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3:7-9
복음을 위한 일꾼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구 삼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일꾼으로 사용해주시기를 원하거나 또 그렇게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목사 또는 선교사를 포함하여 교회와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하지만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일꾼에 대한 착각일 뿐입니다.
일꾼이라는 단어에서 대개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도구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열심히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일꾼의 사명감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일꾼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라는 것입니다.
7절을 보면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이 부르신 일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일꾼인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꾼은 오직 복음을 위해 부름 받았고 존재합니다. 제아무리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복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가 생각하는 일꾼은 성경적인 의미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진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둘러보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입니다. 굳이 교회를 둘러보지 않아도 여러분 자신이 일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를 면밀히 검토해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일꾼으로 인정되고 부각되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교회를 위해 많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 경우 조건은 필히 눈에 드러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에 있어서 유능해야 하고 부지런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 보이고 드러나는 일을 하지도 않는데 일꾼으로 인정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이 없다’‘게으르다’는 평가를 받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도 과연 그러실까요? 사도가 자신을 일꾼이라고 말하는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했기 때문일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일손이 필요해서 복을 미끼로 일하게 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일손을 필요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하나님은 일의 성과를 위해서 될수록 더 많은 사람을 부르고 하나님을 믿도록 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과는 본질적으로 차원을 달리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일꾼이라는 것을 일하는 목적이 자신을 향해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자기 이름, 자기 영광,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복음이 증거되는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생에서 복음이 전부인 사람이고, 복음에 미친 사람입니다.
본인은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된 신자로서 그 은혜와 사랑을 말하고 나타내는 것에 온 마음을 집중하는 그가 바로 복음을 위해 존재하는 일꾼인 것입니다. 복음 때문에 살고 복음 때문에 죽는 그가 하나님의 사랑의 성취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일꾼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신학교에 가면 사명을 많이 강조합니다. 사명을 받고 신학교에 왔다는 사람도 많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 받고 사명감에 의해 교회를 개척합니다. 어둠의 세상에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교회 개척이 점차 현실의 문제에 부딪히며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덧 사명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으로 자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사명을 주신 것일까요? 모두가 가짜입니다. 자신을 위해 그럴듯한 교회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면서도 그것을 사명이라는 것으로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사명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을 자주합니다. 자신의 사도직의 의미도 복음의 시각에서 이해합니다. 딤후 1:11절에서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고 말하고, 롬 1: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바울은 사도직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하고도 확고한 기준과 앎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오시고 만나시고 부르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로 답을 내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한 일꾼을 쉽게 전도와 연결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전도해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것이 복음을 위해 일하는 일꾼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것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필히 제시되는 것은 일한 것에 대한 보상입니다. 현세의 복과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일꾼에 대한 보상으로 보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복음을 위하여’라는 일꾼의 본질과는 단절된 인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복음을 위하여’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복음은 내가 죽음의 냄새로 가득한 존재임을 알게 합니다. 한마디로 나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자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죽음의 냄새만 풍기는 죽은 존재일 뿐임을 알게 합니다. 이처럼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이 강해질수록 더 강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으로 사는 것이 복음을 위한 일꾼의 할 일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좀 더 구체적인 것을 제시해 줄 것을 원할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일꾼을 일하는 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일꾼으로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제시해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제시한 일만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말하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은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일을 하는 행함이 있어야 일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이 일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심으로 인해 내가 존재하고 살고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서는 아예 내가 일했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조각들이기 때문입니다.
마 20장의 포도원 품꾼 비유를 보면 여러 일꾼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부름 받은 시각은 각기 달랐기 때문에 일한 시간이나 양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품삯을 일한 시간과 양에 따라 차등을 두고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부름은 일꾼이라는 것으로만 계산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동일한 품삯을 받습니다.
주인은 포도원의 일을 위해 일꾼을 부른 것이 아니라 부름 받지 않으면 그 날 하루는 먹지 못한다는 일꾼의 처지를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천국이라고 말씀합니다. 따라서 천국은 일의 양이나 시간을 따지는 것도 없고 차등을 두고 대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나를 불러 주신 주인의 긍휼을 감사하는 것이 천국입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이 복음을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일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꾼을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의 죽음의 상태를 자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 주셨음을 생각하게 되면 그 은혜와 사랑이 마음 깊이 다가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러 주시지 않았다면 영원히 죽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알게 된 신자의 마음이 은혜와 사랑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복음을 위한 일꾼인 것입니다.
뭔가 행함이 있어야 일꾼이라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감사함으로 마음이 채워지는 것이야 말로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사랑에 눈을 뜨게 되면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세상의 거추장스런 옷을 다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