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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것은 보기가 좋습니다
보기 좋을뿐아니라 풍경을 평화롭게 합니다
어떤 자리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것은 참 보기에 좋고 마음이 놓이기도하는데
그러지 못한사람이 있으면 불안하고 잘못된 시기까지 만나면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됩니다.
결론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사람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면
돌이킬 수 없는 엄청난 비극이 시작된다는 얘기입니다
가장 좋은 예로
1930대 초반 독일의 심각한 경제공황시기에 히틀러가 총통으로 자리를 차지함으로
인류 최대의 비극인 2차 세계대전 과 홀로코스트가 발발합니다.
우리의 예도 있습니다.
신군부입니다
전두환은 자신의 자리가 아닌 다른자리를 차지함으로
광주의 비극과 수많은 희생이 따르게됩니다
물론 자신마저 사형을 선고받고 여생을 많은 국민들의 원성 속에서 보냅니다.
그가 그냥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면 괜찮은 군인으로 출세하고 최소한 평화로운 노후를 보냈을 것입니다.
노량해전을 이야기 하려다 노량 이전에 원균을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노량은 참 무거운 이야기입니다
이순신의 죽음을 불러온 마지막 해전
선조임금과의 갈등, 일본을 향한 끝없는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일본수군의 명장 시마즈 요시히로와 건곤일척의 승부.
백척간두에 선 조선에서 최강의 수군을 키우고 보유한 이순신은 자신의 전력으로 전쟁의 승리에 기여해야 하는데 이때 느닷없이 원균이 나타납니다.
나타났다는 표현은 지나치군요
원균은 임진전쟁 내내 아물지 않는 종기처럼, 잉잉거리며 달겨드는 등애처럼
이순신의 주변을 배회하고 훼방하고 속을 끓이게 합니다.
승전에 도움이 될만한 전공을 아주 없지는 않을것입니다만.
원균.
그는 임진전쟁에 없었으면 좋았을 사람인데
여러분이 아시는대로
중요한 자릴 차지하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원균을 나쁜사람으로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도 있지만 아주 나쁘기만한 악인이라 여기진 않습니다.
물론 좋거나 유능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냥 욕심내지 않고 분수에 맞는 자리에 있었으면
그저 그런 인물로 후손들이 기억할 필요없이 잊혀져 갈 사람입니다.
예를들어 함경도 종성부사 함경도절도사 쯤에서
아니면 훈련원 교관 정도로 만족했다면
지난 4백년과 앞으로도 오랜세월을 인구에 회자되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테고
그 후손들이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원균의 명예 복원을 위하여 새로운 사료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정례적으로 원균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후손들의 노력이 있습니다
주로 미디어를 통하여 과거의 기록들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개인의 기록들을 가져오거나 (쇄미록 같은)
선조실록의 일부를 가져와 이순신과 어깨를 나란히 한 공신 (때로는 이순신 보다 더 높은 공훈기록)
등의 자료를 제시합니다
그도 나름 열심히 싸웠고 약간의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원균을 싫어하고, 원균도 이순신을 도무지 인정하지 않고 대듭니다.
이 둘의 악연이 어떻게 흘러서 역사를 장식하고
나라를 흔들고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원균은 이순신 보다 5살 은데다 24살쯤에 무과에 급제합니다.
32살에 급제한 이순신보다는 나이도 짬밥도 한참 위입니다.
군대는 요즘도 기수문화가 강합니다
육사동기면 계급이 높아도 사석에서는 경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인지
유교사상의 장유유서 때문인지 어쨋든 그런 문화가 강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은 비슷한 시기에 함경도쪽 여진족 방어전선에 배치되고 어느정도 공을 세운 후
원균은 당시 가장 강력한 군사를 거느린 경상우수사로
이순신은 비교적 규모가 작은 전라좌수사로 부임합니다.
특히 이순신은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좌수사가 되었으니 원균이 보기에 꼴사나웠을 것입니다.
원균은 뇌물로 탄핵당한 전력이 있으니 이순신의 파격적승진도 뇌물때문이라 짐작하였을지 모릅니다.
경상우수영은 조선수군의 핵심보직입니다.
일본을 왕래하는 무역로의 중심이니 자연히 사신들도 지나가고 왜구도 가장 많이 출몰하기에
조선의 가장 큰 수영입니다
본거지와 관할지는 합포 진해 거제동북부그리고 통영까지 즉 경상도 중서부 전체입니다.
그래서 경상우수영의 규모는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을 합친 규모의 전력을 보유합니다.
그러니 편제상 같은 품계지만 원균은 경상우수사가 전라좌수사보다는 한단계 위라고 스스로 생각했을것이고
객관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이 두가지
나이와 급제시기, 그리고 경상 우수사라는 객관적 근거.
그리고 원균이라는 인간 속에 잠재된 인간성.
이것들이 이순신이라는 벽을 만났을때 어떻게 표출되는지 지켜볼 일입니다.
원균의 성정이나 인간적 측면부터 살펴보기로 합니다.
그는 부친의 뇌물사건에 연루되어 탄핵 파직되었다가 다시 급제를 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비정상적인 가치관입니다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정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가치관으로는 이순신 같은 결벽한 성품이 더 비정상으로 보였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원균은 술을 즐기고 여자도 좋아하여 전장에서도 회의실로 사용하던 곳 까지 첩을 들여놓고 담장을 쳐서
지휘관들의 접근을 막았다는 기록이 있고
전투에 나갈때도 어린여자를 배에 태워 갔다고 합니다
이런 원균을 본받아 원균의 부장 중에도 여자를 배에 태우고 다녔다는 기록이 난중일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질구레한 공적을 만들어 자주 장계를 올립니다
전장에서는 적의 수급을 줏어 보내고 심지어 조선인의 머리까지 잘라 보내는 만행을 부립니다.
원균은 걸핏하면 술에 취해 부하를 때리거나 술주정을 하고 행패를 부려 이순신의 심기를 어지럽힙니다
난중일기에 처음에는 원균을 우수사 라는 경칭을 쓰다가 나중에는 <한심하다>, <원흉> 같은 막말을 씁니다.
그만큼 원균은 인간적으로 결함이 많은 사람인데
하필 이순신 같은 완벽주의자 앞에 섰으니 더 작아지는 법이지요
그런데
스스로를 이순신보다 낫다고 생각을 하니 비극의 씨앗이 내재된 것입니다.
임진전쟁이 발발하고 부산 동래가 함락되자
경상수영은 지리멸렬입니다
원균은 우수영의 판옥선 70척을 자침 시키고 대포, 포탄도 모두 바다에 버리고
달랑 한척을 타고 달아납니다
그것도 육지로 살 길을 찾아가려 했는데 수하의 강권으로 이순신에게 의탁하게 됩니다.
수백척의 왜선이 육군을 가득 태우고 부산으로 밀려왔을때
원균의 판옥선 70척이면 고니시의 제1대 정도는 바다에서 맞싸울 수 있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이순신쯤 되는 명장이라면 몰라도 원균같은 평범하기 짝이없는 자에게 무리한 기대입니다.
당시 고만고만한 경상좌수영 (부산진,수영구 쪽) 좌수사 박홍 역시 배를 자침 시키고 나머지군사를 모아 육군에 합류합니다.
제대로 정신이 박힌 장수였다면 합포,통영, 거제의 우수영 1만 수군과 판옥선 70여척을 보전하여
이순신의 좌수영이 있는 여수로 후퇴할 수 있었을텐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판옥선은 고가의 무기 입니다.
이순신에게는 대략 50척 가량의 전함이 있고 거북선도 3척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거북선이 출동하지 않은점을 미루어 아직 미완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늘의 이야기 주인공은 원균입니다.
원균의 가장 큰 공적은
그의 부족한 모든것들이 이순신을 돋보이도록 만드는데 결정적입니다.
원균의 저열한 인성에 대해서는 다소 기록했으니
이번에는 그의 장수, 지휘관으로서의 재질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병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무지했다는 것이지요
겨우 과거에 급제할 정도의 식견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모양입니다
이순신의 일기에도
원균이 병법을 모르는 한심한 사람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순신은 이기는 전투를 만든 후 전투를 개시합니다
그래서 무패의 전적을 자랑하는데다 아군의 피해가 거의 없습니다
옥포해전부터 한산도해전까지 수십척의 적선을 침몰시키면서도 전함의 피해도 사상자도 거의 없습니다.
원균은 이순신을 따라다니며 공적(수급)을 챙기다보니
해전이 이렇게 쉽게 이기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 모양입니다
그래서 걸핏하면 적을 공격하자고 우깁니다
이순신은 신중하게 반대를 하고...
그래서 원씨종친회 (대종회장이 원유철?)에서
원균을 지장이나 덕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용장 맹장이었다고 합니다
싸우자고 우기기만 하면 맹장이라 생각하나 봅니다.
군 생활을 해보면 그런 상관이 있습니다
술 좋아하고 거칠고 부하들 잘 때리고 기분나쁜일 생기면 부대원 모아 얼차려 하고
큰소리 치고 의리있는 척하고 용감하게 싸울듯하다가 정작 싸워야할때가 오면 먼저 달아나는...
원균이 대략 그런자 입니다.
아닐수도 있지않나?
내가 본 기록에는 다르던데?
라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것입니다.
쇄미록이라는 기록과 선조실록의 영향입니다
증명해 보이기는 너무 복잡하고 길어지니 여기선 생략합니다.
어쨋든 수십 수백명의 역사학자 교수부터 향토사학자들의 연구결과이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균은 이순신이 매우 못마땅합니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어리고 짬밥도 모자라고
성격조차 전혀 맞지않아 이쁜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조선 수군 주력이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이고 전라우수사 이억기까지 이순신에게는 고분고분하니
판옥선 몇척뿐인 주제라 이순신의 명을 따르긴합니다만 영 마뜩찮습니다.
더욱이 한산해전 이후 이순심은 삼도수군 통제사라는 공식직함까지 받았습니다.
이럴때 이순신이 알아서
- 원균수사 형님께서 전군을 지휘하십시요 제가 따르겠습니다
라고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는데
꼬장꼬장한 이순신이라 그런 기미는 전혀없고
걸핏하면 훈련한답시고 좌로 가라 우로 가라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일입니다.
실제로 난중일기 등을 보면
원균이 이순신의 훈련을 제대로 이해못한다는 기록이 있고
더구나 학익진 같은 고도의 진법은 치밀한 훈련으로 완벽하게 손발이 맞아야 성공하는 것이지
한군데만 뚫려도 전세가 뒤바뀌는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한두번 실제로 원균쪽이 뚫린 예가 있기도 합니다.
원균은 틈나는대로 이순신을 모함합니다
결정적으로는 부산 왜적의 본부를 소탕해야하는데 이순신이 겁을내고 싸우질 않는다.
자기가 지휘한다면 부산까지 달려가서 적을 섬멸할 자신이 있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야길 퍼뜨리고
이런 모함은 여러가지 정황과 맞아떨어져 마침내 이순신이 파직되고 압송됩니다.
선조는 한산해전 이후 끝모를 이순신의 인기와 위명에 위기감을 느낍니다.
자신은 한양을 버리고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할 뜻을 가졌는데
이순신은 자신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고 그것을 성공시켰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세자 광해군의 명을 곧바로 이행하지 않은 일도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선조는 이순신에게 분노하고 그를 없애려합니다
비슷한 예가 김덕령장군의 사형집행도 있습니다.
선조는 왕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대중적 인기를 지닌 무장을 극도로 경계하였습니다
평시라면 괜찮은 임금일 수 잇었겠지만 전란에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유약하면서 음험하고
의심이 많으며 권력에 집착하는 왕으로 보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을 꼭 죽이라고 명하지만 이원익, 정탁 같은 명재상의 상소,
권율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등의 구명이 잇어 백의종군하는 선으로 정리됩니다.
이순신을 적극 천거했던 서애 유성룡은 당시 이순신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당쟁에 밀렸다거나 친분관계를 잘 아는 조정의 눈밖에 날 경우 같이 실각할 수있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일본수군을 압도하던 막강한 조선수군의 통제사자리는 원균이 차지합니다
평소 부산으로 돌격하여 왜군을 격파하겠다고 큰소리 뻥뻥치고 이순신을 몰아냈습니다만
통제사가 되어보니 부산으로 싸우러가기는 두렵습니다
부산은 물론 견내량 동쪽부터 마산 진해 거제 가덕도 김해 부산까지 모두 일본육군의 점령지입니다.
해전 중 육지에서 지원포격을 하면 불리합니다
더욱이 육지에 정박하여 휴식하거나 급수를 할 수도 없습니다.
원균은 권율에게
- 육지에 적들이 있으니 육군이 함께 병진하자
라고 합니다.
도원수 권율이
- 니넘이 부산까지 쳐들어간다고 했자나?
리고 몰아 부칩니다.
원균이 출전했다가 돌아오고 미적거립니다
권율이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칩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입니다.
합참의장이 해군함대사령관 쪼인트를 깠다고 보면 됩니다만
그래도 당상인데 (3품이상) 직접 곤장을 맞았겠느냐
아마 그의 시종장 정도가 대신 맞았으리라 보는 사가도 있습니다 일리가 있긴한데
김훈의 남한산성을 보면
당상관 수비대장급(이시백?)을 영의정 김류가 곤장을 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 당상이니 엉덩이를 벗기지는 않고 쳤다고합니다.
미루어 원균이 그 뚱뚱한 엉덩이로 곤장을 맞는것은 치욕입니다
원균은 뚱뚱한것으로 유명하여 말을 타면 말 허리가 부러져 수군으로 발령되었단 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뚱뚱한만큼 대식가 입니다
한끼 한자리에서 밥 몇그릇 닭 3마리를 먹어야한다는 ...
곤장을 맞고는 원균이 완전 돌아버립니다
술에 곤드레가 되어서는 밤늦게 느닷없이 전군출동을 명하지요
제장들은 의아하지만 출동을 합니다
보통이라면 선봉 중군 후군 이렇게 나누어 진군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원균은 몽땅 한묶음이 되어 전진합니다
오늘 다같이 죽자~ 정도의 심뽀였는지...
밤을 새워 계속 진군합니다
부산에 거의 도착합니다.
마침 적의 수송선단(보급)이 조선수군을 보고 달아납니다
당시 왜군은 조선수군이라면 오금을 못편 공포의 대상입니다.
도망가는 선단을 추격명령을 내립니다
열척쯤이 추격하다가 노꾼들이 지쳐버려 그냥 표류를 하여 울산근처까지 떠내려갑니다
그리고 몰살당합니다.
밤을새워 달려왔으니 전투가 불가합니다
당시의 해전은 단 몇키로라도 움직인 배와 기다린 배가 싸우면 기다린 배가 무조건 유리합니다
배의 승무원 절반이 격꾼이고 절반이 전투원입니다
격꾼이 탈진해버리면 그때부터 전함이 아니고 그냥 물위를 떠다니는 나무통입니다
앞으로 나가지도 물러서 달아나지도 못합니다.
원균은 그런 기초적인 전술조차 생각못한 모양입니다
함대는 달아나다가 가덕도에 잠시 내립니다
4백명 정도가 물을 가지러 갔는데 매복하고 있던 왜군에게 몰살당합니다
다시 달아납니다
달아나면 그냥 천천히라도 한산도쪽으로 후퇴했으면 좋았을텐데
거제 영등포에 머뭅니다
파도가 칩니다
판옥선은 밑바닥이 평평한 구조라 내해에서 싸우긴 적합하지만 파도에는 젬병입니다
덩치가 크고 무거워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왜군전함은 날렵하고 빠르고 파도에 강합니다
판옥선은 왜군배를 추격할 수 없습니다
포격으로 싸우거나 충파에 강할뿐입니다.
원균은 영등포를 떠나 거제 칠천도 쪽으로 갑니다
칠천도는 거제도와 불과 몇백미터 떨어진 기다란 섬입니다.
칠천도와 거제도 사이를 칠천량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가장 생각하기조차 싫은 부분입니다
그냥 빨리 지나가겠습니다
궁금하시면 칠천량 검색하시면됩니다.
밤 중에 양쪽에서 왜군전선이 습격합니다
잠들어있던 원균은 기겁을 합니다
좁은 해협 어두운 밤 이미 접근해있는 왜군
왜군이 배에 오르면 끝장입니다
우리 판옥선에 백명 가량의 전투원이 있는데
열다섯명의 왜군이 등선하여 전멸당한 기록이 있습니다
왜군들이 백병전에 그만큼 강합니다.
원균은 도망을 갑니다
지휘관이 군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을 가다가 마침내 배를 버리고 ...
수군통제사가 배를 버리고 땅으로 달아났습니다
원균의 동생은 (원연?)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합니다
이억기 최호 등이 전사합니다
칠천량은 싸울곳이 아니니 달아나자고 우기던 경상우수사 배설은 휘하의 열두척을 데리고 달아났습니다.
탈영이긴 하지만 남아 있었으면 그냥 몰살입니다
그래서 나는 배설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는 편입니다.
칠천량전투는 전투가 아니고
그냥 우리 수군을 고스란히 제사상 위에 올려바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해전사에서
칠천량해전이라고 쓰기도 부끄러운 졸전 중의 졸전입니다
일본수군은 전혀 피해가 없이 우리 수군 1만여명 백수십척의 전선이 아작 났습니다
한산도대첩에 왜선 50여척이 침몰했는데 그 두배입니다.
아무래도 정상적인 해전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모두 원균에게 있습니다.
1만여 조선수군이 모두 죽은 것은 아니고 육지로 달아났다는 기록도 있지만
바다에 조선군 시체로 가득 덮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비극의 씨앗은
잘못된 시기에 무능한 자가 중요한 자리를 탐냈고
어리석은 군주가 그를 그 자리에 앉혔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는 역사상 몇번이나 반복됩니다
한국전쟁에도 그랬습니다
.
술과 여자를 좋아했고 밥먹기를 즐기고
병법에 무능했던 자가 중요한 자릴 탐했던 결과는 이렇게 암담했습니다.
일본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기고 해전금지령까지 내리게 할만큼 승승장구하던 조선의 수군은
이 한번의 전투로 괴멸 되었습니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달아나다가 왜군에게 도륙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망가서 숨어 살았다는 설도 있습니다
고성 어딘가 (당동리) 목없는 장수의 무덤이 원균의 것이라는 설도 있고
왜군의 기록에는 원균이 나오지 않으니 숨어살았다는 설도 일리가 있습니다
살았건 죽었건 중요하진 않습니다
패전 후 조정의 기록관들이 현지에 내려와 기록한 내용에도
원균의 무능과 어처구니 없는 모든것들이 적혀있으니
원씨종친회는 원균 용장설을 거두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