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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500(5)
61. 나락 (奈落) ☀불교에서 나온 말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
순수한 불교용어 중 하나로 지옥(地獄)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산스크리트 naraka(나라카)의 발음을 그대로 옮겨 쓴 것으로, 본래는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일반용어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이르는 말로 바뀌었으며, 지옥을 뜻하는 말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 흔히 ‘나락에 떨어졌다’ 또는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62. 나무 (南無)
한자(漢字)로 남무(南無)라고 쓰고 읽기를 ‘나무’라고 하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나마스(namas:뒤에 오는 말의 첫소리에 따라 nama 또는 namaha로도 됨)의
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나마스는 본래 ‘구부린다’는 뜻이던 것이 ‘경례한다’ ‘귀의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된 ‘나무’라는 동사의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나 나마스는 명사이면서도 ‘저는 경례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귀의 하겠습니다’라는 동사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아미타부처님께 귀의 하겠습니다’ 하는 말이 나무아미타불이다.
염불이란 것은 부처님을 염상(念想)하는 것, 부처님을 명상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 실행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흔히 쓰이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여섯 글자의 명호를 입으로 외는 염불이다.
또한 불, 법, 승 삼보에 귀의 하겠습니다 하는 것은 ‘나무 삼보’인데 산스크리트어로는 나모 라트나트라야야(namo ratna-traya-ya)라고 한다.
‘나무갈라달나다라야야’라는 유명한 다라니이다. 후세(後世)에 와서 ‘나무삼보(南無三寶)’는 궁지에 몰렸을 때 궁지에서 헤어나고 싶을 때, 좀 어려운 일이지만 어떻게든 성공하고 싶을 때 거의 주문처럼 외우게 되었다
범어의 ‘Namas'를 음역한 것으로,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으나 한 마디로
귀의한다는 뜻이다.
불자가 지극한 마음으로 돌아가 의지함은 맑고 향기로운 진리의 세계에 살고자
함이다.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는 마음이 ‘나무’이며 자기의 고정관념을 깨는 마음이 ‘나무’이다. 진실로 나무는 실천이 수반되어야 한다. 기도(참선, 염불, 주력, 독경, 보살행)는 솔선수범해야 한다.
‘나무관세음보살’을 독송하면서 지극히 마음을 비우면 반드시 관세음의 세계에
들고 끝내 모든 일은 성취된다. 비우면 채워지는 것이 진리이다.
63. 나옹선사(懶翁禪師) : 청산가, 토굴가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선사(懶翁禪師, 1320∼1376)의 이름은 혜근(慧勤)이다. 법호는 나옹, 호는 강월헌(江月軒). 선사의 나이 21세 때 문경 공덕산 묘적암
(妙寂庵) 요연선사(了然禪師)께 찾아가 출가했다.
전국의 사찰을 편력하면서 정진하다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 석옹화상
(石翁和尙) 회상에서 크게 깨달음을 얻는다. 24세 때(1344년)이다.
선사는 원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법원사에서 인도승 지공선사(指空禪師)의 지도를 받고 자선사 처림(處林)의 법을 잇는다. 광활한 중국을 주유하고는 공민왕 7년(1358)에 귀국한다.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조용히 머물러 있었으나 공민왕과 태후의 청이 하도 극진하여 설법과 참선으로 후학 지도에 나선 곳이 황해도 신광사이다. 이 무렵 중국의 홍건적은 쇠퇴해가던 고려를 향해 개경까지 침입해와 노략질을 일삼았고, 공민왕은 한때 노략질을 견디다 못해 남쪽으로 천도한 일이 있을 지경이었다.
나옹선사는 홍건적이 쳐들어와도 오직 설법과 참선 지도에만 전념하니 선사의
위엄에 눌린 도적떼는 저도 모르게 부처님께 향까지 사르고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래도 대중들은 술렁였다. 홍건적은 내일 또다시 침입해올 것이니 어서 피하자는 것이었다.
나옹선사는 혼자라도 절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고 있는데 한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선사에게 절을 지켜달라고 부탁한다. 과연 선사가 있는 신광사엔 홍건적이 나타나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홍건적의 난이 진압되자 왕은 선사에게 '왕사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 보제존자' (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勸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 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내렸고, 왕은 또다시 불교계의 중흥을 부탁한다.
이때 선사가 불교중흥의 터전으로 삼은 곳은 순천 송광사였고, 마지막 원력을 펼치는 장으로 회암사를 찾았다.
나옹선사의 지도력은 적극적인 현실참여, 실천하는 선으로 지혜의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앉아서 참구하는 수행법을 멀리하고 편력의 도정에서 중생을 만나고 제도했다.
염불은 곧 참선이라 하였으니『가사문학총람』에 수록되어 있는 선사가 지은 참선곡은 오늘까지 널리 수행의 지침으로 여겨진다.
선사의 행법은 곧 혼침 되어 가던 고려 말 불교를 새롭게 고양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로써 회암사는 지공ㆍ나옹에 의해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을 이루었을
만큼 위풍이 당당하고 면모가 수려한 대찰이 된다. 이곳에 머문 승려 수만도 3천 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어쩌면 이 땅의 중세불교사에서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대중교화에 힘썼던 분이
나옹이었던지 모르겠다. 선사의 마지막 법회가 비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혹여 정권과의 갈등이 있지는 않았을까.
4년에 걸친 회암사 중창불사를 회향하는 낙성법회. 귀천을 따질 수 없는 부녀자들이 회암사로 오는데 감당키 어려웠다. 마침내 나라의 관리가 나와 산문을 닫고 왕래를 금하기에 이른다.
임금은 나옹에게 떠날 것을 날벼락처럼 명령했다. 선사의 나이 57세. 그 나이에
벌써 병이 들었던가. 명령이 떨어진 그날을 못 넘기고 밀양 형원사로 가는 도중
겨우 신륵사에 당도해 열반을 맞을 만큼 중병이 들었던가. 여기서 우리는 역사
이래, 이런 경우에 흔히 사용되었던 타살(他殺)설을 가정해보게 된다.
신륵사 법상(法床) 위에 앉은 나옹선사가 일렀다.
"너희들을 위하여 열반불사를 마치겠노라." 봉미산 봉우리엔 오색구름이 덮였고, 선사를 태우고 가던 말은 먹기를 그치고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우왕 2년(1376년) 5월 15일, 스님이 된 지 37년 만이었다.
나옹화상의 법맥은 무학대사가 이었고, 목은 이색은 위와 같은 일들을 비문에
적었다. 나옹선사 비와 부도는 회암사터와 신륵사에 있다.
<청산가>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聊無愛以無惜兮 료무애이무석혜)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如水如風終我여수여풍종아)
<토굴가>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토굴(一間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 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 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處處)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 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꽂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默默)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期限定)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窮究)하니
증전(曾前)에 모르던 일 금일(今日)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 심지월(一段孤明心地月)은 만고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축산 제불회상(靈鷲山諸佛會上) 처처(處處)에 모였는데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靑山)은 묵묵(默默)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천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커든 세욕(世慾)인들 있을소냐
욕정(欲情)이 담박(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업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뜻 올라
무공저(無孔笛)를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 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 제
무착령(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더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靈山會上佛菩薩)
64. 나한 (羅漢, 아라한,阿羅漢)
수행 완성한 사람 아라한(阿羅漢)은 산스크리트 arhan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으로, 줄여서 나한(羅漢)이라고 한다. 응공(應供), 무학(無學), 이악(離惡), 살적(殺賊), 불생(不生)이라고도 번역한다.
아라한은 그 의미에 따라 다양한 명칭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공양을 받을 만큼
존경스러운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응공(應供)’이라고 하며, 수행의 적인 모든 번뇌를 없앴다는 의미에서 ‘살적(殺賊)’, 진리에 상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응진(應眞)’, 모든 번뇌를 끊어 더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라는 점에서
‘무학(無學)’이라고도 한다. 그 외에 ‘불생(不生)’이나 ‘진인(眞人)’ 등으로 의역하는데, 보통은 나한(羅漢)이라고 칭한다.
초기 불교의 최고의 성자를 가리키는 뜻으로 번뇌를 완전히 끊어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공양 받고 존경받아야 할 성자라는 뜻이다. 이 경지를 아라한과(阿羅漢果),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를 아라한향(阿羅漢向)이라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붓다를 아르하트(arhat: arhan의 주격)라고도 하였고, 고대 인도의 여러 학파에서도 존경받을 만한 수행자를 아르하트라고 하였다. 자이나교에서는 지금도 성자를 아르하트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부처와
아라한을 구별하여, 아라한은 부처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소승의 성자라고
격하시켰다.
아라한의 유래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룬 녹야원에서 부처님과 함께 수행한 다섯
수행자에게 가장 먼저 설법을 했다는 초전법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다섯 사람이 부처님과 함께 생활하고 원시적인 교단의 형태를 이루게 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차례대로 모두가 정각을 얻게 됨으로써 부처님을 포함해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생겼다고 한다.
초기 불교에서 아라한은 부처님과 같은 사람을 가르켰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별칭인 ‘응공’이라고도 함께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부파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라한이 부처님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지 않고 불제자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계위가 되었다.
65. 내의 (內衣) ☀불교에서 나온 말
내복(內服)과 같은 뜻으로 속옷을 말한다.
부처님 당시 비구는 승가리, 울다라승, 안타회의 삼의(三衣)를 입도록 했고,
비구니는 삼의 외에 승지지, 궐소락가를 더하여 오의(五衣)를 입도록 정해져
있었다. (袈裟와長衫참조)
66. 누각 (樓閣)
사찰의 누각은 단순히 자연 경관을 감상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누각처럼 사방이 활연히 트인 경우보다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판벽이나 여닫이문으로 마감된 경우가 많다.
누각은 보통 일주문과 중심 법당을 잇는 일직선상에 위치하고 있는 사례가 많아
다락식인 경우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누각 밑을 통과하여 법당 앞마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사찰 누각은 만세(萬歲)ㆍ보제(普濟)ㆍ덕휘(德煇)ㆍ천보(天保) ㆍ우화(雨花)ㆍ안양(安養)ㆍ구광(九光)ㆍ구룡(九龍)ㆍ침계(枕溪)ㆍ영월(映月)ㆍ보화(寶華)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들 사찰의 누각 이름은 불교적인 것보다 오히려 도교, 또는 유교적 정서가 강한 것이 더 많은데, 이것은 우리나라 사찰에서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누각 이름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만세루이다.
그러나 만세라는 것은 불교에서는 그리 많이 사용하는 말이 아니다. ‘천수만세(天壽萬歲)’ ‘왕비전하만세(王妃殿下萬歲)’라는 말에서 보듯이 ‘만세’는 ‘현세 복락이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랄 때 쓰는 말로 도교적 색채가 강한 개념이다.
예컨대 ‘지금 이대로 죽지 않고 오래 살기’, 또는 ‘현재의 번영이 계속되기’를
요할 뿐, 과거나 미래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이것은 모든 사상(事象)을
과거ㆍ현재ㆍ미래, 즉 삼세(三世)를 통섭하는 인연법으로 설명하는 불교의 그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안동 봉정사 만세루 안에는 아직도 덕휘루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덕휘’는
‘덕이 빛난다’는 뜻으로, 나라가 태평하면 하늘에서 봉황이 내려온다는 전설과 관련되어 있다. 중국 한나라의 유명한 시인 가의(賈誼)가 지은 <조굴원부(걸:조屈原賦)>에 이런 대목이 있다. “봉황새가 천 길을 높이 날다가<봉황상우천인혜(鳳凰翔于千잴:인兮)> 덕의 빛남을 보고서 내려오거니(람덕휘이하지(覽德輝而下之)>,
덕이 없고 험악한 조짐이 보일 때면(견세덕지험징혜(見細德之險徵兮)> 날개를
더욱 세게 치며 멀리 간다<요증격이거지(遙增擊而去之)>.”
덕휘루는 이 글의 내용 중 ‘람덕휘이하지’의 ‘덕휘’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치자(治者)의 덕을 기리고 칭송하는 뜻을 담은 누각이 하성 용주사에도 있다.
천보루가 그것인데, 이름은 『시경(詩經)』<소아(小雅)>편에 나오는 <천보>시의
제목을 그대로 인용했다. ‘하늘이 뒤에서 도운다’ 는 의미의 <천보(天保)>시는 달ㆍ해ㆍ남산ㆍ송백ㆍ산ㆍ언덕ㆍ작은 언덕ㆍ큰 언덕ㆍ개울 등 아홉 가지 영원의 상징형을 열거하면서 임금도 이들처럼 오래 살기를 축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용주사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顯隆園)에 명복을 빌어주는 능사(陵寺)로 창건된 절이고, 누각은 정조가 이 절에 행차할 때 사용하기 위해 조성한
건물이므로 그와 같은 이름을 지은 것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하동 쌍계사는 팔영루가 있어 더욱 유서 깊은 고찰이 되었다. 팔영루의 유래는 중국 양(梁)나라 때 학자이며 시인인 심약(沈約,441~513)이 영가 태수(永嘉太守)로 있을 때 지은 원창루(元暢樓)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약은 이 누각 위에서 여덟
편의 주옥같은 시를 지었는데, 이로 인해 뒷사람이 누(樓) 이름을 팔영루로 고쳤다고 한다(성호사설 제 29권 시문문 時文門 팔영루 조) 팔영은 곧 ‘팔영 시’를 말하는 것이므로 불교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문학적 용어이다.
사찰 누각 중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완주 화암사의 우화루(보물 제662호)가 있다.
우화루는 조선 광해군 때 지어진 것으로 주법당인 극락전과 마주하고 있으면서
정문과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이다.
누각의 이름은 법화육서(法華六瑞:부처님이 법화경을 말씀하실 적에 나타난 6종의 상서로운 현상), 즉
①설법서(說法瑞:부처님께서 무량의경을 설하여 마쳤으나,
청중이 물러가지 않고, 다음 설하실 것을 기다림)ㆍ
②입정서(入定瑞:부처님이 무량의처삼매에 드심)ㆍ
③우화서(雨花瑞: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내림)ㆍ
④지동서(地動瑞:대지가 여섯 가지로 진동함)ㆍ
⑤중희서(衆喜瑞:대중이 우화, 지동의 상서를 보고 큰 설법이 있을줄 짐작하고 기뻐함)ㆍ
⑥방광서(放光瑞:부처님이 미간백호에서 광명을 놓아 동방 1만 8천 불토를
비치신 것) 중에서 우화서를 직접 인용한 것이다.
우화서(雨花瑞)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일명 영취산, 고대 인도의 지명,
중인도 마갈다국 왕사성의 동북쪽에 있는 산 이름, 그 이름은 산 정상에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는 그 산에 독수리가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기사굴산, 영산이라고도 함)에서 설법하려 할 때 하늘에서 흰 연꽃, 붉은 연꽃 등의 꽃비가 내린 상서로운 현상을 말한다. 이에 연유하여 스님이 불경을 강설하는 곳을 우화대(雨花臺)라 부르기도 한다.
누각 가운데는 영주 부석사 안양루, 서산 개심사 안양루처럼 안양(安養)이라는 말을 사용한 경우도 많다. 안양은 모든 일이 원만 구족하여 괴로움이 없는 자유롭고 안락한 이상향으로, 이 사바세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토를 지나간 곳에 있다는 극락정토를 말한다.
영주 부석사 안양루는 법회나 강학보다는 자연경관을 감상하는 곳으로 어울리는 누각이라 할 수 있고, 서산 개심사 안양루는 다락식이 아닌 접지식이라는 점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여주 신륵사에는 구룡루가 있다. 혹자는 구룡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탄생했을 때
아홉 마리 용이 물을 뿜어 부처님 몸을 깨끗이 했다는 불전설화와 관련해서 설명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동양 고래의 용생구자설(龍生九子說)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합천 해인사애는 구광루(九光樓)가 있다. 일설에 구광은 부처님이 7처 9회(七處九會)에 걸친 법회를 열 때 설법 전에 백호에서 빛이 나왔다는 ‘방광(放光)의 상서(祥瑞)’와 관련된 것이라 하나, 구광이라는 말은 불교 쪽보다 도교 쪽에 가까운 개념으로 봐야 한다.
도교의 호(號)에 구양(九陽)ㆍ구운(九雲)ㆍ구허(九虛)ㆍ구학(九鶴)ㆍ구진(九眞) 등 구(九)자가 들어간 것이 많은데 구광(九光)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선호되는 호이다.
또한 ‘구광사조(九光四照)’, ‘구광등(九光燈)’ 또는 ‘구광주박(九光珠箔)’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경우 구광은 ‘아홉 색채의 아름답고 신령스러운 빛’을 말하는 것으로
최고의 상서(祥瑞)를 나타낸다.
도교적 풍류가 넘치는 이름을 가진 누각이 해남 대흥사, 울주 석남사, 순천 송광사에도 있다. 이름이 침계루인데, 대흥사 침계루(枕溪樓)는 진인(眞人), 곧 신선을 찾는 다리라는 뜻의 심진교(尋眞橋)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침계루(枕溪樓)는 말 그대로 계류를 베개 삼은 누각이라는 의미로서, 그 뜻에 걸맞게 석남사, 송광사 침계루도 대흥사 침계루처럼 모두 계류 가에 서 있다.
부안 내소사에는 봉래루(蓬萊樓)라는 이름의 누각이 있다. 이것은 도교적 발상에서 나온 이름이라 할 수 있는데, 봉래는 도교 삼신산(三神山)중 하나로, 방장ㆍ영주와 함께 신선의 세계를 상징한다.
이 밖에 신선사상과 관련 있는 것으로 ‘구름을 탄다’는 뜻을 가진 의성 고운사
가운루(駕雲樓), ‘신선이 내려오는 곳’의 의미를 가진 선암사 강선루(降仙樓),
낭만적 서정이 가득한 통도사 극락암의 영월루(映月樓)가 있다.
야외에서 사찰 안으로 들어온 누각은 지금 법회나 대중 집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으나, 그 이름 속에는 불교의 이상세계와 함께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풍류의 여운과 원천적 자유를 누리는 도교의 신선계가 펼쳐져 있다.
그런가 하면 덕을 중시하는 유교 정신이 살아있고, 임금을 기리고 칭송하는 군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으며, 인간의 원초적 욕망까지 담겨 있다. 한 마디로 사찰 속의
누각은 한국인이 추구하는 모든 정신적, 윤리적 이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건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사찰100美100選 上卷32쪽에서 발췌, 허균 글, 불교신문사>
67. 능엄경 (楞嚴經)
이 경의 정식 명칭은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인데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ㆍ대불정경ㆍ수능엄경ㆍ능엄경 등으로 약칭한다. 당(唐) 중종(中宗) 신룡(神龍) 원년(705)에 중인도의
승려 반자밀제(般刺密帝)에 의해 전래되고 그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다.
경의 내용은 5음ㆍ12처ㆍ18계ㆍ7대 등을 통해서 원통무애(圓通無碍)의 이치를
밝히고 25보살이 각각 닦은 법을 열거하여 소증(所證)의 이치를 설함. 여러 보살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말미에 관세음보살의 이근 원통(耳根圓通)의 법으로써 도에 드는 방편을 설함. 오음에 의해 생겨나는 선(善)의 마경(魔境) 50종을 지적하고,
선병(禪病)을 다스릴 것을 강조함.
우리나라에서는 강원 사교과의 한 과목에 포함되어 있으며,
특히 계환스님의 요해가 널리 유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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