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2일 연중 9주일 설교
마르 2:23-3:6. 2고린 4:5-12.
우리 존재의 근거
생명을 상징하는 녹색 연중 기간이고, 우리는 마르코 복음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그 처음이 안식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논쟁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밀 이삭을 잘랐습니다. 병행 본문(마태 12:1-)에는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당시 율법은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금지했고 그중 하나가 추수 행위였습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이 추수 행위였다고 보고 바리사이 사람들이 항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이야기를 인용하여 반박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서 쫓겨 다니다가, 배가 몹시 고픈 나머지 사제들에게 가서 하느님께 올린 음식을 얻어먹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무상 21:1-10) 그 고사에 나오는 사제는 에비아달이 아닌 아히멜렉입니다.
사제들은 안식일마다 하느님께 바치는 빵을 교체했고, 묵은 빵은 오로지 사제들만 먹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곤궁함을 본 대사제 아히멜렉은 오직 사제들만 먹을 수 있다는 규정을 무시하고, 빵을 다윗에게 내어 줍니다. 영웅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 형식을 빌려 기록한 것입니다.
왜 대사제는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빵을 내어 주었을까요?
대사제는 당시 종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가장 강한 권력으로 많은 것을 누린 자리입니다.
지금의 권력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 자리이기에 결정해야 할 일들이 허다합니다.
자신의 존재와 위치를 잘 자각한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대사제라는 자리가 더 오를 데가 없는 높은 지위가 아니라 하느님 앞에 인간을 대표해서 겸손함으로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과 인간을 돌보고 섬기는 목숨을 건 자리라는 것을 아히멜렉 대사제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명확히 깨닫고 있었기에 ‘규정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주어 강조하셨듯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만든 규정에 굴레가 되어 지키거나 지키지 않는 것으로 사람됨을 판단하고 기준으로 삼는 공동체야말로 가장 미래가 없는 조직일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 안병무 박사는 이를 예수님의 첫 인권 선언이라 했습니다.
오늘 나오는 바리사이 사람들을 묵상해 봅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를 율법 준수에 두었던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규정을 지키는 것으로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합니다.
3장 1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또다시 율법을 거스르는 행위를 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은 앞부분부터 이런 강한 충돌을 배치하여 예수님의 활동에 강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왜 돌아가셨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역동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갑니다.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행위 중 다른 하나가 치유 행위입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을 제외하고 안식일에는 병자를 치료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율법의 규정입니다.
그 옛날 모세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느님 앞에 사람들과 더불어 살며, 인간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지침이 율법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 이미 율법은 사람을 가르고 판단하고 통치하며 정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시고 율법의 완성 즉 그 본질을 회복하려 하신 것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본래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도덕적이고 품성도 나쁘지 않았고, 민족에 대한 사랑과 신앙도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그들을 자타가 바리사이(분리된 사람들)라고 한 것처럼, 율법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신앙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에게 공격당했고, 그들도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예수님은 참다운 믿음이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것, 그분을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매우 신실한 사람들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지켜야 할 율법이 진리이고, 다른 것들은 모두 배척해야 한다고 배웠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기 위해 헤로데당과 결탁합니다.
헤로데당은 로마 제국의 앞잡이였습니다. 그 두 분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존재의 근거를 알지 못했기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인 것입니다.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이고 자기 존재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거기에 맞게 행동합니다. 존재가 인식을 규정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거는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로가 2독서에(2고린 4:5-12)서 자신을 소개한 것처럼 존재란 내가 누리거나 혹은 부족한 물적 상태를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존재하는 근거를 확실히 알고, 내 존재의 이유를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는 이를 ‘존재의 용기’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도 경험했듯이 인간은 모두 죽음이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 안에서만 찾다 보면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은 더욱 강화됩니다.
당시 유럽을 휩쓸던 실존주의의 영향 아래 인간의 고독과 공허함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겨 나갈 힘을 틸리히는 ‘관계’라고 했습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올바로 서면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움직이시는 것처럼, 우리의 용기 어린 고백과 실천이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존재의 이유를 알고 고백한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세상을 바꾸기도 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나를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성찰 가운데 나를 알고 용기를 내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노력하기를 소망합니다.
세례와 영입을 통해 자기의 존재 즉 서 있는 곳이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이 길을 걷고 어떤 고난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헤쳐 나갈 용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댓글 아멘, 새벽에도 설교가 자꾸 생각이 나서 설교문을 읽는데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큰 위로와 도전을 받는 것만 같습니다.
가장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자를 인간화하고 이해하는 용기가 저와 모든 교우들에게 허락되길 바랍니다.
그 어떤 화려한 성당도, 그 어떤 근엄한 전례도, 그 어떤 즐거운 선율도 교회의 근거가 되지 못함을 압니다. “하느님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없으면 하느님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하신 성 어거스틴의 말이 생각납니다.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이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함께 세워진 신령한 하느님의 집”을 우리 대전주교좌 교우님들 한 분 한 분께서 이루고 계신줄 믿습니다.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이길 바랍니다. 서로에게 진지한 관심을 갖고 보혈로 이어진 가족이 되길 소망합니다. 교회의 위상을 세우기 전에 먼저 서로의 존엄을 세워주는 우리가 되겠습니다.
가슴이 뛰는 말씀에 하느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