고 있다. 둘째 수는 새들이 귀소(歸巢)하는 하늘이 다 저물어가도 한 마디 하고픈 말을 할 수만 있다면 너무도 멀어 사라지는 점과 같은 그대를 향해 가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여기서‘너’‘그대’는 확연히는 모르지만‘사랑하는 이’가 될 수 있으며, 시인이 마음속에 기리는 어떤 특정존재일 수 있다. 종교적으로 말하면 마음속 숭배자인‘절대자’라고 해도 좋으리라. 어떤 절절한 시적자아의 소망을 이루어줄 존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싱그러운 연꽃잎은 물안개 피워 올리고
이야기로 웃음 짓는 천 년 속의 임연(林衍) 장군
오늘은 덕문이 방죽에 가만가만 오시고.
연꽃잎 웃음에 흘려버린 소금쟁이
연못 위 동그라미 남실남실 파문 짓고
그 파문 동호(東湖)방죽에 어깨춤으로 덩실덩실
-임 상은, 덕문이 방죽, 전편
이 작품 말미 덧말을 보면 ‘덕문이 방죽’과 ‘동호 방죽’은 같은 방죽으로 작품의 종장에다 이들을 배치했는데, 첫수에는 덕문이 방죽을, 둘째 수에는 동호 방죽을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이곳엔 고려 후기에 무신인 임연(林衍) 장군이 동호 방죽을 파고 여기에‘농다리’를 축조했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데 이를 시조 소재의 하나로 삼아 첫수를 엮어놓고 있다. 방죽은 가뭄에 대비하여 들판 가운데를 파서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 두려고 축조한 일종의 큰 샘이다. 덕문이 방죽엔 연(蓮)이 자라 연꽃잎이 물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다. 연꽃잎 사이로는 이 방죽에 농사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농다리를 놓은 전설 속의 임연 장군이 나타나 웃음을 짓고 가만가만 오시는 것 같다. 충북 진천에선 농다리 축제가 매년 열리는데 바로 이 방죽을 중심으로 펼치던 축제가 확장(擴張)된 것 같다. 둘째 수는 방죽 연꽃잎 위에 소금쟁이가 한가로이 돌아다니며 물결에 동그라미 파문(波紋)을 일으켜 놓으니 그 파문은 마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것 같다고 하여 마음속 흥취를 표현하고 있다. 의인적 수법이 돋보이는 시조로 밝고 환한 시상들이 천상지향적인 감흥을 돋우고 있다. 그런데 동의어가 짧은 한편의 시조 속에 너무 반복되는 게 아닌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웃음, 연꽃, 파문이 그것이다.
처마 끝 뜬구름은
어디로 가는 걸까
강보다 깊은 공허
추풍에 날리우고
흩어진
층운(層雲) 사이로
아스라한 어머니.
-최 영수, 그리움, 전편
사랑과 그리움, 기다림, 쓸쓸함은 우리 감정의 골에 맞닿아 있는 말들이다. 그렇게 서로는 이웃하여 아니, 오버 랩 되어 존재한다. 최 시인의 “그리움”은 쓸쓸함을 동반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여기서의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이고, 그 어머니는 지금 시인 곁에 안 계신 것 같다. 그래서 그 그리움의 실체는 ‘뜬구름’으로 대변되고 있다. 손에도 마음에도 잘 잡히지 않는 존재가 되고 있는 것 같다. 눈앞에 아른거리지만 그 행방을 알 수 없는 안타까움을 동반하기에 깊은 공허감이 드는 작품이다. 그 뜬구름을 가을바람이 날리니, 뜬구름 흩어진 사이로 아스라이 환영(幻影)으로 비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움이 구름이 되어 마음속을 떠돌고 있다. 조금은 쓸쓸하고 애절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시조이다. 위 작품 중장에 쓰인 시어 ‘날리우고’는 ‘날리고’의 북한어로 시적 허용어로 쓰인 아어(雅語)이다.
새를 품은 나무는
그의 음을 갖는다.
날개의 후렴을
잡아놓고 휘어진 현
바람이
악기를 튕기면
푸드덕 깨어난다.
-하 미정, 존재, 전편
자연은 어떤 존재로 나타날까. 그 모습은 여러 가지이다. 여기서는 ‘나무’가 다정한 자연 존재의 대명사로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주변 환경과 주변 사물에 연향을 받고 주며 살아간다. 여기서 ‘나무’는 ‘새’를 품고 있다. 아니, 새가 와서 울음소리를 들려주니 그 울음의 ‘음(音)’을 품어 갖고 있다. 나무와 새는 서로 상부상조(相扶相助)한다. 새는 나무에 깃을 접어 앉아 편안을 누리고, 나무는 새의 음을 듣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 새가 날개를 접는 모습을 ‘후렴’이라고 하고, 앉아 휘어지는 가지를 ‘현(絃)’이라고 하여 음악과 결부시키고 있다. 나무가 하나의 악기가 되어 새의 노래를 연주하고 있다. 바람이 와서 그 악기를 튕겨 흔드니 새는 ‘푸드덕’날아가고 나무는 본디의 모습이 되어 그 자리를 지킨다. 이렇게 무정물(無情物)에 정(情)을 넣어 시조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새가 나무에 와서 노래하다 떠나는 모습을 순차적으로 표현해 보인 작품이다.
산새가 늙은 나무 건강을 살피시네.
썩은 곳 도려내고 벌레도 잡아내며
영감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이제는 비바람에 많이도 흔들려서
허리도 아프거니 마음도 약해졌어.
주치의 왕진하시면 시집 한 권 낼 텐데.
-황 인만, 주치의, 전편
시적 발상이 새로운 시조이다. 시제로 등장한‘주치의’는‘산새’이고, 산새의 진료를 받는 것은‘나무’이다. 마치 의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때로 메스로 수술을 하여 곪고 썩은 곳을 도려내 치료하듯이 산새는 늙어 병든 늙은 나무의 건강을 보살피며 썩은 곳은 부리로 쪼아내고 그 속에 있는 나무를 파먹으며 썩게 한 벌레를 잡아먹어 나무를 치유(治癒)한다. 그러면서 늙어서 오래 된 나무를 영감님이라고 인간화하여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나무로 환유된 영감님은 세상 풍파 견디며 많이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흔들려 살다보니 이제는 허리도 아프고 꼿꼿하고 강하던 심성마저 약해져 있다. 주치의인 ‘새’가 왕진(往診)하여 건강을 챙겨주면 곱디고운 건강한 모습이 되어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어 고운 심성으로 살 텐데 지금은 난망(難望)한 모습이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고픈 간곡한 희망이 담긴 작품이다. 세상엔 수많은 늙은 나무가 있고, 수많은 새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며 사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이를 인생에 접목시켜 차분하게 시적으로 표현한 좋은 작품이다. 대개 시조는 맺음이 있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요즘은 맺음을 열린 구조로 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이 작품도 이에 해당하는데 ‘〜낼 텐데’로 하여 독자의 상상의 폭을 넓혀주고 있다. 생략된 말은 ‘그렇게 될라나.’ 혹은 ‘그렇게 되었으면’‘그렇게 되겠지.’하는 소망이 담겨 있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Ⅲ.
시조를 두고 흔히 언어의 감옥 이라고 한다. 짜인 틀에 맞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시조 작품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관념을 유사성에서 찾아 이를 좀은 엉뚱한 비유로 표현하면 독자들은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시인들은 온갖 오감을 작동시켜 이를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여기에 표현하는 언어의 조탁(彫琢) 능력이 탁월하면 좋은 시조를 쓸 역량도 커진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시조의 시상은 언제나 현실에 발을 디디고 펼쳐져야 하고 일정한 흐름을 읽는 이들이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시조는 절제의 미학을 지닌 문학 장르임으로 알맞게 절제된 언어로 써야 한다. 이번 호에 실린 작품 가운데 이런 흔적을 보인 작품이 없지 않았다. 좋은 징조라고 본다. 대체로 시인들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선택하고 그 대상에서 느끼는 감흥을 자연물에서 모방하거나 생활 주변에서 자주 보는 형상을 패러디하여 이를 쓴다. 좋은 작품을 쓰려면 많은 작품을 읽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많은 작품을 모방하라는 말은 아니다. 선배 시인의 작품을 모방하지 말고 읽어서 얻은 감흥을 자기화하여 자신만의 뚜렷한 시적 특성을 가진 작품을 쓰라는 말이다. 이번 현대시조 150호에 실린 작품들을 읽고 느낀 점은 희망의 봄을 제재로 하여 작품을 구상하고 썼기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희망 섞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정중동(靜中動)의 표현이 된 작품도 자주 눈에 띄었다. 특히 이번호는 꽃을 제재로 쓴 작품이 많았는데 대부분 그 표현의 바탕에는 설화가 깔려 있었다. 시조 작품은 감동과 감흥을 유발(誘發)하여 마음의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이 좋다고 하고, 그리고 표현은 직설보다는 간접적인 표현인 비유나 은유로 써서 작품 내용의 문학성을 북돋워주어야 하고, 설명이 아닌 묘사로 써야 한다고 한다. 그래야 정서적인 여운이 느껴진다고 하고 있다. 또한 전하고자 하는 내용도 교훈적(敎訓的)인 내용으로 하는 것은 기피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작품의 흐름은 인과관계나 순차성이 있어야 한다. 한 작품 속에 서로 이질적인 표현이 연관성을 찾기 힘들게 불쑥불쑥 튀어나오면 읽는 이의 입장에선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나 헷갈리게 됨으로 앞뒤 문절(文節)이 서로 호응하게 표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작품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알 수 있도록 그 대상에 집중시켜 표현해야 한다. 한때는 난해성이 있어야 다양한 시적 의도를 상상하게 하여 좋다고 하는 기류가 있어 일부러 이렇게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독자를 멀리하고 자신의 독선에 빠지는 경향을 초래함으로 이런 시적 표현 발상은 버려야 마땅하다. 모든 작품은 그 연결 관계가 순리적이어서 맥이 통하게 하여야 한다. 자기만 아는 잠꼬대 같은 소리를 써놓는 만용(蠻勇)은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앞으로 좋은 작품들이 현대시조의 지면을 장식하여 알차게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