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미국, 파나마 침공 한 미군병사가 파나마시티에 자리잡고 있는 노리에가 장군의 집무실에서 무장경계를 서고 있다. 미국이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군부 독재자 미누엘 노리에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파나마를 침공했다. 미국과 노리에가는 그동안 협력관계를 유지해 왔지만 노리에가가 파나마를 마약조직의 중간 거점으로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더구나 노리에가가 미국의 첨단 기술과 첩보를 공산권에 팔아넘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다. 미국은 침공명분으로 첫째, 미국시민의 생명보호 둘째, 파나마조약의 보호 셋째, 노리에가 체포 넷째, 파나마의 민주헌정질서 회복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2년동안 미국은 파나마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중남미 여러 국가와 외교 및 협상 노력을 전개해왔으나 노리에가가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12월 15일 미국과의 전쟁상태를 선포하면서 미군장교 1명을 사살하자 총 2만6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침공했다. 1900년 이래 4번째인 이번 침공으로 1만5천명의 파나마인이 집을 잃었고 459명의 비전투원이 사망했다. 결국 노리에가는 체포돼 미국으로 압송됐지만 침공을 바라보는 시각 중엔 소국의 주권을 무시한 강대국의 논리라는 비난의 소리도 있었다.
[1901년] 박영희 朴英熙 출생 박영희는 일제 치하에서 진보적 문학예술운동단체인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을 이끈 대표적 이론가이다. 1921년 그는 <장미촌>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에는 박종화·나도향·이상화·현진건 등과 함께 <백조>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듬해 김기진과 함께 낭만적·퇴폐적 문학을 비판하며 <백조>의 해체를 주도했다. 이어 그는 '인생을 위한 예술', '현실과 싸우는 의지의 예술' 등의 주장을 내세운 파스큘라를 조직했다. 파스큘라가 염군사와 통합되어 KAPF로 바뀐 후에는 KAPF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김기진을 상대로 KAPF 내부에서 일어난 최초의 문학논쟁인 '내용·형식 논쟁'을 벌였고 초기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소설인 <전투>, <사냥개>, <지옥순례> 등을 썼다. 그러나 임화를 비롯한 소장파들이 KAPF의 주도권을 장악하자 순수문학에 전념했다. 1934년 전향한 그는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일했으며, 창씨개명과 함께 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8·15해방 후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했으며 6·25전쟁 때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1968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사망 `에덴의 동쪽`의 저자 존 스타인벡 빈민계층과 소수 민족들의 이야기와 기계문명에 반대하는 글을 주로 써 온 존 스타인벡이 1968년 12월 20일 사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교시절부터 농장일을 거들며 고학으로 스탠퍼드 대학에 진학했으나 결국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하고 문학의 꿈을 키워야 했다. 1925년부터 시간당 1달러의 건설노무자로 뉴욕생활을 시작해 `뉴욕 아메리칸`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기자로 활약했으나 객관적인 사실 보도가 아닌 주관적인 기사로 해고당해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왔다. 문학의 황무지 시대라고 할 수 있는 1920년대 후반 영국 해적 헨리 모건을 주인공으로 한 `황금잔`이 그의 처녀작이었다. 1930년대의 대공황기에는 자연주의적 경향이 짙은 인물에 관심을 가졌고 이민노동자의 비극을 그린 `생쥐와 인간`(1937년)을 출간하자 그의 인기는 치솟기 시작했다. `분노의 포도`(1939년) 이후의 대작으로 꼽히는 `에덴의 동쪽`(1952년)은 평론가들로부터 도덕적 혼란을 준다고 비난받았지만 남북전쟁에서부터 제1차대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에덴동산을 찾아, 미래를 꿈꾸는 자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스타인벡은 이후에도 도덕규범의 붕괴로 인한 사회문제를 다룬 `우리들의 불만의 겨울`로 196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64년에 존슨 대통령에게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1960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결성 1960년 12월 20일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nal Liberation Front/NLF)이 결성되어 비(非)공산주의자인 구엔 후 토가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미국을 패배시킨 주역은 농민군에 가까운 게릴라 집단이었고, 그 상부조직은 NLF였다. NLF의 군사조직인 베트콩은 베트남 전쟁 기간 동안(1955~75) 줄기차게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베트콩의 병력은 주로 남베트남에서 충원했으나 무기, 행동지침, 보급품 등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았다. NLF의 결성으로 남베트남 공산주의 계열이 공고히 결속되자 미국은 고 딘 디엠 정권을 돕기 위해 병력을 증강했는데, 1967년에는 38만 9,0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베트남에 주둔하게 되었다. 미군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전쟁을 일으켰으나, 생경한 게릴라전에 따른 피해와 남의 나라의 내전에 개입했다는 도덕적 정당성의 결여에 따른 국론 분열로 곤경에 몰린 끝에 1973년 휴전협정 조인 후 철수했다.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과 NLF의 총공세 앞에 남베트남 정권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마침내 끝이 났다.
[1903년] 장기천 張基千 출생 1903. 12. 20 평북 의주~1980. 4. 3. 독립운동가.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에서 활동했으며, 1922년에는 대한통의부 제5중대 참사(參事)로서 동지 8명과 더불어 의주 고령삭면 일본주재소를 습격했다. 1926년 5월 홍학원의 권유로 정의부에 입대했다. 1927년 7월 홍학순·김봉수·이근수 등과 함께 의용군 제5중대장 김석하(金錫河)의 명령을 받고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입했다. 7월 15일 의주군 가산면의 계용수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계승호·강영화를 납치해 사살했으며, 구성군 관서면의 금광사무소를 습격하는 등 2개월 동안 군자금 모금활동을 했다. 일본경찰의 추적이 심해지자 은신해 있다가 8월 11일 의주군 고진면의 한영기·박세하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8월 15일 수진면사무소를 습격했다. 8월 18일에 2명씩 2조로 나누어 1개조는 식산은행을, 다른 1개조는 용만금융조합을 습격하기로 계획했다. 그와 김봉수는 도중에서 합세한 최성준과 같이 조합을 습격, 수천 원의 현금을 탈취하여 19일 만주를 거쳐 본대로 귀환하던 중 평안북도 경찰부 일본형사에게 체포되었다. 1929년 9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1923년] 이현재 李賢宰 출생 1929. 12. 20 충남 홍성~. 교육자. 195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거쳐 1969년 동 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서울대학교 교수, 1969~71년 동 대학 학생처장, 1971~72년 미국 피츠버그대학교 객원교수, 1975~79년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장, 1979년 동 대학 사회과학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1980~83년 동 대학 부총장, 1983년 한국경제학회 회장, 1983~85년 서울대학교 총장, 1988년 국무총리 등을 지냈다. 1992년 현재 학술원 회원(경제학 분야), 대통령 교육 정책 자문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구조변동〉·〈자본시장과 주식분산〉·〈재정경제학〉·〈한국 경제론〉 등이 있다.
[69년] 제8대 로마제국 황제 비텔리우스[Vitellius, Aulus] 암살 AD 15~69 로마. 네로가 죽은 뒤 잠깐 제위를 계승한 3명의 후계자들 중 마지막으로 제위에 올랐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동료로 켄소르(감찰관)를 지내고 3번이나 콘술(집정관)을 맡은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의 아들이었다. 아울루스 자신도 48년 콘술이 되었고 61년경에는 아프리카 프로콘술(속주총독)이 되었다. 68년 하(下)게르마니아군 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네로가 죽은 후 정치적 소요가 일어나자 69년 1월 2일 그의 레기온(군단)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로 진군했고 4월 16일 경쟁 황제 오토는 자살했다. 아울루스 비텔리우스는 7월 로마에 입성했지만 7월 1일 동부 레기온 지휘관인 베스파시아누스 역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 군대에게 패한 뒤 퇴위를 생각했으나 황실 근위대가 이를 만류했다. 결국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충성하는 군대가 12월 20일 로마로 입성하자 비텔리우스는 자기 병사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1895년] 랑어 (미국 철학자) [Langer, Susanne Knauth] 출생 1895. 12. 20 미국 뉴욕 시~1985. 7. 17 코네티컷 올드라임. 미국의 철학자·교육자. 언어분석과 미학에 관해 광범위한 저술을 남겼다.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 있는 래드클리프대학에서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함께 공부했으며, 1926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27~42년 래드클리프에서 철학 튜터로 있었고, 1945~50년 뉴욕 시에 있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철학을 강의했다. 1954~61년에는 뉴런던의 코네티컷대학교에서 철학교수(1961 이후 명예교수)로 재직했다. 널리 알려진 책 〈철학의 새로운 경향 : 이성·의식·예술의 상징주의 연구 Philosophy in a New Key : A Study in the Symbolism of Reason, Rite and Art〉(1942)에서 랑어는 화이트헤드가 상징 양식들의 분석을 통해 과학에 제공한 의미를 예술에 부여하려 했다. 〈감정과 형식 Feeling and Form〉(1953)에서는 예술의 비(非)추론적 상징과 과학언어의 추론적 상징을 구분하면서 예술, 특히 음악이야말로 생활양식, 즉 일상언어로 전달할 수 없는 감정·동작·정서 등에 대한 직접적 또는 직관적 지식을 상징하는 고도의 명확한 표현형식이라고 주장했다. 3권으로 된 〈정신 : 인간감정론 Mind : An Essay on Human Feeling〉(1967, 1972, 1982)에서는 정신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추적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사망 1482(성종 13)~1519(중종 14). 중종 때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주창하며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시행했으나, 훈구(勳舊) 세력의 반발을 사서 결국 죽음을 당했다.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 조선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감찰 원강(元綱)이다. 17세 때 어천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가, 무오사화로 희천에 유배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때부터 시문은 물론 성리학의 연구에 힘을 쏟았고, 〈소학 小學〉·〈근사록 近思錄〉 등을 토대로 하여 이를 경전에 응용하는 등, 20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가장 촉망받는 청년학자로서 사림파의 영수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김굉필이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에 찬성했다 하여 윤필상(尹弼商)·이극균(李克均) 등과 함께 처형되면서 가족과 제자들까지도 처벌당하게 되자, 조광조도 유배당하는 몸이 되었다. 정계의 현실을 몸소 겪은 그는 유배지에서 학업에만 전념했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공부했는데, 이때는 연산군 시절의 폐해에 느낀 바 있어 '정군심'(正君心)·'치군지'(致君知)를 급선무로 삼아 〈대학〉의 도를 역설하는 한편, 도학정치·철인정치를 주장한 대자성 유숭조(柳崇祖)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라는 관직에 초임되었고, 이어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그해에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죽고 중종의 계비 책봉문제가 논의될 때, 박상(朴祥)·김정(金淨) 등이 폐위된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다 반정공신(反正功臣)인 대사간 이행(李荇)의 탄핵으로 유배되자, 정언으로 있던 조광조는 대사간으로서 상소자를 벌함은 언로(言路)를 막는 결과가 되어 국가의 존망과 관계된다고 주장하여 오히려 이행 등을 파직하게 했다. 그뒤 수찬을 거쳐 호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했다. 그는 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입시(入侍)할 때마다 도학정치를 역설했다. 당시는 연산군이 정치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직후로 정치적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시대적 추세였고, 중종은 조광조의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조광조의 정치관은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체적 실현방법으로 왕이나 관직에 있는 자들이 몸소 도학을 실천궁행(實踐躬行)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을 지치주의(至治主義)·도학정치라고 했다. 그는 지치(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스림의 근본인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며,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체(政體)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뜻을 세움이 크고 높아 시류(時流)에 구애되지 않아야 함을 논하고, '조종(祖宗)의 옛 법을 갑자기 고칠 수는 없지만 만일 현실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역시 변통(變通)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변법주의(變法主義)를 주장했다. 한편 지난날의 사림의 참화를 거울 삼아, 임금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의 공을 이룸으로써 마음을 밝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해야 이상정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1517년 교리로 경연시독관·춘추관기주관을 겸임했으며, 〈여씨향약 呂氏鄕約〉을 반포·간행하여 8도에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향촌의 상호부조와 서민의 복리증진을 꾀했다. 1518년 부제학이 된 후 미신타파를 내세워 당시 폐해가 많아 지식층 사이에 비난이 많았던 소격서(昭格署)의 폐지를 강력히 주장해 이를 혁파했다. 그해 11월에는 대사헌에 승진하고 세자부빈객(世子副賓客)을 겸했다. 이때에 당시의 과거가 사장(詞章)에만 치중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내외의 요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재(才)·행(行)이 있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왕이 선택하게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할 것을 주장하여 이듬해에 이를 실시했다. 현량과의 실시로 김식(金湜)·기준(奇遵)·한충(韓忠)·김구(金絿)·김정(金淨) 등 소장학자들이 발탁되어 정계에 진출했다(→ 사림파). 이후 조광조와 그의 동지들인 소장학자들은 조정의 내외요직에 포진하여 당시를 이상정치 실현의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제도의 실시와 전래 제도의 개혁, 교화의 보급 등을 통해 이상적인 정치를 시행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훈구파를 외직으로 몰아내는 한편, 1519년 반정공신 중 지나치게 공을 인정받은 사람의 훈작을 삭탈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신진사류의 위훈삭제(僞勳削除) 요청은 이미 기성 귀족이 되어 있는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샀고, 왕도 급격한 개혁주장을 꺼리고 있어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광조 등의 요청이 강력했기 때문에 마침내 전(全) 공신의 3/4에 해당되는 76명의 훈작을 삭제하게 되었으며, 이는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훈구파 중에 조광조 등 신진사류에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예조판서 남곤(南袞)과 도총관 심정(沈貞)은 홍경주(洪景舟)와 모의하여, 대궐 후원의 나뭇잎에 과일즙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를 써 벌레가 갉아먹게 한 다음에 궁녀로 하여금 이것을 왕에게 바쳐서 의심을 조장시켰다. 또한 홍경주를 시켜 조광조 등이 붕당을 짓고, 사리(私利)를 취하며, 젊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이 든 사람을 능멸하고, 낮은 이가 귀한 이를 업신여겨 국세를 기울게 하여, 조정을 날로 그르친다고 탄핵하게 했다. 신진사류를 비롯한 조광조의 도학정치와 급진적 개혁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훈구파의 탄핵을 받아들여 1519년 조광조·김식·김구·김정 등을 투옥하고 이어 사사(賜死)의 명을 내렸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변호로 일단 사형이 면제되어 능주(綾州)에 유배되었다. 그후 훈구파의 김전(金詮)·남곤·이유청(李惟淸)이 3정승에 임명되자 현량과가 폐지되었고, 조광조는 그해 12월에 사사되었다. 조광조 등 신진사류들의 도학정치사상을 바탕으로 한 급진적 개혁정책은 연산군 이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요순시대(堯舜時代)와 같은 이상정치를 실현함으로써 국가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실행방법이 급진적인 것이어서 왕권을 배경으로 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개혁정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도학정신은 후세에 계승되어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의 유학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사림에게는 정신적인 표상이 되었으며, 한국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했다. 선조초에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능주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 도봉서원(道峰書院), 희천 양현사(兩賢司)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정암집 靜庵集〉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1863년] 토리 (미국 언어학자) [Torrey, Charles Cutler] 출생 1863. 12. 20 미국 버몬트 이스트하드윅~1956. 11. 12 시카고. 미국의 셈어(語) 학자. 특정 성서 문제들에 대해 독창적이고 자극적인 견해를 가졌다. 토리는 바우두인대학(메인 주)·앤도버 신학교(매사추세츠 주)·유럽 등에서 공부했다. 앤도버 신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셈어를 가르쳤고, 예루살렘에 미국 고고학 학교(후에 미국 동양학 연구 학교로 이름이 바뀜)를 세우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토리의 이슬람교 연구는 〈마호메트교의 이집트 및 북아프리카 정복 The Mohammedan Conquest of Egypt and North Africa〉(1901)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븐 아브드 알 하캄의 아랍어 작품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이슬람의 유대교적 기초 The Jewish Foundation of Islam〉(1933)도 이슬람교를 연구한 것이다. 그는 〈에즈라〉·〈느헤미야〉에 대해 신선한 비평적 평가와 함께 그것들을 다시 배열했는데, 이런 연구는 〈에즈라-느헤미야의 편집 구성과 역사적 가치 The Composition and Historical Value of Ezra-Nehemiah〉(1896)·〈에즈라 연구 Ezra Studies〉(1910)·〈이스라엘의 연대기 편자의 역사 The Chronicler's History of Israel〉(1954)에 나타나 있다. 〈제2 이사야:새로운 해석 The Second Isaiah:A New Interpretation〉(1928)에서 그는 〈이사야〉 34~35장과 40~66장이 BC 400년경에 기원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위(僞) 에제키엘과 원래의 예언 Pseudo-Ezekiel and the Original Prophecy〉(1930)에서 정경 〈에제키엘〉이 3세기 위경의 개정판이라는 그의 이론을 제시한다. 토리는 〈아람어 원본 복음서의 번역 The Translations Made from the Original Aramaic Gospels〉(1912)·〈4복음서:새 번역 The Four Gospels:A New Translation〉(1933)·〈번역된 복음서 Our Translated Gospels〉(1936)에서 4복음서가 아람어 원본에서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고 주장했다. 사후에 출판된 〈요한의 묵시록 Apocalypse of John〉(1958)에서는 〈요한의 묵시록〉이 68년에 씌어진 아랍어 원본의 번역본이라고 주장했다.
[1942년] 노기남 신부, 한국 최초로 주교에 임명 한국인 최초의 가톨릭 주교. 10대 서울교구장. 세례명은 바오로. 양친 모두 천주교 신자였으며,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0년 신품성사를 받고 신부가 되었으며, 종현성당(지금의 명동성당)의 보좌신부로 사제생활을 시작했다. 종현본당에서 12년간 보좌신부로 있으면서 계성보통학교(지금의 계성여고)를 설립하여 그곳에서 종교교육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한국에 있는 외국인 주교를 모두 일본인으로 바꾸려고 하자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라리보(Larribeau) 주교는 비밀리에 교황청에 노기남 신부를 서울교구장으로 추천하였다. 1942년 1월 교황 비오 12세는 노기남 신부를 서울교구장 서리로 임명하면서 평양과 춘천교구장 서리도 겸임하게 하였다. 같은 해 1월 18일 노기남 신부는 교구장 착좌식(着座式)을 가졌으며, 그해 12월에 주교 성성식을 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되었다. 1946년 10월에는 경향신문을 재창간하였고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복간하기도 하였다. 6·25전쟁중에는 군종제도를 발족시켜 가톨릭군종신부단을 창설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후 신학교와 병원 등 여러 교회기관을 설립하여 천주교의 교세확장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2년 3월 로마교황청은 한국에 교계제도(敎階制度)를 설정하고 서울·대구·광주의 3곳을 관구로 설정하였다. 그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되었다. 1967년 서울대교구장직을 사임하고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1984년 6월 25일 죽었다.
그밖에 2002년 한나라당 이회창후보 정계은퇴 선언 2000년 프로야구 6개 구단, 선수협의회 회장단 6명을 방출한다고 발표 1999년 마카오, 442년 만에 중국에 반환 1999년 국내최초 관측위성 ‘아리랑1호’ 발사 1999년 최병모 특별검사, 옷로비 의혹사건 발표 1999년 한국-미국 범죄인 인도조약 발효 1998년 한국,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종합2위(금메달 65, 은메달 47, 동메달 52) 1998년 이봉주, 제13회 방콕아시안게임 남자마라톤에서 2시간 12분 32초로 우승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사면 복권 발표 1996년 천문학자 칼 세이건 사망 1994년 국내 최장 슬치터널(6,128m) 착공 5년 만에 관통 1989년 국방부, FX기종 FA18기 확정 1987년 필리핀 근해서 여객선 도나 파즈호 유조선과 충돌. 1천7백49명 사망 1983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아라파트파 4000명 레바논 철수 1983년 코모로 북한과 단교 1983년 유전자공학육성법 제정 1982년 미국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 사망 1982년 터키 에브렌 대통령 내한 1982년 1천만 이산가족 재회추진위원회 발족 1980년 국내 최초 프로축구팀 할렐루야 창단 1980년 조자양(趙紫陽) 중국수상 평양 방문 1979년 군사재판, 김재규 김계원 등 피고인 7명에 사형선고 1978년 제8회 아시안 게임 폐막, 한국3위 1977년 이란에 대지진, 800여명 사망 1976년 고물카 폴란드 전 수상 사망 1974년 문세광 사형집행 1973년 블랑코 스페인 수상 피살 1971년 파키스탄 대통령에 부토 취임 1968년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 사망 1965년 섬진강댐 준공 1964년 월남군부쿠데타(구엔 칸 최고사령관 주동), 최고회의 해체 1961년 UN총회, 대기권 평화적 이용안 가결 1960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 결성 1955년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처형 1945년 합동통신 창립 1945년 조선연극동맹 결성 1930년 중국, 치외법권을 철폐 1927년 김영삼 출생 / 한국의 정치가, 제14대 대통령 1917년 광복단 총사령 박상진 체포 1916년 윌슨 미국 대통령, 강화각서 발표 1916년 미국 월스천문대의 100인치 대망원경 완성 1905년 일본, 한국통감부 및 이사청관제 공포 1880년 개화추진 위해 통리기무아문 설치 1876년 미국 천문학자 월터 시드니 애덤스 출생 1848년 루이 나폴레옹, 프랑스 대통령에 취임 1803년 미국,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구입 1722년 청나라 2대 황제 강희제 사망 1550년 황해감사 주세붕, 수원서원 창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