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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와 내조의 여왕 안나 스니트키나
톨스토이는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책 특히 문학 작품은 내 자신의 것을 포함해서 모두 불살라버려도 무방하다 그러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만은 예외다. 그의 작품은 모두 남겨두어야 한다"라고까지 말했을 정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세계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작가 도스토옙스키를 구원해준 연인
그런데 만약 한 여인이 없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작품들은 결코 탄생할 수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위대한 여인의 이름은 안나 스니트키나다
45살의 도스토옙스키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을때 혜성처럼 등장한 여인은 그때 나이 겨우 19살이었다 이 어린 여인은 한낱 속기사에 불과했지만, 작가를 위기에서 구해냴뿐 아니라 작가가 죽을때까지 그의 인생과 창작에 없어서는 안될 동지가 되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안나 스니트키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도스토옙스키의 엄청난 대작들은 사실 안나를 제때 만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질 못할 뻔했다 지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면 이 대문호가 살았던 집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집들에는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같이 모서리집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이렇게 모서리집을 선호했을까?
작가가 상경해 처음 살았던 공병사관학교의 기숙사 방이 모서리 집이었기 때문에 그 습관이 평생을 갔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사정 탓이라고 말한다
즉 거의 평생을 빚쟁이들에게 쫓겨 살던 도스토옙스키로서는 언제 어느 방향에서 갑자기 나타날지 모를 빚쟁이를 미리 발견하고 피할 수 있도록 시야를 확보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렇게 늘 빚독촉에 시달려야 했을까?
선하고 약한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시베리아 유형시절에 만난 아이 딸린 과부와 결혼했는데 그 과부가 병으로 죽자 그녀의 아이를 책임져야 했고 또 형이 죽자 형수와 5아이의 생계, 그리고 형이 남긴 부채까지 책임지게 된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는 도박, 룰렛 게임에 완전히 중독되어 하지 않으면 손이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심해서 항상 돈을 몽땅 잃었지만 딸 수 있다는 환상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다시 도박에 매달렸다 이 때문에 정신병리학에는 정식으로 '도스토옙스키 신드롬'이라는 용어까지 생겼다 늘 빚에 쫓기던 도스토옙스키는 새로운 작품을 쓰는 댓가로 출판사로부터 선금을 받아 탕진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또 마감시한에 쫓겨 급하게 작품을 썼고, <죄와벌>같은 긴박한 스토리 전개도 사실 시간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는 속설이 있을 정도다
2♧세기의 청혼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인생에 안나가 등장한것도 바로 작가가 쫓기며 <죄와벌>을 쓰고 있을 때였다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스텔롭스키라는 악덕 출판사 사장에게 선불을 받는 대신 매우 위험한 계약에 서명했다 한달안에 새로운 소설을 탈고하지 않으면 향후 9년간 모든 새로운 작품의 저작권을 몽땅 넘기기로 한 것이다 <죄와벌> 집필을 불가피하게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던 작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작품의 주제를 자기를 그토록 지독하게 고생시키던 도박으로 정하고 집필을 준비한다 그러나 한달안에 완성하는 것은 사실상 역부족이어서 친구의 권유로 뛰어난 속기사를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고용된 속기사가 안나였다
가난한 귀족의 딸로 태어난 안나는 어린 시절 문학애호가였던 아버지의 서재에서 이미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라는 작품을 읽고 깊이 감명받아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가지고 사범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사범대를 중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속기사가 되었다 이미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던 지혜롭고 부지런한 안나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작가는 단 26일만에 <노름꾼>이라는 소설을 탈고하여 악덕 출판사 사장에게 자유로워질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죄와벌> 의 탈고 작업까지 무사히 마쳤다
이 과정에서 어린 안나의 매력에 완전히 빠진 도스토옙스키는 모든 작업이 끝나고 며칠후
1866년 11/8 청혼을 한다 그런데 이 나이 많은 대 작가가 안나의 거절을 너무나 두려워해 마치 새 작품을 구상하는 것처럼 안나의 의중을 떠보기로 한다 늙고 병들고 가까운 이들마저 떠나보낸 중년의 화가가 젊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는 스토리를 들려주며 질문한다
"이 젊은 여인이 늙고 병든 이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사랑은 이 여인에게 너무 큰 희생이지 않을까? 이에 안나가 "이 여인이 선한 마음이 있다면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라고 대답하자 도스토옙스키는 만약 당신이 잠깐
그녀의 입장에 서 있다고 상상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라고 되묻자 안나는 "나라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평생 사랑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할거에요"
이렇게 해서 1867년 2/15 샹트페테르부르크의 아름다운 트로이츠키 성당에서 두 사람은 멋진 결혼식을 올렸다
3♧블랙허니문 을 이겨내며 시작된 깊은 사랑
남들처럼 달콤한 신혼살림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안나에게 결혼 초 한달은 악몽 그 자체였다 빚더미 위에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결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새 작품 <백치>원고료 3,000루블을 선불로 받아낸다 그러나 전처소생 아들과 죽은 형의 아내와 5아이의 생계비로 써벌리고 1,000루블만 남게 된다
형의 가족들과 전처의 아이들
게다가 한달도 지나지 않아 형수의 가족들까지 같이 살게 되어 매일 생활비를 요구하며 작가의 어린 새신부를 들들 볶기 시작했다 좁은 집안에서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이렇다 보니 작품 활동 역시 불가능했다 결국 우유부단한 도스토옙스키에게 더는 기댈수 없다고 판단한 안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환경에서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안나는 모든것을 과감히 버리고 러시아를 떠나자고 말한다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페물을 팔아 여비를 마련한 안나는 3개월 계획으로 멀고 먼 이국땅 스위스로 떠난다 스위스로 가는 여정에서 독일 바덴바덴에 들른 도스토옙스키는 다시 카지노의 룰렛게임에 빠져 가져간 재산을 모두 탕진한다 돈뿐 아니라 자신의 양복, 심지어 어린 아내의 원피스까지 날린다
설상가상의 상황에서 안나는 이런 도스토옙스키에게 바가지를 긁기는커녕 직접 나서서 도박을 부추겼다 남편의 손을 잡고 도박장에 데려다주고 돈이 모자라면 다시 빚을 내서라도 실컷 도박을 즐기게 한다 돈을 구해달라고 어린 신부에게 무릎까지 끓고 사정하는 남편을 위해 식기세트와 귀걸이 등을 내다팔아 돈을 구해주었다 이 힘든 생활이 애초 계획한 3개월을 훌쩍 넘어 4년간 이어진다 그사이 3명의 아이까지 낳았으니 일가친척 하나 없는 이국땅에서 이 어린 여인에게 지워진 생활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도스토옙스키를 너무나 사랑한 안나는 간질 환자인 그가 그동안 쌓인 정신적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 그당시는 도박뿐이었다는것, 그리고 이를 나무랄 경우 정신 상태가 더욱 나빠지고 발작도 더 잦아지리라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당분간은 도박을 해야만 창작 활동이 가능하다는것을 너무나도 잘 파악하는 지혜로움이 있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위대한 작가의 영감을 위해 모든것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성격상 절망과 고통의 밑바닥과 그 끝을 맛보아야만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긴 도박의 늪에 빠져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어느날 문득 임신한 어린 아내가 따뜻한 옷 한벌
없이 내버려져 있고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뱃속 아이까지 죽을수 있다는 무서운 현실을 불현듯 깨닫고 대성통곡 한다
도스토옙스키 가족
도박으로부터의 승리는 안나가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수많은 일 중 그저 한가지에 불과하다
그녀는 러시아 여성 특유의 강단으로 채권자들을 설득한다 도스토옙스키가 형으로부터 물려받은 채무에 대해 채권자들에게 장기간 할부로 변제하게 해주지 않으면 아예 한푼도 돌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아 협상에 성공한다
그리고 경제 개념이 없어 늘 불리한 출판계약에 시달리던 도스토옙스키를 위해 직접 출판업에 뛰어든다 <악령>을 출판하려 할 때 원고료로 단돈500루블을, 그것도 2년에 걸쳐 나누어 지불하려는 출판사의 횡포에 저항하여 직접 인쇄소를 찾아가 외상으로 종이를 구해 책을 찍어낸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전량 판매에 성공하여 4,000루블의 순이익을 낸다
안나와 계약서
그 돈으로 도박빚을 청산했고, 이후 그녀는 수완을 본격적으로 발휘하여 남편의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작품까지 출판하여 도매업자로서 성공한다 결국 아내 덕분에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골이지만 2층집도 마련한다 그 와중에도 아내는 충실한 속기사 노릇을 계속했으며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엄마로써 슈퍼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도스토옙스키는 마지막 작품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르기까지 최상의 조건에서 최고의 작품들을 안정적으로 집필할 수 있었으며 이미 당대 최고의 작가로 대우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혼한지 14년이 지난 1881년 60세의 도스토옙스키는 폐기종에 걸린다
어느날 후두 출혈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아침부터 아내를 불러 그녀의 손을 잡은채 놓지 않고 자기가 오늘 죽을 것 같다면서 성경책을 아무 쪽이나 펼쳐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남편이 죽은 뒤 안나는 7권으로 된 남편의 전집을 출판했다 이때 안나는 시력을 거의 잃어 돋보기로 교정을 봐야 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넘긴 출판 수익 이외의 자기 몫은 대부분 자선단체에 기부하며 여생을 남편의 뜻을 전하는데 매진했다 불행히도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나고 1년 후 집을 빼앗긴 안나는 72세의 나이에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사망했다
출처 : 줌 인 러시아 / 삼성경제연구소 이대식 지음