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하게 가난하던 지난 날, 또 우리네 엄니들은 어찌나 시집살이가 심했던지요.
호랑이같은 시집 식구들, 특히나 시엄씨들은 며느리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매고
심지어 종 부려먹듯 부려먹는 사람들도 많았었죠.
며느리들은 감히 시어른들께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명조차 못하기가 일쑤였는데
행여 대들다 소박이라도 당하는 날엔, 자신은 물론 친정집 명예도 땅에 떨어져 친정식구들이 인근에
고개를 못 들고 다니는 그런 세상 이었죠.
오죽하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 시집살이라는 말이 있었겠어요?
그런 시절, 어떤 며느리가 친정집에 다녀올 일이 생겼다네요.
모처럼 친정 나들이라 시집에서 무슨 꾸러미라도 하나 챙겨줄 듯 한데, 그렇게 못 사는 집도 아닌 집에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대문 밖을 나갈 때 까지도 아무 내색이 없더란 겁니다.
속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 며느리는 아무말 없이 그냥 친정으로 그것도 빈손으로 향했더랍니다.
걷는 발걸음이 오죽이나 팍팍하고 힘이 들었을까... 터벅터벅 걸어서 친정에 갈 수 밖에요.
친정 어머니야 딸의 얼굴만 보는 것도 눈물나게 반가웠을 테니, 걸어 들어오는 딸의 손을
한번 흘깃 바라보곤 두말 없이 그야말로 훈감스럽게 딸을 맞이합니다.
이러구러 하루가 지났고 딸은 다시 시집으로 향해야 했죠.
비록, 빈손으로 친정에 왔을망정 딸가진 게 죄라고 또 친정어머닌 딸을 그냥은 못 보냅니다.
해서 광속에 깊숙히 숨겨져 있던 고구마, 감자라도 싸주려 합니다.
딸은 부득부득 사양합니다.
"어머니, 우리 시댁 잘 살쟎아요? 그런 것 다 있으니까 그냥 마음만 받아 갈께요.
우리 시어머님이 친정에서 뭐 하나라도 손에 들고 오면 집 문턱 안으로 들어올 생각을 마라대요."
"오냐, 알았다. 네가 소박을 당해선 안 되지야. 네 시어머님도 참 네 친정 사랑이 유별하시구나."
그 며느리는 또 터벅터벅 걸어서 시집에 옵니다.
오는 길가에 빨간 맹감나무 열매가 햇살에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며느리는 입이 심심하던 차에
맹감 몇알을 따서 입에 넣습니다. 떨떠름하고 아린 맛이 있긴 하지만 나름 들큰하고 시큼한 게
아주 못 먹을 맛은 아니어서 몇 알을 입에 넣고 질근거리며 걸어서 어느덧 시댁에 당도했죠.
"어머님,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친정에 잘 다녀왔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 얼굴보다 손을 먼저 보더니 차갑게 앵도라져서 하는 말,
"너희 친정 가는 길엔 맹감나무 하나도 없다더냐?"
그 며느리 시큰둥하게 되치는 말,
"하이고, 어머님, 갈 때 없는 맹감이 올 때인들 있겠수?"
했더랍니다.
첫댓글 재미있습니다.
보라돌이님은 타고난 이야기꾼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 저는 들어도 금세 잊어버리는데 다양하게도 기억하고 또 들려주시는군요.
이 이야기는 제 엄마께서 어렸을 적에 들려주신 얘기예요.
또 동네 아줌마들과 모여 있을 때도 자주 하던 레퍼토리구요.
그래서 비교적 소상하게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느티님, 고마워요.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좋으네요.
저희 어머니가 저 어릴 때 가끔 짬이 나거나 반짓고리 옆에 두고 바느질을 하시면서
또 긴 겨울밤 제가 잠 안 자고 있으면 옛날 이야기를 가끔 해주셨는데
자분자분 다정한 말투로 이야기를 해주시면
그게 그렇게 듣기가 좋아서 자주 조르곤 했지요.
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고, 자주 해주지는 않았는데
한 번 시작하면 워낙 실감나게 성음을 바꿔가며 해주셔서
지금 생각하면 그게 글 쓰는 일이나 노래하는 데에 큰 자양분이 된 듯 싶습니다.
이야기, 좋아요.
ㅎㅎㅎ..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 그 며느님 재치 있으신데 어찌 같은 부모 마음이래도 이리 다른 것인지요..
요즘은 간큰 남자 간큰 여자가 너무 많아서 탈이지만요.. 보리돌이님도 타고난 재주꾼이시지요.. 우면골 횐님들은
모두 비범해서 제겐 신기한 세상입니다요 ^^
우리 엄마가 말씀입니다 초심님. 한번 흥이 나면 꽤나 재미난 얘기를 잘 하신답니다.
더욱이 총기가 좋으세요. 갈피갈피 기억 너머에서 잘도 이야기 타래를 풀어내신답니다.
얘기 잘 하시던 아빠, 엄마에 비하면 이 보라돌이는 정말 엉성한 사람입니다.
이야기꾼 축에도 못 들지요. 압니다. 하지만 제겐 너무나 소중한 얘기들이라서 시간나는 대로
이렇게 하나씩 올려봅니다.
졸필이나마 이렇게 읽어주시니 고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